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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4부 3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이러한 결말은 전혀 예기치 못했다는 점이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두 여인이 자기 세력에서 벗어나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 때까지 그토록 뻔뻔스럽게 버티어댔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크게 북돋아준 것은 그의 허영심과 자부심이라고 불러야 할 그의 자신(自信)이었다. 보잘것없는 처지부터 그만한 지위를 쌓아올린 루쥔은 병적일 정도로 자만심이 강했고, 자기 두뇌와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때로는 혼자서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사랑했던 것은 모든 노력과 온갖 방법을 통해 획득한 자기 돈이었다. 바로 그 돈이 자기보다 높은 곳에 있던 모든 사람과 동등한 자리에 앉게끔 해주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두냐에게, 자기는 불미한 소문이 있는데도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었다고 비통한 어조로 경고한 것은 어디까지나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비겁한 배은’에 대해서 그는 격렬한 분노까지 느꼈다. 하긴 그가 두냐에게 청혼했을 때는 이미 마르파 페트로브나 자신이 발 벗고 나서서 그런 풍문을 씻어버린 뒤였고 세상 사람들도 모두 그런 건 잊어버리고 두냐를 변호하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것이 허무맹랑한 낭설임을 완전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런 사정을 그 당시부터 알고 있었음을 이제 와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두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주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을 여전히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을 커다란 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두냐에게 그런 말을 한 것도 실은 지금까지 수없이 감탄해오면서 다소곳이 마음에 숨겨두었던 비밀스런 상념의 고백이었을뿐인데, 어째서 남들은 자기의 이 공적을 감탄의 눈으로 보아주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날 라스콜니코프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충분히 자기 공적의 성과를 거두고 더 없이 감미로운 찬사를 들을 양으로 은인처럼 자처하고 그의 방에 들어갔었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그가 층계를 내려가면서 자기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장 큰 모욕을 받은 듯이 생각하는 것도 실은 무리가 아니었다.
한편 두냐는 그에게 도저히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녀를 단념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몇 년 동안이나 그는 결혼이라는 것을 즐겁게 공상하면서 끊임없이 돈을 저축하며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려왔다. 그는 달콤한 희망을 안고 남몰래 마음 속 깊이 품행이 좋고 가난한(반드시 가난해야 했다), 젊고 예쁘고 좋은 가문에서 교육도 받고, 그러면서도 세상의 온갖 고초를 다 겪어 겁이 많아진 처녀, 끝까지 자기 한 사람에게만 순종하면서 한평생 자기를 은인으로 존경하고 숭배하는 그런 처녀를 공상하고 있었다. 그는 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조용한 곳에서 이 매혹적이고 즐거운 테마에 관해서 얼마나 달콤한 에피소드와 장면을 공상 속에 그려보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 몇 년 동안의 공상이 거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의 미모와 교양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 의지할 데도 없는 호나경은 극도로 그 욕망을 자극했다. 게다가 거기에는 그의 공상 이상의 것까지 있었다. 이 처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의지가 굳고 품행이 단정하고, 교양과 두뇌의 발달은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그도 이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이토록 훌륭한 여성이 앞으로 한평생 그의 위업에 대해서 노예적인 감사를 바치면서 공손히 무릎을 꿇고, 그는 그 위에서 완전하고도 무한한 지배력을 휘두르려는 것이다!……때마침 그는 얼마 전부터 오랜 숙고 끝에 마침내 근본적으로 방침을 고쳐서 더 넓은 활동권으로 뛰어듦과 동시에 오랫동안 그토록 갈망해오던 상류사회로도 서서히 발을 들여놓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의 운명을 시도해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여자라는 것이 일을 하는 데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아름답고 기품과 교양이 있는 여성의 매력은 그의 인생 행로를 장식해주고 사람들을 그에게 끌어들일뿐더러 그의 명성을 높여줄 것임에 틀림없다……….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다. 아, 뜻하지 않은 추악한 결렬은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장난이었다. 바보 같은 얘기다. 그는 잠깐 거드름을 피워보았을 뿐 제대로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농다조로 좀 열중했을 뿐인데 이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다니! 더욱이 그는 이미 자기 나름대로 두냐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속으로는 벌써부터 그녀에게 군림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아니다! …..내일이라도, 내일이라도 당장 사태를 회복해서 응급조처를 취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일체의 원인인 그 젖비린내 나는 오만한 풋내기를 납작하게 혼내줘야겠다. 그리고 이때 병적인 감각과 더불어 저도 모르게 라주미힌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 라주미힌에 대해서는 그도 이내 안심했다. ‘물론 그런 자는 그놈과 똑같은 족속일 게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잇던 것은….다르 아닌 스비드리가일로프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많은 근심 걱정이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니에요! 내가, 내가 제일 나빴어요!” 어머니를 껴안고 키스하면서 두네치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돈에 눈이 멀었던 거예요. 그러나 오빠, 맹세하겠어요. 나는 설마 그가 그렇게까지 졸장부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전부터 그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나를 책망하지 마세요, 오빠!”
“하느님이 구해주셨다! 하느님이 구해주셨어!”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방금 일어난 일들이 아직도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듯이 건성으로 입을 놀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두 서로 기뻐했다. 5분쯤 지나자 웃음까지 퍼져 나왔다. 때때로 두네치카만이 조금 전의 사건을 상기하면서 파리해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자기도 함께 기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루쥔과의 결별이 무서운 불행으로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라주미힌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아직 충분히 기쁨을 표현할 수는 없었으나, 마치 5푸드나 되는 저울추를 가슴에서 떼어낸 듯이 열병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이제 그는 자기의 온 생애를 바쳐서 이들 모녀에게 봉사할 권리를 얻은 셈이다. 사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래의 일을 생각하면 그는 더욱 겁이 나서 그런 생각을 몰아내고 자기 자신의 상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은 채 침울한 방심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루쥔을 물리치자고 주장했으면서도 지금 일어난 일에는 누구보다도 가장 관심이 없어 보였다. 두냐는 아직도 오빠가 자기에게 몹시 화나있다고 생각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겁먹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오빠한테 무슨 말을 했어요?” 두냐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 차, 그래그래!”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외쳤다.
라스콜니코프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꼭 너에게 1만 루블을 선사하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 함게한자리에서 너를 한 번 만나고 싶다더구나!”
“만나고 싶다고! 절대로 안 된다, 안 돼!”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이 애한테 돈을 주겠다고! 아니,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릴 할 수 있단 말이냐!”
라스콜니코프는 (극히 무관심한 어조로) 스비드리가일로프하고 주고받은 얘기를 전했다. 쓸데없는 말은 하고 싶지도 않았고, 또 실제 필요한 것 말고는 하나도 언급하고 싶지가 않아서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유령 얘기는 빼버렸다.
“그래서 오빠는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하고 두냐는 물었다.
“처음엔 너한테 알리지 않겠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너를 직접 만나겠다고 우기는 거야. 그리고 너에 대해서 열을 올렸던 것은 일시적인 착란이었고,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고 보증하더군….그는 너를 루쥔과 결혼시키고 싶지 않은 거야….대체로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는 말이었어.”
“오빠 자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인상을 받으셨어요?”
“솔직히 말해서 뭐가 뭔지 알수가 없더구나. 1만 루블을 제의하는가 하면, 자기는 부자가 아니라는 소리도 하고….어디로 멀리 가버리고 싶다고 하다가는 10분도 지나기 전에 자기가 한 그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리고 또 느닷없이 결혼할 작정이라면서 중매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하고. 물론 무슨 목적이 있을 테지만 십중팔구 좋지 못한 목적이겠지. 그리고 만일 너한테 불순한 생각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우둔하게 나올 리는 만무하거든, 하여튼 나는 너를 대신해서 그 돈 문제는 딱 잘라 거절했다. 대체로 그자는 몹시 변태적인 인상을 받았어. 아니, 오히려….발광할 징후가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어. 하긴 내가 잘못 추측했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단순한 속임수일지도 몰라. 그러나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죽음은 그에게 충격을 준 모양이더군……..”
“아아, 하느님, 그 여자의 영혼에 평안을 주옵소서!”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나는 영원히, 영원히 그 여자를 위해 기도하겠다! 얘 두나야, 그 3천 루블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겠니? 정말로 하늘이 주신 복 같다! 로쟈야, 글쎄, 오늘 아침 우리 수중에 겨우 3루블밖엔 남아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하고 두냐는 빨리 시계라도 전당 잡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엔 그 사람한테서 돈을 빌리기 싫었으니까.”
두냐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제안에 무척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그 사람은 무언가 무서운 일을 생각해냈을 거예요!” 그녀는 부르르 봄을 떨다시피 하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라스콜니코프는 누이의 극심한 공포에 눈치챘다.
“왜 그런지 나는 앞으로도 종종 그 자와 만날 것만 같다.” 하고 그는 두냐에게 말했다.
“모두 조심합시다. 내가 그 자의 거처를 알아내겠습니다!” 라주미힌이 힘차게 외쳤다.
“계속해서 감시를 하겠습니다! 로쟈가 나에게 허락해주었으니까요. 로쟈는 아까 나한테 누이동생을 보호해달라고 했거든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당신도허락해주시겠죠?”
두냐는 방긋 웃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근심의 빛은 그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조심조심 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3천 루블이란 돈은 분명히 그녀를 안심시킨 모양이었다.
15분 후에는 모두 활기 띤 대화를 나누었다. 라스콜니코프도 자신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한동안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신 나게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것은 라주미힌이었다.
“아니, 왜 여기서 떠나셔야만 합니까?” 그는 무엇에 취한 듯이 환희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시골 도시에서 무엇을 하신다는 겁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두 분 다 여기 계셔야 하고, 모두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얼마나 서로 필요한 사람들인지 생각해보세요! 비록 당분간만이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부디 저를 친구로서 한몫 끼워주십시오. 그러면 정말 멋진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 들어보세요, 이제 그 상세한 계획을 말씀드릴 테니! 오늘 아침에,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기 전에 내 머리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생각이란 이런 것입니다. 내겐 백부가 한 분 계십니다, 언젠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만 아주 훌륭하고 점잖은 노인입니다! 그 백부가 1천 루블쯤 갖고 있는데 그분 자신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어서 조금도 궁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부는 2년 전부터 그 돈을 나더러 이용하라면서 이자는 연 6부면 된다고 귀찮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셈은 알고 있습니다. 백부는 다만 나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해엔 나도 그럴 필요가 별로 없었지만, 올해는 백부가 오시는 대로 그 돈을 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자당님께서도 그 3천 루블 가운데 1천 루블만 제공해주시면 착수금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합자한 셈이 되지요. 그돈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하면?”
여기서 라주미힌은 자기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서적상과 출판업자가 자기 상품에 대해서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기 때문에 좋은 평들을 못 받고 있지만, 착실한 책만 출판하면 반드시 수지를 맞추고도 이익을 올려서 상당한 돈을 벌 수 있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라주미힌은 2년간이나 남의 출판사를 위해서 일을 했으며 유럽 3개 국어에 능통했으므로 출판업을 하려는 공상을 항상 품어왔던 것이다. 엿새 전에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독일어만은 ‘시원치 않다’고 했지만, 그것은 친구에게 번역 일을 반쯤 맡기고 선금 3루블을 쥐어주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그는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도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자본의 하나인 자기 돈이 생겼는데 말입니다!” 라주미힌은 열을 올렸다.
“물론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을 합해서 일해봅시다. 자당님을 비롯해서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그리고 나와 로지온이 협력해서 말입니다. 몇몇 출판은 지금 굉장한 이득을 올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사업의 근본 문제는 요컨대 무엇을 택해서 번역하느냐, 그것을 잘 알아야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번역도 하고, 출판도 하고, 공부도 함께하자는 겁니다. 그러면 나도 꽤 쓸모가 있을 겁니다. 경험이 있으니까요. 이미 2년 동안이나 여러 출판사를 돌아다녔으므로 그자들의 내막이라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전문가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까지 가져다주는데 그냥 밀어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아주 근사한 책을 두세 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번역해서 출반한다는 아이디어 만으로도 한 권에 100루블씩은 쉽게 받을 수 있는 비밀을 갖고 있거든요. 그중 한 권은 아이디어료만으로 500루블을 준다고 해도 응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내가 누구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미친 소리라고 의심할 지도 모르죠. 세상엔 바보들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인쇄라든가 용지라든가 판매 같은 잡무는 일체 내게 맡겨주십시오! 그 방면의 내막은 환하니까요! 처음엔 소규모로 시작해서 점점 사업을 키워가는 거죠. 적어도 그것으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설령 잘못된다고 해도 본전은 건질 수 있으니까요.”
두냐의 두 눈이 빛났다.
“당신 이야기는 퍽 마음에 드는군요, 드미트리 프로코피치”하고 그녀는 말했다.
“난 그런 얘기는 하나는 모르지만…..”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대답했다.
“그 계획은 좋을 것도 같군요. 하지만 장래의 일은 아무도 보증하지 못할 거예요. 새로운 일이라 어떨지 알 수가 있어야죠. 물론 우리는 당분간이라도 여기 머물러 있긴 해야겠지만………”
그녀는 로쟈에게 눈을 주었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냐가 물었다.
“나도 참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해”하고 그는 대답했다.
“회사를 만든다는 공상까지 미리할 필요는 없지만 대여섯 권 정도의 출판이라면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어. 나도 틀림없이 잘 팔릴 책을 한 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친구의 경영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사업적인 두뇌가 있거든. 그러나 아직 상의할 시간은 충분히 있어………”
“만세!” 라주미힌은 외쳤다.
“잠깐만! 여기 이 집에 같은 주인이 갖고 있는 아파트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방들과는 통로가 막혀서 아주 독립된 집 같고, 가구도 딸렸으며, 작긴 하지만 방이 세 개나 되고 집세도 퍽 쌉니다. 우선 그 집을 빌려드세요. 시계는 내가 내일 당장 전당 잡혀다 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은 만사가 다 잘되어갈 겁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세 분 가족이 함께 사실 수 있다는 겁니다. 로쟈도 가족들과 함께……아니, 어디 가는 거야, 로쟈?”
“얘, 로쟈, 너 벌서 가려는 거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아니, 하필이면 이러한 때!” 하고 라주미힌은 외쳤다.
두냐는 의아스러운 듯 놀란 빛을 띠면서 오빠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모자가 들려있었다. 그는 금방 나가려는 자세였다.
“마치 모두가 나를 장송(葬送)하거나 생이별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얼굴이군요.” 그는 몹시 이상한 말투로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빙긋 웃는 것 같았으나 웃음이 아닌 것도 같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우리가 얼굴을 대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말을 문득 저도 모르게 입밖에 내고 만 것이다.
“아니, 너 왜 그러느냐?” 하고 어머니가 외쳤다.
“오빠, 어딜 가세요?” 두냐도 어쩐지 이상한 어조로 물었다.
“잠깐 꼭 가봐야 할 데가 있어서.” 자기가 말하려던 생각에 동요를 느낀 듯 그는 막연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창백해진 얼굴엔 그 어떤 단호한 결심의 빛이 어려 있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겁니다……이리로 오는 도중에…..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거예요. 어머님께……그리고 네게도 두냐, 우리는 당분간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좋겠다고. 나는 기분이 좋지 않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또 오지요. 올 처지가 되면 내 발로 걸어오겠어요. 나는 어머니와 두냐를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발 내 걱정은 말아주세요! 나 혼자 내버려두세요! 나는 전부터 이러헥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심은 확고합니다…..설사 나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몸이 파멸해버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혼자 있고 싶습니다…..나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주세요. 그쪽이 편안합니다…..아예 내 소식을 수소문하거나 하지는 말아주세요. 필요할 때는 내가 오든지…..어머니와 두냐를 부르든지 하겠습니다. 부활할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지금은, 나를 사랑하신다면 단념해주세요……그렇잖으면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만 같아요…..그럼 안녕히!”
“아아, 이를 어쩌나!” 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외쳤다.
어머니도 누이동생도 기절을 할 만큼 놀랐다. 라주미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쟈, 로쟈! 마음을 풀어다오. 다시 그전처럼 지내자꾸나, 응!” 가없은 어머니는 애원하듯 외첬다.
라스콜니코프는 문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느릿느릿 방을 나갔다. 두냐가 그 뒤를 쫓았다.
“오빠! 어머니를 어떡할 작정이세요!” 분노에 타는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는 괴로운 눈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 올 테니. 자주 들르겠다!” 자기 자신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는 듯이 그는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고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매정하고 심술궂은 에고이스트!” 두냐는 외쳤다.
“저건 미, 미치광입니다, 매정한 게 아니라 머리가 돌았어요! 당신은 그걸 모르십니까? 모르신다면 당신이 오히려 매정해요!” 라주미힌은 두냐의 손을 꼭 잡으련서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는 열띤 음성으로 속삭였다.
“얼른 갔다 오겠습니다!” 그는 기절하다시피 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이렇게 외치고 방에서 뛰쳐나갔다.
라스콜니코프는 복도 끝에서 라주미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가 뛰쳐나올 줄 알았네.” 하고 그는 말했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서 두 사람과 함께 있어주게…..내일도 와서 함께 있어주고….그리고 앞으로도 죽, 나도 어쩌면 다시 올지 모르지…..올 수만 있다면….잘 있게!” 이렇게 말하고 그는 손도 내밀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대체 자네 어딜 가는 건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래, 이럴 수가 있나?” 어안이 벙벙한 라주미힌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네만, 다시는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게. 물어봐야 아무것도 대답할 게 없으니까. 나를 찾아오지도 말고. 어쩌면 내가 이리 올지도 모르지.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러나 저 두 사람만은 내버리지 말아주게. 알겠나?”
복도는 어두웠다. 그들은 램프 옆에 서 있었다. 1분쯤 그들은 잠자코 서로 얼굴만 마주 보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한평생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라스콜니코프의 불타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은 마치 시시각각으로 힘을 더해서 라주미힌의 영혼과 의식을 꿰뚫는 듯했다. 라주미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엇인지 괴이한 것이 그들 사이를 스쳐 간 듯한 느낌이었다…..그 어떤 상념이 마치 암시처럼 번쩍 스쳐 간 것이다. 무섭고도 추악한, 그러나 쌍방이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그 무엇이……….라주미힌은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이젠 알겠지?” 라스콜니코프는 병적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어서 두 사람한테로 돌아가보게.” 이렇게 덧붙이고 그는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날 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거처에서 생긴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쓰지 않겠다. 라주미힌은 라스콜니코프를 보내고 돌아와서 모녀를 위로했다.
로쟈는 지금 병중이라 정양(靜養)이 필요하다, 로쟈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날마다 올 것이다. 그는 지금 몹시 머리가 혼란되어 있으니 그의 신경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자신, 곧 라주미힌은 그를 잘 보살피려고 좀 더 좋은 의사를 데려오겠다 등등을 약속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날 밤부터 라주미힌은 두 여인을 위해 아들이 되고 오빠가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