우리가 다시 한 시절, 유고를 겪는다면 꽃을 던지고 난간에 매달리고 거리에 운집할까? 나날을 잊고 부모와 형제와 화환과 장의 행렬이 하나가 되어 손을 잡을 순간이 있을까? 모두를 파헤치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무얼 더 물을 수 있을까? 무얼 더 묻을 수 있을까?
*
강바닥에서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새도록 삽날을 세워 나를 깠다, 국문학사는 역겨워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어, 시가 재밌나? 내겐 잡음처럼 지지직거리는 게, 등짐을 지고 호이스트카를 타고 철망 너머 하늘에 눈을 담그고 오르락내리락 그런 기분, 캠퍼스에서 내가 배운 것은 대머리 대통령들의 순환 주기와 햑명 계보로 기운 러시아사였다, 알아? 공사판 구멍 뚫린 아시바 위에서 배운 그것,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무언가를 세울지라도 지상에 커다란 구덩이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 뿌리를 박고 기둥을 세우고 지반을 다지는 것도 아닌 구덩이, 그곳엔 우리의 피와 잡념이 묻히고 언젠가 광장이 된다는 것
*
하지만 그것은 네 삶에 이미 갖추어지기 시작하는 진실의 기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남자들처럼 그곳에서 돌아와 그곳에 아련한 동물의 추억 한 자락 붙잡히고
아무런 분노 없이 자신을 얘기하는 그런 비극만 아니면 되는 것.
*
눈이 깊은 계곡이다, 주간훈련계획표를 만들고 작계를 따라 단대호를 꽂으며 밤을 샌다, 이곳은 내삶의 페바 알파 정도라고만 해두자, 신물과 헛구역질 속에 시계가 돈다, 강돌을 주워 포병단장 집 연못을 쌓고 시멘트 독이 모두 빠질 때까지 정원을 지키다보면 해 지고, 라디에이터에서 뿜어지는 수증기에 엉덩이를 까고 줄빠다를 맞는 사역(死域)에서의 희열, 그런대로 재밌다, 다만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울적하다, 가끔 예초기 날에 베어져나가는 풀들을 볼 때면 이 삶이 마구마구 설렌다, 힘차게 무의미하게 베어 넘기며 돌아가는 모터.
*
―가자
―표 나? 납작한 구두를 신고 어정어정 걷다가도 혹시 생리대를 한 게 들킬까
―……
―경리부로 옮겼어 정직원이고 왕고야, 서른넷이고 남자 친구는 더이상 날 믿을 수 없단다
―기다려, 손 꼭 잡고
―어둡다 그치?
―여긴 사람이 많이 죽더라
―저게 왕십리 하늘이구나
―그래
―넌 그대로구나 변한 게 없어
*
유리병 속에 갇힌 곤충 표본처럼 조금만 더 표피 쪽으로 표피 쪽으로 움직일 수도 있지만, 불안은 작은 생식세포가 되어 원생동물처럼 기하급수로 분열해간다고 해도, 병색의 뺨을 비비며 서로의 옷깃에서 주검의 냄새를 맡는다고 해도, 병적인 신경증과 무관심 속에 움직이는 작자(作者)는 상상력의 파쇼, 서정적인 정열 속에 재재바르게 죽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는.
늑대는 잠 속에서 무리의 경험을 털끝까지 새겨 나르고,
인간은 죽음 이후에서야 이생을 억겁 반추한다.
내 삶은 잠 속에서 교전 지도를 확장한다.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문학동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