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시간, 삶은 현실이다.
길게 잠자리에 누웠다. 바라보이는 높은 하늘엔 구름사이로 낼모래면 보름될 달이 젖살붙은 어린애 엉덩이처럼 뽀얗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몇시쯤에 잠들어야 마음이 편한지 알 수가 없다. 더이상 어둠에 두려움 느끼지 않으며, 가끔은 아침에도 눈뜨지 말았으면 하는 고약한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낮이면, 지난 밤 꾸었던 악몽이 현실의 빌미가 되어 나타날 것만 같아 지난 날 내삶의 흔적을 하나하나 머리속에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방안 의자에 앉아도보고, 전등불아래 서성이기를 수차례, 한동안 불길한 생각을 대체할 감상적인 싯귀라도 머리속에 떠 올라주기를 갈망해 보았다.
그리고 맥없이 창가에 앉았다. 다가오는건 도심의 잿빛 공기 사이로 희미한 버스터미널 불빛과 창틈으로 스며드는 상강(서리가 내린다는)을 기다리는 절기의 무등을 탄 바람뿐이다.
힐끗 바라다본 먼 창너머 희멀건 도회의 공간은 얄밉게도(그렇치 않아도) 고층 아파트의 아스라한 별빛마져 삼켜버리고 말았다.
침대밑에 던져진 휴대폰에서는 축하해야할 일이긴하여도 여태껏 검증되지 않고, 팽팽하게 대립되는 역사의 단면을 소설화한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무거운 논평이 계속되었다.
뭐하자는 짓일까? 가족의 생일도, 부모님 기일도 기억 못하며 혼란스런 역사의 사실을 들먹이며 지식인인양 착각하는 사람들, 게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소피스트)'이고, '힘은 정의에 우선한다'는 인도 경전을 신봉하는 무리와의 대립에서 평범하고 소박한 서민들은 길을 잃고 헤맨다.
정작 경제가 어려워 자영업자들이 원상복구 비용때문에 누적적자를 감수하며, 폐업도 못한다는 현실에서 누구하나 국가 지도자랍시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자 없다.
순간 한때는 10년동안 감옥 생활에 7개의 학위를 받았다는 아프리카의 지식인으로 추앙받던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가 평양을 방문한후, 김일성을 능가하는 세계 1위의 독재자가 되어 국가를 망쳤다던 뉴스가 생각났다.
공허한 이념전일까? 어차피 역사의 시간은 강자의 편이라는 속설을 되뇌이며, 씁쓸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또 다시 강자의 먹이사슬되어 허덕이는 삶을 살아가야하는 노동자 농민들의 한숨소리를 계속해서 들어야 하는건지...
세상일에 생각을 끊어야지 하면서도 잘밤이면 생각들이 못다한 숙제공책 밀치고, 잠들어버린 초등학생의 잠꼬대처럼 어쩔수없이 베개밑을 스멀스멀 파고든다.
지금쯤은 덧붙이는 삶을 탈피하고 뺄셈의 철학을 읽혀 나가야할 현실이지만 아직도 그 셈법앞에서 갈팡질팡 갈곳 몰라하는 나 자신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낮에 받았던 자식 장가 보낸다며 전해왔던 옛직장 후배의 청첩문자, 엇그제 하룻밤쯤 막걸리 마시고 옛이야기 나누며 자고 가라는 친구의 전화, 10년이 넘는 잊혀질듯한 세월속에서 나를 기억해줌이 고마웠다. 그나마 메마른 나의 삶의 양념이다.
나이들면 그동안의 사람과 거리는 점차 멀어지고 이별과 산천이 다가옴을 서러워 하는 것이 인생이다. 젊은시절엔 후회없는 삶을 살고자 마음의 다짐해 보았었다. 그러나 나는 과연 TV소설의 청순한 여주인공처럼 진솔하게 세상을 살아왔을까? 살아오며 가끔씩 회의가 일어났었다.
나만의 삶, 생각은 꼬리를 물고 순탄히 앞서가는데 실상은 열마지기 논빼미의 보리타작 끝낸 농부의 저린 다리처럼 절뚝거리며 세월에 끌려가고 있는 것 같다.
건너집 고양이 쫏는 요란한 개소리에 이어 철맞지 않고 드물게 구슬피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주인과 자신의 영역을 잃지 않으려 목청 높인다지만 대체 이 밤에 옆산 공원 나무에 앉은 부엉이가 구슬피 우는 사연은 무엇일까?
휴대폰 손에 쥔채 텔레비젼 화면 응시하며 마루에 누워 정다운 사람들과 2박 3일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고 들떠있던 애 엄마의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살아가며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속에서 우리들은 그 애틋한 그리움이란 단어를 배웠었다. 밤이면 그 그리움이 솟아남은 외로움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또 이렇게 개념없이, 때론 남들이 읽어주기를 바람없이 서둘러 휴대전화 자판을 휘둘러대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혼자 있을땐 지갑에서 돈 빠져나가는 휴대전화의 휘파람소리에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었더니 웃음이 나왔다.
깊어가는 밤,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공허함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말해두고 싶다. 삶은 현실이기 때문이다.(행복이라 여기며 살아야지. 내 인생이니까)
[김해 외동 청마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