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mbique Channel,Madagascar#2006
모잠비크의 해류를 따라 고기잡이를 하는 착한 어부들은 욕심없이 그들의 식탁에 올릴 만큼의 고기만을 잡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때로 집에 손님이 찾아올 일이 있다면 다소 몇 마리의 물고기를 더 잡기 위해 소소한 욕심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디 욕심이라 할 수 있을까?
가끔 싱싱한 랑구스터(languster)나 랍스터(lobster) 같은 것들을 잡으면 대부분이 프랑스인인 여행자들에게 팔기도 하는데
이때의 셈법이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다.
랑구스터 한 마리당 또는 무게로 가격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아놓은 작은 양동이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양동이 안에 몇마리가 들어 있든 무조건 양동이 하나에 부르고 싶은 액수 만큼의 아리아리(Ariary 마다가스카르 화폐단위)를 매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마리가 들어 있어도 또는 대여섯 마리가 들어 있어도 가격이 늘 똑같다는 말이다.
지구상에 이런 어이없고 순진한 셈법을 가진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간혹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여행자들이 이 순진한 어부들과 작은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는데
이유인즉 다른 여행자에겐 다섯 마리를 팔면서 일만 아리아리를 받았는데 왜 자신에겐 한 마리를 팔면서 일만 아리아리를 받느냐고 항의 하는 것이다.
서양인들이나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분명 그것은 바가지를 씌우려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세심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면 이들의 순진무구한 셈법과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먹을 만큼만의 고기를 잡는 이 어부들은 그날의 어획량은 마릿수가 기준이 아니라 양동이가 기준인 것이다.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우리가 생산량에 대하여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면 이들은 그 생산량이 아닌 생산하는 행위에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의 그물질에 몇마리가 되었든 동일한 가격기준을 가지고 있는 이 동화속에나 나올 법한 어부들은
속내를 모르고 랑구스터의 마릿수를 탓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연신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아~ 얼마나 삶에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란 말인가?
그나마 프랑스 여행자들은 마다가스카르가 오랫동안 그들의 식민지였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빨리 이해를 하게 되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끝끝내 달러로 환산해도 몇푼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자신들의 셈법으로만 이들을 이해하려 든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답답한 순간이지만 그것 또한 나의 부질없는 걱정일 뿐 모잠비크 해협의 어부들은 그런 여행자들을 보며 오히려 더 행복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겐 이방인들의 알 수 없는 언어와 표정들이 그저 신기하기만 한 것 같다.
마침, 랍스터도 랑구스터도 시즌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롯지가 아닌 호텔에 투숙을 하고 있어서 직접 조리를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흥정에 끼어들지는 못했지만 착한 나의 마다가스카르 친구 '나이보'의 소개로 프렌치 타입으로 요리가 되어진
랑구스터를 호사스럽게 먹어 볼 수는 있었다.
파도에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작은 돛단배에 오늘도 모잠비크해협의 어부들은 랑구스터나 랍스터가 아닌 아름다운 동화를 건져 올리고 있을 것이다.
다시 내가 이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기준이 되어줄 수 있는 곳, 인도에서의 속깊은 깨우침 같은 것들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자연스러운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고
동경하는 것 만으로도 무거웠던 삶의 군더더기들을 떨쳐내고 정화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안의 사랑도 어쩌면 그러했는지 모른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며 그 하나 하나에 가격을 매겨가듯, 스스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거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깊이를 가늠했는지 말이다.
부끄럽다. 사랑, 그 이름 하나 만으로도 모든 것에 족해야 함에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양동이 안에 다시 얼마만큼의 사랑이 들어 있는지를 세고자 한다면 영원히 우리는 이들 같은 동화를 꿈꿀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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