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웅천향교 하마비
현재의 웅천에는 향교는 없지만 옛 기록에는 향교가 있었다.
향교를 세울 때 하마비를 세우기 마련인데 처음의 하마비는 기록이 없지만
정조때 향교의 기록에는 하마비가 있다.
그러나 향교는 폐교 되고 하마비는 어디론가 가고 없어졌는데
찾아보니 서울에 있다.
서울의 하마비를 정리를 하던 중 검색에서 발견 되어 확인을 하니 웅천 향교의 하마비 이었고
두번 째 방문은 그 곳을 지나가기에 다시 보고 뒷면을 확인을 하니 글이 보였다.
세번 째는 탑본을 하러 갔다 보고 온 하마비이다.
국내에 남아 있는 하마비 중에 인명에 대한 명문이 있거나 아니면
명문이 있는 하마비는 정산향교 하마비와 광양향교 하마비 인데
웅천 향교 하마비는 국내에서 제일 많은 명문이 남아 있는 하마비 이고
설립년도가 정확한 몇 안되는 하마비이다.
그리고 정약용과 관계되는 인물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즉 다산의 종조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주 정씨에서 관심을 가질만 한 하마비 인것이다,
다산의 종조부의 이름이 정지열(丁志說) 이다.
마지막으로 이 하마비는 원래의 자리에 갔으면 한다.........
하마비가 있는 지금의 자리는 삼성출판박물관 앞에 있지만 원래의 위치는 웅천향교로 전하고 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웅천향교는 존재하였지만 1915년에 폐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성출판박물관에 있는 하마비는 누군가의 기중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 온 것으로 확인된다.
서울의 하마비는 답사를 가서 다 확인하였다고 생각했는데, 마무리 작업 중 발견한 하마비이다.
위치를 몰라 확인 차 상경하여 보았는데 비의 뒷면에 많은 글이 새겨져 있어 사진 촬영만 하고 왔다.
삼성출판박물관 측에 허락 받고 상경하여 탁본을 하고 글은 고전번역원의 도움을 받았다.
탁본 내용은 아래와 같다.
[移校之議久矣 歲舍丁酉任侯希華莅職遂
因士林累禀棠營牧 啓蒙允 旋報蓮營
----중략
未迄工 又於己亥仲秋 丁侯志說 繼莅銳意
聖門添材沽瓦 巨功告畢 末竪下馬碑 爲壽
前後大蹟焉
都監幼學禹文聖 謹識
別有司 幼學 李蒙聘
色鄕吏 朱离塢
庚子三月日 立
향교를 옮기려는 논의를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정유년에 임희화(任希華)가 직임을 맡았을 때 마침내 사림들이 누차 당영목(棠營牧)에게 보고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곧바로 연영(蓮營 막부의 별칭)에 알려 득림(得林)이 땅을 골라서 비로소 초가을에 공사를 시작하고 다음해 중춘에 또 이방조(李邦祚)가 와서 한결같이 재용을 보충하고 보태었으나 일은 산처럼 많은데 힘은 약하여 아직도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 또 기해년 중추에 정지열(丁志說)이 굳은 마음으로 직임을 이어 맡았는데 성문(聖門)에서 재목을 보태고 기와를 사서 큰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끝에는 하마비를 세우고 전후 사적이 오래 전해지도록 하였다.
도감유학 유문성 삼가 짓고,
별유사 유학 이몽빙. 색향리 주리오.]
『하마비를 찾아서 2』에서는 세운 시기를 추정할 수 없다고 글을 썼지만 위의 내용에 첨부된 인명에서 중요한 자료를 얻었다.
이방조, 정지열이 웅천현감이었다는 기록이 정조실록에 있으므로, 하마비를 세운 시기를 추정보다는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된다.
1777년에 이방조가 웅천현감으로, 1778년에 정지열이 웅천현감이 되었다는 기록에 의거, 하마비에 새겨진 경자년(庚子年)은 1780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방조(李邦祚)와 정지열(丁志說)에 대한 많은 자료가 부족한 것이 많이 아쉽지만 위의 두 분에 대한 기록이 있어 하마비를 세운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이므로 기록이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다만 정지열은 나주정씨 족보를 확인하여 보니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숙조부(叔祖父)로 확인되어 다산 선생과 관계되는 인물로 나와서 중요한 자료를 얻었다.
처음 탁본을 하고 나서 한문을 어떻게 번역을 하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탁본 중 어느 분이 지나가면서 근처에 있는 고전번역원에 의뢰를 하여 보라는 말에 의뢰를 하여 비에 새겨진 내용에 관한 번역본을 얻었다.
탁본을 허락한 삼성출판박물관과 번역을 하여 주신 고전번역원에 지면을 빌려서 고마움을 전한다.
하마비의 모양은 위부분이 약간 둥근 장방형이고 각자는 ‘대소인원하마(大小人貟下馬)’라 되어 있다. 비 앞에는 하마비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있는 조그마한 푯말이 있다.
처음에는 웅천향교의 하마비가 원래의 위치가 아니고 멀리 서울에 있어 의아했지만 하마비가 있었기에 웅천향교에 하마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렇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에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원래 자리에 있어야 더 빛난다고 생각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