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자혜 朴慈惠 (1895~1943)】
"1919년 간우회 조직, 1926년 나석주 의거 지원, 혁명가 신채호 동역자"
188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수유리(水踰里, 현 강북구 수유동)에서 중인 출신 박원순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어린 시절 궁궐의 수습 나인(內人)으로 생활하다가 1910년 12월 발표된 「이왕직(李王職) 관제」에 따라 궁녀 신분에서 벗어났다. 1911년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기예과(技藝科)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조선총독부 의원 산부인과 간호부에 들어가 조산원(助産員)으로 근무하였다.
조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필주(李弼柱)와 연락이 닿아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동료 조산원과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여 각종 유인물을 제작·배포하였다. 또한 김형익(金衡翼) 등 한국인 의사들과 결의하여 태업(怠業)을 주도하다 붙잡혀 유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풀려난 이후에는 병원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1919년 베이징(北京) 옌징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부인 이은숙(李恩淑)의 중매로 신채호를 만나 가정을 꾸려 이듬해 첫째 아들 신수범(申秀凡)을 출산하였다. 1922년 경제적 어려움으로 첫째 아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국내로 돌아와서 서울 종로구(鐘路區) 인사동(仁寺洞)에서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을 내걸고 산파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녹록치 않았다. 국내에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국내 인사들과 중국 내 인사들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박자혜는 지인의 도움으로 인사동에 방 한 칸을 얻어 큰아들 수범과 함께 살았다. 1936년, <신가정> 기자는 박자혜가 살아가는 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산파 박자혜라는 간판이 개외집들 틈에 어깨도 펴지 못한 채 옹구리고 있는 어느 초가집 대문 밖에 걸려 있었습니다. 중문턱을 들어서서 안방을 향하고 박자혜 씨를 찾었드니 뜻 밖에도 등 뒤 아랫방문 열리며 부인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예상은 하엿거니와 부엌도 마루도 없는 아래채 한 칸 방에 너무도 쓸쓸하게 지내는 여사의 얼굴을 참아 바라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렇듯 매우 곤궁한 삶을 살아간 그녀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남편으로부터 "너무 추워서 견디기 어려우니, 솜을 많이 누빈 두툼한 옷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 그녀는 매달 6원 50전의 월세를 내지 못해 집 주인의 독촉을 받으며 살았으며, 신채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영양실조로 2살 때 세상을 떠났다. 또한 산파업이 제대로 안 돼서 아들과 함께 풀장사, 참외장사, 노점상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전국에서 그녀를 후원하고자 자금이 전달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곤궁한 처지를 해결하기엔 부족했다.
게다가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아내이자 과거에 한국 간호사들의 만세시위 및 동맹파업을 주동했던 그녀를 감시했다. 장남 수범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일본 경찰이 책가방을 뒤져 검색을 했다. 이러한 간섭 때문에, 수범은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는 일제 경찰에게 갖은 모욕과 폭력을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 있는 신채호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1931년 신채호가 "<국조보감>과 서양역사책을 사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2책의 값이 50원에 달했기에, 그녀는 안재홍에게 부탁했지만 그 역시 사서 보내지 못했다. 그 후 신채호는 더이상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1934년 박자혜를 찾아갔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신가정> 기자는 '부군은 옥중에, 신산(辛酸)한 새해맞이, 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 방문기'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신채호 씨가 전형적인 학자이신 만큼 부인의 그 후 생활에는 그렇게 관심은 안 가지셨을 것이겠고, 또한 학자로서 무엇보다도 사랑하시는 서책을 차입치 못한 것에, 오해를 품기도 쉬운 일이다. 학자라 할 수 없고나.
박자혜는 그래도 입에 풀칠하나마 자식들을 정성껏 돌봤고, 신채호의 10년 옥살이를 수발하며 남편이 석방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형무소에서 '신채호 뇌일혈로서 의식불명, 생명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박자혜는 수범과 친구 서세충과 함께 여순으로 급히 와서 신채호를 만났지만, 남편은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사망했고, 박자혜는 2월 24일 특급열차 노조미편으로 유해를 싣고 귀국했다. 이후 그녀는 집에 방문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대련이 오죽이나 추웠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이제는 모든 희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1926년 12월 나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산파원에 폭탄을 숨겨주고 나석주의 길잡이 역할을 담당하였다. 1936년 2월 21일 신채호가 중국 뤼순감옥(旅順監獄)에서 순국하자 2월 24일 유해를 모시고 왔다. 이후 첫째 아들을 해외로 보내고 1942년 둘째 아들 신두범(申斗凡)이 세상을 떠나자, 홀로 셋방에 살다가 194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