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 빛 터널은 수평으로 100m 가까이 이어져 있었고 끝에는 AV 후버 탱크도 들어 갈 만큼의 넓이에 또다시 100m에 이르는 지하방주 중심부로 수직 연결되는 다이렉트 고속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행이 넓은 승강기형 엘리베이터 한복판에 서자 문이 닫치는 동시에 엘리베이터 안의 불빛이 붉은 색으로 바뀌며 위에서부터 안개와도 같은 연기들이 흘러 내려왔다.
"머. 뭐지요. 이건?"
당황과 경계의 몸짓들 사이에서 마이클이 자신의 몸을 타고 내려가는 기체와 적색 불빛을 몸에 붙은 벌레인양 떨쳐 버리려 노력하며 외쳐됐다.
"모두들 진정 하십시오. 이건 포르말린가스와 자외선입니다. 우린 지금 소독되고 있는 겁니다."
론의 침착한 말에 마이클이 의문을 제시한다.
"소독이요? 도대체 왜 말입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제스처와 함께 론이 답한다.
"글쎄요. 잘은 몰라도 이곳은 겜마의 일기속 내용처럼 1만8000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 시설입니다. 그 많은 인원을 이런 밀폐된 공간 안에 짚어 넣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있겠지만 그중 박테리아, 바이러스와 같은 질병의 위험 역시 빼 놓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그런 이유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인 것 같습니다."
그의 답에 마이클이 아직 확신을 얻지 못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론이 다시 덫 붙인다.
"인체에 무해하니 전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런 소독은 생물학 연구에선 흔한 일이니까요. 아무 이상 없을 겁니다."
이때 다시 연녹색 훌라후프 모양의 강한 빛의 띄가 천장에서 바닥으로 일행들을 훑고 지나간다. 또 다른 술렁임이 펴져 나가기 전 라밍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이건 엑스레이 스캔 광성(X-ray Scan Light)이에요. 말 그대로 우리 몸을 엑스선으로 스캔을 뜬 거지요. 우리 몸 속에 있는 206개의 뼈와, 656개의 근육, 심장 및 장기들의 움직임, 피의 흐름, 온도 등의 모든 건강상태가 한번에 체크되는 거지요."
라밍의 말에 진이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이 노아. 빈틈이 없는 곳이군."
디 ∼ 잉. 엘리베이터 안이 처음처럼 밝아 졌다. 띠띠띠. 문쪽에 달려 있는 소형 디지털 브라우져 속에 아래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가 깜박거림을 신호로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꺼지듯 미끄러져 들어 같다.
웅 ∼ 웅. 엘리베이터는 오랜 부상에서 완쾌된 운동 선수처럼 경쾌하고 신속하게 움직여 일행을 목표점 위에 뱉어 놓았다. 그리고 친절한 여성의 음성으로 말했다.
"노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지하 1층인 그린 로비(Green Lobby)입니다. 계속 내려가시려면 이곳에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 주 십시오."
축하객들 없는 인사말을 뒤로한 체 일행은 주위를 돌아본다. 장대한 스케일의 경악. 노아는 바로 그것 이였다. 20m 높이의 굵은 콘크리트 구조물과 철근들로 이루어진 둥근 돔형의 천장에는 푸른색 하늘과 흰 구름들로 덫 칠해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기다란 고양이 눈처럼 생긴 대형 등이 설치되어 이 깊고 깊은 지하 속을 밝혀 주고 있었다. 일행이 서있는 엘리베이터 센터를 기준으로 지름이 200m는 족히 넘을 듯한 둥글게 둘러 처진 노아의 하얀색 내벽을 이루는 티탄합금 골격과 실리콘은 내심 그 크기와 구조가 거대한 물길을 막아내는 댐의 외벽을 연상시킨다. 가공할 크기, 최첨단의 기술, 인간의 피와 땀, 신의 계시록, 그리고 그 중심에 위치한 노아.
"인간이 이런걸 만들었단 말인가. 이 깊은 땅속 안에..."
론이 인공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자아냈다.
"이거 웬 만한 야구 경기장 크기 군."
마이클이 크기에 질려버린 시선으로 두리번거린다.
"도대체 누가 이런걸 만들어 냈을까요? 이 암석층을 파고 들어오는 데만 몇 년이 걸렸을 텐데. 게다가 그 엄청난 압력을 견디어 내는 돔형 디자인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커크는 찬탄을 해대며 평소답지 않게 들떠 떠들어 됐다.
"그런데 저 밑에 것들은 뭐지요?"
론이 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낮춘다. 그곳에는 투명 유리관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원통형 파이프들이 얼키고 설키어 그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론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려는데 리나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저건 식물 인큐베이터(Plant Incubator) 에요."
"예??"
"저건 좁은 공간을 이용하여 많은 식물을 기르게 할 수 있는 장치랍니다. 저 유리관 중앙에는 식물들의 씨앗과 그것들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완벽한 영양과 수분을 조달해 주는 인공 바(Bar)가 설치되 있지요. 그 둥그런 바 안에 식물들은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바가 천천히 회전운동을 시작해서 어느 면에서든 원하리 빛에 의한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요. 자 보세요. 저 안에 파란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게 보이죠."
그녀의 말대로 투명한 파이프 안으로 무성하게 자라난 푸른 식물들이 천천히 시계방향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담. 저 거대한 등들이 이곳에서 태양을 대신하고 있는 거군요. 그런데 그런걸 어떻게..."
론이 말끝을 흐리자 리나가 바로 답한다.
"세이비어들의 쉽 속에는 비단 인간들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구의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 지구의 거의 모든 생명체들이 잠들어 있지요. 그 중에 식물들을 관리할 때 저와 비슷한 방법을 쓰고 있거든요. 솔직히 좀 놀랍네요. 거의 1000년 전의 인간들이 세이비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이곳이 그린 로비라고 불리 우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론은 리나의 말을 갈무리하듯 머리를 끄덕이며 수많은 인큐베이터들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일행을 향한다.
"자. 이곳부터는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가야고 한다니 서둘러 가봅시다."
론의 재촉에 일행의 뒤편에서 라밍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이곳에 재미있는 게 있어요."
Noah's Arc - 2000
라밍이 보여 준 것은 이곳 노아의 홀로그램 지도였다. 3차원 영상의 이 지도는 라밍의 앞 편에 위치한 작은 분수대 모양의 홀로그램 영사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3D 지도 군요."
진이 흥미 어린 몸짓으로 팔을 흔들어 지도를 휘졌자. 지도는 출렁이듯 사라졌다 이내 다시 모습을 돼 찾았다.
"이게 노아의 본 모습이군요. 마치 몽당연필 아니 도토리처럼 생겼군요."
론의 말에 몽당연필이나 도토리를 알길 없는 리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보다 우주적인 표현을 만들어 낸다.
"마치 블랙홀의 반대인 화이트 홀의 구조를 형상화 한 것 같아요."
화이트 홀의 모양을 알길 없는 일행중 론이 다시 말한다.
"이 지도에 따르면 우리가 위치 한이 곳이 지하 1층인 그린 로비 군요. 그리고 2층부터 10층까지가 리빙 유닛, 즉 이곳에 사람들이 잠자고 먹는 생활하는 공간이고 11층과 12층이 컨트롤 센터. 이름의 의미를 보아서는 노아의 모든 시설 및 사람들을 통제하고 운용해 나가는 곳인 것 같고. 마지막 13층이 카타콤베??"
론이 벽에 부딪인 표정을 하자 스와르가 여유 있는 목소리로 거들어준다.
"프랑스 말이지요. 지하 묘지라는 뜻입니다."
론이 알겠다는 얼굴로 계속한다.
"지하묘지라... 제 생각엔 쓰레기장이나 뭐, 실지 노아 사람들의 지하묘지일 것 같군요."
론이 스와르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스와르가 담담하게 입을 연다.
"나로서도 알 길이 없군요. 하늘을 왜 하늘이냐고 묻는 것과 같소.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박에."
스와르의 말이 끝나자 일행은 론의 통솔 하에 지하 2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리빙 유닛(Living Unit)
일행은 노아 중심에서 노아의 핏줄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8개의 고속 엘리베이터 중의 하나를 이용, 2층 리빙 유닛에 도착했다. 다소 어둡고 차가워 보이는 회색 톤의 불빛이 일행을 맞이한다. 엘리베이터 기둥을 중심으로 8개의 육각형으로 이루어진 문들이 입을 꼭 다 문체 둘러 처져 있었다. 문의 개수를 헤아리며 한바퀴 돌아본 론이 말한다.
"문은 모두 8개가 있군요. 좌표로 따지자면 동, 서, 남, 북, 남동, 남서, 북동, 북서.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각 층 당 8개의 유닛으로 구성된 겁니다. 자 보세요."
론이 자신의 앞쪽에 위치한 문 윗면의 푯말을 바라본다. 푯말에는 '1 - 1'이라 적혀 있다.
"이 문부터 시작하여 오른쪽 방향으로 1 - 2, 1 - 3, 1 - 4 .... 1 - 8까지 이여 지는 군요. 팔각형 구조와 같죠. 그럼 열어 볼까요."
론이 육각형의 문에 설치되어 있는 버튼을 누르자 문은 마술처럼 사라진다. 순간 론을 주시한 팀원들의 몸이 경직되어 버린다. 문안으로 펼쳐진 세상. 그것은 거대 벌들의 집처럼 생긴 정 육각형의 작은 방들이 일직선으로 난 통로를 사이로 빼곡이 들어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벌집."
론이 짧게 웅얼거리자. 마이클이 문안으로 얼굴을 드리밀며 말한다.
"맞아요. 이건 벌집 모양인 정 육면체. 위로부터 내려오는 압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도형이지요. 인간들이 이미 예로부터 쓰여온 벌들의 건축학을 도용한 거예요. 그것도 이 최첨단 시설 속에... 정말 멋진 일이군요."
정말 오랜만에 그의 학자다운 모습을 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간 진이 론에게 말한다.
"켑틴. 방들을 일일이 둘러본다면 시간이 많이 지체 될 겁니다."
론이 끄덕이며 답한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기도 좀 그렇군요. 우선 다른 리빙 유닛은 모두 같을 거란 생각이 드니 지금 있는 2층의 방만이라도 둘러본 뒤 11층 컨트롤 센터로 내려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두 명씩 짝을 지어 팀당 2개의 유닛들을 두러보기 바라겠습니다."
론의 말과 함께 론과 진, 라밍과 리나, 스와르와 커크, 마이클과 로베르토 순의 짝을 맺어 자신들의 유닛들 속으로 들어갔다.
"대인국의 걸리버가 된 느낌이에요."
진이 육각형의 문을 지나 유닛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밟으며 말한다. 거대한 부화실을 상상하고 있던 론이 가볍게 응수해 준다.
"대인국이 나이라 대충국(大蟲國)인 것 같군요."
"정말이지 갑자기 거대한 벌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진의 평소답지 않은 말투에 론이 말한다.
"인섹트 포비아(Insect Phobia) 군요."
"예?"
진이 인상을 찌푸린다.
"곤충 공포증을 그렇게 부르지요."
"내가 실어하는 건 곤충이 아니라 벌이라고요."
진이 자존심이 상한 투로 말하자 론이 서둘러 화제를 바꾼다.
"이 발판을 보세요."
론은 반 평 남짓한 은색 알루미늄 발판 위에 발을 얻고 그 옆으로 달려있는 난간을 잡으며 말했다.
"제 생각엔 2, 3층에 있는 방으로 옮겨 주는 기구 같은데..."
론은 난간에 달려 있는 소형 스위치들을 만지작거렸고 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지나 그녀의 시야 속에 유닛 전체의 모습을 담는다. 지하 2층이라고는 하지만 한 유닛 당 3층으로 이어진 대형 벌집모양의 방들. 근 100m 의 길이 안에 40개의 방이, 3m 너비의 중앙 통로를 사이로 거울처럼 마주보며 가로 지르고있었고, 그 위로 연결된 같은 수의 2, 3층이 모여 양쪽 각각 120개, 도합 240개의 육면체의 방들이 하나의 유닛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진은 이러한 유닛이 각 층 당 8개 그리고 이런 층이 노아 안에 9개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 수치를 헤아리고 있을 때.
"아하. 됐다."
론의 낮은 탄성과 같이하여 그를 싣고 있던 발판이 방들 사이로 난 레일을 따라 위로 부드럽게 움직여 2층에 있는 방 앞에 선다. 론이 다시 스위치를 만지자 발판은 다시 오른쪽 방으로 향했고 3층을 지나 왼쪽, 2층, 1층의 원위치로 도착했다.
"이제 저 위쪽 방을 차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방문을 나서는지 알 것 같군요."
론이 재미난 듯 말했지만 진은 여전히 껄끄러운 얼굴로 통로를 따라 걸어나간다. 7m 는 되어 보이는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던 진 앞에 벽이 서있다. 유닛의 끝인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론이 마치 미술관에 그림들을 관람하는 사람처럼 방들을 둘러보며 걸어온다. 그 거대한 벌집들 사이로 걸어오는 론의 모습이 마치 꿀벌들이 버리고 떠난 벌통을 수색하러 들어온 병정개미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00m 의 길이에 40개의 방이군요. 위로는 3층. 마치 3층 침대 같은 구조. 각방은 가로 세로 2m 정도. 이 정도 살펴봤으니 한번 들어가 봅시다."
론이 가까운 곳에 있는 벌집의 하얀 플라스틱 막을 걷고 속으로 들어간다. 안에는 역시 육면체의 구조에 2.5평 남짓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벽에 연결되어 있는 작은 받침대와 그 위에 설치된 소형 모니터와 멀티 컴퓨터, 미닫이 식으로 되어있는 침대와 의자, 음식이 배달되는 곳으로 보이는 우체통 모양의 전자오븐 그리고 벽면 끝에 위치한 변기와 샤워기 등이 방안에 있는 물건의 전부였다.
"꿀벌의 방에 항상 꿀이 들어 있는 건 아니군요."
진이 싸늘한 방 분위기에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
"살았어도 이런 환경 속에서 지내야 했다면 차라리..."
"그래도 죽는 것 보단 나은 거예요. 어떠한 경우라도."
론이 무게 담긴 어조로 말하며 컴퓨터 등을 작동시켜본다.
"우린 선택받았군요."
"선택? 어떤 의미에선 그렇죠. 하지만 그 기준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었어요."
"켑틴의 말은 우리는 어떠한 가책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건가요?"
진이 약간의 흥분 석인 말을 내뱉었다.
"단지 현실을 받아 드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임무로 인해 새 삶을 살아가게 될 세이비어 쉽에 잠들어 있는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하란 말입니다."
진이 풀썩 의자에 앉는다.
"후.. 미안해요 캡틴. 전 군인이에요. 항상 명령에 복종하고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의 해결책만을 생각하면 되는 거죠. 나머지 일 들은 모두 윗 선에서 결정하니까요. 하지만 이런 비인간 적인 벌집 아니 닭장 같은 곳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목숨을 연명하게 할 생각을 했다는 게 쉽게 받아 드려지지 않는군요. 이런 시설을 만들기 이전에 차라리 인류가 핵 등의 무기를 제거하는 일에 힘을 썼었다면..."
실망과 포기가 가득 담긴 진의 말에 론이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말한다.
"진. 당신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재앙에서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의지들을 생각해 보자 구요."
"구한 다구요? 이런 감옥 같은 곳에서 말이에요?"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삶이 끝나는 것보다는 나은 거니까요. 너무 갑작스런 전쟁으로 결국 많은 사람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겜마라는 사람을 구했지 안소."
"단 한사람. 그것도 창조의 능력이 있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레피탄을 만든 사람."
"그럼 당신은 그 재앙에서 모두가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진은 할말을 읽었다. 론이 진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달랜다.
"미안해요 진. 하지만 그 재앙은 당시의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요. 지금은 그런 일로 인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가책이나 미안함을 느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앙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아닌 우리의 자손들이 대를 이여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아니겠습니까. 세이비어들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의심이나 정의를 떠나서 현실에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생각한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길이라 믿읍시다."
론이 진을 일으켜 방을 나왔다. 진이 론의 얼굴을 돌아본다.
"캡틴. 방금 전 대화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특히 저희 병사들에게는..."
론이 걱정 말라는 투로 말한다.
"물론이요. 진 대령."
진은 애써 자신의 미소를 만들어 보였고 두 파트너는 유닛의 출구를 향해 걸어나갔다. 유닛의 규모는 너무도 커서 둘의 모습은 길을 읽고 헤매는 어린 벌처럼 작게 느껴졌다.
사라진 멤버(Hide Out)
"예? 로베르토가 사라 졌어요?"
당혹 감을 감추지 못한 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마이클을 향해 진이 다그쳤다.
"그. 그게..."
"차근차근 말해 보세요."
론이 손짓으로 진을 진정시키며 마이클에게 말했다. 마이클은 자신의 턱을 주무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잊는다.
"우리... 그러니까 저와 로베르토는 각각 한 유닛씩 조사하자고 합의를 보고."
"잠깐. 그게 누구의 아이디어였습니까."
스와르가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메마른 어조로 마이클의 말을 자르며 쏘아 붙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찔린 듯 마이클이 겁먹은 표정으로 계속한다.
"물론 로베르토가 먼저 제시했지요. 그, 그래서 우리는 각각 하나의 유닛씩 조사하러 들어갔어요. 모두들 같을 거라 생각되지만, 아무튼 전 그 벌통 같은 방들을 둘러보고 이 엘리베이터 장소로 나와 그를 기다리는데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다른 멤버들도 다들 조사를 끝내고 이렇게 모였는데도 말이지요. 해서 제가 그가 들어간 유닛에 가보니 그가 안보였어요. 전 방안에 들어가 있나 해서 소리쳐 부르면서 방들을 사사치 찾아 보았지만 그는 없었어요."
"로베르토가 사라졌다."
스와르가 혼자말로 마이클의 말을 정의 지었다.
"으... 이런 바보 같은. 내가 그런 녀석을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다니... 놈 잡히기만 하면..."
진은 자신의 실수에 대한 자책과 사라진 자에 대한 분노로 이를 갈며 외쳐 됐다.
"진. 진정하세요. 로베르토에게 무슨 용무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리나가 걱정스런 눈으로 진에게 말하자. 진은 잠시 어의가 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되물었다.
"용무? 무슨 용무?"
갑자기 할말은 읽은 리나가 손가락 끝을 맞대며 새끼고양이처럼 작은 소리로 야옹 거린다.
"화장실이라든가..."
"리나!"
진은 진짜 화가 난 얼굴로 리나에게 소리치자 그녀는 라밍 뒤로 숨어들었고 론이 두 사람의 사이에 끼여든다.
"자. 자. 지금 상황으론 로베르토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우리로선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노아 어디엔 가에 있을 것이고 우리가 화를 내는 건 그를 찾아낸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두 진정들 하세요."
론이 캡틴다운 침착함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라밍은 리나의 손을 살며시 잡아끌고 뒤편으로 대리고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캡틴."
스와르가 덤덤하게 물어왔다. 옆에서 팔장을 끼고 씩씩거리고 있던 진도 스와르의 물음에 론을 쳐다본다. 론이 눈길들을 의식하며 말한다.
"제 생각엔 이곳에서 로베르토를 기다리거나 찾아본다는 건 시간낭비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그의 행동거지로 볼 때 그는 우리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그자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자취를 감추었단 말입니까?"
커크가 갑작스럽게 끼여든다. 그에게로 얼굴을 돌리며 론이 말한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의 목적이라."
스와르가 다시 한번 벌려진 일들을 일축시키며 콧등을 매만진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 노아 안에서 행할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도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론이 지극히 낙천적으로 상황을 계획하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입이 벌려진다.
"캡틴 지금 어디로..."
마이클이 머뭇거리며 물으려 하자 론이 재빨리 말을 받는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었습니까? 닥터 겜마의 출생과 지구 밀림화의 비밀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곳에서 기다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 우선 컨트롤 센터로 내려갑시다."
컨트롤 센터(Control Center)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어두운 곳에 익숙해 있던 동공들이 갑작스런 빛의 향연에 수줍은 듯 줄어들면서 익숙한 어지러움을 전해 주었다. 리빙 유닛들이 8각형 모양의 사방이 막혀 있는 어두운 엘리베이터 홀로 시작한 반면 컨트롤 센터는 벽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을 정도로 투명한 강화 플라스틱으로 둘러 싸여, 1층이 하나의 거대한 방처럼 느껴지도록 꾸며져 있었다. 잠시 후 빛에 길들여진 눈으로 진이 걸어 나아가 벽을 집고 마치 창문 안을 드려다 보는 사람처럼 사방을 둘러본다.
"이건 컨트롤 센터가 아니라 스포츠 센터 구만."
어쩐지 부러움이 벤 목소리로 진이 말하자 뒤 이어 일행들이 투명한 벽을 통해 컨트롤 센터의 구석구석을 세세히 살펴본다. 컨트롤 센터는 시설의 끄트머리로 해서 이어지는 원형의 러닝 트랙과 거대한 수영장, 2개의 테니스장을 비롯 볼링, 탁구, 스쿼시, 농구, 배구, 당구, 배드민턴, 권투, 기타 벤치 프레스, 카알, 오버 더 헤드 등의 헬스클럽과 사우나에다 소형 골프 코스까지 두루 갖춘 완벽한 스포츠 컴플랙스의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좀 즐길 줄 아는 자라면 그리 심심하지만은 않은 곳이었겠군요."
론이 벽에서 눈을 때지 못한 체 말하다가 아쉽게 등을 돌리며 다시 말한다.
"일단 이곳은 스포츠 공간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바로 다음 층으로 내려가도록 합시다. 컨트롤 센터는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이런 용도로 쓰였다면 다음 층에는 노아의 모든 시스템을 움직이는 중앙 컴퓨터와 발전기, 수압 조절 장치 등이 있을 겁니다. 그 곳에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가 있을 거라 추측됩니다. 아쉽지만 지체 말고 가보지요."
론의 말에 수긍한 일행은 12층인 제 2 컨트롤 센터로 내려온다. 제 1 컨트롤 센터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조금은 경계 스런 몸놀림으로 엘리베이터를 나선다. 천장과 벽면 바닥까지도 가득 이어져 있는 크고 작은 파이프 관들과 연결 관 사이로 새나오고 있는 증기들이 희뿌연 연기처럼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기체들을 통해 전도되어 오는 우렁차고도 반복적인 발전기의 기계 음은 구석구석 설치되어 있는 조명등과 어우러져 마치 곳 폭발해 버릴 파이프실을 연상케 했다. 귀가 멍멍해져 왔다. 탁한 공기를 휘저으며 방향을 살피기 위해 론들은 앞으로 나선다. 마이클의 발이 걸려 넘어 졌다.
"벌집 다음은 개미굴인가?"
넘어진 이가 투덜거리며 일어났지만 그의 불만은 소음 속에 묻혀 버렸다. 제 2 컨트롤 센터는 자로 그어 놓은 것처럼 기계실, 의무실, 주방과 메인 컴퓨터 룸으로 나누어져 4등분되어 있었다. 진이 발 밑에 깔린 파이프를 주시하며 헤쳐나가 방향표를 확인한다. 엘리베이터를 중앙으로 십자로 나아 있는 길 중 한곳을 손으로 가르치며 외친다.
"이쪽이 기계실이에요!!"
론이 귀에 손을 올린 체로 고개를 흔들고 손가락을 두게 펴서 진을 행해 흔든다. 여군은 알겠다는 제스처를 보내고 일행을 두 번째 방인 의무실로 안내한다. 일행들 뒤로 의무실의 자동문이 닫히자. 귀를 괴롭히던 소음 역시 말끔히 사라진다. 말이 의무실이지 일반 병원을 능가하는 시설을 두루 갖춘 이 곳은 외과, 치과, 내과, 이비인후과, 비뇨기과에 신경, 성형, 정신과까지 모든 병동을 망라하고 있었다. 병원 특유의 하얀 공간을 눈으로 핥으면서 라밍이 오래 비워둔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프론트 데스크를 손으로 매만진다.
"그리운 풍경이군요."
감격에 어린 라밍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리나가 라밍의 팔짱을 끼며 달래고 론 등은 소음에서 해방된 귀를 만지며 이곳 저곳을 훑어본다. 먼지는 조금 싸였지만 지금 당장 수술을 시작해도 좋을 만큼 깔끔하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프론트 데스크를 지나 좀더 살피려 할 때 라밍의 미련이 담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캡틴. 이곳은 더 이상 둘러 볼 것이 없을 듯 합니다. 말 그대로 의무병실이고 다른 기계실이나 주방 역시 노아 안의 그렇고 그런 일들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지체없이 우리의 주목적인 컴퓨터 실로 향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론은 마침 원하던 바였기 때문에 주위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없는 승낙을 구한다. 커크, 스와르, 마이클의 순으로 고개를 흔든다. 일행의 동의가 얻어 지자 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중앙 컴퓨터 실로 가봅시다."
메인 컴퓨터 룸(Main Computer Loom)
소란한 복도를 다시 지나 소음을 막아주는 2중문을 통과하여 컴퓨터실로 들어섰다. 처음 팀원들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동굴의 종유석처럼 천장과 바닥 사이로 연결되는 형태로 방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컴퓨터의 모습 이였다. 마치 UFO가 기둥을 들이받고 그대로 사이에 끼어버린 모습의 컴퓨터는 중심부의 29인치의 평면 스크린을 주시로 하여 가지각색의 불빛을 번쩍이며 일행들을 유혹해왔다. 앞으로 걸어나간다. 티딩 티딩. 파이프들이 들여다보이는 망사형의 철판에서 발걸음에 맞추어 음을 발한다. 컴퓨터와 문을 이어주는 좁은 철판통로를 사이로 네모지고 기다란 검은 박스들이 마치 소형 아파트 미니어처 모양처럼 줄지어 서있었다. 아마도 수천 테라 바이트(Tera = 1000 Giga) 용량의 하드나 램 또는 기타 컴퓨터 하드웨어일 거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일행은 드디어 컴퓨터 앞에 섰다. 가까이 에서 보니 천장과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튜브들과 호스들 전선, 밸브 그리고 고무 파이프들로 연결되어 중앙의 타원형의 컴퓨터를 지지해 주고 있었다. 그건 마치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무수히 많은 실핏줄로 이어진 외눈박이 괴물 같았다. 그 외눈 앞에 유난히 목 바침이 긴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의자에는 상아빛 키보드와 자이로(장갑처럼 손에 끼워 사용하는 마우스) 마우스가 달려 있었다. 알 수 없는 떨림이 일행의 마음속에 솟구친다. 신 지구의 모든 비밀, 태초의 과정, 새로운 바이블의 역사가 자신들의 눈앞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깨울 수 있는 비밀정원의 열쇠를, 보물섬의 지도를,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트로이의 목마를 손에 쥐고 서있는 것 이였다. 누가 달에 첫발을 내딛는가를 고민하는 우주인의 심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작은 긴장 속에 론이 입을 연다.
"리나, 앉으세요."
뒤이어 리나의 아리송한 시선이 돌아온다.
"왠지 당신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리나는 아직 납득이 가지 않는 다는 얼굴이었으나 라밍의 인도에 순순히 자리에 앉는다. 리나는 자신에게 고정된 흥분과 부러움,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을 둘러보고 마음을 정한 듯 이내 능숙한 솜씨로 자이로 마우스를 움직여 에덴의 문에 키를 꽂았다.
접속
외눈의 검은 눈가에선 잠시동안 로딩 신호가 이어지다 곳 메인 메뉴 화면으로 리나를 안내해 갔다. 허공에 주먹질을 하듯이 리나의 자이로 마우스가 쉴새 없이 움직인다. 메인 메뉴(Main Menu)에서 메모리 큐브(Memory Qube)로, 다시 레코드 파일(Record File)로 단숨에 들어가 수많은 파일들을 끄집어냈다. 대량의 파일들 앞에서 길을 잃은 리나가 옆에 서있는 론에게 구원의 시선을 보낸다. 턱을 궤고 모니터를 지켜보던 론이 신중히 말한다.
"우선 날짜별로 구분해 보지요. 지구가 멸망했던 2032년 전 후로 해서 검색해 보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리나의 손가락이 피아니스트처럼 물결치자 수만에서 수천의 파일로 요약된다.
"이렇게 되면 폴더나 파일명을 알아내야 하는데... 우선 Gamma(겜마)라는 파일을 찾아보지요."
론의 말이 떨어지자 리나의 손이 다시 무음의 연주를 시작한다. 띠 ∼ 띠 ∼ 띠. 네모진 화면에선 파란 글씨로 쓰여진 File Not Found(지시한 파일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오며 더 이상의 접근을 막아섰다.
"캡틴?"
리나가 뚫어지게 글자를 처다 보며 말했다.
"음..."
론이 신경질 적인 시선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을 잊지 못하자 스와르가 거든다.
"꼭 그의 이름으로 지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뭐랄까.... 연구 논문의 이름이나, 과학자 본인의 성명 또는 프로젝트의 이름..."
"프로젝트?"
론이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그것을 머리 속에 구체화시키려 노력했다.
"프로젝트, 노아, 겜마, DNA 합성법, 레피탄, 마이더스. 마이더스! 그래 마이더스 프로젝트!"
리나가 론의 외침과도 같은 탄성에 손을 나부낀다. 화면 속엔 마이더스 프로젝트란 폴더 밑으로 정리되어 있는 수백 개의 동영상 파일들이 떠올랐다.
"됐어!"
마이클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환히도 잠시 론의 의혹 적인 눈이 파일중의 하나에 맞추어 진다.
"벤?"
수십 개의 파일 중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벤. 마이더스라는 파일들을 론이 뭐에 홀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라밍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뭐 집히는 거라도 있나요, 캡틴?"
"서.. 설마, 그럴 리 없어."
론은 재차 자신에게 부정의 최면을 걸어본다.
"캡틴, 왜 그러세요?"
라밍이 다시 물어오자 론은 떨리는 손으로 가장 위쪽에 위치한 파일을 가리킨다.
"열어 보세요 리나. Ben20311108.midas 라는 파일을..."
Dr. 벤 스트레인져(Dr. Ben Streinzer)
리나의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곧게 펴져 전방을 한번 가볍게 찍자 검은 스크린은 금새 30대 후반의 남자의 모습으로 채워졌다.
"벤. 벤 스트레인져."
마치 유령과 마주친 사람처럼 론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진다.
"왜, 아시는 사람입니까?"
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넋이 나가있는 론에게 물어 왔다. 30초 정도 경직된 자세로 화면을 바라보던 론의 몸이 서서히 풀리면서 론이 입을 열었다.
"저자는 벤 스트레인져 입니다. 제 동료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죠. 이제야 감이 오는군요. 어떻게 마이다스 계획이 실용화되었는지..."
허탈함이 벤 론의 말투에 주위는 차차 조용해져 갔고 그 고요함을 틈타고 화면 속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음. 이거 제대로 녹음되고 있는 거요?"
론에게 벤이라 불리운 남자가 화면 밖의 남자에게 말했다.
"예. 깨끗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답이 돌아오자 벤은 모니터 중앙으로 움직여 자세를 가다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2031년 11월 8일 PM. 2시 24분, 현 위치 노아의 핵심 연구소인 카타콤베에서 마이다스 프로젝트의 첫 번째 기록을 올립니다. 나의 이름은 벤 스트레인져 박사. LA 태생이며 Cal Tec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나이는 36세, 이번 프로젝트의 치프 연구원입니다."
벤은 카메라가 익숙치 않은지 멋 적은 투로 자신을 설명했다. 나이에 비해 희끗희끗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는 머리에 얼굴의 반을 덮는 두꺼운 안경,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는 그의 상체는 전체적으로 가늘고 갸름한 것이 박사라는 그의 직업에 딱 마저 떨어진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하였다. 같은 박사 라지만 론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딴판인대다 역시 하얗게 센 그의 콧수염은 그를 더욱 나이 들어 보이게 하였다. 그가 자신의 왼쪽 상의 주머니에 꽂혀 있는 세라믹 볼펜들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금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우선 이번 프로젝트는 미 펜타곤(미 국방부)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이며 이번 계획에 지원되는 장소와 장비, 금전적, 인적 지원은 군이 100% 부담하고 후에라도 나를 비롯한 연구요원들은 계획에 대한 소유권을 일체 주장할 수 없으며 물론 이 기록 역시 기밀 사항에 해당함을 미리 말해두고 싶소."
벤이 침을 삼킨다.
"이건 나의 꿈이었소. 세상을 뒤바꿀 수 있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계획이요."
처음의 건조한 말투에서 갑자기 흥분한 어조로 바뀌었다.
"솔직히 말해 처음 이 계획을 생각해 낸 것은 내가 아닌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학교 동기이기도한 론 고벨 박사의 아이디어였지, 하지만 그의 기틀인 DNA 합성법에 나의 살을 더해서 하나의 완벽한 이론을 성립시켰지. 이름하여 마이다스 프로젝트."
벤의 입에서 론의 이름이 거론되자 탐사대원들의 시선이 론으로 향했다. 론 역시 놀란 표정이었으나 침착하게 말한다.
"좀더 들어봅시다."
벤의 말이 이어진다.
"1865년 완두콩 실험재배를 통해 유전법칙을 얻어낸 멘델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아들이 아버지를 닮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궁금증을 품게 되었지 1869년 화학자 미셔라는 세포핵 속에 화학물질로 구성된 DNA(디옥시리보 핵산)을 발견했고, 1953년에 영국의 젊은 과학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클릭은 DNA의 신비를 풀어냈지. 이어 1973년 최초로 박테리아 유전자와 두꺼비 유전자 결합에 성공했고, 1997년엔 드디어 복제 양 '돌리'가 태어났어. 2001년 인간게놈 지도가 완성, 이후로 계속되는 복제 인간과 동물들이 태어났지. 그러나 그후 지금까지도 DNA 연구는 복제수준에만 머물고 있어 미국의 인간게놈계획 역시 계속되는 DNA 합성의 실패와 이식 받은 DNA의 부작용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시점이지. 하지만, 2년 전 나와 론은 현대 DNA 연구의 계보를 뒤바꿀 수 있는 혁신적인 DNA 합성이론을 제시했지. 그 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세운 가설에 비해 97.6%의 안정성을 보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학설 마이다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꿈의 계획을 원자폭탄쯤에 비유하며 우려와 멸시의 글을 보내왔지, 우매한 과학자들은 인간이 진정한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진리의 길에서 겁을 먹고 후퇴해 버린 거야. 긍정적으로 보면 질병과 선천적 장애에서 완전히 해방된 신 인류를 만들 수 있는 이 계획을, 꼭 부정적 측면으로만 판단하고 계획 자체를 중도에 포기하게끔 해방 놓은 세계적 명성의 멍청이들을 난 저주하고 증오했지 적어도 미군이 이 모든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 까지는. 그래 그들은 일을 독점으로 따낼 생각으로 나와 론의 계획을 일부러 방해 한 거야. 그리고 후에 내게 접촉하여 비밀리에 일을 진행시킨 거지.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들이 내게 어떠한 압력을 행세해서가 아닌 나의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황금의 길이 보였기 때문이지. 난 그걸 포기할 만큼 아니 이보다 더한 상황 이였더라도 난 받아 드렸을 거라고. 한가지 아쉬 운 건 바로 론이었지. 그는 아직도 이번 일에 대한 아무런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지. 군이 그에게도 접촉하려는 것을 내가 중도에서 막았기 때문이야. 10년을 넘게 알아온 그였지만 우리의 우정은 그가 노벨상을 받을 때부터 조금씩 틀어졌지. 솔직히 말해 내가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라. 이번 프로젝트 역시 그가 생각해낸 것이기도 하거니와 아무튼 그의 천재성을 오래 전부터 난 질투하고 부러워한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통감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 연구가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될 거야. 사회적 명성, 부와 권력 모든 것이... 한편으론 미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현재로선 연구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참고로 이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하는 건 어차피 연구에 대한 모든 사항이 기밀이며 군이 사실을 안다 하여도 이 노아에선 어제 오전 12시를 기점으로 1년 동안 모든 출입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마이다스만을 위한 폐쇄 연구가 시작된 것이지."
벤은 유리컵에 담긴 물로 목을 축인 뒤 계속한다.
"이 곳 노아에 대해 조금만 설명하자면 1999년에 대 재앙을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의 말을 고지 믿은 미 정부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1만 8천 여명을 수용하고도 500년 가까이 지낼 수 있는 반영구적인 특수제해대피 시설, 또한 대피해 있으면서도 전쟁시 지상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 시설이 장착되어 있지 기밀사항으로 되어 있어 나 역시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있는 이곳, 세상의 지하묘지를 뜻하는 카타콤베에서 미사일 운용을 맞고 있지만 현재 우리의 연구 자제들이 들어 차있고 무엇보다 마이다스가 설치되어 있지. 아. 내친김에 보여주지 창조의 지팡이, 역사를 낳게될 미래의 어머니인 마이다스를."
벤의 손이 화면을 메움과 동시에 어지러이 움직이다 기하학적으로 생긴 어떠한 사물에 맞추어 진다. 그것은 길쭉한 거대 공룡 알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옅은 베이지 색을 띠고 밑 부분에는 무 색 투명하고 두꺼운 플라스틱제로 만들어진 인큐베이터가 달려있었다. 화면상으로 정확한 길이를 알 수는 없지만 높이가 약 3m 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알 모양을 뒤로 튜브와 전선 등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U 자 모양의 컨트롤러가 보였다. 마치 누군가 먹다 남긴 도넛에다 달걀하나를 비스듬히 세워둔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이클의 머리 속에 어른거린다. 화면 속 양수로 꽉 찬 인큐베이터에선 공기방울 모양의 기체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줌인 신호가 나오며 인큐베이터의 중앙을 비추자 인체 다큐멘타리에서나 나올법한 2cm 정도의 해마 모양을 한, 이름 모를 생명체가 마이다스와 연결된 가느다란 탯줄을 통해 작은 숨결의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해마형의 생체개가 크로즈업 되면서 벤의 목소리가 재생된다.
"아름답지 않나? 이것이 지구의 새로운 미래라고...."
거기에서 화면이 정지된다. 스크린 아래쪽에 있는 납작한 막대형 게이지에선 파일의 끝을 알리는 낮은 신호음을 전해왔다. 소름 비슷한 감정이 대원들을 감싸안으며 밝혀진 진실 속에 전해지는 혼란이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론이 무겁게 입을 연다.
"앞서 말했지만 벤은 나의 동료요 친구였습니다. 지구 멸망 2년 전, 우리는 마이다스 계획을 추진 중에 원로 과학자들의 반대에 부디껴 계획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그후 난 다른 실험에 착수했고 벤은 영국 게놈연구소에 의뢰를 받았다며 떠났습니다. 1년여 동안 연락이 없어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론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리나가 그녀의 작은 손을 론의 어깨로 가져가 아이를 달래 듯 다독거린다.
"난 뭐가 뭔지. 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이클이 자신의 도톰한 입술을 문지르며 말했다.
"우선..."
론이 다시 입을 연다.
"초 미립자 분쇄기(M.P.S : Micro Particle Shatter), 마이다스. 방금 보신 그 기계의 이름이죠. 지금까지의 DNA 합성법을 완전히 뛰어 넘을 수 있는 꿈의 기계. 미분자 단위까지 읽어버리는 초정밀 센서기능을 갖춘 전자 현미경을 장착하고 보통의 슈퍼컴퓨터의 7배의 속력과 용량을 자랑하는 메가슈퍼컴퓨터를 배경으로 하여 중심부에 장착되어 있는 원자로 발전소를 뛰어넘는 미립자 분쇄기에서 분해와 합성이 가능하며 그 합성물은 바로 양수로 채워진 인큐베이터로 이동, 세포번식을 시작하여 완전체의 모습까지 갖추어 질 수 있습니다. 다시 완전체의 모습에서 성장환경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입력시키기만 하면 영양 공급은 물론 성숙기까지의 기초 교육까지도 전담할 수 있는 완벽한 마더머신(Mother Machine)입니다."
대원들간에 경악의 눈빛이 겹친다.
"단지 합성시키고 만들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상당기간 자라날 때까지 키워주기도 한단 말입니까?"
라밍이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론에게 말했다. 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게 제가 마더머신이라 부른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캡틴이 그런 것을 만들어 냈단 말입니까?"
진의 경외 담긴 물음에 론이 말없이 턱을 흔들어 보인다.
"나의 디자인에 몇몇 벤의 아이디어를 첨가한 것이지요."
"난 그 게놈이라는 것도 아는 바가 거의 없어요."
마이클이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며 시험 답안을 보고 싶어 친구를 재촉하는 아이처럼 말했다. 론이 입 속의 침을 한 모금 머금은 후에 입을 열었다.
"인간게놈계획이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유전 정보의 총체인 인간게놈을 모두 해석하려 하는 장대한 프로젝트로 노화나 유전자 병의 연구·치료, 인체의 기능 해명 등에 귀중한 정보를 가져다 줄 것이란 기대와 프로젝트가 가져다줄 엄청난 희소성 때문에 새로운 산업의 형태로 떠오르던 계획 이였습니다. 하지만 게놈지도를 그리는데 성공, 유전자 암호를 이루는 문자인 32억 개의 염기순서까지 밝혀 냈음에도 그 기능 해명에 근 30년 동안 75% 정도 밖에는 파악해내지 못하고 점점 그 열기가 식어 가는 추세였습니다. 지금까지 인간게놈과 DNA 합성법 연구에 가장 큰 장애를 일으키는 부분은 바로 분자의 구조였습니다. 레고(Lego)의 블록들처럼 앞뒤의 홈이 맞지 안으면 하나의 개체로 이루어 질 수가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마이다스는 그런 개념 자체를 안전히 뛰어 넘는 것으로 인간과 기타 모든 생명체의 게놈의 최소단위인 DNA를 이루고 있는 4개의 염기 즉 A(아데님), G(구아닌), C(시토신), T(티민)의 다양한 조합을 메가슈퍼컴퓨터에서 읽어 낸 후 각각의 염기를 순번대로 초정밀 미분자 분쇄기로 분해한 뒤에 다시 컴퓨터가 염기들의 수억만 단위에 이르는 고유한 염기 배열을 단 수초만에 파악하여 내가 원하는 또 다른 분자와의 가장 적합한 결합식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미분자 분쇄기에서 결합배열구조로 맞추어 다시 합성시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게놈 상에서 수백만, 수억만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염기 순서 때문에 결합할 수 없었던 분자의 구조를 사용자의 마음대로 고칠 수도 또한 맘에 드는 염기 서열만을 오려 내여 사용할 수 도 있게 되는 겁니다."
폭탄과도 같은 론의 설명에 팀원들은 할말을 읽어 버렸다. 심연처럼 가라 앉혀 버린 분위기에서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스와르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날선 음성으로 묻는다.
"왜 저 기계의 이름을 마이다스라 지은 거요?"
론은 의외의 물음에 멋 적게 머리를 극적인 뒤 답한다.
"신화에 나오는 마이다스왕에서 힌트를 얻었지요.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황금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의 손을 지닌 마이다스. 비록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황금은 아니지만 오히려 황금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자 붙인 이름입니다."
"이카루스, 노아, 마이다스, 결국 인간은 과거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군요."
론의 답을 들은 스와르의 차가운 한마디가 주위에 서있는 인간들의 마음에 가시처럼 와 박혔다.
Ben20311109.midas
계속해서 다음 파일을 열어본다. 방금 전 보다는 안정적인 모습의 벤이 다시 등장했다.
"2031년 11월 9일 AM. 10시 32분, 카타콤베에서 마이다스 프로젝트의 두 번째 기록을 올린다. 어제의 간단한 연구설명에 이어 오늘은 연구진들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이번 연구로 노아에 머무는 총 인원은 15명, 그 중에 실질적으로 연구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나를 포함해서 11명, 나머지는 미군 측의 '피터 레밍턴' 소령과 '존 소보다' 대위 그리고 민간인 흑인 의사인 '알렉스 프랭클린' 박사, 마지막으로 식사를 담당하는 요리사 '데미안'들과 앞으로 1년 동안의 시간을 함께 하게 되는 거지. 대부분이 미국인으로 짜여져 있지만 이 분야의 일인자라 불리 우는 독일의 '루트게르 바인덴스타인' 박사와 영국인 '찰스 첸들러' 박사, 일본의 '혼죠 미타나미' 박사 등이 참여하여 연구의 질을 높이고 있어. 정말이지 세계적 명성의 과학자들이 함께 모여서 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지경이야. 피터 소령과 존 대위 등이 남자로만 짜여진 임원들에 대한 조크를 해됐지만 난 솔직히 1년이 아니라 몇 년이라도 연구에 치중할 수만 있다면 그런 문제는 그리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 아쉬우면 하나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잠시 동안 벤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저런 놈 밑에 태어났으니 겜마가 괴물이나 만들어 됐지."
진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앞에서도 멘트 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1년간 노아의 출입을 전면 폐지하고 이루어지는 폐쇄 실험이다. 물론 세상과의 통신 및 장비 교류는 이루어지겠지만 임원들의 출입은 전면 금지된다. 그만큼 미군이 일급기밀 사항으로 이 실험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뜻인데 이유인 즉슨, 이 마이다스 프로젝트가 기존의 인간의 벽을 뛰어 넘는 것에서, 보다 발전한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뒷 배경에는 군부대에서 생화학적 무기를 개발하려는 의욕이 드리워져 있을지 모르나, 현재로는 지능을 갖춘 새로운 생명체에 중점을 두고 그들 또한 그 이상으로는 어떠한 간섭도 요구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들의 생체 무기나 기타 계획들에 대해서 알아야할 의무도 알고 싶은 마음도 없이 나의 일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후에 혁신적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도 그 용도의 쓰임새에 남은 여생을 후회 속에 보내야 했던 노벨처럼, 미련에 얼룩진 삶을 살거나 혹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역사의 악인으로 점찍어져 평생을 지내야 할지라도 난 나의 실험에 나의 모든 것을 걸 것이다. 그리고 꼭 성공시키리라. 인간만큼의 지능을 지니고 생각하며 말하고 자손을 만들어 보존할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생명체를 만드는 거다. 내가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주가 되는 거야."
격해진 벤의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심한 거부감의 낳게 했다.
"그는 심적으로 무척 불안한 사람인 것 같군요. 너무 편중 돼 버린 그의 집착이 그를 망가트린 거지요."
리나가 한마디, 한마디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공간에서 1년간의 폐쇄 연구라... 미치기에 아주 적당한 프로젝트였던 것 같군요."
침묵을 지키던 커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벤... 왜 이렇게 까지..."
론이 차마 말을 잊지 못한다. 이런 침울한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벤은 계속해서 떠들어 된다.
"카타콤베에는 실험에 필요한 모든 자제가 갖추어져 있지. 내가 말하는 자제란 바로 피(血)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98%에 달하는 동물의 피 샘플이 모두 체취 되어 각각의 혈액캡슐 속에 담겨 보관되고 있다. 동물뿐만이 아닌 식물과 곤충, 어류의 씨앗과 혈액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아이러니 하게도 이 노아는 성경 속에 나오는 방주와 조금도 틀린 것이 없다. 하느님의 게시를 받은 노아가 방주 속에 동물들을 들여놓았던 것이 단지 한 방울의 피로 대처되었다는 것만 뺀다면..."
두 번째 파일이 정지되었다. 처음 파일 때와는 또 다른, 차갑고 서먹서먹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생명체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없이 중요한 건 오직 피 속에 담긴 DNA 뿐이란 말인가. 단지 더 뛰어난 생명체를 만들기 위해서...'
론의 머리 속이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 메워 진다.
"자, 다음 파일로 넘어가 볼까요."
어떻게든 분위기를 뛰어 보려는 의지가 담긴 말투로 리나가 말하여 마우스를 끼운 손을 앞으로 뻗는다. 그때 스와르가 의견을 제시한다.
"웬만한 사실들은 확인이 된 것 같으니 이번에는 2032년도로 넘어가서 지구 폭발 바로 전의 상황을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론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그의 말에 찬성의 의사를 밝힌다.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겜마의 출생이 우선 이니 까요. 폭발 직전인 2032년 5월말 정도가 좋을 것 같군요."
리나가 짧게 끄덕이고는 손을 나비처럼 가볍게 움직여 Ben20320529.midas 라는 파일을 오픈 시켰다.
Ben20320529.midas
"2032년 5월 29일 PM. 9시 52분, 카타콤베에서 마이다스 프로젝트의 이백 마흔 네 번째 기록을 올린다. 어제 실험의 실패로 돌고래의 지능을 갖춘 원숭이에 대한 연구는 일단 잠정적인 보류에 들어 같다. 첫 번째 실험인 개미의 자신보다 200배에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는 힘과 지구력 유전자를 가진 바퀴벌레와 페로몬 성분을 발하며 개미와의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사마귀 그리고 기타 곤충들과 하등 동물 합성의 성공으로 들떠 있던 우리팀원들에게 찬물을 끼언 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비교적 신체기능이 단순한 곤충류 쪽보다는 역시 포유류 등의 척추동물 같은 고등생물에서의 합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물론 마이다스의 능력으로 생물체를 얻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같은 고기라 할지라도 부위마다 맛이 다르듯 우리가 원하고 있는 고기의 맛이 우러나오지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팀원들간의 팀워크는 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요리사인 데미안은 물론이고 피터 소령이나 존 대위 역시 매우 협조적 이여서 실험은 척척 진행되어 왔었다. 어제의 실험이 우리의 겨우 두 번째 실패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이 한풀 꺾여서 데미안에게 맥주를 마시러 갔다."
이백여 게의 파일들을 건너뛰는 사이에 벤의 얼굴은 눈에 뛰게 수척해져 있었다. 원체 마른 체구의 얼굴 이였으나 지금은 창백한 피부에 광대뼈가 뚜렷이 나타나고 눈 밑이 검게 물들어 문득 말기의 암 환자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의 눈만큼은 먹이가 앞에 놓인 굶주린 뱀처럼 무섭도록 번쩍이고 있었다. 마치 최후의 순간을 향해 타 들어가는 재처럼.
"태양을 받지 못해서인지 조금씩 낮과 밤의 구분이 묘해지고 있다. 연일 반복되는 실험과 스트레스. 프랭클린 박사는 내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계속해서 권고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있지만 연구가 시작된 후로 몸무게가 10kg 가까이 빠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힘들 때마다 만약 론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배신한 친구에 대한 감상적 여운인가. 가끔씩 그가 그리워지곤 한다. 제길.. 피곤하고 우울하다 오늘은 짧게 마치겠다."
벤의 말대로 기록은 짧게 끝났다. 론의 가슴속에 점점 폐인화 되어 가는 친구의 모습이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어두운 침묵 속에 파일들의 모습이 하나씩 형상화된다.
Earthstrike20320603.midas
두 개의 파일이 그날의 날짜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벤이라는 파일명에서 지구 스트라이크 란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지구 폭발은 노아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파일에선 벤이 새로운 연구결과에 대해서 떠들어 되다가 지진과도 같은 갑작스런 진동의 혼란 속에 화면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파일을 연다.
"3시간 전 진도계 11.7에 해당하는 기록적인 대지진이 노아를 강타했다. 이 정도의 치수라면 캘리포니아 일대가 쑥밭이 되었으리라 생각되어 1시간 전에 지진의 피해를 입었던 전원과 통신시설을 긴급 복구하고 외부와의 접속을 시도하였으나 지금 까지 통신이 두절되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이런 대지진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다. 눈먼 장님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지금쯤 세상 밖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리라 예상된다. 때문에 언제 다시 통신이 연결될지 역시 미지수이다. 펜타곤의 빠른 대처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다행히도 지진으로 해서 노아가 입은 피해는 극히 미비한 수준 이였다. 특수제해대피 시설이란 명칭답게 지진의 진동 이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과학자들 역시 미타나미 박사가 작은 찰과상을 입었을 뿐 모두 무사하다. 팀원들 사이에선 가족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아쉽지만 현시점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외부와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밖에는 없을 듯 싶다. 답답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파일이 멈추었다. 지구가 멸망해 버린 엄청난 사건 이였지만 벤은 단순한 지진쯤으로 여기고 다소 긴박한 상황만으로 사태를 과소평가 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사실을 알게되는 되까지는 1년이 넘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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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또다시 그림 부분이 날라갔습니다. 홀로그램이 나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