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천 감독은 아트디렉터 백종열씨의 추천으로 닉스광고를 연출할 기회를 안았습니다. 백종열씨는 90년대 중반 닉스,스톰 등 톡톡 튀는 신세대의류브랜드의 인쇄광고를 담당한 유명 크리에이터죠. 요즘은 뜸한 것 같은데 엄정화의 '초대' 등 몇몇 뮤직비디오를 통해 영상연출에도 재능이 있음을 과시한 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엄정화가 반라로 엎드린 채 안마를 받는 '초대' 뮤직비디오의 끈적끈적한 장면이 생각나는군요. ^ ^.
아마도 백종열씨는 닉스의 첫 CF를 기존 광고 관습에 길들여지지 않은 신선한 발상의 연출자에게 맡기고 싶었을 겁니다. 닉스TV 광고가 파격의 자유를 한껏 누린 인쇄광고의 연장선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몇몇 잡지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착안하는 데 남다른 재주를 보인 박명천 감독이 그 적임자로 발탁된 것이고요. 당시에는 모험이나 다름없었을 텐테 결과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박감독은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악전고투(일정에 쫓며 겨우겨우 촬영을 마친 당시를 생각하면 박감독은 아직도 모골이 송연해진다고 합니다. 데뷔무대에 선 신인의 떨림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끝에 멋진 영상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후 박명천 감독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광고계는 능력평가가 아주 빠른 곳입니다. 일단 재능을 인정받으면 많은 기회가 주어지죠. 박감독은 전원주 아줌마가 출연한 데이콤 002 광고로 홈런을 날렸고, 또 신비소녀 임은경이란 존재를 알린 TTL 광고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성을 구축했습니다. 데뷔과정은 어떻게 보면 행운이었지만 그 다음의 이력은 순전히 박감독의 능력에 따른 것입니다. 사실 걸출한 데뷔작을 선보였지만 당시만해도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이른바 '캠프 감수성(Camp Sensibility)'에 따른 단발성 화제몰이 아니냐라는 신중론이 있었죠. 90년대 광고계 최고의 연출자인 김규환감독도 '스타일만 너무 튄다'며 신출내기 박명천 감독의 실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진 않았습니다.
캠프 감수성이란 과장스러운 게이의 여성적인 몸짓을 뜻하는 말인데 이것이 광고계에선 감각적이고 통통 튀는 광고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의 의미로 통합니다. 박감독에 대한 젊은층의 환호를 캠프 감수성의 일시적인 결과로 본 것이죠.
그러나 박감독은 자신의 장기가 결코 감각적인 이미지 광고에만 머물러있지 않음을 증명해나갔습니다. 리얼리티 광고의 모범답안을 보여준 한미은행 CF같은 작품목록을 떠올리면 박명천 스타일의 내공이 결코 얕지 않음을 알 수 있죠. '아버지, 나 누구예요?'의 016 '나' 광고, 최근작으론 '유쾌 상쾌 통쾌'란 카피로 익숙한 메가패스 광고 등이 모두 박감독의 손을 거쳐간 것입니다. 박감독은 광고를 통해 때로는 가장 평범한 일상에 눈을 맞추고, 때로는
암호처럼 이미지를 직조해내 시청자에게 해석의 주도권을 넘기는가하면, 또 때로는 촌티·엽기·키치적인 기호로 기묘한 웃음을 자아냅니다.
불과 몇 년새에 이렇게 다양한 스타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니,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쯤에서 차은택 감독에게 시선을 옮겨볼까요?
차감독은 신인시절 박명천 감독이 꾸린 매스메스에이지란 프로덕션에서 활동했습니다. 박명천 감독이 막 광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그는 뮤직비디오 연출자로 서서히 입지를 닦아나갔는데 그 때 그의 중요한 파트너가 된 인물이 '어린왕자'이승환입니다.
이승환의 마니아들은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가수 이승환은 음반,공연,뮤직비디오 등에서 최고와 완벽을 기하는 뮤지션이죠. 흔히 '가요계의 혁명가'하면 서태지를 떠올리지만 공연기획, 앨범 디자인 등 실질적인 많은 분야에서 국내 음악계의 발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한 주인공은 이승환이라고 평가합니다. 다른 가수들이 뮤직비디오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부터 이승환은 뮤직비디오(이하 뮤비) 제작에도 특별한 열의를 보였습니다. 그는 홍종호,하홍 등 기성 뮤비 감독들과 작업해오다 5집 '애원'뮤비의 연출을 차은택감독에게 맡긴 뒤부터 줄곧 차감독과 호흡을 맞춰오고 있습니다. 왜 이승환이 차은택 감독을 선택했고, 그의 어떤 재능을 높게 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이디어, 콘티작업, 편집 등 전 제작과정에서 두 사람의 파트너십이 원활하고, 공고하다는 점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차은택 감독이 이승환이란 톱가수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덕분에 유명세를 탄 것도 사실이고요.
드라마타이즈 뮤직비디오의 대명사로 매스미디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김세훈감독의 조성모 뮤비시리즈가 꼽힙니다. 그러나 '음악의 영상화'란 뮤직비디오의 기본원칙에 입각해있는 드라마타이즈 뮤비의 진정한 수작은 차감독이 연출한 이승환의 '당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차감독은 이 뮤비로 99년 한국영상음반대상에서 영예의 대상을 거머쥐었고, 최고의 뮤비감독이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옛날 옛적 슬픈 결혼식을 치루는 소녀가 있고, 그 소녀의 꽃신을 든 채 시집가는 길을 뒤쫓아가는 소년이 있습니다. 이 소녀와 소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당부'뮤비는 중국풍 민속음악의 색채를 가미한 곡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가슴을 울립니다.
차감독의 장기는 말없는 영상으로 감성의 심연을 파고들 줄 안다는 겁니다. 이는 지난해 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인터넷부문 금상을 받은 차감독의 야후 광고시리즈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DDR, 드럼연주, 댄스 등을 즐기는 신세대 할아버지와 할머니, 순정만화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험상궂은 청년 등이 기억나는 야후 광고는 섬세하고 신선한 터치로 인간의 보편적인 희로애락을 자극합니다. 영화를 만들 듯 작업했다는 차감독의 최근작인 브라운아이즈의 '벌써1년' 뮤비도 스토리텔링과 영상미 구축에 그가 범상치않는 재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내년에는 두 영상의 재주꾼이 영화에서 진검승부를 겨룰 예정입니다. 곧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할 계획인데 그동안 제품과 음악에 기반한 아이디어를 영상으로 풀어온 광고나 뮤직비디오와 달리 영화를 통해서는 그동안 꾹꾹 참아온 나름의 얘기를 한껏 펼쳐내겠다는 각오가 대단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개인적으론 무척 기대되는 일입니다. 누가 더 성공적인 영화데뷔작을 내놓을 것인지, 얼마나 다른 스타일의 영화가 탄생할지 등을 함께 점처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