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함께.
부산 동래읍성.
동래읍성으로 올라간다. 원래 간 거지만, 동래향교를 먼저 보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빠르게 지나친 후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내려갈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가파르다. 지금 오르는 구간은 동래읍성 중에서도 북문 일대에 해당하는 곳이다. 왜적의 침입이 있었던 곳인 만큼 다른 지역의 읍성보다 규모가 큰 동래읍성은 산성 형태로 이루어진 북쪽과 평지에 세워진 남쪽으로 나뉜다. 규모는 무려 둘레 3.8km로 참고로 순천 낙안읍성 둘레가 약 1.3km, 경주읍성이 둘레가 약 2.4km인 걸 고려했을 때 상당한 규모인 걸 알 수 있다. 지금은 남쪽 평지에 세워진 읍성은 대부분 개발로 사라지고 북쪽 산에 남아있던 일부 성곽과 함께 북문, 인생문, 서장대, 북장대 등을 복원한 것이다. 새로 만든 하얀 성벽을 따라 오르자 부산의 높은 아파트들이 점차 작아지며 내 시야 아래로 들어온다. 과거와 현대의 조우, 부산이 가지는 또 다른 멋이다.
(동래읍성 성곽 길.)
(가는 길에 있는 입구. 원래 있는 암문은 아니고 복원 후 통행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부산 시내와 조화를 이루는 동래읍성.)
끝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서장대가 나온다. 최근 읍성 정비사업을 하면서 복원한 것인데 이중 누각으로 되어있어 큰 규모의 누각은 아니지만, 웅장함이 느껴진다. 모습은 수원화성의 수어장대와 닮았다. 서장대에 도착하니 몇몇 등산객분들이 쉬고 계셨다. 2층은 대부분 그러하듯 출입금지다. 서장대에서 바라보니 멀리 산꼭대기에 있는 북장대가 어렴풋이 보인다.
(성벽 뒤로 보이는 서장대.)
(동래읍성 서장대. 이중 누각으로 되어있다.)
(서장대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북장대.)
서장대에서 내려가면 점심 먹기 전 보고 온 복천동 고분군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위에서 보니 부드러운 능선이 더욱 예술이다. 그리고 밑으로는 색색 깃발이 펄럭이고 북문이 보인다. 북문은 옹성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북문 앞에는 1731년, 동래부사 정연섭이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기념으로 세운 내주 축성비가 우뚝 서 있다. 그 뒤에는 갑자기 장영실 동산이라고 각종 장영실 발명품이 전시된 공원이 나오는데 처음엔 이게 왜 여기 있나 싶었으나 장영실이 이곳 동래 출신이란 것을 알게 된 후 이해했다. 장영실 동산에는 측우기, 앙부일구, 수표, 혼천의 등의 각종 발명품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 봐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각종 기하학적인 모양을 보니 정말 장영실이 시대를 풍미한 천재였는 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장영실 같은 인물이 다시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미 우리나라 곳곳 기업에서 수많은 장영실이 활동하고 있지만.
(성벽 중간 모습을 드러내는 북문.)
(동래읍성 북문.)
(내주 축성비. 비석 주변 주춧돌은 예전에 비각에 있었다는 소리인가?)
(북문 뒤 장영실 동산. 각종 장영실의 발명품이 전시되어 있다.)
북문에서 북장대까지는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북장대와 시원한 경관이 보이기 시작한다. 북장대는 서장대와 함께 읍성 복원사업 때 함께 복원되었는데 서장대와 달리 일층누각이지만, 규모 자체는 서장대와 비교가 안 되게 크다. 북장대 앞에는 부산 일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전망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오늘은 미세먼지 때문인지 조금 뿌연 날씨라 조망이 그리 좋진 않다. 그렇지만, 동래구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되는 경치 하나는 정말 장관이다. 밑에는 복천동 고분군 전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밑에서 직접 걸었을 때도 크게 느껴졌는데 위에서 아파트 단지와 함께 비교하니 그 크기가 더욱 실감 난다. 나중에 날씨 좋을 때 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포루가 복원 안 된 구간.)
(동래읍성 북장대.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북장대에서 바라본 동래 일대. 이러니 장대를 세웠지. 밑에 복천동 고분군이 보인다.)
밑으로 내려가면 3.1 독립운동 기념탑이 서 있고 탑 왼쪽 큰길로 빠지면 도로가 나오는데 끊겼던 성벽과 함께 복원된 인생문이 나온다. 북문보다는 규모가 작은데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복원된 느낌이 방금 북문보다 강하게 느껴진다. 인생문 옆에는 인생문보다 더 큰 성벽을 가로지르는 굴이 있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동서남북 그 어디의 문도 아닌 특별한 이름을 가진 인생문(人生門)은 임진왜란 당시 이 문으로 통해 피난을 떠난 사람은 모두 살았다 하여 인생문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작지만, 그 의미만은 어느 문보다 큰 곳이다.
(3.1 독립운동 기념탑.)
(동래읍성 인생문.)
인생문 위 성곽을 따라 걸으면 다시 성곽이 희미해지다가 어느 철조망에 다다르면 철조망 반대편에 큰 누각과 함께 끊겼던 성곽이 보인다. 아무래도 동장대 같은데 굳게 닫힌 철문을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성벽을 따라 쳐진 철조망만이 발길을 잡는다. 결국, 영문도 모른 채 철조망 뒤에 있는 동장대를 쳐다보며 내려온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끊긴 성곽. 오른쪽 보이는 철조망 뒤로 길이 나 있어 성곽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철조망엔 붉은 글씨로 '입산금지'란 표시만 있을 뿐이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도로를 따라 걸어 충렬사로 향한다. 큰길이 나오자 우뚝 선 충렬탑이 보이고 그 뒤로 충렬사가 보인다. 통영 충렬사와 이름이 같은 동래 충렬사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하신 순국선열들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효종 때 송공사에서 제를 올리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면에 본전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옆에는 호국영령들의 뜻을 기리고 그 뜻을 널리 후세에 전하고자 만들어진 교육기관인 소줄당이 보인다. 다만, 특이한 점이 모든 건물이 단청 없이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 그 의도를 알 수 없다. 덕분에 처음엔 혹시 후대에 경주 통일전처럼 새로 세운 것인가 의심하기도 했다. 소졸당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자 위패를 모신 본전이 나온다. 본전도 본전이지만, 본전 뒤로 보이는 경관이 멋지다. 오길 잘한 것 같다.
(부산 충렬사 전경.)
(충렬사 소줄당.)
(충렬사 본전. 왜 건물들이 다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걸까?)
(본전에서 바라본 충렬사와 부산 일대.)
충렬사 일대를 둘러보니 방금 들어가지 못한 동장대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그런데 여기도 잠겨있다? 글을 잘 읽어보니 지금은 입산통제 기간이고 6월이나 되어야 들어갈 수 있다 한다. 황당해서 사무소에서 가서 혹시 열어달라 하면 열어주려나 했지만, 역시 원칙이 그런지 6월이나 돼서 다시 오라고 한다. 답사객 입장에선 끊긴 성곽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걸 또 통제해 놓은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 가파른 산도 아니었는데. 6월이나 7월 반드시 당당하게 다시 오리라 다짐하고 그만 내려간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제일 처음 왔던 역으로 되돌아온다. 역에는 동래읍성 모형 등을 전시한 역사관이 있다. 이렇게 지하철역을 그 지역 특성에 맞게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지하철역에 있는 동래읍성 모형.)
역에서 올라와 마지막 답사를 시작한다. 역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남문 터가 나온다. 위 사진 모형에 있는 사라진 남문이 서 있던 자리이다. 남문 터에서 계속 올라가면 군관청 터, 망미루 터 등을 알리는 표지석이 차례로 나온다. 특히 남문이 있던 자리는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역사가 서려 있는 거리다.
(동래읍성 남문 터. 지금은 도로로 바뀌어 흔적을 찾기 힘들다. 복원도 어려울 듯.)
(군관청 터. 그 밖에도 망미루 터 등이 표시되어 있다.)
골목 안쪽 시장 쪽으로 들어가면 동래부 동헌이 나온다. 이곳은 말 그대로 관아로 동래부에서 공적인 업무를 맡아 보던 곳이다. 문을 나서면 중앙에 충신당이란 건물이 나온다. 당시 대일관계를 맡은 동래부인만큼 다른 지역의 관아보다 크고 격식이 높다. 현재 남아있는 부산의 조선 시대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오른쪽에는 연제당(아마 잘못 읽은 것일 겁니다.)이 보이고 몇몇 공덕비가 담장에 붙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는 정비공사 중인지 많이 어수선한 분위기다.
(동래부 동헌 입구.)
(충신당. 상당한 건물 규모를 자랑한다.)
(연제당(?).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 (한자 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각종 공덕비. 지금은 공사 중이라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하다.)
동헌에서 조금 더 가면 송공단이 나온다. 이 단은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운 추념 제단이다. 원래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순절한 모든 분을 모셨으나 후에 동래에서 순절하신 분만 모시고 다른 분들은 따로 또 제단을 마련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2005년, 충렬사지 기록대로 옛 모습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엄숙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송공단 입구.)
(송공단.)
다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왔던 길로 되돌아 나오는데 골목 옆에 작은 비석이 보인다. 바로 여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 만세거리라고 한다. 400여 년 전에는 나라를 뺏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던 동래읍성의 남문이었고 100년 전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이 터지도록 외쳤던 애환과 민족의 얼이 서린 장소이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골목이지만, 매년 당시 3.1운동을 재연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태극기를 들고 함께 외치고 싶다. "대한 독립 만세!"
(부산 만세거리. 독립운동의 역사가 서린 뜨거운 장소다.)
이제 지하철을 타고 장유로 돌아간다. 어느새 해는 져간다. 경전철 창 너머로 너른 김해평야와 낙동강이 지나간다. 그저 평화로운 풍경이다. 피곤한 몸을 이끈 채 친척 집에 도착한다.
왜인지 가슴이 뜨거워지고 공감이 되었던 답사였다. 다만,동장대도 그렇고 공사 중인 동래부 동헌도 그렇고 아쉬움도 많이 남았다. 이곳만큼은 꼭 올해 6월이나 7월 시간을 내서 다시 가야겠다.
-여정- (2014. 2. 25. 火)
(저번 복천동 고분군, 동래향교 답사에 이어서)------→ 동래읍성 성곽→ 서장대→→ 북문→ 장영실 동산→→ 북장대→ 3.1독립운동 기념탑→ 인생문→→ 철조망(동장대가 안에 있음)→→ 충렬사→ (지하철)→ 동래읍성 역사관(?)→ 남문 터→ 군관청 터→ 망미루 터→ 동래부 동헌→ 송공단→ 만세거리
새롭게 펼쳐라!
羅新
첫댓글 복원을 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지만 과거의 고색창연한 멋과는 조금은 거리가 멀다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리고 옛날의 돌 하나에도 정감이 더 가는 것은 왜일까?
건강하게 공부 잘하고 있겠지.
이제 곧 방학을 할 것 같구나.
우린 국토순례 준비 때문에 조금은 바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