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el Kennedy
전통을 벗어난 파격적인 연주 복장과 펑크 머리로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 고전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Nigel Kennedy).
그는 연주에서건 스타일에서건 어디에서나 튀는 사람이다. 6년 전 클래식 음악계에서 잠시 안식년을 가지겠다고 선언하기 전에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베스트 셀러였던 비발디의 ‘사계’ 앨범과 최고의 예술적 연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통해 세계 정상을 정복했다. 클래식 바이올린계의 록커 나이젤 케네디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에게서 받은 영향을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앨범에서 차용해 ‘케네디 익스피리언스’라는 앨범으로 내놓았다.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헨드릭스의 록 음악을 뜨겁게 연주한 것이다.
그는 클래식 바이올린으로 지미 헨드릭스를 연주했고 또 이 곡들은 케네디의 미국 순회 공연 레퍼토리로 당당히 선택됐다. 이 앨범에서도 볼 수 있듯 나이젤 케네디는 아무도 실행하지 못하는 아이디어들을 도발적으로 무대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 심판을 받는다. “예술가는 남을 흉내내기보다는 예술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면서. 케네디는 스스로 개성적인 상품으로 자신을 만들어놓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과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에게서 영향을 받고 또 그 영향들을 뛰어넘은 이 괴짜 바이올리니스트는 클래식 콘서트와 재즈, 록 간의 균형을 맞춰가면서 여전히 자신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비평가들을 적당히 놀리면서 즐거워한다. 이제는 이름도 그냥 케네디로 바꾸었다. 그래서 콘서트에서나 음반에서 모두 ‘케네디’라고만 불린다. 늘 새로운 실험에 몰두하는 케네디는 록을 하고 싶은 마음에 기타와 드럼 앙상블을 만들어 1996년 ‘카프카’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2년 전에는 첼리스트 린 해럴과 함께 듀오 연주회를 갖고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바이올린과 첼로로만 연주하는 희귀한 레코딩을 했는데 린 해럴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어떤 것보다 변칙적인 언어”로 평가받았다. 클래식 연주자는 꼭 콘서트 홀에서 연주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지미 헨드릭스의 작품을 동네 퍼블릭 바에서도, 150여 석짜리 작은 홀에서도 연주하는 등 새로운 청중을 만나기 위한 시도들을 펼쳤다. 바흐도 연주하고 지미 헨드릭스도 연주하는 케네디. 돈 키호테처럼 상상을 불허하게 만드는 그만의 놀랍고도 재미있는 세계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펼쳐질 것이다.
클래식의 선입견 속에서는 음악을 할 수 없다
펑크 스타일의 외모와 독특한 연주 스타일, 그리고 독설에 가득 찬 입. 클래식과 재즈 어느 것에나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주자. 비발디의 ‘4계’ 녹음으로 1년 만에 플레티넘 앨범을 기록했던 영국의 젊은이. 기존의 실황음반에 대해 갖은 욕을 하면서 ‘진짜’ 실황음반으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해 또 한 번 화제가 된 사나이….
나이젤 케네디는 그런 식으로 매번 화제에 올랐다. 그에 대한 화제의 종착역은 지난 92년 돌연 클래식 음악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4년 후, 39세의 케네디는 ‘카프카’라는 록 음악 음반을 하나 들고 다시 찾아와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고정적인 이미지를 항상 거부해 온 사나이
잠시 나이젤 케네디라는 인물을 다시 살펴보자. 그의 아버지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이었고,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였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의 품에서 그는 3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6세 때 예후디 메뉴인의 영재 음악학교인 ‘아런델 스쿨’에 입학해 바이올린을 배웠다. 메뉴인은 케네디의 재능을 일찍이 파악하고 그를 적극 지원했다.
15세 때 뉴욕 줄리어드 학교에 입학한 그는 거기서 재즈와 클래식을 동시에 배웠다. 1977년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데뷔한 이래 80년 베를린 필과의 협연, 85년 보스턴 심포니와의 협연 등 수많은 협연을 거쳤다. 이 시기에 녹음한 그의 엘가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은 85년 그라모폰 ‘올해의 레코드상’에 올랐고, 영국에서만 10만 장이 넘게 팔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비클래식적 만행’은 악명을 날렸다. 앙코르 때는 항상 즉흥 재즈 연주를 하는가 하면, 술집에서 연주하기, 희한한 복장으로 무대에 오르기, 기존의 템포를 깨부수기 등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데뷔 앨범에다 듀크 앨링턴의 ‘매인리 블랙’을 수록했으며, 전자재즈음반 ‘렛 루즈’, 피아니스트 피터 페팅거와의 듀오 앨범 ‘스트라드 재즈’, 폴 매카트니와의 2중주 ‘옛날 옛적에’ 등을 통해 고정적인 이미지를 부숴 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불렀다.
90년 10월에 BBC 심포니가 그를 협연자로 정하자 방송국과 음악담당 프로듀서들은 재앙이 내렸다고 표현할 정도로 우려해 마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연주회장에 검은 실크 블라우스와 진홍색 부츠를 신고 나타났으며, 얼굴에도 ‘가부키’ 배우처럼 흰색을 칠한 채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담당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콘서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다음해인 91년에 발매한 비발디 음반은 ‘메가 히트’를 기록해 기네스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물론 그의 음악에 대해 상업적인 센세이셔널리즘이라는 비평도 줄을 이었다. ‘옵저버’지의 니콜라스 캐넌은 “케네디는 2류 음악만을 생산한다. 나는 유능하고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비음악적 수단으로 성공하려는 데 대해 분개하고 있다”라며 혹평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은 100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고, 이 기록은 스리 테너의 로마 공연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클래식 음반으로는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어 내놓은 브람스·베토벤 협주곡 역시 클래식 차트 1위를 달렸다. 바로 그 인기의 정점에서 그는 돌연 클래식 무대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록 음반 ‘카프카’로 세계 음악계에 재등장
그를 클래식 연주회장에서 떠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최근 영국 음악잡지 ‘클래식 CD’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브람스와 베토벤 협주곡 이후, 나는 내 클래식 경력의 정상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그것은 곧 떠나기 가장 좋은 시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나는 소위 명성이란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왔다. 소위 ‘심각한’ 비평가들은 내가 더 이상 좋은 음악가는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레코드 판매 실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비발디의 ‘사계’ 비디오가 텔레비전에 몇 번 나갔다는 이유로 내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일할 수 있는 음악 세계를 갖는 것이다. 내가 클래식 음악을 떠난 이유는 지성적인 선입견 속에선 참 음악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한 개의 팝 음반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 음반을 위해 그는 록 아티스트 피터 가브리엘, 그룹 ‘스팅’의 드럼 주자인 마누카체와 4개월 동안 숙식을 함께 했다고 한다. 그를 ‘영원한 우상’으로 여기며 따르는 재즈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아마 내 나이 80쯤 되면 이런 작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쯤이면 지미 헨드릭스도 바흐나 모차르트처럼 클래식 작곡가의 대열에 서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음반에서 그는 바이올린 외에도비올라·첼로·색소폰·피아노·만돌린까지 연주하는 다양한 모습을보여준다. 그라펠리와 함께하는 ‘바람의 멜로디’, 신비스럽고 정겨운‘아담이 이브에게’ 등의 곡들을 직접 작곡했으며, 제인 시베리의보컬에 맞추어 피아노 반주를 하기도 한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사용해 전자 기타와 너무나 흡사한 음질을 들려주는 ‘가을의 후회’를들으면 ‘역시 나이젤 케네디’라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단지 팝이라고 하기엔 클래시컬한 요소와 민속음악적 요소들이 아주 짙게 배어 있다. 그는 이러한 음악적 선택이 클래식의 예후디 메뉴인과 재즈의 스테판 그라펠리에게서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
“메뉴인이 없었다면 나 역시 우리 안에서 맴도는 클래식 연주자로 머물렀을 것이다. 메뉴인은 비틀즈보다도 이전에 라비 샹카르를 만나 인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설파한 사람이다. 그의 수업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라펠리는 내게 모든 것을 바꿔놓게 만들었고, 몇 가지 선입견도 없애 주었다. 그를 통해 나는 음악이란 즐기는 것이란 걸 배웠다.”
나이젤 케네디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마치 ‘럭비공’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적어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재주 하나는 탁월한 것 같다. 그는 그 재주로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로 기억할지 모른다. 그야 그들 맘이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어떤 특정 부분의 음악이 아니라 단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왔다. 나는 항상 본능적인 수준에서 연주해 왔고, 그랬기 때문에 내게 있어 연주란 행복한 것이었다.”
글·조희창 기자 |
첫댓글 니젤 케네디. 좀 엉뚱한 사람이죠. ㅎㅎ
지금 바빠요. 음악감상은 퇴근후 집에서...
'내게 있어 연주란 행복한 것' ... 이런 마음으로 평생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