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멜로 영화/ -이진우(경희대 연극영화과 졸업. 영상 촬영 프리랜서)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객을 다 아는 세력이 있죠
문득 다시 궁금해집니다
뻔한 것들엔 아무 이유도 없는지
안 봐도 안다는 말에 미안함은 없는지
우리의 관계는 상영시간이 지난 티켓 한 장일 뿐이므로
텅 빈 극장엔 불행과 무관한 새떼들이 날아다니고 있을테지만
그것들은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지 못합니다
가끔 이유 없이 슬픈 꿈을 꾸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 홈커밍데이/ 이진우(경희대 연극영화과 졸업. 영상 촬영 프리랜서)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여름이 온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벌써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감각들이 유빙처럼 떠내려갔지
애인을 기다리며 마시는 커피의 얼음이 녹는 속도라든지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마시게 될 맥주의 온도라든지
우리는 우리의 이마와 코끝이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했지
앨범에 넣어둔 사진이 눅눅해지는 건지도 몰랐지
그때 네가 입고 있던 반팔 티는 무슨 색이었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의 핏자국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장마처럼 햇볕이 쏟아진다
운동장엔
새로 자란 그림자들이 무성하다
다음 여름도 그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는데
여름에 죽은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질 않는다
✵ 詩 부문 심사평(장석주·시인, 김기택·시인)
당선자가 시집을 낸다면 누구보다 먼저 살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열세 분의 작품들이 취업 절벽, 사회 양극화, 저출산, 이주 노동, 기후 재난 같은 사회의 현안을 제치고 기분에 쏠린 현상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기분이란 미시적 영역에 천착한 시편들을 읽으면서 이것이 이번 신춘문예의 공동 주제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품을 지경이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의 메아리이고, 생의 사소한 기미를 머금은 감정 생활의 한 조각이라는 점에서 기분을 배제할 이유는 없겠지만 이 쏠림은 다소 염려스럽다. 이것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오늘의 비정한 세태를 반영한 징후이고, 자기애의 과잉 때문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 탓이다.
그렇다면 이 사소한 감정의 굴곡인 기분이 어떻게 시의 모티브가 되는가를 눈여겨볼 수밖에. 먼저 경험과 이미지 사이 표면 장력이 작동하는 힘이 느슨한 시, 얕은 경험과 조각난 이미지의 흩어짐으로 끝나는 시, 감각적 명증성을 견인하는 데 실패한 시를 걸러냈다. 최종으로 남은 ‘멜로 영화’ 외, ‘손자국’ 외, ‘연안’ 외 등등은 좋은 시는 “운명을 동봉한 선물”(파울 첼란)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생의 변곡점일 수 있는 순간을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시적 명증성을 붙잡은 한 응모자의 ‘멜로 영화’ ‘홈커밍데이’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들은 범속한 생활 감정을 의미가 분광하는 이미지로 빚어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런 언어 감각과 섬세한 느낌의 표현은 시의 풍부화를 이루는 데 보탬이 되었다. 숙고와 머뭇거림에서 길어낸 사유를 자기의 리듬에 실어 전달하는 능력, 능숙한 악기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듯이 시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귀한 재능이다. 이 응모자가 첫 시집을 낸다면 서점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집을 구입해 읽고 싶다는 게 우리 속마음이다. 당선 문턱에서 멈춘 두 예비 시인께도 아낌 없는 박수를 드린다.
✵ 詩 당선자 소감
이진우 -1988년 서울 출생
-경희대 연극영화과 졸업·영상 촬영 프리랜서
살갗이 있고 피가 도는 ‘살아있는 詩’ 써나갈 것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도 아니고 그것을 가장한 교만도 아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행운들을 지금 다 써버린 건 아닌지, 그래서 남은 인생을 불행하게 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까지 합니다.
감사한 분들의 이름부터 불러 보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이외의 다른 말은 떠오르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가족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감정을 충만하게 해주는 Bassment167의 멤버 철하와 봉겸이, 지금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신 도원이 형과 종상이 형, 조금 많이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기를 바라는 지훈이, 그리고 제 부족한 시들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주신 유계영 시인, 서효인 시인, 박준 시인, 김기택 시인, 장석주 시인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 누구에게보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고집부리던 아들을, 그 일을 하다 허리를 다친 아들을, 그래서 몇 달째 생활비조차 주지 못하는 아들을 항상 사랑해주는 엄마에게, 가장 큰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시를 쓸 때마다 늘 괴로웠고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보았던 시들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갗이 있었고 피가 돌았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말하고 있던 순간들조차도, 그 얼굴들이 짓던 표정들은 언어마저 가로질러 기어이 와닿고야 말았습니다. 저에겐 뼈밖에 없었습니다. 살아 있지도 않은 뼈다귀들을 붙잡고 억지로 움직여 보면서, 때로는 복화술로 살아 있는 척하면서, 진짜로 살아 있는 시들을 질투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열등감도 질투도 없이, 시를 쓰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이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과 모든 우연들에게, 어쩌면 우연으로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출처: 조선일보 2023년 01월 02일(월) 문화·라이프>문화 일반(2023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