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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일정(日政)때부터 "조선인은 정밀작업을 못하는 민족" "한국인이 기계공업?"이라며 비웃었다....
■1973년
1973년 1월 31일 청와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앞에서 오원철(吳源哲) 경제2수석이 보고를 시작했다. "...방위산업의 근간은 기계공업입니다. 우리 기계공업은 아직 유치원 단계입니다."
그로부터 20일 뒤 경북 구미시 공단1동에 현판이 내걸렸다. '금오(金烏)공업고등학교'. 교훈은 정성(精誠)·정밀(精密)·정직(正直)의 '3정'이었다. '정성들여 정밀하게 도면대로 끝까지 정직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가칭 '삼정공고', 나중에 금오공고로 바뀌게 될 프로젝트는 1970년 11월부터 시작됐다.
"동양 최고의 공고(工高)를 만들라!" 그 지시에 따라 6만평의 부지가 마련됐다. 그곳으로 전국의 가난한 인재들이 모였고 국가는 최고의 대우를 해줬다.
금오공고 설립에는 비원(悲願)이 있었다. 한국인을 얕잡아본 일본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후 금오공고는 1973년 개교 후 1979년까지 6년 만에 전국기능대회에서 65개의 메달을 땄고 국제 기능올림픽에서는 13개의 메달을 땄다. 여기서 배출된 기능인들은 고도성장기 대한민국의 정밀기계산업의 중추가 된다.
그러나 박정희 시해 이후 공고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산업화에 열정을 가진 지도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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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것은 금오공고의 설립비용이 한일협력기금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각종 설비 또한 일본에서 들여왔다. 일본을 이기기위해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받아들이는것을 꺼리지 않았던 박정희, 선진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만주군과 일본사관학교에서 배우는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박정희의 실사구시 정신이 떠오른다.
http://gall.dcinside.com/parkjunghee/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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