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에서 식(識, pali vinnana)이란 >
‘식(識, 빠알리어 vinnana)’이란 대상 사물을 분별하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오온(五蘊-色ㆍ受ㆍ想ㆍ行ㆍ識)의 하나이고, 12연기에서는
세 번째 지분(無明-行-識-名色…)으로서, 행연식(行緣識)으로 나타난다.
‘식(識)’의 원래 의미는 ‘나누어(vi-) 안다(j~na)’는 것으로 분별,
즉 분석적으로 아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분별하는 이원적(二元的) 앎이란 말이다.
일반적 의미는 상황을 ‘인식하다’, ‘요별(了別)하다’, ‘판단하다’는 의미이며,
요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앎과 동시에
그것을 식별할 줄 안다는 말이다.
‘식(識)’의 넓은 의미는 대상을 감각, 지각, 사고, 기억, 상상하는
마음활동 일반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을 마음이라 일컫기도 하고, 마음작용을 뜻하기도 한다.
통상 우리가 흔히 쓰는 ‘의식(意識)’이란 것이 식(識)의 일종이다.
단, 불교에서의 의식(意識)은 서양 심리학에 말하는 의식(意識)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식이 ‘알음알이’란 뜻이 있어 무명(無明)의 영역이다.
그래서 “분별하면 식(識)이고 분별하지 않으면 지혜이며,
식(識)은 더러움에 의지하고 지혜는 깨끗함에 의지하한다고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식(識)은 근(根: 인식기관)이 경(境: 대상)을
연(緣)으로 해서 그 작용을 일으킨다고 했다.
이러함을 근(根)ㆍ경(境)ㆍ식(識)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 한다.
즉,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이 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야기되는
마음의 양상들과 그 같은 접촉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마음작용들을
통틀어 식(識)이라고 한다. 따라서 식은 접촉과 함께 일어나고 사라진다.
이 경우의 식(識)은 인식 주체 또는 인식 주관의 의미에 가깝다.
예컨대, 혀(舌-根)가 오미자(境)를 접촉했을 때,
반응해서 시고 달고 매운… 맛을 분별하는 것이 식이다.
이와 같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으며, 혀로 맛보고,
피부로 느낀 것을 마음이 파악하고 분별하는 것이 식이다[6식].
제1식 ― 눈이 대상을 보면 안식(眼識)이 생긴다.
즉 눈(眼)이 대상인 색(色)을 접촉하면(보면)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안식이 제1식이다.
제2식 ― 귀가 소리를 들으면 이식(耳識)이 생긴다.
즉 귀(耳)가 소리(聲)를 접촉하면(들으면) 이식(耳識)이 일어난다.
이식이 제2식이다.
제3식 ― 코가 냄새를 맡으면 비식(鼻識)이 생긴다.
즉 코(鼻)가 냄새(香)를 접촉하면(맡으면) 비식(鼻識)이 일어난다.
비식이 제3식이다.
제4식 ― 혀가 맛을 보면 설식(舌識)이 생긴다.
즉 혀(舌)가 맛(味)을 접촉하면(맛보면) 설식(舌識)이 일어난다.
설식이 제4식이다.
제5식 ― 몸(피부)에 무엇이 닿으면 신식(身識)이 생긴다.
즉 몸(身, 피부)이 대상에 접촉(觸)하면 신식(身識)이 일어난다.
신식이 제5식이다. 이때 신식은 피부가 무엇인가에 접촉했음을
느낄 뿐 접촉했을 때(닿았을 때) 부드럽다 혹을 싫다고 느끼는 것은
제6 의식의 작용이다.
제6식 ― 마음이 작용하면 의식(意識)이 생긴다.
즉 마음(意-뇌) 여러 현상에 접촉하면 의식(意識)이 일어난다.
의식이 제6식이다.
그런데 제6식인 의식(意識)은 특별한 식이어서
앞의 5식(전5식)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제6식인 의식이 분별한다.
즉, 제5식까지는 단순한 감각기관에 불과하다.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스스로 그 느낌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5개의 식을 모두 합쳐 전5식(前五識)이라고 한다.
전5식은 단순히 색깔이 보인다, 소리가 들린다, 냄새가 난다,
(무슨)맛이 있다, (뭐가)닿았다, 등만 느낄 뿐이다.
즉, 전5식은 스스로 분별하고 의식할 능력은 없고, 색깔이 노랗다,
소리가 좋다, 냄새가 독하다, 맛이 좋다, 촉감이 좋다, 등으로
느낌을 분간하는 것은 제6 의식이 인식을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전5식은 제6식인 의식의 도움이 없으면
자기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즉 전5식은 제6식의 도움을 받아
제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와 같이 해서 대상에 대해 알게 된 우리의 지식 모두가
주관적임을 면치 못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실상(實相)을 알지 못하고, 단지 여섯 감각적 지각의 문(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식(識)에 비춰지는(주관적인) 그 대상의 그림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의식에 의해 인식하니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로 볼 수 없다. 실상을 못 본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수행은 그 자의식(일방적인 주관)을 떨쳐내고 실상을 보려는 훈련이다.
그런데 식(識)은 똑같이 ‘안다(j~na)’를 어근으로 하는
지(智, j~nāna)나 혜(慧, praj~nā)와는 달리 분별하는 마음작용이므로
미몽을 낳고, 고뇌를 일으킨다. 그래서 번뇌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제6식(의식)은 전5식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스스로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예상, 상상,
사고(思考), 추리(推理) 따위의 복잡하고 다양한 인식을 한다.
이런 것이 번뇌로 발전한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는 의(意, manas)도 식(識)과 동의어로 썼다.
의(意)는 ‘생각한다(cit)’를 원뜻으로 하는 심(心, citta)이나
사(思, man)와 같은 의미로 식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여러 가지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 의(意)와 식(識)이 구별이 되고,
대승불교 유식에서는 심(心), 의(意), 식(識)을 기능에 의해 구별했다.
• 식(識)은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 등의
육식(六識)으로서 육근(六根)을 매개로 하는 인식작용을 말하고,
• 의(意)는 제7식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이라 부르며,
아집(我執)을 불러일으키는 심층의식으로 간주하며,
• 심(心) 또한 심층의식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주체로 파악해
제8식 아뢰야식(ālaya-vijnāna)이라 했다.
이와 같이 해서, 불교(유식학)에서는 식(識)을 제6 의식이라 하고,
의(意)를 제7 말나식이라 하며, 심(心)을 제8 아뢰야식이라고 분류해서 설명한다.
그리하여 원래 초기불교에서 6식이던 것이
대승불교 유식학에서는 8식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에 해당하는 마음속의 인식작용,
즉 마음작용(8식의 작용)을 심식(心識, 산스크리트어 citta-vijinana)이라 했다.
그리하여 유식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 등 내외의 모든 것이
오직 심식에 의해 창조되며, 이 심식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유정(有情)이 지니고 있는 여덟 가지 식,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6식과 제7 말나식,
그리고 제8 아뢰야식 등 8식을 통틀어 심식 혹은 마음이라고 했다.
이와 같아서 보편적으로 그냥 ‘식(識)’이라 할 때는 8식을 통틀어 말하고,
통상 이를 마음이라고 한다.
헌데 ‘식(識)’은 심왕(心王, citta)과 심소(心所, caitta=마음작용)로 나뉜다.
‘심왕(心王)’에는 8식이 있고, 이 심왕에는 각기 심소가 따른다.
마당극의 예로 든다면, 마당은 심왕이고 그 가운데에 일어나는
갖가지 장면들이 심소이다. 마당과 장면이 같이 있어야 식(識)이 성립된다.
즉, 심왕과 심소로 구분은 하지만 심왕과 심소가 같이 해야 식이 성립된다.
그리고 오온(五蘊)에서 식(識)은 느낌(受)과 인식(想)과 심리현상들(行)과
같은 마음작용(心所-마음부수)들의 도움을 받아서 대상을 아는 것,
즉 모든 인식의 주체가 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즉, 오온에서 식(識)은 수(受)⋅상(想)⋅행(行)을 모두 아울러 분별하고
구체적으로 정신의 바탕이 돼 이끌어가는 식별작용 ― 나누어 아는 것,
분별, 인식, 판단 및 그 작용을 말한다.
이와 같이 식은 수⋅상⋅행, 세 가지 정신적용들의 기저에서
인간이 역동적인 인식활동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리고 식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접하면 그 대상이 있음을 아는,
즉 식별(識別, 了別)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고도 한다.
오온(五蘊)이란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즉, 우주만물의 현상인 객체가 모두 다 색(色)이고,
그것을 주체인 내가 받아들이는데, 수(受)⋅상(想)⋅행(行)을 거친다.
즉, 색이 오관작용에 의해 접촉됨을 수(受)라 하고, 그것을 의식함이 상(想)이고,
그것을 정리해 마음에 전달함이 행(行)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음에 도착하면 이것이구나, 저것이구나 하는
지각작용을 하게 되는 것을 식(識)이라 한다.
그래서 12연기에서 해연식(行緣識)이라 한다.
행을 연해서 식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식은 사물을 분별해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책상이다. 이것은 맵다.
이것은 맛이 떫다.”하고 판단 분별하는 것이 식이다.
그런데 수(受)⋅상(想)⋅행(行)⋅식(識)은 따로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힘들다.
이를 간단히 말하면, 수(受)는 느낌(覺)이며, 상(想)은 앎(知)이고,
행(行)은 선행이나 악행을 이루는 것이며, 식(識)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따지는 것을 말한다.
만약에 땅이 있고 물이 있으면 종자가 자라남과 같이,
중생마다 식이라는 종자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다 탐욕과 애착이라는
물을 주게 되면 중생이라는 나무가 자꾸만 자라나서 해탈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식의 대상인 색이 본래 공(空)함을 알아 탐욕을 끊어 버려야만,
식의 소연(所緣)이 없어져서 식이 집착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이 무명에서 해탈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6식 가운데 전5식은 능동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능연식)
각각 제6 의식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요별하고 분별한다.
즉, 식(識)은 외부대상에 대해서 좋다(선성)ㆍ나쁘다(악성)ㆍ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無記)의 삼성(三性)의 분별을 하면서
온갖 번뇌 망상을 일으킨다.
물론 식(識)은 실체로서 영속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연기할 뿐이다.
즉, 식은 연이 있으면 생기고, 연이 없으면 사라진다.
그렇지만 식은 한 생명체가 최초로 생길 때부터 마지막으로 생명을
마감할 때까지 끊임이 없이 지속되므로 존재지속식(存在持續識)이라 한다.
존재지속식은 찰나에 생성 → 지속 → 소멸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흐르면서 전생의 업의 표상이 삶 속에서 인식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에 이를 때 이 존재지속식은 죽음식[사몰심(死沒心)‘으로 전환되고,
업식에 의해서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데, 재생하는 순간 존재지속식은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으로 전환돼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 남방불교의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지만 과학적 근거는 확인할 수 없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