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는 누구인가. 은자라는 말이 최초로 언급된 ‘장자’ 선성편에 의하면 세상의 형세가 크게 잘못되어 몸을 숨겨 드러내지 않거나, 입을 닫고 말하지 않거나, 지식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자를 말한다. 즉 도덕이 무너져 버려 자신이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자, 덕을 감추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은자는 세상에 몸과 마음을 숨기지만, 이외에도 조정에 숨는 경우, 저잣거리에 숨는 경우, 또는 학계에 숨는 경우도 있다. 물론 진정한 은자는 몸과 마음을 모두 숨기기 때문에 조정 등에 숨는 것은 특수한 예일 것이다. 실제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은자의 다른 호칭인 처사·일민·유인·일사·은군자·고사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을 떠나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세속을 초탈하여 속세 밖을 자유로이 떠도는 모습으로 은자를 받아들였다.
은자들이 모두 고상하게 자신의 일을 했는지, 그리고 은자들이 실제로 잘못된 사회의 문제점이나 탐욕스러움을 깨치는 작용을 했든지 간에, 적어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은자의 형상은 비교적 선망의 대상이고, 사람들은 은자에게 이상적인 인격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율곡처럼 “은자는 은둔에 편향하게 되니, 중도를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부류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은자는 생활 자체가 숨김(隱)이기 때문에 더욱 신비롭다. 그들 중에는 혼자서 숨는 독은(獨隱)도 있고, 형제간이나 부부·부자나 모자 등 둘이서 숨는 대은(對隱)도 있으며, 셋이나 다섯이서 시사(시모임)나 문사(글모임)를 이루어 함께 숨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동굴에 숨어 살거나, 시골집에 깃들거나, 산에서 들짐승과 함께 평화롭게 살거나, 혹은 시체 구더기와 한방에서 산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일생을 목숨을 겨우 부지할 정도의 음식과 차를 마시는 등의 궁핍한 생활을 했지만 정신만은 부유하여, 혹 산수 시화에 마음을 두고 스스로 즐기거나 물외(物外)의 경지를 뛰어 넘어 한가롭고 깨끗하게 지냈다.
은둔이란 무얼 말하는가. ‘주역’ 둔괘에서는 “여유 있게 은둔하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上九, 肥遯, 無不利)”라고 하고, 이를 ‘정전’에서 “비(肥)라는 것은 가득 차고, 크고, 넓고, 여유 있다는 뜻이다. 둔(遯)이라는 것은 정처없이 떠돌아 멀리 가는 것이니, 얽매여 머무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라고 했다. 은둔생활이란 나 스스로 천명을 알아 즐거워하며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정신적으로 굳게 지키며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에 거처함이다. 현실에 대한 반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이상향을 꿈꾸는 것, 즉 노자의 ‘소민과국’ 사회를 지향하거나 도연명의 시에서처럼 도화원 같은 신선의 경지를 꿈꾸는 것이리라. 때문에 은둔이란 방외인(方外人)의 정신적 자유를 방내인(方內人)이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둔처는 과연 어디인가. 은자는 자신의 거처를 아주 고상하고 운치 있게 만들었다. 어떤 은자들은 산이나 물이 없는 곳에 살면서도 자기 집에 산수의 뜻을 담은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명나라 화종욱은 평원지대에 살면서도 자기 집을 서벽(棲碧)이라고 했다. 이처럼 주거환경은 은자의 신분에 부합하여, 깊고 울창한 숲은 은자의 심오함을 상징하고, 곧게 뻗은 대나무는 꼿꼿함과 솔직함을 상징한다. 또한 우뚝 솟은 소나무와 잣나무는 절개를 상징하며, 눈 속에 홀로 피어난 매화는 속세를 초월함을 상징한다. 이는 자연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은자에게 부연된 인격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들의 장식품도 예외는 아니다. 거문고나 장기, 글씨나 그림은 고상함이며, 책은 박식함과 깊이이고, 질박한 책상이나 깨끗한 창은 정결함이다. 심지어 문짝 하나 없는 가난도 은자의 안빈낙도를 표현해 주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자연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은자들과 달리 극도로 궁핍한 은자들의 주거환경도 상당히 많았다.
이제 이러한 은둔처를 염두에 두고 은둔의 미를 생각해보자. 은자의 태도와 가치관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본성대로 행동하는 참됨(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또한 선함(선)을 천명을 지킬 수 있는 도덕기준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은자는 맹자가 성선설에서 제시한 대로 인간 본성의 선함과 능동성을 지지했다.
아름다움(미)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객관 대상에 대해 미의식을 갖게 되자,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다움이다. 인간 자체가 심미의 대상이고, 인간의 창조물에서도 아름다운 이상이 있다. 그래서 자연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산과 강 등이 인간의 눈에 살아 움직이면서 즐거움을 제공하고 감상의 대상이 됨으로써, 인간의 정과 뜻을 기탁하는 미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은자와 자연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매우 밀접하여, 자연은 은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은자는 방외인을 자처하는 자이므로 산수자연에 대한 감정이 남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산수에서 은둔하고 노닐며,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자신의 감정을 의탁했다. 어떤 경우에 자신들이 직접 안개와 이슬 등의 자연경치를 접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에는 언덕과 골짜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일반 사람과 은자의 산수는 다르다고 진술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 사람이 산수를 좋아함은 시끄러운 도회를 떠나 잠시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머무르는 데에만 그 목적이 있고, 그들에게 산수자연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실리적인 것일 뿐임에 반해, 은자는 산수를 동일시하여 자연 일체를 이룬다.
그들에게 자연의 미는 더 이상 감상거리만 제공하는 죽은 물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정서·성격과 하나가 되어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은자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가운데, 순간의 즐거움이 아닌 인생의 참뜻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종면/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