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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 자리
절대다수의 국민이 참여했던 2016년 촛불 시위는 정의를 향한 목마름의 표현이었다. 촛불 하나하나는 무력했지만 그것이 한데 모이니 총칼보다 더 강한 힘이 되었다. 그로 인해 박근혜 정부는 탄핵당했고 문재인 정부가 시작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의 동력이 정의를 향한 목마름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취임사에서 길이 기억될 멋진 문장을 던졌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일생 동안 쌓아올린 ‘청렴’과 ‘정의’의 에토스는 이 말에 희망을 걸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높고 뜨거웠던 기대는 지난 4년 동안 서서히 침식되다가 배신감을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소위 콘크리트 지지층에 속했던 사람들 중에도 등을 돌리는 이가 생겨났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통령 개인의 청렴성과 정의로움을 신뢰한다. 하지만 그의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거듭하여 보여준 부정한 모습들은 배반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공정과 정의와 평등을 신념으로 싸워왔던 진보 인사들이 개인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내부 정보를 이용하여 사익을 도모했다는 사실은 일반 시민들의 누적된 분노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이번 정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은 우리 사회의 왜곡상이 매우 뿌리 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경제 정의가 무너진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손을 잡고 이끌었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체제는 파이의 크기를 늘려, 모두에게 돌아갈 몫을 키울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심하게 망가뜨렸다. 불행하게도 미국식의 왜곡된 경제 현상은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어왔다. 게다가 최근에 대법원과 검찰에서 지속되고 있는 혼란은 사법 정의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증명했다. 사법부와 행정부의 갈등과 분열 상황은 정의를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처럼 보인다. 기회가 균등하지 않고 과정이 정의롭지 않을 경우, 마지막 버팀목이 사법 정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것마저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널리 퍼져 있다. 그뿐 아니다. 경영인들에게 정의로운 운영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었고, 교육가들이 정직하고 청렴하기를 바라는 것은 옛일이 되어버렸다. 정의를 지키는 일에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종교계는 오래전에 신뢰를 잃어버렸다.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오늘날 ‘공정’이 첨예한 사회문제가 된 원인을 능력주의에서 찾는다.1)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번역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이다. 직역하면 ‘능력주의의 독재’라고 할 수 있다. 샌델 교수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유일한 공정함의 기준인 능력주의가 실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능력주의를 향한 맹종으로 오늘날 사회가 철저한 불공정 게임이 되어버렸음을 지적한다. 기회의 평등이 결코 공정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기회가 균등하더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는 전혀 균등하지 않다. 그럼에도 공정하다고 세뇌당하다 보니, 성공한 사람은 오만해지고 실패한 사람은 절망하거나 분노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샌델 교수는 미국 상황을 두고 분석하는데, 한국에서는 그것이 더 심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공정과 정의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된 데에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사상에도 그 이유가 있다. 팀 켈러는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시대사상을 네 흐름으로 파악한다.2) 첫째는 자유방임주의(libertarianism)의 시각인데, 이 사상에서 정의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것이다. 이 사상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는 것이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둘째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시각으로, 모두에게 공정한 것이 정의로운 사회의 기준이 된다. 하버드 대학교의 존 롤스 교수가 대표적인 사상가다. 특별히 기회의 균등을 가장 중요한 정의로 여긴다. 기회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간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로서 정의란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큰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넷째는 포스트모던 사상(postmodernism)으로, 인류가 불행하게 된 근원적인 문제가 부조리한 사상과 관습과 제도와 조직에 있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불의한 사상과 관습과 제도와 조직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정의를 확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보면, 공정과 정의의 문제로 모든 종류의 권위와 권력에 분노하는 등 조직과 계층 간의 갈등이 깊어질 때 그 이유 중 일부가 우리 시대사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는 극단적 개인주의, 기회와 과정과 결과에 있어서 모두가 공평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이상적 평등주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행복감을 극대화하기를 원하는 감상적 행복주의, 그리고 이 모든 문제가 불의한 전통과 사상과 제도와 조직에 있다는 탈권위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그로 인해 ‘나의 정의는 내가 지킨다’는 생각이 점점 널리 퍼져가고 있다. 자기 몫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믿는다. 어느 정도 성취하면 그것을 모두 투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몫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좌절감에 빠지거나 사회에 대한 분노를 쌓아올린다. 과거에 사회적으로 칭송받던 양보·희생·헌신·나눔·배려 같은 미덕들은 패자의 변으로 치부되고 있다. 가난은 수치가 되었으며 실패는 낙인이 되었다.
깨어진 관계, 왜곡된 세상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요 17:16).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한 현실에 몸담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발 딛고 살아야 할 세상의 부조리를 고스란히 보고 겪는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부조리한 현실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선택하면서 생겨난 인간의 실존이다. 공정과 정의와 평등이 인간 세상의 중요한 가치라는 인식은 인간이 원래 지어진 상태를 잃어버렸다는 자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유발 하라리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무신론적 유물론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존엄해야 할 이유도,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할 이유도, 정의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3)
인권과 자유와 정의와 공정에 대한 의식이 서구 사회에서 시작되어 인간 사회를 건설한 개념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존재로 지어졌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무신론이 보편화된 서구 사회에서 아직도 인권과 자유와 정의와 공정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 사상들의 근거를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그것들을 부여잡고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상의 근거를 분명하게 믿는다. 그렇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이런 가치들에 대해 더 예민하고 더욱 철저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망가지고 인간에게 부여한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 이유는 죄에 있다. 죄는 근본적으로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옆으로는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어져 버린다. 그로 인해 인류는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성서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부정과 불공정과 불평등 문제의 뿌리는 인간의 죄에 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에 머물러 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기로 선택한 인간의 원죄에서 기인한 문제다.
성서에서는 공정과 정의와 평등의 개념에 대해 히브리어 ‘체데크’와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를 사용한다. 체데크와 디카이오쉬네는 ‘정의’(justice)보다는 주로 ‘의’(righteousness)라고 번역된다. 그런 까닭에 성서는 정의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체데크와 디카이오쉬네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보다 더 깊고 폭넓은 개념이다. 성서에서 의는 행위 개념이기 이전에 ‘관계’ 개념이다. 예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마 5:6)이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모든 관계에서의 올바름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린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관계적 올바름’을 의미한다. 믿는 이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유는 관계가 왜곡되고 깨어졌기 때문에 생긴다. 총체적 관계의 깨어짐은 개인의 영혼을 고갈시키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 사랑과 평화의 관계가 혐오와 불화의 관계로 왜곡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불공정과 불의와 불평등 상황이 죄로 인한 관계의 깨어짐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온전한 관계에 목말라한다.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개선해나가기 위해 힘쓴다.
구약성서는 죄로 인해 발생한 인간 사회의 불의와 불공정과 불평등 문제에 매우 현실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시편에는 인간 사회의 부조리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탄원 기도가 다수를 차지한다. 시편 37편과 73편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현실 세계에서 당하는 불이익과 불의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편에 반영된 사회상은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 상황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구약성서에서 신앙은 불공정과 불의와 불평등의 현실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시편에서 신실한 신앙인은 ‘아나빔’으로 불린다. 아나빔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거룩하고 정의롭게 살기 때문에 가난해지고 소외당하고 버림받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신실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현실의 불공정과 불의와 불평등이 한없이 심해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율법에 포함시키셨다. 밭이나 포도원을 추수할 때 밭에 떨어진 곡식을 줍지 말고 귀퉁이의 곡식을 남겨두라는 지침(레 19:9-10)이 그 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배려다. 희년의 지침(레 25:8-55)은 현실의 불공정과 불의와 불평등을 정기적으로 수정하여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려는 배려다. 각자가 능력대로 노력하여 토지를 팔고 사는 일이 허용되지만, 50년마다 한 번씩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부와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게 하고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이다. 역사학자들의 중론은 희년법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법은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실현 가능한데,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신정국가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도 이 법이 실현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보여준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이러한 사회 현실을 향한 비판에 초점을 맞춘다. 아모스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법 정의와 경제 정의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종교가 타락했다는 데 있었다(암 2:6-8). 그들은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일에는 열심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불의를 덮으려는 위장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 행위를 역겹게 여기신다(5:21-23).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너희는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이다”(5:7)라고 책망하신다. 주님은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5:24)고 촉구하신다. 남왕국 유다에서는 예언자 미가가 불공정과 불의와 불평등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한다(미 3:1-3, 8-12). 이사야도 사회문제에 침묵하지 않는다(사 3:13-15; 5:7-23).
예언자들에게 사회적 불의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된 결과다. 사회적 병리현상은 그들의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다. 영혼에 병이 들수록 종교적 형식은 화려해지고 종교의식을 향한 열정은 더 강해진다. 하지만 해결책은 종교 형식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에 있지 않다. 종교 형식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고 그들의 손과 발이 그분의 뜻을 따르게 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하나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는 날을 소망하며 섬기게 된다. 예배는 사회정의로 열매 맺어야 하고, 사회정의를 향한 노력은 예배에서 우러나와야 한다.4) 그런 까닭에 올바른 행동(정의) 이전에 올바른 관계(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배에 열정을 다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불의와 불공정과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실 “그날”은 오늘 우리가 갈망하는 사회적 정의와 공정과 평등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때다. 예언자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 몸의 띠를 삼는다”(사 11:5)고 했다. 메시아가 다스리는 때가 오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11:6)고 예언한다. 여기에 언급된 짐승들은 모두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를 상징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죄로 인해 왜곡되고 깨어진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불의와 불평등과 불공정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등과 공정을 포기할 수 없다.
회복된 관계, 회복될 세상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는다. 이사야가 꿈꾸었던 메시아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 땅에 메시아의 나라를 열어놓으신 그분은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당신의 나라를 계속 다스리신다. 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 메시아의 나라 시민이 되어 그 나라 현실을 경험하며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간다. 지금은 당신을 숨기신 채 일하시는 메시아는 때가 되면 당신을 드러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사야에게 보여주셨던 완전한 정의와 공의와 평등이 실현될 것이다(계 21:3-4).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 나라를 소망하고 지향한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과도하게 실현된 종말론’과 ‘과소하게 실현된 종말론’의 두 극단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과도하게 실현된 종말론’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경계하는 것으로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빌 3:12). 이들은 현실 세상에 눈감고 ‘그들만의 천국’을 산다. 반면, ‘과소하게 실현된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태도를 말한다. 혹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볼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두 시대가 중복된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정의한다.5) ‘두 시대’란 옛 시대와 메시아를 통해 도래한 새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시대가 옛 시대 안에 뚫고 들어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두 시대 안에서 ‘즉흥연주’하듯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믿음을 통해 얻는 의는 모든 관계가 올바른 상태로 바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되어 인간 존재 안에 발생한 의의 결핍이 치유되는 일이 그 시작이다. 그 의는 믿는 이의 존재 안에서 발아되어 그가 맺은 모든 관계 안에 뿌리를 뻗고 가지를 내게 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 편만해있는 불의와 불공정과 불평등의 현실과 충돌한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시작된 내면적 의가 말과 행실을 통해 현실로 표현될 때 세상은 그것을 억압하려 한다. 죄성으로 오염된 세상은 왜곡된 관계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은 죄 사함을 받고 천국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17:18)고 하시면서 믿는 이들을 이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은 의를 따라 죄에 물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믿는 이 자신이 의롭게 되고 그가 맺은 모든 관계에서 의를 행하며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사는 것은 세상에서 자주 손해를 보게 하고 반발을 사게 하며 때로 박해를 경험하게 한다. 믿는 이의 삶이 현실 세상에서 아무런 마찰과 저항을 받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믿는 이들에게는 ‘예배’와 ‘공동체’가 필요하다. 예배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기억하게 하고 그것이 더 깊어지게 하는 힘이 된다. 정의를 위해 노력할 때 예배에서 그 힘을 받아야 하고, 예배는 정의를 향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예언자들이 거듭 강조했듯이, 예배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은 일상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는 이러한 의를 경험하게 하는 모태인 동시에 의로운 삶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모판이다. 볼프는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에서 시작된 것은 창조세계 전체로 확장되고, 창조세계의 완성된 미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에서 처음 태어난 평화가 모든 창조세계를 끌어안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것이 믿음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사명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이 얼마나 개인화되고 내면화되었으며 타계적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의 믿음의 깊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졌다. 믿는 이들이 오히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현실에서 불의한 인물로 보도되곤 한다. 요즈음 ‘복음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이런 현실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얼마나 본질에서 멀어졌는지를 확인한다. 교회가 사회정의에 이바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 내에 불의와 불공정과 불평등의 현실이 더 심하다는 사실을 자주 확인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사야와 아모스가 질책하던 당시 이스라엘 종교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철저하게 반성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의 화를 부를 상황에 와있는 것이다.
■ 각주
1)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서울: 와이즈베리, 2020)
2) Timothy Keller, “A Biblical Critique of Secular Justice and Critical Theory”, 〈Life in the Gospel〉(2020)
3)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김영사, 2015), 552-553쪽.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4)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IVP, 2007)의 “7장: 정의와 예배—개신교 예배 의식의 비 극”을 참고하라.
5) 미로슬라브 볼프, 매슈 크로스문,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IVP, 2020), 197쪽.
6) 위의 책, 215쪽.
첫댓글 불의와 불평등과 불공정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정과 정의와 평등을 포기할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