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자 선교사의 삶(제7호) : 3. 담양에서의 종교·사회복지
호남초기선교사 타마자의 삶을 연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고, 관련 정보가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3-3) 광덕학교와 교육복지
당시 담양읍교회를 시무하였던 허화준 목사는 철저한 경건생활로 주일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하게 하였고, 광덕학교를 세워 배우지 못한 소년들을 모아 성경과 일반 교과목을 가르치는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타마자 선교사의 행적은 당시 신문에도 잘 나와 있는데, 본인은 조밥과 맥반을 먹으면서라도 아동의 교육을 위해, 광덕학교(담양읍 백동리 254번지, 초등 3년 과정)에 토지 800평과 천원(당시 광주읍 서방면 토지 평당 가격이 6.5원으로 약 6,500평 정도)를 기부하였다(동아일보 1934.12.14.). 또한 타마자 선교사 25주년 기념축하식(동아일보 1935.8.13) 기사를 보면, 본인이 세운 30여 처 교회연합으로 담양읍 예배당에서 축하예배를 드렸는데, 무상아동교육기관 6곳과 학비를 대준 학생이 30여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담양군, 2011:93). 그러던 중 1937년 9월 6일 신사참배로 선교부 산하 10개 학교 가운데 광주의 숭일, 수피아, 목포의 정명, 영흥, 순천의 매산, 담양의 광덕학교를 모두 폐쇄하였다. 이후 일부학교는 개교가 되었으나 광덕학교는 개교하지 못했으며, 앞으로 광덕학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3-4) 옥과교회 조용택 전도사
타마자 선교사의 사역은 옥과교회 조용택 전도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옥과교회의 이수정 순교자는 전라도 옥과현에서 이병규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온건개화파 양반 학자였는데,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으며, 일본의 기독교 농학자인 쓰다센을 만나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연구 하던 중 1883년 4월 29일 일본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한국인 개신교 신자가 되었으며, 이후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이 복음서를 들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다(한국기독교역사학회a, 2014:115-122).
한국개신교 선교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수정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구한국정부의 노여움을 샀고, 개화당의 김옥균과도 사이가 나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으나 1886년 귀국 즉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진위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옥과교회, 2012:21).
조용택 전도사는 1902년 옥과에서 태어났으며, 당시 타마자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던 고모 조덕화의 전도를 받고 25세 때 예수를 믿게 되었다. 타마자 선교사는 조용택의 신앙을 보고 선교부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고, 그는 타마자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순창과 담양지방의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 일을 하였다. 조용택 전도사는 타마자 선교사의 중매로 결혼을 하였으며, 타마자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뤘고, 6.25때는 유화례 선교사를 피난시키는 등 선교부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였으나, 1950년 9월 29일 공산당에게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타마자 선교사는 1930년 전남노회 재단법인 설립의 공로를 조용택 전도사에게 돌리고 있는데, “ 미스터 조가 없었다면 노회재단의 설립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선교회의 많은 돈을 관리하면서도 물질의 유혹을 받지 않았다”라고 회고하였다(옥과교회, 2012:68-85). 조용택 전도사 가문은 2대에 걸쳐 타마자 선교사와 선교의 길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신앙은 전남과학대학과 남부대학교의 우암학원 조용기 이사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타마자 선교사가 거주하였던 현 담양공공도서관과 옥과교회의 거리는 약 14킬로미터 정도이며, 당시에는 자전거로 가능한 거리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담양 공공도서관에서 옥과교회 이수정 기념관까지의 자전거 도로가 생기면 담양지역을 찾는 종교 관광객들에게 의미있는 순례길이 되리라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