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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水
[19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 방북한 문익환 목사(왼쪽)와 김일성 주석이 포옹하고 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고문인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으로 1989년 3월 25일 평양을 방문했다. 문목사의 방북에는 재일동포 정경모씨가 동행했으며 일본과 중국을 경유했다. 문목사는 평양도착 성명을 통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조국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평양에 왔다고 밝혔다.
문목사는 27일 다른 행로로 북한에 간 소설가 황석영씨와 정경모씨와 함께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다. 4월 2일에는 평양에서 문목사와 북측의 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의 공동명의로 ‘4.2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됐다. 문목사는 열흘간의 북한 방문을 마치고 4월 3일 북한을 떠나 중국과 일본을 경유해 4월 13일 귀국했다.
정부는 당국과의 사전협의 및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한 문목사의 행위가 명백한 실정법위반이라고 규정, 귀국하자마자 구속했다.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그의 행동을 ‘감상주의적,이상주의적’으로 규정, 7년 징역형을 확정했으나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로 1990년 10월 20일 1년6개월여 만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했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에 김대중, 이문영씨 등과 함께 구속돼 20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77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 뒤에도 국민연합선언서사건(1978년), 내란예비음모죄(1980년), 집시법위반(1986년), 국가보안법위반(1989년)등 모두 6차례에 걸쳐 10여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채 반정부 활동을 계속해왔다. 1994년 1월 18일 별세했다. /조선
[1918년]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 사망
←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1909년)
‘방탕한 아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유희’ ‘아라베스크’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근대 작곡가 드뷔시가 1918년 3월 25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드뷔시는 근대음악에서 제일 처음으로 낭만음악에 반대하여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상파 음악의 원조이다.
드뷔시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11살 되던 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22살 때에는 칸타타(방탕한 아들)로 로마 대상을 받아 로마로 유학했다. 그러나 유학생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러시아와 유럽을 여행하며 경험과 감수성을 풍부히 하기도 했다.
드뷔시의 작품을 보면 초기에는 후기 낭만주의의 경향을 보였으나 무소르크스키의 음악을 접하고 바그너로부터 멀어지며 점점 인상주의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눈에 띤다.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은 미술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섬세하고 감각적인 음색으로 표현해 낸다. 문학에서의 상징주의를 음악에 표현하기도 했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인상주의 음악을 창시한 첫 작품이다. 드뷔시는 관현악곡, 성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조선
[1934년] 미국의 여성운동가·정치운동가·편집인 스타이넘(Gloria Steinem) 출생
← Gloria Steinem at news conference, Women's Action Alliance, January 12, 1972
1934년 3월 25일 Toledo, Ohio, USA ~ .
"신발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꼭 발을 바꿔야만 하는가? " - 글로리아 스타이넘
스타이넘은 20세기 후반 여성운동을 이끈 미국의 언론인이다. 1960년대에 뉴욕에서 자유기고가로 일하면서 여러 자유주의적 급진운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민권운동,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 등과 더불어 수십 년 만에 새로이 부각된 페미니즘 운동으로 곧장 이어졌다. 그녀는 1971년 여성의 정치 참여를 촉구하는 전국여성정치간부회의를 소집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뒤이어 베티 프리던 등과 함께 미국 최초의 페미니즘 잡지 <미즈 Ms.>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초판부터 매진되었고, 5년이 채 못 되어 50만 부 발간을 기록하는 등 선풍을 일으키면서 여성 문제의 중요한 발언대가 되었다. 그녀는 잡지 편집과 정치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성난 행동과 매일의 반란 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1983)·<내부로부터의 혁명 Revolution From Within>(1992) 등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을 써내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82년] 영국 의회, 캐나다 헌법 승인
1982년 3월 25일 영국 의회가 캐나다 헌법을 승인했다. 이어 4월 17일에 엘리자베스 2세가 개정된 새 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캐나다는 완전 독립을 이루었다. 1867년 빅토리아 여왕이 노바스코샤·뉴브런즈윅·캐나다를 하나의 자치령으로 합병하고,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와 영토가 이 자치령에 가입할 수 있도록 규정한 영국령북미법을 승인한 지 115년 만의 일이었다. 새로운 헌법은 "캐나다의 공식 언어는 2개이다"라는 피에르 엘리오트 트뤼도 총리의 관점과 각 주의 특별한 문제간의 타협점을 제시했다. 권리와 자유의 헌장에서는 캐나다에서 준수되어야 할 34가지 권리, 즉 종교의 자유에서부터 인구조사에 근거한 언어와 교육의 권리 등을 규정했다. 한편 강력한 분리입장을 취했던 퀘벡 주정부는 헌법개정에 반대해 법원에 제소했으나 캐나다 연방대법원은 헌법거부청구에 대한 기각판결을 내렸다./브리태니커
[1922년] 국문학자 정병욱(鄭炳昱) 출생
1922. 3. 25 경남 하동~1982.
호는 백영(白影).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1948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48~52년 부산대학교 조교수, 1952~58년 연세대학교 조교수, 1958~85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73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판소리학회를 조직하여 판소리감상회를 열기도 했다. 학술원 정회원이었고, 하버드대학교 초빙교수로서 한국고전시가와 문학에 대한 논문발표 및 강의, 미국·프랑스·일본 등의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했다. 1952년 〈자유문학〉에 〈국문학의 개념규정에의 신제언(新提言)〉을 발표한 뒤, 〈시조부흥운동 비판〉(신태양, 1956. 6)·〈고전문학의 순화문제〉(자유문학, 1959. 2) 등을 발표했다. 낙선재문고(樂善齎文庫)를 정리·해제했고, 낙선재 소설의 사회사적·문화사적 의의를 밝힌 논문 〈이조 말기 소설의 유형적 특징〉을 발표했다.
주요저서로는 〈국문학산고〉(1959)·〈한국고전시가론〉(1976)·〈한국고전의 재인식〉(1979)·〈한국의 판소리〉(1981) 등이 있다. 특히 시조 2,276수를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여 출전과 해제를 붙인 〈시조문학사전〉(1966)은 이 분야에서 뛰어난 책이다. 1967년 한국출판문화상, 1979년 외솔상, 1980년 3·1문화상 등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99년] 한국 최초의 여성 체육전문가 김신실(金信實) 출생
1899. 3. 25 서울~1993. 11.17 서울.
국내에서 영신소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하와이로 이주, 이승만 박사가 교장으로 있던 한국기독교학교에서 6년 동안 공부했다. 그뒤 미국 오하이오 주 오버린(Oberlin)에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오버린대학 체육학과, 미시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30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전에 교수로 부임하여 한국 전통을 살리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다채로운 운동경기를 소개·보급시켰다. 당시 처음 소개된 운동으로는 6인제 여자 농구와 여자 연식야구, 배드민턴·포크댄스·현대무용·필드하키·기계체조·크리켓·등산·탁구·펜싱·수영 등이 있다. 또한 처음으로 여러 가지의 응원복을 입고 응원가를 부르는 응원도 시작했다. 체육과 주임으로 있던 1938년 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신사참배와 창씨개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거부해 1939년 9월 학교를 떠났다. 이때 중앙여자고등학교의 박순천 등이 교직을 떠났다. 8·15해방 이후 복직되어 1955년까지 이화여대 교수 겸 체육학부 부장을 역임했고, 1961년에는 같은 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해 정년퇴직했으나 1975년 까지 강사로 출강했다.
특히 사회 및 단체활동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는데, 1930~60년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연합위원과 학생부 위원장, 국제친선부 위원장·부회장을 역임했고, 동연합회 회장·위원장을 거친 후 명예 연합회원으로 활동했다. 그외에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1954~60)·부총재(1962~71)를 역임했고, 대한여성체육학회 회장(1948~58), 대한올림픽위원회 이사 및 위원(1954~56, 1964~67),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부회장(1964~73), 대한가족계획협회 부회장(1971~75) 등을 역임했다. 한편 대한민국문화표창상(1962)을 비롯하여 대한민국국민훈장 동백장, 한국 걸스카우트연맹 공로상(25주년), YWCA 공로표창(50주년), 여성체육공로자 표창장(1972), 대한적십자사 적십자인도(금)장(1976) 등을 받기도 했다. 한국여성체육학회 설립의 주춧돌 구실을 했으며 여성 체육지도자 양성과 프로그램 제공 등 여성 체육의 저변 확대와 보급에 기여한 바 크다./브리태니커
[1894년] 독립운동가 임국정(林國貞) 출생
1894. 3. 25 함남 함흥~1921. 8. 25.
1919년 3·1운동 후 북간도로 건너가 윤준희(尹俊熙)·한상호(韓相浩)·최이붕(崔以鵬) 등과 더불어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 무장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철혈광복단이 당시 남만주에 본거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자 북로군정서의 특파원으로 윤준희·한상호·최이붕 등과 함께 김하석(金河錫)의 제안으로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송금하는 현금을 습격, 탈취하여 군자금에 충당하기로 계획했다. 조선은행 회령지점 은행원 전홍섭(全弘燮)으로부터 1920년 1월 4~5일경 현금 15만 원을 용정으로 송금할 예정이라는 연락이 오자, 윤준희·최이붕·한상호와 함께 매복했다가 현금호송차를 습격해 탈취했다. 김하석과 함께 1월 9일 탈취한 현금을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다량으로 구입해 북로군정서에 전달했다. 한편 서성권(徐成權)을 회장으로 하는 간도청년회단의 운동부장으로, 강백규(姜白奎)·이광(李光)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1920년 12월 일제 밀정으로 암약하던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한준희·한상호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27년] 독문학자 강두식(姜斗植) 출생
1927. 3. 25 서울~.
195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독문과를 거쳐 1955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73년에 서울대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 중앙대 교수, 1962년 서울대 교수, 1964년과 1971년에 한국·독일 문학회 회장, 1980년에 서울대 인문대학장 등을 지냈다. 현재(1990) 서울대 독문과 교수이며 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1965년〈파우스트〉를 번역하여 한국 펜클럽 번역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괴테평전〉·〈독한사전〉 등이 있다./브리태니커
[1926년] 무용가 송범(宋范) 출생
1926. 3. 25 충북 청주~.
본명은 철교(喆敎). 17세 때 신무용의 대가인 조택원(趙澤元)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춤에 뜻을 두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동인(韓東人)에게 1년간 발레를 배웠다. 또 장추화(張秋華)무용연구소에서 거의 독학으로 인도춤과 마리비그만 등 표현주의 경향의 모던 댄스를 익혔다. 1948년 현대춤 계열의 작품 〈습작 習作〉으로 첫 선을 보인 뒤 1949년 〈출진 出陣〉·〈인도의 연가〉, 1950년 〈수련몽 睡蓮夢〉을 내놓아 주목받았다. 6·25전쟁 때 피난지에서도 〈망향〉·〈양자강〉 등을 발표했고, 1956년에는 〈패배자〉·〈죽음의 승리〉·〈항거〉 등을 발표하여 현대인의 삶의 고뇌를 표현했다.
1957년부터는 발레 계열 작품으로 〈환상교향곡〉·〈유쾌한 휴일〉·〈무도회의 권유〉 등을 해마다 발표하면서 방향전환을 시도했다. 1961년 한국발레단을 창단하고 1962년부터 13년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한국춤계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서울예술고등학교·서라벌예술대학 등에서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그 뒤에도 창작춤 〈강강술래〉·〈우물가에서〉·〈전원풍경〉·〈봄의 찬미〉 등으로 일본·방콕·유럽 등지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리나라 창작춤 활동의 토대를 세웠다. 1972년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별의 전설〉·〈왕자 호동〉·〈사의 승무〉·〈춘향전〉·〈도미부인〉 등을 발표했다. 중앙대학교 무용과교수,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다./브리태니커
[1867년] 미국의 조각가 보글럼(Borglum, John Gutzon de la Mothe) 출생
← 보글럼
1867. 3. 25 미국 아이다호 베어레이크 세인트찰스~1941. 3. 6 시카고.
천연의 바위에 거대한 정치가 조상(彫像)들을 새겨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을 되살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890~93년에 파리에 있는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파리에서는 살롱전에 그림과 조각을 모두 출품했으며, 영국에서는 중요한 작품의 주문들을 받고 왕실의 인정을 받았다. 1901년 뉴욕 시에서 〈디오메데스의 암말 The Mares of Diomedes〉이라는 청동 군상(群像)을 만들어 이름을 날렸는데, 이 작품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미국의 조각품으로는 처음으로 사들인 것이다. 다재다능한 솜씨로 뉴욕 시에 있는 세인트존더디바인 대성당의 〈12사도상(像)〉과 같은 장엄한 조상들을 비롯해 애국자들의 흉상을 많이 만들었다. 얼마 후 설형문자 등 중동지역의 여러 문자들을 연구하는 학자였던 그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작품의 크기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무게가 6t이나 되는 대리석으로 워싱턴 D. C.의 캐피털로툰다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거대한 두상을 만들었다.
일부 남부지방의 여성들은 보글럼에게 이것을 본떠 남부 연합군의 장군이었던 로버트 E. 리의 두상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다. 그러나 보글럼은 그 대신 조지아에 있는 스톤 산에 대열을 지어 행군하는 리 장군과 참모들 및 병사들의 거대한 조상을 만들 것을 구상했는데, 후원자들과 논쟁을 벌인 끝에 이 방대한 작업을 포기했으며 결국 이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완성했다. 그뒤 그는 정부당국에 고용되어 또다른 산을 기념물로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사우스다코타의 러슈모어산 국립기념비에 있는 워싱턴과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의 두상을 조각했다. 그는 뛰어난 공학 기술로 많은 양의 돌을 빠른 시간에 쪼아낼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트와 공기 해머의 기능을 이용한 새 방법들을 창안했다. 이 기념물 작업은 1941년 보글럼이 죽은 해에 완성되었는데, 마무리 세부작업은 그의 아들 링컨이 해냈다.
[1992년] 우주미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 등 313일 만에 귀환
우주정거장 미르호(Mir)에서 우주 탐사임무를 수행하다가 구 연방의 해체로 지구귀환이 늦추어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와 알렉산데르 볼코프 등 우주비행사 3명이 우주선 소유즈 TM-13호를 타고 우주미아생활 313일 만인 1992년 3월 25일 귀환했다.
1991년 5월 18일 구 소련 우주정거장계획의 하나로 미르호에 탄 크리칼료프는 만10개월 열흘간을 우주에 머물며 각종 측량과 기계실험을 해왔다. 크리칼료프가 우주미아가 된 것은 러시아가 돈이 없어서 그의 귀환을 위한 우주선을 발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가 돌아오게 된 것은 독일이 2천4백만달러를 지원해 귀환을 위한 우주선 발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1981년]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 이갑성(李甲成, 1889~1981) 사망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마지막 생존자였던 연당(硏堂) 이갑성 선생! 1981년 오늘 아흔두 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연당은 3.1운동 당시 서른 살의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이갑성 선생은 1933년 신간회 사건 때문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8.15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아홉 차례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과도 입법의원과 민의원,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연당의 유해는 국립묘지의 제1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잘(Faisal ibn Abdul Al Saud, 1906~1975) 피살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1975년 3월 25일 조카에게 피살돼 오후 2시13분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조카는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리야드 궁전에서의 암살 사건은 국민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왕실은 정신이상인 조카의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파이잘 국왕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단두형에 처해졌다.
1964년 11월 국왕에 즉위한 파이잘은 곧 국가재정을 건전히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해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제3차-4차 중동전 때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들에게 석유금수라는 강한 태도를 보였으나 중동평화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평화추진을 위해 노력했다.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 출범
유럽은 작은 땅에 여러 나라가 얽혀 있는 탓에 역사적으로 늘 경쟁과 대립, 그리고 이로 인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는 중국과 이슬람 세력에 뒤져 있던 유럽이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인(動因)이 되기도 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인들은 반복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꿈인 유럽통합을 모색한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석탄과 철강산업의 통합을 제창하며 꿈의 실현에 나섰다. 이 제안은 유럽연합이 이 날을 ‘유럽의 날(Europe Day)’로 기념할 만큼 유럽통합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듬해 4월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족시키면서 ‘유럽 합중국’을 향한 유럽인들의 먼 여정이 시작됐다.
1957년 3월 25일에는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회원국 간 자본·상품·노동력·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창설에 조인함으로써 유럽통합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1928년] 안창호, 김구 등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24년 중국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국민당의 단일정당으로 결속된 것을 계기로 중국·만주 등지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한인들 사이에 ‘유일당(唯一黨)’ 촉성운동(促成運動)이 일기 시작하였다. 사상과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자들이 하나의 정치조직 아래 결속해야 한다는 데 그 명분을 두었다. 1927년 임정요인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하여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 최고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고 헌법에 밝힘으로써 유일정당이 최고헌법기관임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분열 ·대립되자 유일당에 참여하려던 좌익계 독립운동자들이 이를 외면하게 되어 결국 유일당 결성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정당조직의 의욕을 북돋아준 결과가 되어 각지에서 여러 정당의 결성을 보게 되었다. 그 하나가 1930년(1928년이라는 설도 있음) 상하이[上海]에서 민족주의 민주주의 신봉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기초적 정치세력으로서 조직된 한국독립당(한독당이라 약칭함)이었다.
여기에는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이 참여하였다.
[1921년] 프랑스의 연극, 영화 배우 시뇨레(Signoret, Simone, 1921~1985) 출생
← 영화 금투구의 포스터
본명은 Simone Kaminker.
1921. 3. 25 독일 비스바덴~1985. 9. 30 프랑스 외르.
따뜻하고 용감한 여성역을 훌륭하게 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 프랑스 국적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좌익 운동에 참가했으며, 여러 편의 연극에 출연한 뒤 영화 〈금투구 Casque d'or〉(1951)로 스타가 되었다. 〈꼭대기에 있는 방 Room at the Top〉(1958)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화협회 및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배우로 상을 받았으며, 1965년에는 〈바보들이 탄 배 Ship of Fools〉로 다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51년 첫 남편인 영화감독 이브 알레그레와 이혼한 뒤 가수이며 배우인 이브 몽탕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함께 로젠버그 처형과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 프랑스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6년의 헝가리 사태로 그들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녀가 자신의 자서전 〈그리움은 옛날의 그리움이 아니다 La Nostalgie n'est plus ce qu'elle était〉(1976)에서 적고 있듯이 그들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그들의 느낌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그녀는 몇 편의 텔레비전 연속극에도 출연하여 성공했으며, 1985년 출판한 2번째 소설 〈안녕, 볼로디아 Adieu, Volodia〉를 비롯한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25년] 미국 작가 오코너(O'Connor, Mary Flannery) 출생
1925. 3. 25 미국 조지아 서배너~1964. 8. 3 조지아 밀리지빌.
미국의 소설가·단편작가.
주로 남부의 시골을 배경으로 인간의 소외를 다루었으며,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밀리지빌에 있는 조지아주립여자대학을 졸업한 뒤 아이오와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1946년 〈악센트 Accent〉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첫 장편소설 〈현명한 피 Wise Blood〉(1952)는 자신이 '종교를 갖지 않은 신앙심'을 탐구했다고 표현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그녀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에 대한 예민한 감식력, 날카로운 종교적 상상력, 이후의 작품을 특징짓게 된 부조리 성향 등이 결합되어 있다. 그뒤 발표한 단편들을 모아 출판한 첫 단편집 〈착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외(外) A Good Man Is Hard To Find, and Other Stories〉(1955)로 형식의 거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밖의 작품으로 장편소설 〈끝까지 공격하는 자는 그것을 얻는다 The Violent Bear It Away〉(1960)와 단편집 〈오르다 보면 모든 것은 한 곳에 모이게 마련 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1965)이 있다. 특별한 행사 때 쓴 산문들을 모은 〈신비와 풍습 Mystery and Manners〉은 1969년에 나왔다. 1971년 유고집으로 출판된 〈단편집 Complete Stories〉에는 이전에 책으로 출판되지 않은 여러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홍반성낭창으로 10년 이상 불구로 지내다가 결국 이 병으로 죽을 때까지 어머니가 물려받은 농장에서 작품을 쓰고 공작을 키우며 수수하게 살았다. 그녀가 죽은 뒤 출판된 서간집 〈존재의 습관 The Habit of Being〉(1979)은 인습적인 규격화를 거부한 한 작가의 삶과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1954년] 제1회 학-예술원 회원 선거
대한민국학술원은 학술발전에 공적이 있는 과학자를 우대·지원하여 학술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과학자들의 대표기관이다. 1952년 제정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3월 25일 초대 학술원회원 50명을 선출하고 같은 해 7월 17일 개원하였다. 1985년 8월 12일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통합되었으며, 1988년 12월 31일 대한민국학술원법이 제정되면서 문화보호법은 폐지되었다. 1990년 1월 3일에는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다시 분리되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우리나라 예술가의 실질적인 대표기관이다. 1952년 8월 7일 법률 제248호 문화보호법에 따라 설치되어 1954년 7월 17일 443명의 문화인 대표들이 뽑은 25명의 일반회원과 이들이 추천한 10명의 추천회원 그리고 대통령이 임명한 4명의 임원회원 등 총 39명의 회원으로 개원하였다. 초대회장은 고희동(高羲東)이다. 1955년 4월 9일 예술원상 수상규정을 제정하고, 1988년 12월 31일 대한민국예술원법을 제정하였다. /naver
그밖에
2003년 미국 LA법원, 스팸메일에 첫 실형 선고
2002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강진. 최소 2000명 사망
2002년 정부, 교육정보시스템 구축 추진 발표
1994년 조용필, 재미교포 사업가와 결혼
1981년 미국 보스턴의대, 사상초유의 암면역동물 생산에 성공
1981년 내무부, 연좌제 폐지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77년 소련, 유럽 및 극동에 SS-20미사일 배치
1974년 미국 골퍼 죠니 밀러 홀인원
1969년 파키스탄 아유브칸 대통령 하야
1968년 주한미군 팬텀기대대 창설
1964년 미국 일본간 TV 우주중계 실험에 성공
1958년 서독 하원 국방국의 핵무장 결의안 가결
1951년 이라크, 석유국유화 법안 결정
1951년 국군, 동해안 38선 돌파
1949년 주미대사관 창설
1949년 장면초대 주미대사, 트루먼에 신임장
1929년 경성제대(서울대 전신) 제1회 졸업식
1928년 미국의 우주 비행사 - 1970년 아폴로 13호 비행사령관 - 제임스 러벨 출생
1926년 항일투사 박열, 사형 선고
1919년 독일의 조각가 렘브루크 사망
1909년 창경원 동물원 준공
1895년 을미개혁 추진
1881년 이만손 등 만인소 상소
1881년 헝가리 작곡가 벨로 바르톡 출생
1871년 군포제 폐지, 호포제 실시
1867년 이탈리아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출생
1864년 독립운동가 이승훈 출생
1829년 그리스 독립
1801년 독일 시인 노발리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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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독립운동가 이승훈 출생
1864(고종 1) 평북 정주~1930.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교육가·기업가.
개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벌였다.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자는 승훈(昇薰), 호는 남강(南岡).
초년
아버지는 석주(碩柱)이고,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자 1869년에는 고향을 떠나 유기(鍮器) 제조공업의 중심지인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여 약 3년간 서당에서 수학했다. 1873년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납청정에서 유기제조와 도산매업을 하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기업활동
1879년부터는 점원을 그만두고 주인이던 임권일(林權逸)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기행상을 하다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에게 돈을 빌려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과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열었다. 이후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환경을 개선하여 공장을 위생적으로 만들었고 근로조건을 개선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일정한 시간의 휴식을 하도록 했으며,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근로자를 평등하게 대접했다. 약 7년간 순조롭게 영업을 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집과 상점·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다시 오희순을 찾아가 자본금을 빌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상점과 유기공장을 재건하여 근처의 유기공장을 거의 독점했으며 평양 지점을 다시 열고 진남포에도 지점을 열었다. 1901년 평양으로 가서 윤성운(尹聖運)·김인오(金仁梧) 등과 합자하여 무역상회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평양·인천·서울을 오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서울과 인천 간의 운송업을 시작하고 인천항에 수입되는 석유·양약 등을 구입하여 이를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산매하기도 했다. 또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지물(紙物)을 매점(買占)하고 종이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팔아 큰 이익을 보았는데, 이의 금이 5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어나자 군수품사업에 손을 댔으나 전쟁이 뜻밖에 빨리 끝나자 큰 손해를 보았으며 값싼 일본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유기공업도 큰 타격을 받게 되자 1905년 용동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이후 민족문제에 대해 자각을 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1908년 평양에 신민회(新民會)의 산하기관으로 각종 유인물과 서적 등을 출판·공급하기 위해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고 관주(館主)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수입하고 한국의 특산물을 수출할 생각으로 인천에 파마양행(巴馬洋行)이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서구 무역상사와의 직접 무역거래가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염려한 일본의 방해로 이탈리아 파마양행측의 지배인이 귀국하여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때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 자본의 대량 유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소민족자본은 합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 단계로 관서지방의 상공업자들은 그들대로 자본을 합자하여 회사를 설립할 것이고, 다른 지방의 상공업자들도 서로 자본을 합치면 일본 자본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민족기업은 외래 대자본에 눌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자본을 확대 모집하여 사업을 확장하려던 무렵에 무관학교사건·105인사건으로 인해 체포되면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1910년대 윤성운·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선천·박천·정주 등지의 토착자본을 끌어들여 근대적 산업자본화를 위해 노력했다.
독립운동과 교육사업
1905년에는 용동에 은거하면서 국내외 정세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은둔지인 용동에서 나와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봉건적 교육을 하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도중 가을에는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자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가출옥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공부했다. 1917년 선천의 북교회(北敎會)에서 오산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북노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제7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상하이[上海] 교민 대표로 참가한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자는 논의를 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춘(徐椿)·조만식 등과 더불어 국내 및 상하이·도쿄[東京]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할 것을 논의했으며, 김승만(金承萬) 등과 더불어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안전한 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연락할 거점으로 교통사무소를 설치했다.
3·1운동 때에는 기독교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와 함께 광문사(光文社)의 설립발기인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후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3·1운동과 같은 방법을 통한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래에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이상재·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의 조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으며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5개월 동안 경영을 맡았다. 이때 조선기근구제회에 관여하는 한편, 출감 후의 환영회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국에 관한 것 등에 대해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하여 정치·교육·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25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으로 기울어지면서 개량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자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공동체 건설운동
초기의 이상촌운동은 1907년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을 세우면서 시작되어 위생·단발·금주·금연·근면·문맹퇴치 등을 당면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온 동리가 술과 담배를 금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위생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가내작업으로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모아 판매하기도 했다. 한편 야학을 열어 생활에 관한 지식을 보급했으며 청년회에서는 교육계몽을 실시하고 공동작업 등에 모범을 보였다. 또 국민들의 정신적 퇴폐를 한탄하면서 정신상의 수양을 위해서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용동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다시 용동으로 돌아온 1920년대에는 용동을 중심으로 한 이상촌운동을 7개 마을로 확대하고자 하여 먼저 각 마을에 동회(洞會)를 조직하도록 했고, 7개 마을의 동회를 묶는 조직으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두었다. 학생과 주민을 위한 생활필수품, 학용품을 취급하는 협동조합을 운영했다. 이상촌운동의 기본조직으로 조직된 자면회(自勉會)는 오산공동체운동 중 마을공동체의 자치기구로 근면·청결·책임이라는 동시(洞是)를 제정했다. 자면회는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 등 생활의 개선과 생활의 수준향상에 노력했으며 자면회의 협력조직으로는 청년회와 학생조직이 있었고 상부조직으로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산학교 교정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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