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치영
그리고, 고화 속의 초상. 찬손을 얹고 입김을 불면 전설 속의 한 사람 잠시 전설의 바다를 건너와 단편적 요설(饒舌) 같은 입맞춤. 최면을 거는 술사의 속삭임처럼 현기증 같은 소란이 일다가, 붉은 머리카락 흩날리며 숨기척 없이 흩어지는 일몰의 시간. 속임수 같은 속임수가 우글거리는 우리 안에 갇혀 있어요. 마법의 상자인가요. 둥근 감옥인가요. 이것이 나의 세계인가요. 두려운가요 나는. 낡은 얼굴을 손에 들고 낡은 의자처럼 잠겨 있었죠. 유기된 채, 머리 위로 낡은 시간이 부옇게 쏟아지고 순식간에 낡은 사람이 돼버렸어요. 창턱에 걸린 바람이 종일 악머구리 끓며 악을 낼 때마다 몸속에서 마른 먼지들이 튕겨져 나왔어요. 마치, 보드라운 모래 폭풍 같았죠. 태양을 바스러뜨리며 사막을 건너간 쇠약한 낙타 한 마리 방울 소리 울며 절렁절렁 저문 뻘밭을 지날 때, 척추가 없어진 것처럼 진창에 고꾸라져 곤죽이 된 마음. 요란히 우그러드는 얼굴. 울긋불긋 뿔 달린 불가사리 같아요. 무서워요, 이 덧없는 얼굴의 감정. 홑껍데기 당신. 당신은 위선. 당신은 지옥. 멱을 붙잡힌 이곳은 꽃이 피지 않는 저편의 언덕. 엎드린 땅 위로 저주받은 숙명에 묵종한 저녁의 무늬가 잔인하게 그려놓은 얼굴 하나. 그래요, 믿을 수 없어요 나는. 이상하죠. 이 상한 얼굴이. 눈먼 망둑어처럼 혼탁해진 이 무질서한 얼굴이. 그래요, 위험한가요 나는. 피비린내 나는 황혼. 불을 저어 나는 새. 은밀히 불어오는 휘파람 속의 바다. 용서하세요, 오늘 밤. 오래 벗어둔 먹빛 얼굴 속의 헝클어진 이 무참한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