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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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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 자료방2 스크랩 남양(토홍)홍씨만전당홍가신선생의상소모음..
홍왕식 추천 0 조회 67 15.06.28 22: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공의 휘()는 가신()이고,

 자()는 흥도()이며,

성()은 홍씨()인데 남양인()으로 자호()를 만전()이라 한다.

 남양 홍씨는 그 대서()가 아주 멀다.

 상조() 홍선행()은 고려 때 금오위 별장 동정()을 지냈으며 이 이후부터 세대마다 훌륭한 인물이 나왔다.

 본조()에 들어와 홍한()은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는데, 사사()에 좌죄()되어 연산군() 때 귀양 가서 죽었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로서 중종 반정() 후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홍윤창()은 내섬시 판관()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홍온(?)은 장원서 장원()을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양세()의 추은()은 모두 공 때문이었다.

 어머니 정경 부인() 신씨()는 군수 신윤필()의 딸로서 가정() 신축년(, 1541년 중종 36년) 7월 17일에 공을 낳았다.

***********************

홍가신의상소모음...

1596년 7월 2일 홍주 목사(洪州 牧使) 홍가신(洪可臣)이 선조에게 상소하기를

 “이 자자(玆者)에에 갑자기 4월 16일자의 신하로부터 비판의 말을 구하는 구언(求言)하는 전지(傳旨)를 받들건대 대소 신민들로 하여금 재앙과 난리인 화란(禍亂)이 있게 된 연유 및 회복(恢復)시킬 계책과 성상인 성궁(聖躬)께서 실수하신 궐실(闕失) 및 민생들의 질고(疾苦)에 관해 극력 진달(陳達)하도록 허락하시면서 끝에 이르시기를 ‘발언이 비록 중도에서 벗어난 과중(過中)이라 하더라도 또한 장차 반갑게 여기며 의견(意見)을 받아들이는 채납(採納)하겠다.

’하셨으니 전하의 말씀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야말로 바로 위태로움을 반전(反轉)하여 안전하게 전위위안(轉危爲安)하고 재앙을 해소하여 상서로움을 가져 오게 소재치상(消災致祥)하는 하나의 큰 기회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변고가 이미 극도에 달하고 하늘의 마음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불예(不豫)함이 더욱 심해지는 유심(愈甚)함으로써 놀랍기만 한 비상한 재변이 겹쳐 나타나고 잇따라 발생하여 심지어는 대궐문에서 향축(香祝)을 받는 날 사람과 말에게 벼락을 치는 변이 있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또 역대에 있지 않던 일로서 전하께서는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조심하는 경구긍척(警懼兢?)하시면서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는 도회(圖回)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위열(慰悅)할 계책을 도모해야 할 것으로 단지 지난 날처럼 임금을 섬기는 데 의롭지 못하고 나아가고 물러서는데 예의가 없으며 말만 하면 선왕의 도를 비난하는 예예답답(泄泄沓沓)하게만 해서는 안됩니다.

?

?신은 우선 성지(聖旨)에 하문하신 일에 관하여 논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성지를 읽어보는 복독(伏讀)하건대

 ‘원수는 기필코 갚아야 하고 내정(內政)을 닦는 것이 시급한데 와신상담(臥薪嘗膽)인 신담하고 각고면려(刻苦勉勵)인 각려하는 뜻이 혹 그럭저럭 안일만을 도모하는 고식구안(姑息苟安)으로 돌아가버린 것인가?’하셨습니다.

신은 듣건대 ‘천지처럼 한이 없는 궁천극지(窮天極地)의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은 천지처럼 한이 없는 궁천극지(窮天極地)의 원통함을 잊어버리지 않고서 음식과 거처의 봉(奉)함을 모두 평소와는 아주 다르게  절이(絶異)한다.’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오국(吳國)왕 합여(闔閭)의 차남인 부차(夫差)가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회계()의 치욕을 상기하고자 드나들 때마다 사람을 시켜 ‘부차야 월국 사람들이 너의 아비 합여(闔閭)를 죽인 일을 잊고 있느냐?

’라고 외치게 한 출입 상호(出入 常呼)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인데 이렇게 한 다음에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감격(感激)시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게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환도(還都)하신 처음에는 자못 신인(臣隣)들을 인접(引接)하여 문답하시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불권(不倦)하시며 지난 날 몸이 한가(閑暇)하고 마음이 편안(便安)한 연안(宴安)의 해독을 경계삼고 앞으로의 수양(修攘)할 정책을 도모하시는 듯했는데 날이 가고 달이 바뀌게 되는 일왕월래(日往月來)하면서는 점차로 흐늘거리며 노는 완게(玩揭)하게 되어 깊이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大殿), 왕비가 거처하는 중전(中殿), 대비가 거처하는 대비전(大妃殿)인 대내(大內)에만 계시면서 아름다운 옷과 좋은 음식인 미의옥식(美衣玉食)에 스스럼 없는 친압(親狎)하는 사람은 궁녀(宮女)와 환관(宦官)인 부시(婦寺)들 뿐이었습니다.

?

한 달 동안에 겨우 몇 번 경연(經筵)에서 시사(視事)한 적이 있었지만, 강관(講官)들은 계옥(啓沃)하는 도움이 없었고 임금의 잘못을 꿋꿋하게 간하여 선도(善導)하는 쟁신(諍臣)들은 간(諫)하여 바로잡는 의리를 잃어버렸으니 상하가 시들해진 위미(委靡)해져 어떤 일을 할 때 처음에 기세를 올려 단숨에 처리하는 1고작기(一鼓作氣)가 진작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서 그와 같은 소원을 바란다면 같은 하늘을 받들면서 함께 살 수 없는 지독한 원수인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를 갚을 날이 없을 듯하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 점에 대하여 통렬하게 반성하셔야 하겠습니다.

삼가 성지를 읽어보는 복독(伏讀)하건대 ‘효도하려는 심정이 간절해야 하고 선조를 받드는 예의가 엄격해야 하는 법인데, 상로(霜露)가 내리고 나면 구슬프게 사모하는 창모(愴慕)하게 되는 심정이 도리어 폄손(貶損)하여 자책(自責)하는 일에만 빼앗기고 있는 것인가?’ 하셨습니다.

 신은 듣건대 공자는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하지 않은 것 같다.’하였습니다.

효자가 선조를 받드는 도리는 부득이한 병고(病故)가 있지 않으면 직접 제사를 집행하여 선조가 그 자리에 계신 듯하게 하는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이 번 변고가 있은 뒤로 조종(祖宗)을 봉안한 타어(妥御)한 방들이 남김없이 불타버리는 회신(灰燼)하여 놀란 조종의 혼령이 정처없이 방황(彷徨)하고 있을 것인데, 전하께서 환도하신지 이제 이미 여러 해인 누세(累歲)가 되었는데도 태묘(太廟) 제사에 아직 한 번도 친림(親臨)하지 않으셨으며, 군신(群臣)들 중에 또한 일찍이 이 일을 들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태묘 문에 들어가 고기와 채소를 담는 제기인 조두(俎豆)를 친히 차리는 것을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는 비록 전하께서 스스로 폄손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정리(情理)에나 예도에나 모두 근거할 데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시는 조종들의 영혼이 ‘나도 후손이 있다.’고 하려 하시겠습니까?

오늘 날의 일은 다만 마땅히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품고서 더욱 추원(追遠)하는 예의를 다하면서 착하게 하기를 스스로 힘써 후일 기필코 이 적을 섬멸하고 기필코 이 원수를 갚기로 기약하여 원릉(園陵)의 통분함을 쾌하게 씻고 종사(宗社)의 천조(天祚)가 거듭 이어지게 해야 하니 이 것이 곧 전하의 큰 효도인 것입니다.

구구하게 스스로 폄손하는 소소한 예절로는 조종들의 마음을 위안하거나 후세의 공론을 면할 수 없을 듯싶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 점에 대하여 척념(?念)하셔야 하겠습니다.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궁중의 일을 언제나 엄숙하고 근신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반연(攀緣)에 따라 사정(私情)으로 청탁하는 길이 혹시 있는 것인가?’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궁중이란 임금의 집이다.’하였습니다.

 세상의 임금으로서 그 누가 그의 가도(家道)를 바로잡아 내외(內外)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고 사정으로 인한 은애(恩愛)를 근절하여 자신의 덕에 해가 되고 자신의 정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침내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덕이 잘 닦여지지 못하여 명령하는 바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성탕(成湯)은 성인이었지만 오히려 여알(女謁)이 성행하는 것과 포저(苞?)가 나도는 것이 가뭄을 가져오는 이유가 됨을 두려워 했었는데, 하물며 성탕만 못한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멀리서 궁벽한 고을을 지키고 있느라 일찍이 한 번도 도성에 발을 디뎌보지 못했기에 궁중에서 금단하고 있는 사례에 대해서는 진실로 알지 못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형체는 보지 못해도 그림자는 볼 수 있고 내부는 보지 못해도 외부를 보고 점칠 수 있는 것으로서 관작(官爵)의 제배(除拜)와 옥송(獄訟)의 저앙(低仰)이 모두 공정한 도리대로 되지 못한다고 항간에서 수근거려온 지 오래되었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 점에 대해 잘 생각하셔야 하겠습니다.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편폐(便嬖)의 부류들에게 모두 법도대로 하도록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기묘한 짓을 하여 잡다하게 들어오고 있는 폐해가 혹시 그 사이에 행해지는 것인가?’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소인의 성질은 기묘하게 방탕하고 간사하게 아첨하는 태도를 하여 임금의 욕구를 맞추어 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임금이 살피지 못하고 한 번 넘어가게 되면 점점 방탕해져서 그와 함께 동화되어 의리를 지키는 마음은 차차 쇠퇴하고 교사(驕奢)하려는 욕심이 날로 자라나게 되니, 작게는 화란을 부르게 되고 크게는 나라를 망치게 된다.’했습니다.

?

 무왕(武王)은 성인이었지만 오히려 무익한 일을 하느라 유익한 일을 해치게 되거나 소소한 행실을 아끼느라 마침내 큰 덕을 더럽히게 되지 않도록 경계했었습니다.

전하께서 환시(宦寺)의 무리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삼가지 않는 잘못이 있으면 즉시 유사(有司)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여 마땅히 음교(淫巧)한 짓으로 성상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는 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평상시에 오랫동안 모시면서 얼굴과 인정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한가한 틈을 노려 성상의 뜻에 보다 영합(迎合)하는 를 잘 쓸 것입니다.

 비록 전하께서 영명하시기는 하지만 어찌 꼭 이런 일이 없기를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소문으로 알게 된 일인데, 전하께서 수레나 말이나 의복이나 애완(愛玩)거리 및 공장(工匠)들의 기예(技藝) 솜씨에 대하여 지극하게 마음을 두신다고 합니다.

이 것이 어찌 전하의 본성이겠습니까?

좌우에서 귀여움받는 사람들이 권유하며 떠받든 죄가 아닐 수 없으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 점에 대해 반성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삼가 성상의 전지를 읽어보건대 ‘옛적에 적을 제어한 사람들은 반드시 현명한 인재를 중히 여겼었다.

 지금 군신(群臣)들 중에도 또한 위(魏)나라를 보호한 간목(干木)초(楚)나라를 물리친 계양(季梁)과 같은 사람이 있는데도 모두 임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하셨습니다.

?

신이 듣건대 ‘맹호(猛虎)가 산에 있으면 여곽(藜藿)도 캐러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했습니다.

 옛적에 적을 잘 제어한 사람들은 성지(城池)를 믿을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현명한 인재를 얻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습니다.

 예컨대 춘추시대에 위나라 임금이 간목을 스승으로 삼자 나라가 편안해지게 되고 수(隋)나라 임금이 계양(季梁)을 정승으로 삼자 적이 물러가게 된 것은,

 진실로 그 사람들의 덕망과 위엄이 이웃 나라와 적의 마음을 진정하여 복종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재를 부족하게 내지 않기 때문에 ‘인재를 다른 시대에서 빌릴 필요가 없다.

’하고,

또 10호(戶)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臣)한 사람이 있는 법이다.’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재가 비록 적다고는 하지만 군신(群臣)들 중에 어찌 한두 사람이라도 덕성이 순고(純固)하고 식견과 생각이 총명하고 통달하여 함께 나라 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이 없겠으며, 어찌 한두 사람이라도 지기(志氣)가 강개하고 풍채가 준정(峻整)하여 언사(言事)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혹은 과거(科擧)로 국한시키고 혹은 자급(資級)으로 제한하며 준례에 따라 빈 자리를 메우기만 하여 범연히 반열(班列)만 따르게 하니, 비록 세상에 드문 현명한 사람이나 출중한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모두 쓰일 수 있겠습니까.

?

모두 쓰이게 되지 못한다면 이는 인현(仁賢)한 자들을 신임하지 않아 나라가 공허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허한 나라야 적국 사람들이 무엇을 꺼리어 업신여기지 않겠습니까.

사람이란 궁지에 몰리면 선(善)을 생각하게 되고 난이 극도에 이르면 다스려지기를 생각하게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하문하시게 된 것은 측석(側席)하시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까?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옛 날 변방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군신(群臣)들로 하여금 누구나 의논하게 했었다.

 오늘날 조정에도 또한 제후(諸侯)들을 꺾은 계포(季布)나 어사(御史)를 힐책한 적산(狄山)처럼 자기의 계책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사변(事變)은 무한하고 한 사람의 생각은 유한하다.’ 했습니다.

 유한한 생각으로 무한한 사변을 대응하는데 어떻게 일마다 완전무결하게 해나가겠습니까.

하물며 변방 일에 대한 계책은 적을 요리(料理)해야 하는 큰 일이므로 반드시 널리 조정 의논을 채택하여, 가부 간에 의논을 서로 조화시켜야 하고, 남의 의견만 따르거나 구차하게 잘못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비변사의 신하는 단지 두서너 재상(宰相)들일 뿐이어서 변보(邊報)가 오면 으레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그에 관한 공사(公事)를 가지고 일일이 그 집에 가서 품하게 하는데, 그 책응한 것의 득실은 따지지 않고 어느 재상이 무어라고 했는지만 물을 뿐입니다.

?

비변사에 모이는 날에 있어서도 한 사람이 말을 하면 세 사람은 그저 옳다고만 하고, 심한 경우에는 들은 척 만 척 머리를 숙이고 졸고 있으며, 때로는 또 지나치게 비밀로 하여 제목(題目)마저도 은휘(隱諱)하여 봉해서 올리고 봉해서 내리고 하고 있으니, 비록 이해 득실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누가 어떻게 따져볼 수 있겠습니까.

 지난 일은 어찌할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래도 잘 해나갈 수 있는 법인데 전하께서 오늘날 하문하시게 된 것은 계중(稽衆)에 뜻이 있으신 것입니까?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원통하게 죽은 신하들을 이미 포장(褒奬)하고 증직(贈職)하도록 명하기는 했지만, 황천(黃泉)에 아직도 원한을 씻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셨습니다.

반역(叛逆)은 최대의 죄악이고 죽이는 형벌은 최대의 법입니다. 최대의 법을 최대의 옥사(獄事)에 적용하는 것을 어느 누가 통쾌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마는 불행하게도 반역한 사람들이 진신(縉紳) 가운데에서 나옴으로써 화가 널리 퍼져 옥석(玉石)이 구분없이 타버리게 되었으니, 천하 사람들의 마음에 반드시 분함과 불평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

?역신(逆臣) 정여입(鄭汝立)은 성품이 실로 이심(異心)을 품은 사람으로 몰래 무뢰배(無賴輩)들을 유인하여 감히 석천(射天)의 흉계를 내었다가 신명(神明)의 벌과 귀신의 앙화가 발길을 돌릴 사이도 없이 내려 와서 노륙(?戮)당하여 형벌이 로 조상에까지 미쳤으니, 이는 진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2∼3명의 조정 진신에 있어서는 모두 한 시대의 명류(名流)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잘하는 것을 좋아하기만 했지 사람을 가려 보지는 않았고, 하는 말만 들었지 하는 행실은 보지 아니하여 서찰(書札)로 문답하는 사이에 망령되이 시사(時事)에 대한 시비를 논하였으니, 이는 그만한 죄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함께 반역 모의에 참여하여 반역을 도모했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만무할 것입니다.

원인은 조저(朝著)가 분열되고 사론(士論)이 대립되자 일종의 부류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분한 마음을 품고서 틈을 노렸다가 일망 타진하는 계책을 부리려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 반역한 무리들의 변이 마침 이 때에 있게 되자 위협하여 꾀어내고 끌어들이어 갖가지로 단련(鍛鍊)한 데 있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당사자는 그만두고라도 늙은 부모와 연약한 자식들까지 모두 엄한 형장(刑杖) 밑에 죽어갔기에 지금 7∼8년이 되도록 나라 안의 공론이 자자하고 대중의 심정이 애처롭게 여기며 답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신(朝臣)들 중에서도 일찍이 여러 차례 원통함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말을 했었지만 참벌(斬伐)이 있은 나머지라 사기(士氣)가 좌절되었기에 겨우 미미하게 그 실마리만 열어놓았을 뿐 끝까지 말을 다하지는 못하면서 전하께서 스스로 깨달으시게 되는 날을 기다렸던 것인데 세월만 가고 있습니다.

 알 수 없습니다만, 어느 때에나 깨달으시게 되고 지극한 원통도 어느 때에나 씻을 수 있게 되겠습니까?

전하의 마음이 어찌 산림(山林)에서 지내며 행실이 고결하고 지조가 신고(辛苦)한 진주현(晉州縣) 사람 사포(司圃) 최영경(崔永慶)에게 있어서는 밝고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두운 것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좌우의 제신(諸臣)들이 이런 곡절을 잘 갖추어 면류(冕旒) 앞에 주달하는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겨울의 음기(陰氣) 다음에는 반드시 봄의 양기(陽氣)가 있게 되는 법인데, 전하께서 오늘날 하문하시게 된 것은 측은하게 여기시는 마음이 발로되신 것입니까?

?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죄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이미 소방(疏放)하도록 했지마는 감옥 안에 아직도 미처 원통함을 씻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역경(易經)

 ‘군자는 분명하고 신중하게 형벌을 사용하고 옥사를 지체하지 않는다.’했습니다.

이는 성인들이 괘상(卦象)을 관찰하고 교훈을 세운 것으로서,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중외(中外)의 옥사에 있어서 실정과 법률이 서로 맞는 것은 유사(有司)가 수시로 결단을 내려 풀어주고 있지만, 오직 죄명은 지극히 무거운데 정리(情理)상으로는 안타깝게 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유사들이 감히 뜻대로 결단하지 못하여 세월을 지체하고 있다가 마침내는 형틀에서 말라 죽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이 앞서 수원(水原)을 맡고 있을 때에 경영(京營)의 군졸 황윤주(黃允宙)란 자가 보미(保米)와 보포(保布)를 받아내려고 하면서 혹시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부방(赴防)에 관한 공문(公文)을 위조하고 인신(印信)을 찍어 그 것을 가지고와서 보미와 보포를 독촉하자 이웃 사람들이 의심을 하고 관에 신고했습니다.

율(律)을 고찰해 보면 인신 위조는 사형에 해당됩니다만 그 실정을 따져 보면 바라는 바가 몇 되 몇 말의 쌀과 몇 자나 장(丈)의 베에 지나지 않는데, 승복(承服)하면 사형을 받게 되고 승복하지 않으면 형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

그 동안 여러 차례 대사(大赦)가 있어 사형에 해당되는 잡범(雜犯)들은 모두 은덕으로 용서를 받았는데 이 자만은 용서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신이 항상 안타깝고 측은하게 여겨 왔습니다.

 지금 중외(中外)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죄가 의사(疑似)하여 감결(勘結)하지 못하고 오래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 신소(伸訴)할 길이 없는 그런 사람이 어찌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옥사를 결단하여 죄수를 돌보는 일은 성인들이 더욱 조심해서 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 하문하시게 된 것은 이런 흠휼(欽恤)하는 유덕(遺德)에서 나온 것입니까?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은 인심(人心)을 위주로 하는 법인데, 대중의 심정이 마치 파도 속에 있는 것처럼 흉흉(洶洶)하여 조금이라도 위급함을 경고하는 신보나 와전된 말이 퍼지면 고기가 놀라고 새가 흩어지듯 하여 안정된 뜻이 없으니, 인심을 어떻게 유지해야 될지 모르겠다.’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4해(四海)가 지극히 넓고 백성들이 지극히 많지만, 그들의 정의(情義)를 와 결합시켜 비록 의외의 환란이 있더라도 차마 버리고 이산(離散)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평소에 은덕과 신의로 민중에게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했습니다.

?

?오늘날 군민(君民)의 관계는 이와 달라 에서는 아래에다 은덕과 신의를 행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에 맺어질 만한 정의(情義)가 없어 가로막히고 통하지 못하여 전혀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임금은 고립되어 도움받지 못하고 백성은 각자들 딴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궁중에서 먼저 떠나버리는 행동이 매양 민중들의 본보기가 된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귀를 기울이며 짐을 메고서 도적이 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수선거리며 안정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조금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하문하게 된 것은 마음이 실로 비통해서일 것입니다마는 유지해 갈 방책에 대해서는 또한 어찌 일단의 특이한 사업이 있지 않겠습니까?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하려는 사람은 백성의 안정을 급선무로 삼는 법인데, 여염(閭閻)이 떠들썩하여 마치 수화(水火) 속에 있는 것만 같다.

 비록 관대한 전지(傳旨)와 견면(?免)하라는 영이 있어도 황방 백최(黃放白催)를 하기 때문에 끝내는 실질적인 혜택이 없게 된다. 민생들을 어떻게 하면 안정되게 살 수 있게 할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옛적에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반드시 백성을 안정시키기를 힘썼는데 백성을 안정시키는 길은 반드시 세납(稅納)을 가볍게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한다.’하였습니다.

?

?지금 병난을 당한 뒤끝이라 재력이 이미 다 되었고 칼날 밑에서 외롭게 살아남은 백성들은 이리저리 옮겨다니느라 살아가기가 고달픕니다.

바로 조정에서 견제(?除)해 주고 진대(賑貸)해 주더라도 10년 이내에는 생업을 복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상중(上中)의 세납을 풍년든 해에 비교해서 매기고 각종 명목으로 징수하는 것은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사상(使相)은 한편에서 견면(?免)해 주기를 상주(上奏)하는데 해 조(曹)는 한편에서 신보(申報)하기를 재촉하니, 전하께서 근심하여 애쓰고 애처로워 구제하려 하시는 뜻을 으레 유사(有司)들에게 내리더라도 재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논에 걸리어 마침내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 것이 비록 중요한 군수(軍需)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고 광범한 경비를 수응(酬應)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나온 조치라고는 하더라도 껍데기가 다 망가져 터럭이 붙을 데가 없을 정도로 백성이 망해버렸는데 재물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원망하고 비방하는 민암(民?)이 두렵기만 합니다.

전하께서 하문하시게 된 것은 매우 염려하셔서일 것입니다마는 안정시켜 살아가게 하는 길이 또한 어찌 다시 별스러운 특이한 방법에 있겠습니까?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상과 벌은 사람들의 마음을 격려시키기 위한 것인데, 충성스럽고 부지런하게 힘을 다한 사람은 실망을 안게 되고 요행을 노리며 망령되이 외람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갖게 된다.

 상과 벌을 어떻게 하면 권면되고 징계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

신이 듣건대 ‘상과 벌은 임금의 큰 권한이요 국가의 이기(利器)이다.’했습니다.

임금은 반드시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마음으로 에서 환히 내려다 보아야 하고 재상(宰相)은 반드시 대정 지공(大正至公)한 도리로 아래에서 집행한 다음에야 공이 있는 사람이 낙심하여 맥이 빠지는 염려가 없게 되고 공이 없는 자가 외람한 허위로 요행히 얻으려는 희망을 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각기 스스로 분발하여 힘쓰면서 형살(刑殺)과 위령(威令)이 자신에 가해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송동(?動)하고 권면(勸勉)하게 되면 허위가 용납될 데가 없지만 오직 공정한 도리가 와 아래에서 행해지지 않아 상과 벌이 합당하게 되지 못하면 권면과 징계가 합당함을 잃는 가 많은 법입니다.

 예컨대 요사이 군공(軍功)에 관한 한 가지 일만 하더라도 전혀 두서가 없어서 분발하여 충성하고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은 우악(優渥)한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고 연줄따라 빌붙은 사람은 도리어 높은 등급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힘을 다한 사람은 실망하게 되고 망령되이 외람한 짓을 한 자만 마음 갖게 되었으니 과연 성상께서 하문하신 말씀에 논란한 바와 같은 점이 있게 되었습니다.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기강(紀綱)은 사기(士氣)를 진작시키기 위함인데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罪科)를 범한 자도 요행히 면하게 되고 군기(軍機)를 그르치고 일을 망친 자도 보존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기강이 어지러워지지 않겠는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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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듣건대 ‘국가에 기강이 있음은 사람에게 맥(脈)이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맥이 병들면 비록 4지(四肢)가 아무 탈이 없어도 믿을 수 없는 것이요, 기강이 어지러워지면 4해(四海)가 비록 아무 일이 없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했습니다.

 이른바 기강이란 안으로는 조정으로부터 밖으로는 나라의 사방에 이르기까지 존비(尊卑)의 구분이 질서 정연하게 상도(常道)가 있어야 하고, 현명한 사람과 현명하지 않은 사람의 구별이 판연하게 차등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공이 없이는 상을 받을 수 없게 하고 죄가 있고서는 형벌을 면할 수 없게 해야 하니, 이와 같은 국정을 집행하기를 금석(金石)처럼 굳게 하고 이와 같은 명령을 시행하기를 4시(四時)의 운행이 어김없듯이 하되,공평정대(公平正大)한 의리로 유지시켜야 하고 편당하거나 반측(反側)하는 사심으로 무너뜨려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고 사기(士氣)가 어찌 진작되지 않을 수 있으며 국가 사세가 어찌 존엄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임금의 마음가짐 속에 사(私)와 사(邪)가 가리우고 있는 것을 없애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국정을 집행할 때 공정한 시행과 조치를 극진하게 하지 못하여 기강이 해이되고 풍속이 퇴패(頹敗)하게 만듦으로써 마침내는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사이 임금을 버리고 왜적에게 아첨한 패역(悖逆)하고 부도(不道)한 사람들에 대해 8의(八議)의 법을 끌어대어 그의 죽음을 용서하도록 두둔하였고 무모한 겁장이로 전군(全軍)을 패망시킨 사람을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핑계로 마침내 말감(末減)하게 함으로써 간사한 짓을 한 사람이 요행히 면하게 되고 일을 그르친 사람이 보존하게 되었으니, 과연 성상께서 하문하신 말씀에 논란한 바와 같은 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3군(三軍)의 장수 임명을 어떻게 해야만 적임자를 구하여 간성(干城)을 삼아 어모(禦侮)함을 맡길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손자(孫子)가 ‘장수는 국가를 보좌(輔佐)하는 자이니 보좌를 주밀하게 하면 나라가 반드시 강해지지만 보좌에 틈이 생기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게 되는 것이다.’했습니다.

 대저 장수의 한 몸에 사직의 존망과 3군(三軍)의 사생(死生)이 달려있는 것이기에 적임자를 구하기가 쉽지도 않고 소임을 경솔하게 줄 도 없는 법입니다.

옛적의 장수들은 임명받은 날부터 가사(家事)를 잊어버리고 군사를 배치하여 야영함에 어버이를 잊어버리며, 사졸들과 함께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속에 노력하며 술을 줄 적에도 고루 은혜를 보여 사졸들을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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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람들이 필사의 힘을 다 쏟게 되어 가는 곳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소위 장수들은 5재(五才)는 없고 7과(七過)만 있어,

용맹스럽기만 하여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인자하기만 하여 우선 좋게만 하려는 사람이 있고,

지혜스럽기는 하면서도 마음에 겁내는 사람이 있고,

 청렴 결백하기는 하면서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강퍅하여 자기 멋대로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탐오(貪汚)하여 이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포악하여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모두 옛 사람들이 경계하여 장재(將才)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었는데, 곤수(?帥)의 소임을 나누어 부여하여 3군(三軍)의 명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간성 어모(干城禦侮)의 위임은 이런 무리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듯합니다.

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융병(戎兵)에 관한 정사를 어떻게 닦아가면 요령을 얻어 끝내 적과 대치하게 되는 염려가 없게 되겠는가?’하셨습니다.

신이 듣건대 주공(周公)성왕(成王)을 경계하기를 ‘그대의 융병을 잘 다스리라.’하고, 소공(召公)이 강왕(康王)을 경계하기를 ‘6사(六師)를 장황(張皇)하라.’ 했습니다.

성왕과 강왕의 시대에는 제후들이 화목하고 4방 오랑캐들이 제항(梯航)하게 되었으므로 마땅히 하는 일 없이 단정하게 팔장끼고 있으면서 군려(軍旅)에 관한 일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을 듯한데 주공소공의 정성어린 충고가 유독 이 점에 있었으니, 이는 문교(文敎)가 유여한 때에는 언제나 무비(武備)가 부족해서 걱정인 것이고, 태평하여 아무 일이 없는 세상에는 화란이 반드시 뜻밖에 일어나게 되어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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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의 군신(君臣)들은 편안하게 지낼 때에도 위태함을 생각하고 태평시대에도 난리에 대한 대비를 이처럼 하였는데 하물며 후세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군정(軍政)의 요건은 대개 세 가지가 있으니 군의 내실을 검토해야 함이 하나요,

갑옷과 병기를 잘 마련하는 것이 하나요,

교련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적임자를 구하여 오래 장수로 있으면서 자신이 교육시켜 자신이 쓰도록 한 다음에야 상하가 서로 친해져 사졸들이 쓰이게 됨을 즐겁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옛적에 염파(廉頗)초(楚)나라 장수가 되어 공이 없자 조(趙)나라 사람 쓰기를 생각한 것이 이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군정은 허술하다 하겠습니다.

 생존 여부를 고핵(考?)하고 호보(戶保)를 수개(修改)함은 군정의 실속을 검토하려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인데 노약(老弱)이 절반이나 됨을 면치 못하고, 기·창·검·총(旗槍劍銃)을 모두 신제(新制)에 따르도록 한 것은 갑옷과 병기를 잘 장만하려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인데 그만 폐단이 생겨 예전대로 함을 면치 못하게 되고, 단체로 모여 대오(隊伍)가 되어 부지런히 훈련을 시키는 것은 교련을 분명하게 하려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인데 익히는 무예(武藝)가 맞지 않는 것임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솔(領率)하는 사람도 가르치던 사람이 아니어서 아침에 바꾸었다 저녁에 갈았다 하는 폐단이 있고, 역사(役事)하는 사람들도 예속(隷屬)됐던 데가 아니어서 전일한 마음으로 정밀함을 다할 길이 없게 됩니다.

군정이 이러하니 앞날의 근심거리가 갑자기 적과 대적하는 데에서 그칠 뿐만이 아닐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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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성지를 읽어보건대

 ‘말해야 할 일이 또 이 몇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하셨으니,

전하께서 스스로 세밀하게 아시고 간절하게 고치려고 하시는 데 대해 깊이 앙모하게 됩니다.

 신이 일찍이 반복해서 추구해 보건대 성상께서 하문하신 이외에도 말해야 할 일이 과연 한두 가지가 아닌데, 화란을 가져오게 된 까닭은 인심을 잃어버린 데에 있습니다.

서경(書經)에 ‘하늘의 총명(聰明)도 우리 백성들의 총명에 의한 것이고 하늘의 명외(明畏)도 우리 백성들의 명외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했습니다.

 옛적부터 천명(天命)의 가버림과 돌아옴이 어찌 일찍이 인심(人心)이 떠나버리거나 합침으로 말미암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

?전하께서 자품(資稟)이 총명하고 영특한 기운이 넘치시어 호령을 내리는 사이에 매양 자용(自用)하는 병폐가 있었으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첫째 일이요,

언사(言事)하는 신하가 한 마디라도 성상의 뜻에 거슬리면 포용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말을 한 사람이 자신을 안정시키지 못하여 떠나버리게 하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둘째 일이요, 백성을 쇄출(刷出)하여 변방을 채우는 일이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명령을 받든 신하가 성지(聖旨)에 맞추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여 각박하게 독촉하고 구박(驅迫)하면서 닭이나 개도 남김없이 북쪽 변방에 내몰아 백에 하나도 생존할 수 없게 하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셋째 일이요,

왕자로서 산업(産業)을 점유한 자가 산택(山澤)을 남김없이 차지해 서민들이 나무하고 풀벨 데도 없게 하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넷째 일이요,

궁중에서 저자의 이득을 독점하는 자가 헐한 값으로 강제로 무역하게 하여 시정인들로 하여금 왕왕 파산케 하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다섯째 일이요,

 초액(椒掖)의 친정 천얼(賤孼) 등이 연줄을 대며 의지하여 청탁하는 길을 크게 열어놓고 보내오는 뇌물을 공공연히 받아들여 로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면서 아래에서 제 멋대로 하고 있으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여섯째 일이요,

 논사(論思)하는 신하가 보도(輔導)하는 직책으로서 당시의 폐해를 차자(箚子)하여 논할 적에 말이 기휘(忌諱)에 저촉되면 무관(武官)으로 좌천되어 낭패하고 나가 조정 신하들이 혀를 깨물고 말을 못하고 4방 사람들은 놀랍게 듣고 있으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일곱째 일이요,

서얼(庶?)들에게 허통(許通)하여 쌀을 바치고 속신(贖身)하게 했다가 그만 도로 폐지하여 신의를 잃고 원망을 쌓았으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여덟째 일이요,

간신(奸臣)이 유감을 품고 때를 노렸다가 독기를 부려 마구 죽이게 된 나머지 죄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아홉째 일이요,

 태의 어보(御寶)를 도둑질한 자는 그 죄가 멸족(滅族)을 시켜도 되겠지만 알지 못하고 잘못 산 사람으로 연루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정위(廷尉)가 공평하지 못하여 원통한 백성들이 신원(伸?)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것이 인심을 잃게 된 열째 일입니다.

?

?신이 일찍이 5자지가(五子之歌)를 읽다가

‘한 사람이 세 번이나 잘못하다니,

 어찌 원망함이 현저히 드러나야만 알 수 있으리요?

보이지 않을 적에 도모해야 하는 것이다.’한 대목에 이르러 일찍이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하의 잘못은 세 가지만이 아닙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잃어버리기 쉬운 것도 인심이고 감동시키기 쉬운 것도 또한 인심이며,

 믿기 어려운 것도 천명(天命)이고 만회하기 쉬운 것도 또한 천의(天意)인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에는 진실한 마음으로 응해야지 형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실심(實心)으로 이전의 과오를 뉘우치고 실심으로 이전의 과오를 고치면서 인심에 순응할 길을 찾고 하늘의 뜻에 맞추기를 힘쓸 만 있다면 재변(災變)을 해소할 도 있고 회복을 기필할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이란 천 가지 만 가지로 복잡합니다.

 반드시 먼저 큰 근본이 되는 것과 급선무에 대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종사(從事)하여 착실하게 힘을 쓴 다음에야 강령이 들려지고 조목이 펴지면서 실마리가 모아지고 실끝이 정리되듯 천하에 바로 잡기 어려운 병폐가 없게 되는 법이니 역경에 이른바 ‘근본을 바로 잡으면 만사가 다스려지는 것이다.’한 것이 이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큰 근본이란 것은 입지(立志)가 그 것이요

급선무란 것은 현명한 인재를 구득하는 것이 그 것입니다.

?

신은 듣건대 ‘지(志)라는 것은 마음이 통하여 가는 데가 있는 것이다.’ 했습니다.

 뭔가 성취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 뜻을 굳게 유지하며 고수하여 이험(夷險)과 생사 관계로 고치지 않는다면 천하에 해낼 수 없는 일이 없는 법입니다.

 옛적에 월(越)나라 임금이 회계(會稽)에서 곤욕을 겪고 속을 태워가며 법령을 개수(改修)하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는 한편,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죽은 사람을 조위(弔慰)하며 거마(車馬)를 보수하고 갑병(甲兵)을 다스리면서 사졸(士卒)들과 더불어 노고를 같이 했는데, 무릇 오(吳)나라에 보복하게 될 일은 하지 않는 것 없이 하고 오나라에 보복하게 될 일이 아닌 것은 할 틈이 없었습니다.

오직 이렇게 했기 때문에 마침내 부차(夫差)를 죽게 하였고 미록(?鹿)이 고소대(姑蘇臺)에서 놀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보잘것없는 조그만 오랑캐가 우리가 대비하지 않은 틈을 타 쳐들어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해지가 함락되고 3도(三都)가 모두 빈 터가 되었으며 태묘(太廟)와 능침(陵寢)의 화가 부초(夫椒)의 패망(敗亡) 같을 뿐만이 아닌데 전하께서 노심초사하고 각고면려하는 뜻이나 복어(服御)와 음식의 자봉(自奉) 및 국정을 닦아가고 사람을 임용(任用)하는 도리에 있어 지난날 하던 것에 비해 크게 고쳐진 것이 있음을 듣지 못했으니 전하께서 원수를 갚으려는 뜻이 아직도 세워지지 못하신 것입니다.

?

신은 바라건대 결단코 지금부터 앞으로는 비록 옛 사람처럼 와신상담은 못하실망정 화려한 의복이나 가볍고도 따뜻한 갖옷 같은 것은 또한 마땅히 입지 않고 물리치며 아름다운 여색(女色)이나 부드럽고 향기로운 술 같은 것을 또한 마땅히 대하지 않고 끊으시면서 원대한 계책을 도모해가고 눈 앞의 오락은 경계하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의 원수 갚으려는 뜻이 세워지지 않을까 걱정할 것이 없게 되어 이른바 큰 근본이란 것이 이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뜻이 이미 세워지고 나면 현명한 사람을 구득하여 함께 다스려가기를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옛 날 대업을 성취한 임금은 재기(才氣)와 지략이 족히 업적과 공을 세울 수 있어 다른 사람의 협조를 기다릴 것이 없었는데도 반드시 현명한 인재를 구득했던 것은 사세가 서로 필요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던 것인데 구득하지 못해서는 자신을 낮추는 말과 후한 예물로 맞아 오고 이미 구득하고서는 국정을 통틀어 전담시켰기에 쇠퇴한 나라를 일으키고 혼란을 안정시키며 약세를 변화시켜 강해지게 하여 자신의 뜻한 바를 실행하기를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듯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오늘 날 전하께서 현명한 인재를 구득하기를 진실로 이미 간절하게 하셨고 전하를 돕는 신하들이 또한 모두 인망(人望)이 있는 사람들인데도 몇 해 동안에 조정의 기강이 풀려버리고 모든 일들이 번잡스러워져서 회복해 갈 형세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하므로, 신이 항시 괴이하게 여겨 한탄하며 의아해 하였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신임하시는 것이 전일하지 못하고 책임지움이 무겁지 못하며 대우함이 친절하지 못하고 문답하심이 성실하지 못한 탓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돕는 신하들이 문아(文雅)는 넉넉하지만 덕량(德量)이 부족하고 청렴과 근신은 충분하지만 강의(剛毅)가 부족하고 승순(承順)은 잘하지만 광구(匡救)는 부족한 탓이 아니겠습니까? 심상한 예대로 지키기만 하는 사람을 좋아하여 온건해서 임용할 만하다고 여기고, 준엄한 말과 곧은 논의를 하는 선비는 꺼리면서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니 포용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지상(紙上)에 나열되는 문서의 말단에만 마음을 쏟으면서 도리어 임금을 시정하고 일을 바로잡아가는 근본적인 면에는 빠뜨림이 있으며 한갓 성를 쌓고 곡식을 모집하고 하는 작은 일에만 간절하면서 백성을 보호하여 나라가 든든해지게 하는 중요한 일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날은 크게 성취할 때가 아니라 하여 우선 임시 조치만 하며 목전에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랄려고 해서가 아니겠습니까?

?

앞의 말대로라면 잘못이요, 뒤의 말대로라면 돕는 신하들의 과실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백리해(百里奚)우(虞)나라에 있을 때에는 우나라가 망했으나 진(秦)나라에 갔을 적에는 진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는데, 이는 우나라에서는 어리석었고 진나라에서는 지혜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써주고 써주지 않음과 말을 들어주고 말을 들어주지 않은 탓이었을 뿐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결단코 앞으로는 전하께서 이미 구한 현명한 사람에 있어서는 한갓 그의 몸만 써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의 말도 써주고 한갓 말만 써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적도 책임지우면서 날마다 청포(靑浦)에 나아가 시정(時政)의 합당한 방법을 자문(咨問)하고 자주 천장(天章)을 열어놓고 다스리는 도리에 관한 요법(要法)을 조목조목 진달하게 하여 암혈(巖穴)과 초야(草野) 속의 청렴한 명성과 지조가 높은 선비들이 높다란 관(冠)에 위패(委佩)차림으로 모두 조정에 모여들게 하신다면 모두의 정신이 집결되어 잘못되는 계책이 없게 됨으로써 국가 사세의 회복이 십중팔구는 이루어질 것이니, 이른바 급선무도 그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

?그렇게 된다면 와신상담하고 각고면려하는 뜻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게 되고 상로창모(霜露愴慕)의 정이 간절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도 없게 되며,

궁중의 사정(私情) 쓰는 길도 막을 것이 없게 되고 편폐(便嬖)의 잡다한 발동도 방지할 것 없게 될 것이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재질을 다 발휘하지 못한 인재가 없게 되고, 악악(??)하게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 아래에서 자기의 계책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며,

황천(黃泉)에서도 원통함을 씻게 되고 환토(?土)에서도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해소될 것입니다.

용기가 있고도 방법을 알아서 하는데 어찌 고기 놀라듯 하고 새 흩어지듯 함을 걱정할 것 있으며,

백성이 번창하게 되고 나라가 부유해질 것인데 어찌 황방 백최(黃放白催)를 일삼게 되겠습니까?

한 가지의 상(賞)이나 한 가지의 벌도 권면(勸勉)하고 징계하는 것 아님이 없게 될 것인데 크고 작은 기강(紀綱)이 어찌 혹시라도 어지러워지게 되겠습니까.

 장수는 인재 아닌 사람이 없어 변방에는 조두(勺斗)의 경보(警報)도 없어지게 되고 군정(軍政)도 닦아지지 않은 것이 없어 군사들이 모두 용맹스럽게 될 것입니다.

?

내정(內政)이 이미 지극하게 닦아지고 외적(外敵)을 물리치는 일도 또한 잘 거행되어 인심이 기뻐하며 복종하게 되고 하늘의 아름다운 해가 비치게 될 것이니,

요(堯)의 천지와 순(舜)의 시대처럼 막힌 데 없이 청명해져 회복의 공업이 유감없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뜻을 세우고 현명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큰 근본이고 급선무이긴 하지만,

 성찰(省察)과 극치(克治)의 학문이 또한 어찌 그 두 가지를 극진하게 해가는 중요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결단코 지금부터 전하께서 학문하는 공부에 깊이 뜻을 두시어 엄공 인외(嚴恭寅畏)로 수지(守持)해 가고 의리를 강명(講明)하는 것으로 함양(涵養)하여 내면과 외면을 다같이 배양하기를 간단이 없도록 하심으로써 천리(天理)가 항시 존재하도록 하고 인욕(人欲)은 물러나 순종하게 하신다면,그 근본과 급선무에 있어서 시종(始終)이 한결같이 되어 공휴일궤(功虧一?)하게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신이 다시 한 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조정에서 대신(大臣) 두 사람을 명하여 남북의 4도(道)를 체찰(體察)하게 한 것은 곧 성주(成周) 때에 분섬(分陜)한 것과 같은 뜻입니다.

?

신은 바라건대 동남(東南)의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경과 서북(西北)의 함경도와 평안도 사이에 막부(幕府)를 세워 관속(官屬)들을 임명 배치하고서 고을들의 세미(稅米)와 노비(奴婢)의 공포(貢布)를 요량해서 덜어다가 군량을 저축하게 하고, 또 변장(邊將)과 수령의 현부(賢否)를 잘 알게 하여 그로 하여금 후덕하고 신실하여 남을 애호하고 부지런하면서 영민하여 일을 잘 아는 사람을 3∼5명 정도 가려내도록 한 뒤, 도(道)마다 각각 1인씩 배치하고서 군정(軍政)을 전담하는 권한을 부여하여 군기(軍器)를 보수하고 병사를 훈련하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무릇 나라에 이롭고 백성에게 편리한 것과 적에게 위엄을 보이고 변방을 튼튼히 할 수 있는 방책을 모두 편의대로 종사하게 한 다음에 차자(箚子)를 갖추어 주문(奏聞)하게 하고, 간간이 일이 없을 때에 왕래하여 조회(朝會)하며 친히 탑전(榻前)에서 아뢰게 하되 세월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지 말고 기어코 일이 정리되도록 한다면 특이한 인재들이 역량을 발휘하게 되어 변방의 방비가 거의 허술함이 없게 될 것이요,

 먼 명 조정의 병력을 빌려올 필요없이 조정의 남쪽과 북쪽에 대한 근심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일개 한미(寒微)하고 소원한 사람이지만 오직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할 줄만 알고, 세상 따라 부침하며 구차하게 한 시대에 용납받는 짓을 하지는 못합니다.

이 번에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시는 날을 당해 삼가 애통하고 측은하게 여기시는 분부를 받들어 보고 충성이 마음에 격동되어 헤아릴 줄을 모르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1601년 5월 21일 행 부호군(行 副護軍) 홍가신(洪可臣)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호종한 여러 신하들과 역전한 장사(將士)들을 녹훈하는 일에 대해서는, 원훈 대신들이 이미 사퇴하였으니,

역적을 토멸(討滅)한 공신을 이미 등제하여 계하한 다음 그대로 국(局)을 설치하였으나 독자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사리에 매우 어긋납니다.

더구나 호종하여 익운(翊運)한 막대한 공도 이처럼 때가 아니라 하여 정지하였으니,

구구한 잗단 노고는 본래 기록할 실적도 없는데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이 도리어 위의 두 가지 공보다 앞에 있으니 더욱 미안합니다.

응당 행해야 할 절목을 아직 다 거행하지 않았으니, 현재로서는 이르러 정파하여도 실로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자께서는 도감의 설치를 혁파하고 신을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하였다.


1608년 7월 7일 영원군(寧原君) 홍가신(洪可臣)이 광종(광해군 묘호 추상)에게 상소하기를

 “신은 듣건대 임금은 좋아하고 미워함을 잘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정직한 것을 좋아하면 정직한 신하가 나와서 등용되어 상하가 서로 규간하여, 임금을 바로잡고 일을 바루는 공효가 마침내 3태성(三台星)인 태계(泰階)가 제자리를 잡아 4시(四時)의 기후인 옥촉(玉燭)이 조화로운 데에 이를 것이요,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면 아첨하는 신하가 나와서 등용되어 상하가 서로 속여 곧은 말이 들리지 아니하므로써,

 마침내 임금은 위에서 교만하고 신하는 아래에서 아첨함에 이르러 나랏일이 날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처럼 좋아하고 미워함을 잘 살피느냐 살피지 아니하느냐에 따라 정직과 아첨이 각각 그 유로써 응하는 것이 북소리나 그림자보다도 더 빠른 것인데,

신은 감히 오늘날 전하의 마음이 정직한 것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에 정경세(鄭經世)가 상소로 시사(時事)를 말하면서 꺼려야 할 것을 망령되이 범하자,

전하께서 그를 무부 무군(無父 無君)으로 지목하셨습니다.

신은 아직 그 상소를 보지 못하여 이른바 선왕조(先王朝)의 잘못된 정사를 지적하였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경세가 신하인데, 어찌 감히 선왕의 과오를 드러내는 데에 뜻을 두어 스스로 정직하다는 평가를 들으려 하였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임금의 과실을 미연(未然)에 바로잡아드리는 데에 다급하여 우선 전하께서 미처 보고 듣지 못하신 것을 들어 경계하면서 그 것이 침범한 것이 되고 곧음을 구한 것이 될 것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데 지나지 않으니 경세와 같은 사람은 바로 이른바 충성에 지나친 자입니다.


그러나 일을 말하는 신하에 대해서는 말이 혹 맞지 않더라도 다만 마땅히 불문에 붙여두어야 합니다.
 어찌 그와 더불어 시비를 다투고 곡직을 따져 능히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에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리어 이처럼 얕디 얕아서야 되겠습니까.
말할 책임을 진 신하가 전하께서 이 사람에게 몹시 진노하신 것을 한 번 보고는 바로 아첨할 계책을 짜내 인용하지 않아야 할 경전(經傳)의 말을 망령되이 인용하여 부회(傅會)하니,
이는 곧 나라를 망치는 말로서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깊이 증오하여 철저하게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날에 한 문제(漢 文帝)는 황후의 아우 두광국(竇廣國)을 어질다고 여겨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고자 하다가 황후의 척속이라는 혐의로써 마침내 신도가(申屠嘉)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명제(明帝) 때에는 마원(馬援)이 황후의 아버지인 까닭으로 운대(雲臺)의 반열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재략과 공명은 단지 자질구레한 인아(姻?)의 무리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두 황제의 위엄과 세력이 능히 그들을 존숭하고 표창하여 등용할 수 없지는 않았습니다.
 두려운 것은 천하의 공론이었을 뿐입니다.
 이 것이 어찌 어진이를 등용함에 일정한 규칙없이 하지 못하여 그러하였겠습니까.
말씀을 드리다가 꺼려야 할 것을 범한 사람은 대부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가 겨우 사형을 모면하고, 소인으로서 아첨하는 사람은 의기 양양하게 스스로 계획대로 되었다고 여기니, 전하의 좋아하고 미워하심이 어떠한지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정경세(鄭經世) 등에 대해서 평소에 그 얼굴도 모르니,
감히 그를 위하여 해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석한 것은 바야흐로 전하께서 다스림을 구하는 날에 간단 명료하지 못한 말씀을 잡다하게 올렸다가 성명(聖明)의 시대에 죄를 얻어 초야(草野)에서 듣는 사람들을 거듭 놀라게 한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나라를 통치하신 40여년 동안에 일찍이 일을 말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조정의 선비로서 완고하고 우둔하여 조급하게 승진하려는 사람이 스스로 임명을 받고 못받는 즈음에 망령되이 임금의 뜻을 헤아려 혹 이러니저러니 하는 바가 있으면 그 말을 들은 사람도 살펴보지 아니하고 역시 그렇다고 하여 수십 년 이래로 분경(奔競)만을 일삼고 왕래하는 것을 시급하게 여겨왔습니다. 이에 선비의 절개는 땅을 쓸어낸 것처럼 없어졌습니다.
지난 번에 권세를 가진 간신(奸臣)이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힐 적에 이끗을 탐하여 염치도 없는 무리들이 조정에 소굴을 파고 점거하여 권세를 가진 간신이 있는 줄만 알고 군부(君父)가 있는 줄은 몰라 마침내 임금의 세력이 날로 위에서 외로워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동탁(童倬)과 조조(曹操)의 난리가 장차 한 달도 안 되어 닥치게 되었으니,
아첨하는 무리가 나라를 해치는 것이 대단합니다.
선유(先儒)의 말에 이르기를
 ‘평상시에 직언하고 과감하게 간하는 선비가 없으면 환란에 임하여 절의에 죽는 신하가 없는 것이다.
’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고 영특하여 학문이 뛰어나시니 시강(侍講)하는 신하들이 그 바탕과 노력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임금의 학문은 애당초 장구(章句)를 강설하는 사이에 있을 뿐이 아닙니다.
귀로 듣고 마음에 간직하여 이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데 베풀어 사람을 등용하고 버리는 조치가 하나도 사람의 마음에 합하지 아니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천하의 인심이 조정 위로 확 모여들어 조정의 기력이 쉽게 고무되어 풍교(風敎)가 일어남을 당장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마음을 가지고 논한다면 언로(言路)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그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는 것은 도심(道心)이 은미하여 천리(天理)에서 발로된 것이요, 마침내 능히 통쾌하게 용서해 주지 못하고 혹은 구속하여 수감하기도 하고 혹은 삭직하고야 마는 것은 인심(人心)이 위태로워 사욕(私欲)에 떨어진 것입니다.
 혼란한 세상 혼주(昏主)의 시대에 있어서는 말한 사람의 죄를 말감(末減)하는 것은 또한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찌 전하처럼 성명(聖明)하고 포용력이 있으신 분이 대번에 이 정도로 만족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의 병통 가운데 스스로는 넓은 체하면서 남은 좁게 여기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남의 간언을 포용하고 남의 착한 말을 받아들이려고 마음먹어 비록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을지라도 포용하고 인내하여 절대로 갑자기 말과 얼굴빛에 나타내어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그 깊이를 엿보아 헤아리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것이 인심이 흩어지고 모이는 기틀이며 천명이 떠나가고 이어지는 갈림길이니, 선왕의 왕업을 계승하여 정치에 임하는 초기에 제일가는 터전이며 근본입니다.
말을 다하는 사람은 죄를 얻고 아첨하는 사람이 뜻을 얻는다면 비록 요순(堯舜)이 위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아첨꾼을 멀리하라는 것으로써 안자(顔子)의 나라 다스리는 데 대한 질문에 답하셨고 순(舜)임금이 간악한 사람을 거절하는 것으로써 오랑캐를 이끌어 복종시키는 근본을 삼으셨고 이윤(伊尹)이 그 임금에게 또한 곧은 말은 마음에 거슬리고 아첨하는 말은 뜻에 맞는다는 경계로써 간곡하게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 어찌 분잡하고 동요되는 가운데 덕을 견고하게 지키기는 어렵고 마음을 잃어버리기는 쉽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외롭게 슬퍼하시는 중에 계시니 착한 생각이 항상 보존되어 있고 사사로운 뜻이 싹트지 아니하여 마치 물이 파도치지 아니하고 거울이 먼지 끼지 아니한 상태와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말씀을 드린 사람들이 식견이 미치지 못하고 심기가 안정되지 못하여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있으나 그 내용이 도리어 황잡(荒雜)하여 떳떳하지 못한 데로 흘러들어가는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다만 일의 체통만 손상시키고 전하의 묻기 좋아하고 선(善)을 즐거워하는 정성에는 도움이 없어 전하의 마음속에 간직된 것이 가끔 외부에 새나가도록 하여 도량이 넓지 못한 뜻을 허다히 보여주게끔 하였습니다.
 한성과 지방의 인심이 이에 혹 해체됨에 이르기도 하였으니, 이 것이 비록 신하의 죄라 하더라도 또한 어찌 후일의 끝없는 걱정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국가에 충성할 생각이 있는 모든 사람은 나의 결점을 책망하는 데에 힘쓰도록 하라.
그러면 일도 성공할 수 있고 적도 섬멸할 수 있어 공적을 발돋움하고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훌륭한 말입니다.
백세(百世)의 뒤에서 그 마음의 도량이 넓고 크며 규모가 원대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재상으로서 국가의 큰 임무를 담당한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더구나 천승(千乘)의 나라에 크게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사람이 누군들 과오가 없겠습니까.
그것을 고치는 것이 귀중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늘 날 학문하시는 데 있어 마땅히 여기에 힘을 쓰시어 광명하고 정대한 마음이 불길이 타오르고 샘물이 솟아나듯 끊임없이 확충되도록 하시고, 사사롭고 협소한 폐단이 얼음이 녹고 언 것이 풀리듯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하시어,그 표준을 세워 왕도(王道)가 탕탕(蕩蕩)한 데에 이르기를 기약하소서.
그러면 3왕(三王)이 4왕(四王)이 될 수도 있고 5제(五帝)가 6제(六帝)가 될 수도 있어 해와 달처럼 밝은 광명을 만물이 모두 우러러볼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이라 두서도 조리도 없으니, 만약 전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그 참람됨을 용서해 주신다면 신의 나라에 대한 보답이 끝날 것입니다.”하였다.

1611년 7월 25일 치사한 영원군(寧原君) 홍가신(洪可臣)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저보(邸報)를 보건대 그 안에 충훈부의 계사로 인해 녹을 주라는 은명(恩命)이 있었습니다.

 조정의 사체에 있어서 비록 노인을 우대하고 공로를 보상하는 점에 있어서는 잘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녹이라는 것은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신이 시골에 물러나 있으면서 일도 없이 나라의 늠록만을 허비한다면 후세에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국록만 받아 먹었다는 비난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신(老臣)이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오로지 전하께서 성량(聖量)을 넓히시어 간언을 따라 충고를 어기지 마시고 좋아하고 미워함을 뭇 사람과 더불어 함께 하시고 학문을 향상시키고 정사를 닦아 인심을 수습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야말로 오늘날의 근본이 되는 일입니다.

 충훈부의 계사와 같은 것은 단지 절목 안의 일일 뿐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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