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200여년전 이 땅에 신앙공동체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역대 교황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교회다.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롭지 못한 몸이었던 교황 비오 6세는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한 조선교회의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가 하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상 처음으로 한국교회를 사목방문, 이 땅에서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시성하는 각별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박해기 한국교회를 관심과 애정으로 지켜본 교황들을 비롯 성장기 한국교회와 희로애락을 나눈 역대 교황들의 면면을 교황주일에 만나보았다.
교황의 존재가 우리 민족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10년대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한역 서학서를 도입했던 이수광(1563~1628)은 저서 <지봉유설> 에서 마태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를 소개하면서 '교황'을 "그 풍속에 군을 교화황이라 하고 혼취하지 않으며 습사함이 없고 현자를 택립한다"고 소개했다. △ 알렉산데르 7세 반면, 역대 교황 중 우리 민족에 관한 보고를 처음으로 접했던 교황은 알렉산데르 7세(1655~1667)였다. 제사 금지를 완화하는 등 중국 복음화에 관심을 보였던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당시 중국 예수회 선교사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660년에 조선 지역을 '남경대목구'에 예속시켜 조선 선교를 권장했다.
△ 클레멘스 11세 '얀세니즘'을 이단으로 단죄한 교황 클레멘스 11세(1700~1721)는 1702년 조선에 대한 재치권을 남경교구에서 북경교구로 이양했다. 그는 1715년 제사 등 선교 지역의 관습을 수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 중국을 비록한 아시아 지역 선교에 '박해'라는 걸림돌을 자초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조선 왕조가 천주교를 박해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교황으로 알려져 있다. △ 비오 6세 재임 중 프랑스 혁명을 겪은 교황 비오 6세(1775~1799)는 1784년 조선교회가 창설된 다음 해인 1785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선교사 도움없이 탄생한 조선교회의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비오 6세는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교회를 돌보고 보호할 임무를 위임,하루 빨리 조선 땅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명하고, 교황강복과 함께 은화 500냥을 조선교회 선교자금으로 내놓았다.
당시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은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프랑스 혁명정부군에 의해 체포된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탈리아 각지로 끌려다니면서 고충을 겪었던 비오 6세는 자신에게 암울한 시련이 닥칠 때마다 조선교회의 오묘한 탄생과 발전을 기억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깊은 고뇌를 극복했다"고 전하고 있다. △ 비오 7세 교황 비오 7세(1800~1823)는 1801년 신유박해로 초토화 된 조선교회 재건을 위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말할 수 없는 괴로운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것으로 알려져있다.
비오 7세는 1814년 8월, 조선교회 신자들이 1911년 음력 10월24일자로 자신에게 보낸 서한을 받는다.
교회 재건을 위해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조선 신자들은 서한에서 "목자를 잃은 이 나라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여 빨리 선교사를 보내시어 구세주 예수의 은혜와 공로가 전파되고, 저희들의 영혼이 도움과 구원을 받고,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어디서나 찬양되게 하소서"라고 교황에게 호소했다.
프랑스 혁명군에게 파리 인근 퐁텐블로에 구금돼 있던 그는 이 서한을 읽고 북경 주교에게 "가능한 한 빨리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낸다.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이 구금상태에 있던 그가 조선교회를 위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이었다. △ 그레고리오 16세 포교성성 장관으로 재임하다 즉위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교황직에 오르자마자 조선 선교지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했다. 그레고리오 16세는 1931년 9월 조선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대목구'로 설정, 초대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애르 주교를 임명하고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교회 사목을 위임했다.
이어 조선교회 발전을 위해 조선대목구장에게 승계권을 지닌 부교구장 주교를 선정할 권한을 부여해 박해로 인해 대목구장직이 공석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이 용이하도록 만주대목구를 설립하는 배려도 아까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16세는 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 비오 9세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페레올 주교가 불어로 작성하고 최양업 신부가 라틴말로 옮긴 <기해박해 순교자록>을 처음으로 접한 후, 곧바로 1857년 9월24일 조선 순교자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했다. 이로써 비오 9세는 한국 교회 순교자들을 처음으로 대우한 교황으로 역사에 남게됐다.
그는 또 1866년 병인박해가 발발하자 1866년 12월 서한을 보내 조선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 비오 11세. 교황 비오 10세(1903~1914)는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했다.
이후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2)에 이어 즉위한 비오 11세(1922~1939)는 '전주지목구'(1937년)를 설정, 최초로 한국인 성직자에게 자치를 맡겼는가 하면, 평양(1927년)·연길(1928년)·광주(1937년)·춘천(1939)지목구를 설정, 한반도의 지역교회 틀을 마련했다.
비오 11세는 1925년 7월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식을 열어 한국 순교자 82명 중 79위를 복자로 선포했다. 비오 11세는 한국 순교 복자 79위 선포 다음해인 1926년에 뮈텔 주교를 대주교로 임명, 한국교회 최초의 대주교를 탄생시켰고,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개최된 한국교회 최초 공의회에 무니 대주교를 교황사절로 파견하는 등 한국교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 요한 23세 교황 요한 23세(1958~1963년)는 1962년 3월10일 교령을 통해 한국교회의 '교계제도 설정'을 공포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지난 130여년간의 선교지 교구에서 벗어나 정식 교구의 자격을 갖추게 됐고, 한국 주교들은 교황을 대리해서가 아닌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교구 관할의 전권을 행사하게 됐다.
요한 23세의 이같은 조치로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정식으로 초대돼 보편교회의 당면 과제에 협력하고, 중대 사안을 함께 결정하는 완전한 형태의 지역교회로 인정받게 됐다. △ 바오로 6세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1968년 10월6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1925년에 이어 한국 순교자에 대한 2번째 시복식을 거행, 순교 복자 24위를 탄생시켰다.
바오로 6세는 시복식 강론을 통해 한국 순교자들의 용덕과 신덕을 극찬하고, "유럽신자들은 한국 순교사를 연구하여 한국 가톨릭의 훌륭한 모범을 본받으라"고 촉구했다.
바오로 6세는 또 이날 한국 순례단들에게 1시간20분간의 유례없는 긴 알현을 허락, "순교자는 여러분의 영광인 동시에 전 교회의 영광입니다. 한국 교회와 한국 국민에게 인사를 드리며 한국민의 화목과 번영과 평화를 기원합니다"라며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바오로 6세는 시복식에 앞서 1963년 12월 대한민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을뿐 아니라 1969년에 김수환 추기경을 임명, 한국교회가 교회의 최고 통치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는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이 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식을 주례,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탄생시킴으로써 한꺼번에 1백명이 넘은 성인을 교황청 밖에서 시성하는 첫 기록을 남겼다.
그로부터 6년만인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기해 방한한 교황은 성체대회를 주재,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표현했다.
'평화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의 두차례 방한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갈구하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한국교회 복음화율이 급성장하는데 일조했다.요한 바오로 2세는 지금도 한복을 입은 신자들의 알현을 받을때면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하고, 틈만나면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를 호소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교황으로 사랑받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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