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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명언 중에, “칠판을 향해서 반생, 칠판을 등지고서 반생”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같다. 칠판을 두고서 한 바퀴 돌았다는 것, 그것이 그의 생이라는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 역시도 비슷한 일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칠판을 향해서 앉는 것은 학생이고, 칠판을 등지고서 서는 것은 선생이다. 학생과 선생, 누가 더 행복할까? 이 질문을 내가 받는다면, 나는 “학생”이라 대답할 것이다.
선생보다 학생이 더 행복한 이유를 학생 입장에서 찾아본다면, 무엇보다 학생에게는 미래가 열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학생일 때는 아직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그러나 선생이 되면, 이미 미래는 많은 부분 ‘닫혀버린 과거’가 된다. 예컨대 만약 지금 내가 학생이라면 내 학생시절에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미국유학’에 도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선생이 되었기에 내게 그 꿈을 현실화하는 것은 거의 ‘꿈’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 ‘꿈’을 포기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부터도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미래가 내게 남아 있다고 믿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다음으로 학생이 더욱 행복한 이유는, 선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친다. 하지만 학생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을 배운다. 무지의 여백(餘白)을 줄여간다는 점에서 학생에게 그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선생이 자기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가능성이 전연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식의 탐구(내지 과정) 그 자체를 함께 해간다면, 어쩌면 그 보다 더 좋은 가르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의 경우에는 그런 방식의 수업이 얼마나 가능하겠는가.(나의 경우 대학원 수업에서는 다소 그런 점을 시도해 보기는 한다.) 안전한 것은 역시 스스로 아는 것을 전수(傳授)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을 통하여, 선생의 지식이 더 늘 수 있다면 좋지만 말이다.
학생이 되는 것은 선생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미 선생이 된 나의 경우가 학생일 때보다 덜 행복하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된다는 것이 곧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일부의 선생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선생이 다 그렇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선생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학생이었을 때 느끼지 못한 행복감을 얻는다면, 그런 선생은 나로서는 한없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선생이 아닐 수 없다.
실제 나는 선생 노릇을 금년으로 24년째 하고 있다. 90년부터 97년 8월까지는 시간강사로서 칠판을 등졌고, 97년 9월부터 현재까지 약 만 15년은 전임교수로서 칠판을 등졌다. 그러나 학생노릇을 한 시간은 총 30시간이다. 이 선생노릇과 학생노릇 중 5년은 겹치는 시기이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친 시기였다.
이렇게 “24년 선생, 30년 학생”의 총결산을 해볼 때, 역시 내게는 학생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앞으로도 학생노릇을 더더욱 오래
오래 하고 싶다. 여기에 또 하나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같다. 선생노릇에는 한계가 있으나, 학생노릇에는 시간적 한계가 없다는 사실. 선생 노릇은 앞으로 약 11년 6개우러 정도 남아있다. (건강하게 정년을 맞이한다는 가정 아래서). 하지만 학생노릇에는 정년이 없다. 교수 정년은 있어도 학생 정년은 없다. 건강이 허락하고, 학비를 보탤 경제적인 여건만 허락한다면 언제까지라도 학생노릇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학생하는 것이 좋다. 행복하다. 위의 년수 계산에서 연구년 시절의 ‘청강시간’은 산입(算入)하지 않았으나, 그 시간 역시 내게는 소중한 학생체험이고 유학체험이다. 교토의 불교대학 시절에는 「청강생의 행복」(『우호의 수레바퀴』, 불교대학 국제교류과 발간)에 싣기도 했다.
그런 행복체험이 있기에 코치대학에서의 1학기 동안에도, 또 다시 ‘학생체험’을 누리기로 했다. 그 첫 번째 --- 사실상 사전 기획단계에서는 ‘유일한’ --- 대상이 엔도(遠藤) 교수의 대학원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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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선생의 주요한 전공은 ‘중국 송대의 가족제도’이다. 이 분야의 저서도 낸 바 있다. 그러나 송대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일본과 송나라의 교류’를 시야에 넣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맥락에서 송나라에 가서 송나라의 상황이나 사정을 여행기에 넣은 죠진(成尋)스님의 여행기 『참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불교승려의 저술인 만큼, 적지 않게 불교의 지식이 요청된다. 나의 합류로, 이 책의 독서회도 다시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엔도 선생은 여기 코치대학의 교수이다. 코치대학은 지방의 국립대학이다. 일본의 경우, 그 지방의 국립대학 교수에게는 그 지방과 관련한 연구에 대한 요청이 있다. 문부성 자체가, “당신들 지방 국립대학은 그 지방에 신경써라. 그것이 당신네들의 존재이유가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코치현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세 번째 연구분야이다.
대학원 수업에서는, 바로 이 세 번째 분야와 관련한 수업이 행해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토사사(土佐史)’라고 할까. 중국 송나라 가족제도 전공 교수가 마침내 일본의 코치현의 역사라는 지방사를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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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강생’으로 참여하게 된 토사사의 수업에서 교재로 다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토사도서구락부’의 신문이었다. 토사는 ‘코치’현의 옛이름이다. ‘토사의 나라’라고 말해지다가, 에도시대에 ‘토사의 번(藩)’으로 일컬어졌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조치로서 ‘코치현’이 된 것이ᄃᆞ.
그러니 ‘토사도서구락부’는 토사지방에서, 토사사람들이 만든 ‘도서구락부’라는 말이다. 구락부는, 우리에게도 그 용례가 남아 있다. ‘외교구락부’와 같이. 구락부는 영어 ‘클럽(club)’의 음사(音寫)가 아닌가 싶다. 책 읽기 클럽, 지금 내가 추진하고 있는 ‘독서회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독서회’와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을 중심으로 해서 책을 수집하고, 또 대여해
주었다는 점이다. 도서관 역할을 했던 셈이다. 메이지 시대에 ‘토사’라는 지방에서 일어난 최초의 도서관운동인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월간의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바로 「토사도서구락부」인데, 엔도 선생의 수업은 바로 이 신문을 읽는 것이다. 벌써 오래되었는지, 내가 처음 참여했을 때 42호인가를 읽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이 신문을 계속 읽을 것같다.
도서관으로서, 또 신문으로서 ‘토사도서구락부’를 이끈 인물이 고토(五藤)라는 분이었는데, 토사번의 가로(家老) 중 한 사람이었다.
토사번은 에도시대가 성립하자 --- 토쿠가와 막부가 성립하자 --- 야마우치(山內)라고 하는 무사에게 주어진다. 이른바 ‘토사이십사만석’이라 말해진다. 토사, 즉 고치현에서 나오는 세수(稅收)가 24만석이 되는데 그것을 막부는 야마우치 가문에게 준 것이다. 초대는 야마우치 카즈토오(山內一豊)이다. 현재 고치현립도서관 앞에 말을 탄 장군의 모습으로 서있는 사람이 그이다.
막부로부터 받은 24만석을 활용해서, 번주 야마우치는 그 너른 토사번을 다스려야 했다. 그에게도 챙겨야 할 사무라이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참모 중에서 가장 상위의 그룹 --- 가로들 --- 이 각기 한 군을 다시 분봉(分封)받아서 다스린다. 토사번에는 전체로 7군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코치시에서 동쪽 지방인 아키(安藝)군을 받은 가로가 고토씨이다. 그리고 아키군을 대대로 다스려왔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말았다. 번이 현으로 바뀌면서, 그들의 지위에도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동적으로 관료로서 재출발 할 수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고토씨는 ‘토사도서구락부’를 이끌게 된다. 고마운 일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일본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이 ‘도서관 운동’의 개조(開祖)가 그 뜻을 이어가는 후손을 낳았으니, 코치성 앞의 서점 “후지쇼보(富士書房)”을 운영해 왔다. 작은 서점이었는데, 금년 6월말로 서점은 폐점되고 말았다. 코치에서 책 읽고, 책 사서 보는 인구가 점점 더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도서공급회사로서는 그 명맥을 유지한다는 소문이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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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토사도서구락부」는, 외국인으로서 ‘현대 일본어’를 배운 나같은 사람은 해독불가능한 일본어로 쓰여져 있었다. 소위 ‘메이지 일본어’였다.
그런 일본어를 김갑현 군(고치대학 석사과정, 엔도 선생의 제자, 동국대 사학과 출신) 혼자 읽어 내려간다. 틀린 곳이 있을 때는 엔도 선생이 그 음을 바로 잡아준다. 김군이 어느 정도 읽고 나면, 엔도선생이 다시 한번 말끔히 읽고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이 수업을 통해서 내가 배운 것은 크게 셋이다. 첫째는 ‘메이지 일본어’를 좀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당시 토사지방의 문화에 대해서 다소 알 수 있었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메이지 유신 이후 나라르 세워가는 입장에서 ‘독서’를 통해서 이바지해 가려는 사람들의 열정같은 것이었다. 이는, 독서회 운동을 내 생의 마지막 카르마(일, 업, 의무)로 여기는 내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토사도서구락부」는 신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 토사지방의 학자들 --- 대학이 성립되기 전이므로, 아마도 재야학자가 다수였으리라 --- 이 논문이나 수필 등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의 매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만요슈고의(萬葉集古義)』라는 대저를 남긴 국학자 가모치 마사즈미 특집이었다. 또 자주 등장하는 필자로는 仙石正路같은 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난코쿠(南國)에 있는 ‘토사역사자료관’에 가서 보니, 그 분의 자료로만 전시회를 하고, 도록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역시 대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놀랐다.
토사의 땅에 사는 만큼, 토사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고자 노력은 했으나, 글로 써서 남길만큼의 지식 축적 --- 책 읽기를 통한 ---을 할 수 없었던 점은 아쉬웠다. 그만큼 ‘토사의 역사’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2013. 11. 23. 인도의 푸쉬카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