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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제4주일)
권위의 회복
신18:15~20; 고전8:1~13; 막1:21~28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 안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다시 말해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그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에, 정말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렇게 산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거기엔, 가령 본 회퍼 목사님처럼 우리가 아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무수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무슨 병 고치는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고 있습니다만, 오늘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문자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축귀 능력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숨어있는 온전함”을 회복시키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우리의 숨어있는 온전함일 드러나는 “삶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가치를 훼손할 것 같은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일상의 요동치는 삶 가운데서, 내 삶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지 않고, “숨겨진 온전성”을 인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품위를 지키며 사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난 성탄절에도 말씀드린, 5세기의 성 그레고리의 성탄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존엄성)를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비참함으로 돌아가지 말고 품위를 지키십시오.”
여러분,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질그릇 같은 내게 “하나님에게서 나는 엄청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본 회퍼 목사님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3개월 전, 감옥 안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선한 힘에 든든하고 고요히 감싸여
신비로이 보호받고 위로받으며
나는 오늘 그대들과 더불어 살고
나 그대들과 더불어 새해를 향해 나아갑니다.
.....
선한 힘에 감싸여 신비롭게 보호받으며
우리는 고요히 다가 올 것을 기다립니다.
밤에도 아침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다가오는 새날에도 함께 계심을 확신합니다.
그가 감옥 안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유명한 시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태연하게, 명랑하게 확고하게,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가 감방에서 나온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는데.
나는 누구인가? 자유롭게, 다정하게, 맑게, 명령하는 것이 나인 것처럼, 간수들과 대화한다고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하는데.
나는 누구인가?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자랑스럽게, 승리한 자처럼, 불행한 나날을 참고 있다고 사람들은 내게 말하는데.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자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알고 있는 나에 지나지 않을까? 새장 속의 새와 같이 불안하게, 그리워하다 병들었고, 목을 졸렸을 때와 같이 숨 쉬려 몸부림치며....”
그러면서,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일까? 둘 다 나일까?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스스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약자일까?...”
그러다 이 시는 이렇게 끝맺음을 합니다.
“나는 정말 누구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주님,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대단한 분들의 이야기지만, 그러나 그들도 우리처럼 똑같은 인간이었고,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사람이 가진 존엄성, 온전함이 무엇인지를 한껏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 정도의 품위를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교의 부활의 능력은 적어도 이런 능력을 말한다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이런 믿음의 증인들은 우리를 구름떼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의식을 갖는 것이 하루 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아마도 이런 의식은 우리가 소유할(혹은 도달할) 어떤 수준이라기보다는 평생 지향해 가야 하는 방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에펙테이노메노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북쪽에 있는 한 작은 시골마을 가버나움에서 행하셨던 치유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이 “권위”가 있어 사람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이 많이 들어오던 “율법학자”(서기관, 그람마튜스)의 것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회당에 악한 귀신(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왜 우리를 간섭합니까? 우리를 없애려 오셨습니까?”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꾸짖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하자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는 겁니다. 그때 사람들의 반응은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직역하면, ‘권위를 통해 나온 새로운 가르침’)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수군댔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 속에 “권위”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사람들을 가르쳤을 때 “그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다”는 것이고(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권위를 통해 나온 새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권위”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권위” 혹은 “권세”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엑수시아>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1차적인 의미는 “선택할 자유”(freedom to choice)라는 뜻이고 그 다음이 힘/능력(power, ability)이라는 뜻이 있고(선택할 자유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힘/능력이 있으니까) 권위(authority)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엑수시아>는 어원적으로 보면, <엑스>라는 단어와 <우시아>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엑스>라는 뜻은 영어의 from, out of~ “~로부터”라는 뜻이고, <우시아>의 본디 뜻은 “본질”,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be 동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미>의 여성분사 <우사>에서 왔거든요. 그러니까 영어로 하면 being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엑수시아>는 from being, 즉 “존재, 본질로부터”라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서 왔는지 아시겠지요? 본질에서, 존재에서 온 것입니다. 본질과 존재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모든 힘은 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바로 그 본질, 그 존재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존재로부터 행동하시고 존재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본질 안에, 당신의 고요한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에, 그분의 존재는 하시는 말씀과 일치했고 행하는 행동과 일치했습니다. 그분은 힘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행동은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심지어 십자가를 지시는 것까지 자유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삶은 자유로운 삶이었고 온전한 삶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이런 권위는 당시 머리로 살았던 “율법학자”들의 권위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바로 이 권위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에게 이 ‘권위’(권세)를 준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권위는 단지 예수님의 독점물이 아니라 바로 “온전한 인간”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온전함을 가지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힘과 능력을 가지고,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라. 그 자유, 그 능력, 그 권위는 바로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 병자들, 귀신들린 자들의 온전함을 회복해 주신 것은 그들 안에 있는 “권위”를 회복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숨겨진 온전함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런 권위, 이런 힘과 자유를 발견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포하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엑수시아)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그런데 <엑수시아>에서 <우시아>의 본디 의미가 존재, 본질이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이 <우시아>가 “소유물, 재산”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권위(또는 힘)는 어디서 오느냐면, 그 사람이 가진 소유(재산)에서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드문 일이 아니고, 흔하고 일반적인 일이지요. (오히려 권위가 본질/존재에서 오는 것이 너무나 드문 일이지요)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냐면 그 사람이 가진/소유한 “무언가”에서 나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의 힘은 “통장 잔액”에서 나오고, 우리의 “가방끈”에서 나오고(“아는 것이 힘이다”), “사회적 위치나 정치적 권력”에서 나옵니다. 요즘 검찰 권력 얼마나 대단합니까?
물론 예수님 당시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사실 인류 역사가 힘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힘은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니까요. 죽음 앞에서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힘에 취하면, 그게 그렇게 안되는가 봅니다. 이런 힘을 가지고 남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우리 사람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게 박힌 욕망인가요?
그래서 시편은 노래합니다.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구하는데 군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지는데 많은 군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시33:16~17)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의 원천인 그 본질/존재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 힘으로 말씀하셨고, 그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힘으로 살라고, 그 힘으로 말하고, 그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8장에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의 아주 커다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당시 신들에 바친 고기들이 많았고, 신들에게 제사를 바친 다음에 그 고기는 좀 싼 값에 시장에 내다 팔렸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 중에도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사서 먹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답변은 분명합니다. 세상에 우상이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한 분 뿐이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친 제물도 그냥 고기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이의 “지식”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지식을 가진 사람을 소위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누구에게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곧바로 다른 얘기를 합니다. “강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소위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보면 걸려 넘어질 수 있고, 한편으로 자신도 강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그 음식을 먹음으로 양심에 걸려 넘어지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말 약한 사람을 위하는 힘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믿음 강함을 드러내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사람들의 입장으로 내려오는, “약한 자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그 약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힘이고 진정한 권위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자신의 믿음 좋음을 드러내는 그런 힘은 바로 본질/존재로부터 나온 힘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뭔가로부터 나온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믿음은 본질이 아니라 소유물이 됩니다.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 즉 본질/존재로부터 나오는 힘을 발견하고, 그 힘과 권위로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권위 있는 사람, 힘 있는 사람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물론 이것은 원한다고 금방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끝까지 달려가야 할 길입니다. 예배와 기도수련은 그 힘과 권위를 회복하는 일을 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마음의 작업들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소유한 것에 틈을 벌리는 일을 도와 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것을 늘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회복한 그 힘과 권위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힘이 아니며,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이런 힘들은 모두 자신의 가진 소유에서 나온 힘입니다), 오히려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받아주고 그들이 있을 공간을 내어주는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내어 쫓으셨던 예수님처럼, 오늘의 약한 자들을 대하는 믿는 자들의 힘과 권위이며, 이 힘과 권위가 건강한 공동체의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참된 권위를 우리도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우리의 힘을 삼지 않게 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그분의 본질과 존재가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그 참된 힘과 권위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약한 자를 받아주고 배려하며 그들이 머물 작은 공간을 내어줄 수 있는 진정한 강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