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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F. 영은 저서 『메디치』에서 역사상 카트린 드 메디시스만큼 왜곡된 인물도 드물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필자도 근본적으로 이 관점에 동의한다. 비록 그가 애정을 듬뿍 담아 쓴 『메디치』에서 전반적으로 메디치가 인물들에 대한 미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그만큼 카트린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는 것 또한 부정될 수 없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에 관한 글들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나오는 부분은 참 애매하기 그지없다. 전반적으로 카트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군데군데 좀 다른 수식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카트린이 정치력이 없었고 신·구교 융합정책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이 프랑스를 더 혼란에 빠뜨리기만 했다' 고 쓰면서도 마리 드 메디시스 편에 가서는 '그녀는 카트린같은 정치력을 가지지 못했다.' 라는 말을 한다. 또한 그녀가 사악하고 권력을 잡아 아들들을 제멋대로 휘둘렀다고 하면서도 호위병도 별로 없이 폭동 중인 파리 시내를 가로질렀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한다. 이것은 카트린에 대한 얕은 연구 탓으로, 기본적인 가정으로 깔려있는 그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약간의 연구를 통한 역사적 사실들이 애매모호 하게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카트린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상반된다. 이제 카트린에 대한 인간적인 면을 보기로 한다. 필자는 필자 나름의 견해로 카트린의 일생을 서술해 나가겠지만, 여러분도 이 인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함께 정립해 보았으면 한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 Medici), 즉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151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로렌초 데 메디치이고 어머니는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였다. 아버지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손자로 흔히 우르비노 공 로렌초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미켈란젤로가 건설한 산 로렌초 성당 신 성물실에 '명상하는 로렌초' 라는 이름의 조각상으로 남아있다.(비록 전혀 닮지 않았다고 당대의 비판을 받긴 했지만)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는 부르봉 가의 일원으로 프랑수아 1세의 먼 친척이었다. 그러니 일생동안 자기 국민들에게 '그 이탈리아 여자' 라고 비난받던 카테리나도 반은 프랑스 인인 셈이다.
당황스럽게도 카테리나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장 가까운 친지 넷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지 엿새 뒤에, 어머니는 두 주 뒤에, 할머니 알폰시나 오르시니와 고모할머니 마달레나 데 메디치가 그 직후에 죽었다. 고모인 클라리체 스트로치와 다른 친척들은 당시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아기는 메디치 저택에서 홀로 하인들에게 맡겨졌다. 태어난 지 작은 할아버지인 교황 레오 10세의 명령으로 태어난 지 6달만에 로마로 옮겨진 아기는 클라리체 스트로치의 양육을 받으며 6살까지 로마에서 살았다. 그 이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추기경 파세리니의 양육을 받았다. 그러나 1527년 그녀가 8살 때 로마 약탈이 일어났고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다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인질로 피렌체에 남아야만 했다. 그 후 레 무라테 수녀원에서 열한살까지 살게 된 그녀는 거기서 예절과 학문을 익혔다. 그러나 피렌체 군과 교황 군의 싸움이 치열해지자, 피렌체 시의회에서는 필요할 때 그녀를 죽이기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송하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카테리나는 머리를 깎고 수녀복을 입어 자신이 레 무라테 수녀원에서 강제로 끌려나가는 부당함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교황군이 승리해 메디치 가가 다시 피렌체로 복귀한 후 카테리나는 로마로 불려왔다. 이곳에서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았던 사촌 이폴리토 데 메디치와 재회했다. 그 둘을 결혼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작은 할아버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그녀를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인 오를레앙 공 앙리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피렌체로 돌아가 결혼 준비를 했고, 곧 프랑스로 갔다. 이때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으로 유명한 조르조 바사리는 그녀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카트린은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 때문에 우리에게 초상화를 남겨 두었으면 싶은 여성이다. 그 따뜻한 마음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내 붓으로는 아무 기억도 남길 수 없다.>>
1533년 10월 28일에 오를레앙 공 앙리와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결혼식이 마르세유에서 거행되었다. 교황과 사촌 이폴리토, 고모뻘인 마리아 살비아티와 카테리나 치보가 그녀와 함께 했다. 교황은 카트린에게 알이 굵은 7개의 진주를 선물했는데, 이 진주들은 초상화에서 그녀의 면류관을 장식하고 있다. 카트린은 25년 뒤 이것을 메리 스튜어트에게 주었는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처형하고 이 보석들을 가져갔다. 그래서 이 진주들은 영국 왕실 보석이 되었고 1901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때 그의 왕관에서 모습을 보이고는 이후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재미있게도 프랑스의 식문화가 크게 달라졌다. 16세기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식문화는 그리 풍성치 못했다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나이프로 요리를 잘라 손으로 집어먹던 장면에 대한 묘사가 흔히 보이는데, 그랬던 프랑스의 식문화가 지금처럼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에 의해서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카트린과 앙리의 결혼이다. 그녀가 가져온 많은 식기와 함께 온 요리사들에 의해 궁정 음식이 변하면서 프랑스의 식문화는 달라졌고, 결국 오늘날 가장 우아한 음식으로 칭송 받는 프랑스 요리는 이탈리아외 여러 나라의 것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카트린은 남편인 앙리에게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지만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와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녀의 지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의 좋은 말상대가 되었고 사냥터에도 줄곧 따라다녔다. 사냥을 매우 즐겼던 프랑수아 1세와 마찬가지로 카트린도 사냥을 좋아해 예순이 다 되도록 사냥을 계속 했다. 그러나 시아버지 이외의 누구도 그녀에게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온 프랑스 국민들은 교황이 왕을 속였다고 생각했다. 결혼할 때 사람들은 그녀가 제노바, 밀라노, 나폴리를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교황은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 따라서 국민적인 미움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것은 앙리의 형인 프랑수아가 죽자 크게 증폭되었다. 단지 오를레앙 공작부인일 뿐이었던 그녀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도 아닌 피렌체의 부르주아 가문의 여인이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편의 냉대는 이것과는 차원이 좀 달랐다. 필자의 생각으로 앙리는 아마도 자기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카트린을 조금은 질투했었던 듯 싶다. 앙리는 성격상 아버지처럼 활발하지 못한데다 스페인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온 뒤로 한때 프랑스 말까지 잊어버렸었다. 그래서 밝고 활달한 프랑수아는 그런 둘째 아들을 크게 총애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 아내는 쉽게 호감을 얻었으니 질투가 생길 법도 하다.
앙리는 아름다운 미망인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빠진 이후 카트린을 더욱 냉대했다. 9년 동안 카트린에게 자녀가 없자 디안은 프랑수아 1세에게 카트린을 이혼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프랑수아 1세는 그 자리에서는 마지못해 승낙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의 누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도 카트린에게 "우리 오빠는 말은 그렇게 하셔도 이 이혼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라고 위로 편지를 보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카트린은 프랑수아 1세에게 찾아가 남편을 포기하고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프랑수아 1세는 그녀를 위로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
사실 당시 카트린은 아직 23살 밖에 되지 않았고, 이듬해 바로 아들을 낳았으며 이후 9명의 자식을 더 낳았다. (비록 세 명은 유아 때 죽었지만)
1547년 그녀가 28세 때 프랑수아 1세가 죽고 앙리가 왕위에 올랐다. 앙리는 어렸을 때보다 활기차고 힘있는 청년이 되었다. 카트린이 남편을 사랑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앙리는 디안에게만 빠져있었고 디안 편에서 서술했듯이 그와 디안은 카트린에게 많은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 카트린은 줄곧 참고 지냈다. 훗날 딸 엘리자베스가 남편인 펠리페 2세의 불성실 때문에 괴로워하자 카트린은 자신을 왕의 사랑에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본보기로 삼으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아들들은 디안에게 빼앗겼고, 그녀는 줄곧 딸들 (엘리자베스, 클로드, 마르그리트) 과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양육하며 세월을 보냈다.
왕이 자리를 비웠을 때 마땅히 왕비가 가져야 할 섭정권조차도 디안은 카트린이 가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불운이, 카트린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1557년 8월, 왕이 샹파뉴에 간 동안 몽모랑시가 지휘하던 프랑스 군이 사보이 공작 에마뉴엘 필리베르트에 의해 생 켕탱 전투에서 대패했다. 프랑스 북부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파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디안은 모든 사람들과 같이 공포에 휩싸여 있었으나 카트린은 의회로 달려가 의원들을 격려하고 국방 예산 지출 승인안을 통과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녀의 용기와 웅변은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처음으로 파리 시민들은 카트린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1559년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을 위해 열린 마상대회에서 앙리 2세가 장창에 눈을 찔려 사망했다. 카트린은 비록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었지만 그런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매우 슬퍼했고, 이 때부터 항상 상복을 입고 베일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죵교전쟁이라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것이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프랑수아 2세의 재위기인 일년 반 동안 카트린은 기즈 가의 위세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샤를 9세가 즉위하자 섭정여왕이 되어 약 30년 간 종교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은 종교전쟁의 요약에 제시되어 있다.
카트린에 대한 중요한 혐의는 몇 가지가 있는데, 샤를 9세의 독살, 잔 달브레의 독살, 콜리니의 저격,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 학살에 관한 것들이다. (그 이외에도 적지 않다) 샤를 9세의 독살은 '핑크빛 양초 독살' 이라고 불리는데, 카트린이 샤를의 동생이자 자신의 아들 앙리를 독살하기 위해 독이 든 양초를 타오르게 하여 방안을 독으로 가득 채우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 날 동생과 방이 바뀌게 된 샤를이 대신 죽었다는 것이 그 음모설의 줄거리이다.
잔 달브레 독살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아들의 결혼식 준비를 위해 파리에 와 있던 잔 달브레를 카트린이 향수 상인을 시켜 그녀의 장갑에 독을 바르게 하여 죽였다는 설이다.
콜리니 저격 사건은 샤를 9세가 콜리니를 총애하여 자신이 정치에서 배제된 것에 분개한 카트린이 기즈 가와 합세해 콜리니를 없애려 했다는 것이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저질렀거나 아니며 미리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왔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혐의들은 사실 근거가 빈약하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하나도 없을뿐더러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카트린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앙리 3세는 카트린이 자식들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다. 그를 너무나 사랑하여 그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앙리를 독살하려 했다는 것부터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려 하겠는가.
잔 달브레의 암살 혐의도 마찬가지다. 잔은 이미 그전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고, 그녀의 두 주치의는 독실한 위그노였지만 독살설을 부인했다. 또한 카트린의 일생의 목표가 프랑스에 종교적 화합을 정착시키는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잔의 죽음은 카트린에게 이로운 것이 전혀 아니었다. 샤를 9세의 즉위 때 감옥에 갇혀 사형 날을 기다리던 콩데를 풀어주었던 것이 바로 카트린이다. 그런데 그녀가 일부러 잔을 살해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카트린이 독에 정통했다는 것은 그녀가 메디치가 출신이고 점성술을 좋아했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메디치 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그 가문의 장자 계열은 매우 건강했다. 차자 계열의 코지모가 토스카나 대공이 되면서 여러 가지 어두운 사건이 발생했지만, 국부 코지모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로렌초 일 마니피코에 이르기까지 피렌체는 메디치 가가 이끄는 황금기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대한 가문에게 피로 복수한 적이 없었고, 암살을 당한 적은 있으되 사주한 적은 없었다. 또한 도서관과 아카데미를 만들어 고전고대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가문에는 관용이 있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사후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되는 등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났고, 피렌체로 되돌아가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카트린 또한 고모인 클라리체 스트로치를 통해 메디치 가의 건강한 가풍을 이어받았고, 또한 일생을 통해 본 성격으로 볼 때 독살 따위를 시도할 인물은 결코 아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후손들 중 가장 그와 닮은 인물이 바로 카트린이 아닌가 한다. 위그노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커다란 대포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하다는 이유로 '왕비마마' 라고 불렀을 때(카트린은 중년 이후 매우 살이 쪘다) 그녀는 전혀 화를 내지 않은 채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고 한다. 만약에 할 수만 있었다면 가장 독살하고 싶은 인물은 아마도 디안 드 푸아티에 였을테지만, 카트린은 그녀에게도 별다른 복수를 하지 않고 단지 궁정출입을 금지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강인하고 관대하며 유쾌한 성격을 지녔던 그녀가 독살을 즐겨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근거가 빈약하다.
콜리니 저격은 어떻게 보면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특히나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카트린이 저질렀다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약 가톨릭 편에 서서 학살을 저지르려 했다면 그 전날 그 우두머리 중 하나를 저격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신교측의 경계심을 키워주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M. 메리메) 또한 앙리 3세가 앙리 드 기즈를 죽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모든 게 끝났다며 탄식하던 카트린을 생각하면 더욱 신빙성이 없다. 그녀는 암살이 평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불길을 키울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때도 딸의 결혼을 빌미로 신교를 뿌리뽑을 작정이었다면 왜 두말할 필요 없는 위그노의 거두들인 콩데 공, 나바르 왕 앙리, 대법관 미셸 드 로피탈 등을 지켜주었겠는가. 당시 그녀의 보호로 루브르에 숨어 목숨을 건진 프로테스탄트의 수는 적지 않다. 혼란한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었다.
인생에서 많은 고난을 겪고 일어선 사람은 두 가지 길을 걷게 된다. 하나는 세상에 한을 품고 복수하려는 부류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만큼 세상에서 그 빚을 받아내려 하는데, 이 때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만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정난정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면 십중팔구는 압제를 행하게 된다. 리슐리외도 "복수심이 강한 사람을 권력 있는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미친 사람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트린과 같은 부류는 두 번째에 속한다. 그것은 자신이 당했던 고통과 부당함을 다른 사람들은 받지 않게 하려는 종류이다. 카트린은 어릴 때부터 정치적 상황의 희생물이 되어왔다. 메디치 가의 부침에 따른 피렌체의 혼란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러번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카트린은 종교라는 또다른 종류의 이념 속에서 부당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종교 화합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카트린에게 많은 혐의가 씌워진 것은 그녀가 배경 없는 이탈리아 출신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섭정으로 프롱드의 난을 겪은 안 도트리슈의 경우는 그녀가 젊었을 때부터 모국인 에스파냐와 내통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미움받지 않았다. 국민들의 미움은 모두 마자랭에게 쏠렸다. 그러나 카트린의 경우는 달랐다. 속된 말로 그녀가 만만해서였을까? 카트린 덕에 종교전쟁 내내 기회를 엿보던 에스파냐, 영국 등의 외세를 많은 부분 막을 수 있었고, 또한 막상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은 그녀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녀를 미워했다. 그녀의 유화정책을 비난하고 오히려 전화에 몸을 맡겼다. 만약 카트린이 이탈리아 출신 섭정이 아니라 당당한 프랑스 왕으로서 화합을 추진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외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카트린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가 오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프랑스사의 종교전쟁 부분에 한결같이 나쁜 이미지로, 아니면 선과 악을 양극을 넘나드는 애매모호한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어떤 인물로 느껴지는가? 아직 생각이 정리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로 어떤 인물인지 궁금한 생각은 들지 않는가? 필자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의문을 일깨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