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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부처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정전을 실천하면 다들 여래가 될 수있다고 대산종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조석으로 외우고 실천하면 누구나 여래가 될 수 있다고 하셨고요.) 대종사님은 정전을 선약(仙藥)-먹기만 하면 모든 병이 치료되는 약-이라 표현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병을 치료하고, 복과 혜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 우리 교법이고 정전입니다.
2. 정전의 구성
정전은 총서편, 교의편, 수행편으로 나뉩니다. 총서편은 방향이고, 교의편은 설계도입니다. 방향과 설계도에 맞게 실천을 해야 합니다. 수행편은 실천편, 실행편입니다.
(1).총서편
총서편에는 개교의 동기ㅡ원불교를 연 목적과 동기ㅡ가 나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발전함으로써 물질문명의 노예로 살아가니,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 즉 수행으로서
정신을 개벽하여 일체생령을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법은 삼학팔조 사은사요로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이렇게 원불교를 열었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2).교의편
이 신앙과 수행하는 법이 교의편에 나옵니다.
교의편은 일원상, 사은, 사요, 삼학, 팔조,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 사대 강령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사은사요는 신앙(인생의 요도), 삼학팔조는 수행(공부의 요도)에 해당합니다.
일원상의 위력적 측면, 일원상의 타력적 측면, 일원의 나타남이 사은입니다. 일원의 위력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지요. 우주가 천지(하늘, 땅), 부모, 동포(사농공상금수초목) 그리고 이것을 받쳐 주는 법률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①천지_하늘의 공기 땅의 바탕에서 살고요.
②동포_여러분 저녁밥 으로 고기 먹고, 나물먹고요. 앉아있는 의자를 사농공상이 만들었지요.
③부모_육신의 부모와 정신의 부모가 없으면, 여러분은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람답게 크지도 못하고. 사람답게 제대로 배우지를 못해서 환영받고 살기가 쉽지 않지요.
④법률_법이 없으면 세상은 금수의 세계와 같다고 합니다. 짐승 같은 세상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큰 은혜 속에서 삽니다. 천지부모동포법률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예전에 LA에 전기가 나간적이 있지요. 한국사람들이 슈퍼를 운영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슈퍼를 털어서 쓰셨지요. 법률은 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이라고 해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야할 법을 성자가 내놓으셨습니다. 성자가 법을 내놓지 않았다면, 우리는 약육강식으로 개돼지처럼 살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국제법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국제질서는 약육강식이지요. 자기는 핵폭탄가지고 있으면서, 남들보고는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강자들이 솔선하지 않으면서 약자들에게 지키라니까 불만이 많습니다.
일원상에 세 가지의 속성이 있습니다. 공(空, 비었음), 원(圓, 두렷이 밝음), 정(正)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공원정을 찾기 위해서 살고있습니다. 왜? 공원정이 본래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깊숙한 마음 속은 본래 비어있습니다(空). 본래 원만구족이라 해서, 지극히 밝은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圓). 비우면 밝아집니다. 그리고 밝아지면 바르게 됩니다(正).
갓 태어난 아이는, 그야말로 공원정입니다. 몸뚱아리도 공원정이에요. 둥글둥글합니다. 호흡도 단전호흡이라 할 것도 없고 온몸으로 호흡이 다 됩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호흡이 단전부터 점점 오므라들어요. 어린이 단전은 통통한데요, 나이 먹고 욕심이 많아지면 단전부터 오므라듭니다. 오므라들면 혈관이 압박을 받아, 상기 되어서 화가 올라옵니다.
여러분도 공원정으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욕심이 끼어들고 우리가 관리를 못하면서, 마음의 공원정도 잊어버리고 육신의 공원정도 잊어버려요. 수행은 본래 갖추어진 우리의 기질(공원정)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영육쌍전입니다. 대종사님은 단전에 솥뚜껑을 올려놓은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마음공부라고 하니까, 일어난 마음만을 마음이라 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여러분 마음을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짜증나지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행복해지지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없는 데서 오는 동시에 수많은 연관선상에서 옵니다. 몸이 길들여진 것에서, 자기가 관념 지은데서, 습관에서, 마음이 가려진데서도요. 마음공부한다는 것은 심신공부라 해도 되고요, 성품을 깨치고 정신을 수양하고 마음을 대조하고 뜻을 바로 세워서 육근을 온전하게 갖추어서서 온갖 경계(육경)를 만나 식이 일어날 때 마음을 거기에 속지 않는 것을 마음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경계에 마음을 대조하는 것만이 마음공부가 아니에요. 성품을 깨쳐야만, 정신을 수양해야, 마음을 경계 속에 대조해야, 공원정을 회복하겠다는 데 뜻이 세워져야 마음공부입니다. 본래의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육신을 회복하겠다는 것이 참 마음공부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육신까지도 본래의 육신자리,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육신을 회복하자는 것이 우리의 수행, 마음공부입니다.
신앙과 수행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입니다. 두 가지를 사대강령으로 했습니다. 사대강령을 요약하면 무아봉공입니다. 봉공을 하려면, 무아가 되어야 하는데, 무아가 안 되면 봉공이 되겠어요? 무아가 되지 않으면 봉공이 되다가 뿔이나요. 도망가요. 원불교 서울교구 청년회 회장만 하고나면 도망가요. 봉공하고 나서 사라져버려요. 왜? 무아를 모르니까요. 나라는 존재가 공입니다. 무아잖아요. 없는 나가 참 나요 그 참 나가 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무아봉공인데, 있는 나가, 잘난 나가, 큰 마음 먹어서, 하라고 하니까, 복을 받는다니까, 공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 도망가버리지요. 출발이 잘못되었습니다.
(3). 수행편
오늘부터 할 것이 수행편입니다. 원불교 수행편은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바탕한 훈련(즉 수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종교에 “How 어떻게”가 빠져있습니다. (원리도 물론 많이 빠져있습니다.) 미래시대의 종교는 분명한 원리가 밝혀져야하고요. 그 원리에 바탕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대종사님은 그 어떻게를 수행편에 제시해주셨습니다.
수행편을 하기 전에, 아까 말씀드린 기본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수행편은 개교의 동기를 실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원불교인은 어디가서나 도움을 받고, 주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내가 사은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잖아요. 나라는 존재는 도움을 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은혜를 줄 때 내 마음이 가장 온전한 마음이 되고, 가장 바른 마음이 됩니다. 돈 벌었으니까, 좋은 대학 나왔으니까, 여유가 있으니까가 아니라, 많고 적음을 떠나서 나를 비웠을 때, 내 마음이 가장 행복합니다. 비우기 위해서 기도하고 선하고 염불하고 수양하고요. 비우면 정말 행복해요. 사람들이 비움의 행복에 대해 잘 모르니까, 다른 행복을 찾습니다.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가지려하고요. 기본적인 의식주보다 더 많은 요구를 하고요 그걸 가지면, 행복 호르몬이 나와요.
비웠을 때 나오는 행복호르몬은 영원히 나오지만 외형적인 의식주를 통해서 나오는 호르몬은 잠깐 나오고 허망해요. 더 강한 자극이 계속 필요합니다. 끝없는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은 비웠을 때, 밝혔을 때, 바를 때의 행복이 아니라 외적인 의식주, 명예, 쾌락을 통해서 행복호르몬을 발생시키기를 원합니다. 내 안의 공원정이 회복이 안 되면 자꾸 외적인 걸 찾아요. 다른 사람, 외적 물건을 통해서 내 마음이 좌지우지 됩니다. 원리를 모르면 저도 그랬을 것입니다. 행복은 좋은 집, 좋은 직장, 좋은 차, 예쁜 여자, 토끼 같은 자식 같은 것이 행복인 줄 알았을 거예요. 그러나 사실은, 공원정이 내 본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 본래 마음이 공원정입니다.
욕심이 많으니까, 비우기는커녕 번뇌 덩어리요, 요란함이 꽉 찹니다. 다음에 저거 사야지, 사야지. 범부들은 계속 번뇌거리를 저장해요. 경계따라 있어질 때, 저장한 것이 나옵니다. 계속 나와요.
육근이 육경을 만나서 육식을 일으킵니다. 즉 내가 어떤 대상을 만나서, 어떤 식을 일으켜요. 육근도 무아요. 육경도 무아입니다. 단지 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육근도 나요, 육경도 나요, 식은 실체가 있는 식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무도 없는 무아인 육근이, 무아인 육법을 만납니다. 여기서 법은 대상을 말합니다. 육법은 모든 경계의 대상입니다. 육법은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도 변하는 것이고, 저것도 변하는 것이니까요. 100년만 지나보세요. 여기 있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육근도 없고 육법도 없고, 단지 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자꾸 있다고 생각해요. 강연 좀 하라고 하면, “저는 강연 원래 잘 못해요”라 합니다. 원래 못한대요. 원래 그렇습니까? 여러분의 원래는 공이요 원이요 정입니다. 공원정이 여러분의 원래입니다. 여러분은 본래 부처라는 표현이 이것입니다. 공원정의 마음이 부처(심즉불)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심지는 원래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이 없건마는”이라 했고, 그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라 하셨습니다. 요란함이 본래 있는 것이라면 “없애야합니다”, 요란함이 본래 없기 때문에 “없게 하면” 됩니다. 더 들어가면, “없어지게” 됩니다.
마음의 원리를 확실히 알면 훨씬 더 수월합니다. 마음의 원리를 알면 자기학대를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원리를 안다는 말은 공원정을, 대소유무를, 삼세인과를 아는 것입니다.
원불교는 관념의 종교가 아니라, 학술공부가 아니라 마음공부입니다. 원불교 공부를 학술공부로 생각하면, 지적호기심으로 달라들어요. 자기 생활에 도움이 안됩니다. 원리를 아는 공부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학자가 성불했다는 소리 저는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학자가 학(學)을 뛰어넘어야 성불합니다. 학(學) 속에 묻혀있으면 성불 할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해야 성불합니다. 정시수행의 핵심은 수양과 연구입니다. 동시수행의 핵심은 취사, 즉 실행입니다.
우리는 정시에서 배워서 동시에 써먹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종교를 보면요. 일생동안 수양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계를 끊어버리고 토굴에 들어갔다가 병이 나요. 정말 그 구도심과 열정은 있는데, 스승을 못 만나고 원리를 모르니까, 수양만 하다가 요절해버려요.
수행편은 취사가 핵심입니다. 불법을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일심으로 보은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보은입니다. 교의편에는 사은사요 신앙부터 나왔거든요. 수행편은 삼학부터 나와요.
일상수행의 요법 이제 들어가네요.
일상이라는 것인 “늘상”, “날마다”입니다. 어쩔 때는 조석으로, 경계를 대할 때 마다, 시시로 때때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왜? 마음은 시공간을 넘어서서 항상 나와 함께 있거든요. 지금 제 말을 듣는 것이 마음입니다. 별 마음이 다 있을 것입니다. 오롯이 들을 수도 있고, 딴 생각할 수도 있지요.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영생의 동반자입니다. 그래서 무시선이라 하고, 처처불상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마음공부는 언제어디서나 모든 것을 하는데 쓰이는 공부입니다. 연구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도 마음이 들어야합니다. “일상수행”은 “일상으로 수행한다” 즉, 마음공부한다는 말입니다. 확장해서 말하자면 공부의 요도와 인생의 요도, 즉 삼학팔조 사은사요를 실행한다는 말입니다.
“요법(要法)”은 요긴한 법이라는 말입니다. 삼학팔조 사은사요를 강령지어서 놨어요. 예전에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구성심조항(마음을 반성할 아홉가지 조항)이라 했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을 실천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고 여래가 될 수 있습니다.
원불교 수행은 마음공부인 동시에 훈련입니다. 원불교 수행은 공 자리를 챙기는 것입니다. 무념도 챙기는 유념공부입니다. 나오는 마음뿐만 아니라 무념을 챙기는 것까지가 원불교 공부입니다. 그 챙기는 공부는 반복 훈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참 어렵지요.
일상수행의 요법이 1조부터 9조까지 있어요. 어떻게 해야 실천이 되지요? 외우면 실천 되나요? 원리를 알면 되나요? 뭐 해야 하지요? 챙기는 반복이 필요합니다. 챙기는 반복이 훈련입니다. 훈련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훈련은 마음의 원리를 알아서 그 마음을 깨쳐서 지키고 쓰는 것이고, 나아가서 몸까지 훈련하는 것입니다. 영육쌍전입니다.
대종사님은 몸이 만사만리의 근본이라 표현하기도 했고, 업덩어리라 하기도 했습니다. 저 혼자 심신작용에 따라, 신구의 삼업에 따라 그대로 받은 것이 몸입니다. 동시에, 제일 철없는 것이 몸입니다. 원불교 수행은 몸과의 싸움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법위등급에서 법위의 표준을 말하자면, 특신급은 심신귀의(心身歸依), 법마상정급은 심신교전(交戰), 법강항마위는 심신조복(調伏), 출가위는 심신출가, 여래위는 심신자유입니다. 여기서 몸은 철없는 요구를 하는 몸을 말합니다. 몸이 끝없는 요구를 해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배가 나온 사람은 훈련을 잘 못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배가 나온 것은 대종사님, 경산종법사님이 동글동글한 것과 달라요. 상중하 단전이 다 소통이 되어서, 기질변화가 되어서 동글동글한 것은 제대로 된것입니다. 기질변화가 되면, 목소리까지 바뀌거든요. 보통은 그렇지 않지요.) 제일 쉬운 것 같은데, 제일 어려운 몸과의 싸움에서 진 것입니다.
원불교의 훈련은 마음의 변화 뿐만아니라 기질변화까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라합니다. 먹는 것, 자는 것 하나 제대로 조절 못하는데 무슨 마음공부입니까. 방청소도 못하면서 무슨 마음공부입니까. 그래서 대종사님은 동정일여로, 자타력병진으로 훈련법을 내주셨습니
원기 99.01.15. [정전 제 3 수행편 제1장 일상수행의 요법]_ 김제원 교무님 설법.hwp
다.
대종사님 훈련법은 동정간에 끊임없이 마음의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동시가 특히 중요합니다. 정시(靜時)수행은 동시(動時)수행을 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전산님이 출가여행 강연 때 정(靜)할 때 정기훈련의 중요성이 20이라면, 동할 때 상시훈련의 중요성은 80이라 하셨습니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초입자는 정기훈련이 중요합니다.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의 비중이 50대 50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전산님 말이 맞습니다.) 정기훈련(20)을 아무리 잘했어도, 상시훈련(80)을 잘 못하면 20점이니까 과락이라고 전산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상시훈련은 상시응용주의사항과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으로 나뉘는데, 그 둘은 90대 10입니다. 아니, 교당이 10도 안될걸요. 자력으로 하는 상시응용주의사항이 90 이상입니다. 정시보다는 동시가 중요하고, 동시에서도 교당보다는 가정/직장/사회에서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취사 위주의 상시응용주의사항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1조입니다.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ㅡ이것이 비로소 원불교의 삼학수행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 1조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는
상시응용주의 사항 1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의 온전에 대한 것입니다.
마음을 “심지”라고 표현했는데, 심전(心田), 심인(心印), 일원상, 성품, 본래 마음자리, 한마음 나오기 이전 자리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은 공원정에서 공입니다. 온전함, 여유, 맑음입니다. 마음은 본래는 요란함이 없습니다. 무생법인, 무멸법인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무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요란함이 본래 있는 줄 알아요. “원래 강연 못한다”고 말합니다. 원래 강연 못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어요. 단련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본래 심지는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어요. 육조대사는 문자를 몰라도 깨치셨잖아요. 본래 어리석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남녀노소 선악귀천을 막론하고 평등합니다. “저는 원래 이렇게 생각이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쪽으로 경계따라 있어지게 본인이 만들었습니다.
경계따라 있어지게 만든 것을 “능이성(能以成)”이라 하고, “자재(自在)”라 합니다. 본래는 요란함이 없는데, 갖고 싶은 물건이 보이거나 꼴보기 싫은 사람이 나타나거나 그러한 경계를 대하면 자동으로 있어지게 됩니다. 마음은 없으면서 있어지는 것이고, 또 없어질 수도 있어요. 많은 사람들은 절대 안 없어진다고 하지만 아니예요. 미운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덜 미워지고요. 단련을 하면 마음이 그렇게 됩니다. 제가 수색대에서 훈련을 심하게 받고 나서 첫 휴가를 나오니까, 누구랑 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본래 그렇지 않은데, 훈련을 하면 그렇게 달라집니다.
경계를 따라 자동으로 있어진다는 말이 무척 중요합니다. 탐심, 진심, 나태심이 날 때, 수행하는 사람들이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요”라고 말하곤 하는데 잘못된 말입니다. 있어지는 것은 오토입니다. 감정의 희로애락애오욕은 자기도 모르게 나옵니다. 문제는 있어지는 게 아니라 내지 않는 것입니다. 계문에 탐/진/치심이 나지 않게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탐/진/치심을 “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사람은 다 탐/진/치심이 나게 되어있어요. 그렇지만 탐심이 나는 것과 탐심을 내는 것은 다릅니다. 있어지는 것을 “공부가 부족해서”, “깨치지 못해서”, “중생이라서” 있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학하게 되어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학대해요.
소(小) 자리는 있어지는 거예요. 마음을 왜 땅이라 했느냐. 땅에서 이것저것 나잖아요. 비옥한 땅 일수록 곡식도 잘 자라고, 잡초도 잘 납니다. 수행한다는 사람들이 마음의 원리를 모르면 밭에다가 연탄재를 뿌려요. 이것이 마음공부인줄알아요.
경계에 마음이 안 일어나면 죽었거나, 감정이 메마른 것입니다. 살아있는 영혼은 반드시 경계따라 감정이 있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감정이 있어지는데 사람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습관, 업력, 지혜 따라 달라요. 그래서 평상시에 ‘없는 자리(진공)’를 잘 단련하는 것과 불필요한 것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이 있어지면 돌로 누르려합니다. 그러면 풀이 돌을 피해서 옆으로 자랍니다. 있어지는 마음을 누를 필요는 없어요. 있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있어지는 것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선을 하거나, 훈련을 하거나, 경전을 공부해도 전생에 자기가 닦은 바까지는 빨리 갑니다. 전생에 자기가 닦은 바에서 올라가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중근병에 걸립니다. 수행을 하다가 힘들면, 전생에 했던 데가 끝나고 새로 맞이하는 것이 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묵힌 밭을 다시 경작하는 것은 쉽지만, 밭을 새로 만드는 건 얼마나 어렵겠어요. 중근을 넘으려먼 신(信)도 있어야하지만, 이러한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있어질 때, 있어지는 것이 전생에 닦은 바에 따라 사람마다 달라지고, 또 이생에서 어떻게 몸을 길들여놨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몸 관리를 안해도 번뇌가 많아집니다. 번뇌가 많은 것은 믿음이 안 서서 그렇기도 합니다. 믿음만 서버려도, 정(定)해집니다. 정(定)해지면 정(靜)해집니다. 번뇌의 70프로가 사라집니다. 욕심이 많아도 번뇌가 많습니다. 기타, 볼링, 스쿠버다이빙ㅡ 다 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취사선택을 해야하잖아요. 내 목표에 맞게요.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 자성의 정을 세우자”
여기서 주목할 것이 “그”이고요, 앞 문장 “있어지나니,” 끝의 쉼표입니다.
앞 문장(“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까지가 마음의 원리, 진공묘유의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어떻게 하냐하면요, 저녁에 일기 쓰면서 오늘 낮의 요란함을 공부하려해요. 에너지 효율로 보면, 요란함을 만나기 전에 그 요란함을 대처하는 것이 좋습니다. 요란하게 할 사람을 만날 것 같으면, 마음을 먼저 챙기세요. 법신불 사은님께 기도해요. “이 사람 만나면 내가 요란해질 것 같은데 하여간 마음 최대한 챙겨보겠습니다.” 그러면 요란함이 훨씬 적어집니다.
그 요란함을 당했을 때는, 그 경계에서는 당처불공입니다. 경계는 연(緣)입니다. 경계는 원인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을 원인으로 생각합니다. “너 때문이다” “회사 때문이다”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은 대상일 뿐입니다. 내 마음의 크기에 따라 연을 선연으로, 악연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연을 사은으로 보아야 맞습니다.
마음공부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정(靜)시에 절에 가서 기도하고 법회를 봅니다. 그렇지만 실제 경계에 가서 요란함이 날 때는 어떻게 할 줄을 몰라요. 경계 따라 마음이 있어지는 것과 있어지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가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있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화가 날 때는 화가 납니다. 그러나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이 다르고요, 화를 내는 처리시간이나 화를 방법이 다릅니다. 원불교인은 화가 나지 않는 돌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화는 나지만, 문제는 그 화를 얼마나 냈는냐 어떻게 처리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가 중요합니다. 경계 전에 미리 정시 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경계 후의 참회대조반성공부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경계를 당했을 때의 그 순간 나의 마음공부가 더 중요합니다. 경계 전에 미리미리 염불하고 좌선하는 것은 경계를 당해서 쓰자는 것이고, 경계 후에 참회 대조하는 것 또한 다음에 그 경계가 다시 왔을 때 처리를 잘하기 위한 것입니다.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없게 하는 것입니다. 본래 있었다면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본래 없었기 때문에 없게 하는 것입니다. 없게 하는 방법은 자성의 정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자성의 정과 그냥 정은 달라요. 혜능의 방법과 신수(神秀)의 방법이 다릅니다. (혜능과 신수는 5조 홍인의 제자인데, 견성한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선종의 6조가 되었습니다.) 혜능의 방법은 알고 하는 것입니다. 신수는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신수의 방법을 그래서 오염수라 합니다. 수심결에는 수상문정(隨相門定)이라 하였습니다. 교법에, 신심에, 목적에, 서원에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도 깨닫기전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자성의 정(定)이 중요합니다. 경계를 따라 팽이가 돌다가 자빠지면 다시 세우면 됩니다. 만들 것 없고, 없앨 것 없습니다. 원래 없는 그 자리에 가면 자성의 정(定)이 세워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자성반조(自性返照),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견성이 기본입니다. 자성자리를 모르면 대조할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 법, 원력, 믿음 뿐입니다. 내 안의 자성에 반조지 못하면 뿌리가 없습니다. 자성에 반조하는 공부가 원천수의 공부입니다.
그러면 견성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대종사님이 견성해서 이렇게 내놓으셨잖아요. 교법에 대조하면 됩니다. 견성을 못했어도 견성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종사님이 내놓으신대로만 하면 견성을 못했어도 그 위력은 나옵니다. 그렇게 하려면 교법을 알아야하고, 교법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또 내 안의 자력적인 서원과 대타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모르면 헛다리짚고요, 믿음이 없으면 할까말까하고, 서원이 없으면 다른데다가 마음을 뺏기게 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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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자인교우 정성스런 타이핑 감사합니다^^ 초벌타이핑 해주신 성해굥님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복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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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교우님 짱짱!!
표 만들어주신 점이 특히 짱짱짱!
자인교우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타이핑 공양?ㅎㅎ
냠냠
자인교우님 타이핑 감사합니다^^*
우아 ㅜㅜ 자인 고생 많아쪄용 넘넘 보기 좋아용 ♡ 성해교우님음 언제나 늘 은혜로움 ♡
ㅋ 자인교우 생유 베리망치~~!
우리 자인 고맙네~
타이핑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