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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를 여는 나의 집 § 원문보기 글쓴이: pinetree
1919년 4월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수만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이기 시작한다. 민족대표 33인이 상하이로 파견한 현순을 시작으로 문학가이자 언론인 이광수, 3균주의 창시자 조소항, 근대공화주의자 대표 신익회, 민족사학자 신채호, 신한청년단을 설립한 여운형,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시영까지 총 2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10시부터 탄생할 나라의 국호를 정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시작한다. 여러분~ 국호는 대한민국이 어떻겠습니까? 대한은 일본에게 망한 나라인데 굳이 쓸 필요가 있습니까? 조선공화국이나 고려공화국은 어떻소? 밤새도록 이어진 그들의 토론은 다음날인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현장을 공포하면서 결실을 맺는다. 바로 그날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가 시작됐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다가올 4월 11일 대한민국이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저널 그날에서 준비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획 1부작 해피 버스데이 to 대한민국~ 잔칫날 오신 거네요.
류근/시인: 오늘 특별히 넥타이 까지 매고 왔어요.
최원정: 박재민씨는 빈손으로 온 거예요?
박재민/배우: 전 대본 들고 왔습니다.
이윤석/방송인: 노래 라도 한번 불러야 되는 거 아닌가요? 시작~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대한민국 생일 축하 합니다.
최원정: 게다가 오늘 우리가 저분(29명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합니다. 쟁쟁한 분들이예요.
류근: 저쯤되면 초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올 스타 정도되지 않습니까
최원정: 다행히 우리가 그 동안 공부를 해서 이름들에 좀 익숙해요 다 아는 분들~
박재민: 저는 한 없이 작아지네요. 한 분도 못알아보겠습니다.
류근: 각자 한권씩 역사책이 되는 대단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1919년 4월 10일에 한자리에모였다는 거 아닙니까. 야, 진짜 정말로 명실상부하게 역사적인 그날입니다.
이윤석: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단 하룻밤 사이에 국호를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까지 만들어서 발표를 했다는 거잖아요. 이 거는 초능력이거든요.
최원정: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정할 때 아까 얘기들어보니까 신한민국 조선공화국 또 고려공화국 이런 국호들도 함께 거론이 됐다고 하는데~ 흥미롭네요.
심용환/역사작가: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신석우 라는 분이 제안을 하셨는데 말씀한 걸 제가 읽어드릴게요. 대한으로 망하였으니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다는 뜻에서 ‘대한’이 옳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공화국을 이루고자 하니 ‘민국’이 옳겠다 라고 하면서 민국과 공화정 이라는 단어와 엮은 거죠.
이윤석: 저는 대한민국이 그냥 가슴에 와 닿아요. 대~한~민~국~
박환/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실 여담이긴 한데요. 우리 국호를 보면 고려라든가 조선이라든가 또는 한 대한할 때 한이 반복되는 측면이 있어요. 예컨데 고조선이 조선, 고구려가 고려, 삼한이란게 있잖아요. 한, 대한, 100%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가설도 있을 수 이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죠.
류근: 듣고 보니까 돌고도는 물레방아 국호네요.
박재민: 옛 것을 버리는 것 보다 옛 것을 다시 되찾고 그것을 통해서 흥하자는 게 아녜요,
박환: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북한 같은 경우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라고 해서 조선이라는 표현이 나오고요. 대한민국 같은 경우는 한, 코리아 라고 할 때는 꼬레아, 고려 라고 가설아닌 가설이 반복되고 있는 거죠.
최원정: 3개가 고려 조선 한 국호가~ 다 현존하는 쓰이는 거잖아요.
이윤석: 반복되면서 국호의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
박환: 박환의 국호 평등이동~
최원정: 하여튼 고려 조선 한국은 기운을 모아서 지금 나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문득 이런 고민이드네요. 만약에 통일이 되면~통일이 되면 국호를 어떻게 정해야 될까요?
류근: 기분은 좋은데 사실은 복잡한 문제이기도 해요. 서울을 옮긴 것 같잖아요?
박재민: 이게 영어일 때는 쉽더라구요. 한국은 Republic of Korea 그리고 북한은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Korea가 같이 들어가 있으니까 단일팀으로 입장할 때 Koreea를 쓰거든요. 이걸 국어로 바꾸는 작업이~
이윤석: 저는 대한민국에 꽂혀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통일이 돼서 더 커진다. 태한민국~~
류근: 그것도 괜찮네~
박환: 태극기~太자가 클태자인데~
이윤석: 교수님, 의견을 제가 빌려가지고 이름이 길면 오래 산다고 그러잖아요~ 고조선부터 다 부쳐 가지고~
류근: 진짜 괜찮은 거 같애~
최원정: 하여튼 Republic of Korea 라는 걸 고려로 다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통일 국호 한번 고려해 봅시다. 우리가 잠깐 이렇게 얘기를 나눴는데도 국호를 정한다는 게 쉽지않잖아요. 그런데 임시정부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거였는데 이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애요.
이윤석: 그런데 100년전에 그분들은 단 하룻밤에 해낸 거 아닙니까. 조선은 500년 전에 그분들은 단하룻밤 사이에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바꾼 거예요. 대단한 일입니다.
박재민: 이게 정말 대단한게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길할 때 프랑스 혁명을 꼭 얘기하잖아요. 그 프랑스에서도 혁명을 통해서 이끌어내는 기간이 백년이 걸렸는데 지금 상하이에 모여서 29명의 독립투사들이 하루 사이에 민주주의 공화국을 만들었다는 게 한편으로는 대단하기도 하고 사실 한편으로는 이거 날림아냐 이런 의견도 있을 거 같고 이게 가능한 거야?
류근: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예요. 헌데 저는 혹시 문득 생각나는 데 천자문을 다른 말로 뭐라하는지 혹시 아십니까?
박재민: 올가?! 중학교 때 올 ‘가’를 맞아서~
박환: 러시아인 여성이름 ‘올가’인 줄 알았어요.
류근: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해요. 흰백자 白 머리수 首, 천자문은 중국 양나라 때 주흥사 라는 사람이 양 무제의 명으로 감옥 안에서 편찬한 책이라고 하거든요. (천자문(千字文)-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 그런데 한 글자도 중복됨이 없이 네 글자 250구는 일조의 시집입니다. 그런데 주흥사가 이 천자문을 감옥 안에서 단 하루 밤에 완성하고 나서 스트레스로 수염과 머리가 하얘지고 눈까지 멀어서 백수문 이라 한다라는 카더라가 있어요. 그런데 그와 똑 같은 진짜 그 정도 스트레스 라면 아마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하룻밤 동안 그 독립운동가들도 머리가 다 하얘지지 않았을까.
최원정: 그 얘기 들으니까 시인의 白髮이 달리 보이네요. 創作의 고통의 결과?
박환: 평소에 보면 진짜 열심히 노력하는 거 같애요~ 밤을 새면서~
심용환: 그런데 이제 이날 그냥 국호만 정한게 아니고요. 국호, 국회, 헌법 나라의 근본 3가지 원리가 다 정해지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이때부터 의회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는데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결성된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죠. 그 당시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이라는 게 이때 만들어졌구요. 대한민국 임시헌장 이라고 하는 10개조 헌법전문도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은 정말 나라 만들기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거고~
박환: 물론 1919년 4월 10일부터 하루 동안 이것이 최종적으로 결정은 됐지만 그 이전에 독립운동가들이 끊임없이 권력구조랄까요 이런 임시헌법 내용이랄까요. 이런 것들에 대한 수많은 고민들이 있었구요. 또 임시헌법 나름대로의 강령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가져왔기 때문에 본격적인 논의도 했다 이렇게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최원정: 임시정부 수립이 말은 하루지만 오랜 고민의 결과다. 그런데 정부라는게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인데 이게 왜 상하이에서 이루어졌는지?
심용환: 지금도 상하이에 임시정부 청사가 남아 있잖아요. 저도 갔다온 적 있고 사실 많이 가 보셔서~~!
박재민: 저는 또 한번 한 없이 작아지네요~
이윤석: 작아져도 내 어깨보다 넓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온 사람이예요. 여러 사람, 어린이들 하고 뭉쳐 가지고 대한민국 만세 부르고, 2년전에 가서 미리 100주년 축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무 뿌듯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이들이 그러는 거예요. 너무 작아요. 초라해요. 이렇게 얘기 하니까 조금 마음이 안타깝기도 했어요.
박환: 그런 설명안하셨어요?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지금 관광객들이나 일반인들이 임시정부 청사를 탐방했을 때 그건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청사예요. 그러니까 임시정부가 조금 여러 활동이 미약했던 시절에 였죠. 초창기 하비로 청사 1919년 임시정부 청사는 상당히 큰 건물이었죠. 그런거 설명 안하셨어요?
이윤석: 지금 알았어요.
박재민: (이윤석을 향하여) 어깨가 작아지신 거 같은데~?
심용환: 가보시면 느끼셨겠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그 주변 건물들이 유럽 쪽으로 특이하잖아요?
이윤석: 예쁘고 유럽 한 복판에 와있는 느낌이었어요.
심용환: 유럽식 건축물들이 있다는게 단서가 될 수 있다는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프랑스 조계지였어요 (租界地-청나라말 열강 들의 중국진출로 인해 중국이 타국에 임대하여 준 지역), 그러니까 치외법권적인 지역인 거죠.
최원정: 그러니까 프랑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인거예요?
심용환: 그렇죠, 그렇죠.
박환: 거기 상하이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은 상하이에 여러 나라들의 조계지가 있었잖아요. 특히 프랑스만이 유일하게 망명정부를 허락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자연스럽게 상해 프랑스 조계지 쪽으로 모일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이루어졌던 것이죠.
이윤석: 일본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텐데~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니까~ 약 올랐을 거같애요.
박재민: 상하이하면 우리가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상하이 트위스트~(설운도 가수의 노래), 두번째는 무역 중심지가 떠오르잖아요. 상하이에 거점을 잡아서 임시정부를 세운다면은 한국에서 들어오는 소식도 빨리 들어올 수 있고 또 빨리 알릴 수도 있고 외국인들과 교류가 있다보니까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박환: 대단하신데요. 1842년에 아편전쟁이 끝나면 청나라와 영국이 협정을 맺게 돼요. (제1차 아편전쟁(1839~1842)-청나라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일으킨 영국의 침략전쟁), 그걸 난징조약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강제적으로 영국에 의해서 상하이가 개방이 되죠. 그러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오게 되고 무역이라든가 외교라든가 이런 쪽에 상하이가 급부상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3.1운동 후에 많은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상하이에 와서 또 망명정부가 허락되는 곳이니까 이곳에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를 해서 3.1 이후에 뭔가 정부를 조직해서 여기서 뭔가 좀 이뤄보겠다는 그러한 것들이 활성화되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류근: 잠깐만요. 독립 임시사무소란 말은 처음 듣는데~
박환: 3.1운동 이전에 현순 이란 인물이 국내에서 상하이로 파견되게 되는데요. 3.1운동을 하기 전에 이쪽으로 옵니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외교적으로 국제적으로 알리는 사전 정지 작업을 하고요. 더불어서 상하이에 미리 와서 임시독립사무소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현순이 상하이에 온 것은 바로 3.1일날입니다.
박재민: 이 당시에 여러 사람들이 의도하고 3.1에 무슨 행동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지나고 보니 3.1이란 날짜가 참 의미가 깊은 날이네요.
박환: 그렇죠.
이윤석: 많은 것들이 시작되는 기점이예요.
최원정: 해외에서도 본인의 임무수행에 여념이 없었던 걸 생각하니까 이것도 참 대단하고 짠 하네요. 정말, 죄송하지만 이 ‘현순’ 이라는 이름 처음 듣습니다. 매주 처음 듣는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참 죄송합니다.
이윤석: 약간 그런 느낌이 들어요. 현순의 독립임시사무소가 2번 주자 같은 독립운동의 이어달리기를 한다면 3.1운동이 출발지이고 최종주자가 임시정부라면 2번 주자 독립임시사무실, 연결이 중요하잖아요. 그런 역할을 해줄 거 같애요.
박환: 현순이 미국이라든가 이승만이라든가 전세계에 우리 독립선언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알리는 그런 역할도 했기 때문에 현순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한~
최원정: 하룻밤 사이에 국호도 만들고 내각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떤 인물들이 내각에 이름이 올랐는지 궁금하네요.
박환: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익숙하신 많이 아시는 존함들이 만이 나오죠?
박재민: 다 익숙하고 특히 안창호 선생님 이나 최재형 선생, 외무총장 자리는 2 주전에 박용만 선생이 내정됐다고 들었죠. 그런데 조금 의외인 건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되어 있네요.
박환: 1919년 4월 11일날 내각을 조직했을 때는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라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였어요.
최원정: 처음에는 내각제였다.
박환: 그래서 인제 국무총리 이승만~이렇게 나오시는 거죠.
류근: 그만큼 당시에 그분들이 아주 유능했거나 유명했다는 뜻이잖아요. 어떤 강력한 이유가 있어서 임명하지 않았을까요.
최원정: 정부가 바뀌고 조각이 발표가 나면 하는게 있잖아요?
이윤석: 청문회, 인사청문회~
최원정: 물론 그때 안했겠지만 오늘 우리 이 자리에서 우리 아까 나왔던 그분들 인사청문회 한번 진행해 볼까요? 먼저 국무총리부터 가보겠습니다.
심용환: 국무총리 임명된 분은 이승만 보통 인재가 아닙니다. 워싱턴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마쳤고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정치학 박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보통 말을 이승만 박사 이승만 박사 말을 하잖아요. 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이 뭐냐면 당시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이었습니다. 얘기하면 총장 때 학생이었으니까 이게 최초 박사로서의 후광과 대통령 인맥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최원정: 미국 대통령과 아는 사이야
류근: 그래서 학벌부터 기가 팍 죽네요 하버드도 그렇지만 프린스턴 대학은 2019년도 미국 대학순위 1위 라고 신문에 났어요.
일동: 아! 그래요? 프린스턴이요?
이윤석: 이력으로 봐서는 임시정부 대표로 할만한 인물로 손색이 없다고 보이는데 지금 청문회니까~
심용환: 주눅들지 맙시다!
이윤석: 이승만 후보,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인데 혹시 그 과정에서 논문 표절이라든지 학력위조라든지 이런 사항은 없었습니까?
류근: 거기에 더해서 이왕이면 인사, 5대 원칙대로 따져봐야 합니다. 위장전입 부동산투기 세금탈루 그리고 병역면탈,
박환: 그런데 이분들이 그 당시 미리 예견력일까 이런 거 있었나 봐요 특별한 표절, 논문표절이라든가 기타사항 여기에 걸리는 게 별로 없는 걸로 나오죠. 기록상 나오고요. 그런데 이승만 같은 경우는 걸리는 문제가 하나, 단재 신채호 선생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그런 부분이 있었다구 그래요.
류근: 대쪽같이 꼿꼿한 신채호 선생님이 이승만을 결사반대했다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박재민: 자, 그러면 그 먼지가 뭐였는지 제가 준비를 해왔습니다. 예일대학교에서 발표된 문서가 하나 있는데 이게 5장의 문서입니다. 요 문서를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이 문서 때문에 실제로 신채호가 이승만을 격렬히 반대했다고 나와 있구요. 이 문서는 1919년 2월 25일날 이승만이 그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월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문서입니다. 여기에 내용을 살펴보면은 굉장히 간곡한 요청을 하고 상황설명하는 내용들이 있어요.
최원정: 그런데 글씨가 잘 안보여요.
류근: 1919년 영어는 더 안 보여요.
이윤석: 옛날 영어라~
박재민: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이 부분 때문에 신채호 선생이 이승만을 굉장히 격렬히 반대를 했었는데 the peace conference will take such action as will free Korea from the present domination of Japan and place Korea under the mandatory of the League of Nations with the guarantee of complete independence in the future.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요청한다는 내용인데, 문맥상 여기 나와있는 mandatory 라는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거는 위임통치를 얘기하는 거예요. 한 마디로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위임통치를 요청하니 대한민국을 구해 달라는 내용인데 완전한 독립을 꿈꿨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과연 맞는 조건이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고,
류근: 잠깐 만요, 그러니까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하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이승만 청원서 中-------에서 정도로 했다는 거아녜요?
박재민: 그렇습니다. 여기 굉장히 재미있는 거는 league of nations (국제연맹)라는 단체가 있어요. 이거는 1920년 유엔의 전신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보냈던 이 편지의 league of nations 에 일본이 상임이사국으로 있습니다. (국제연맹의 4개국 상임이사국中 하나였던 일본), 한 마디로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보냈던 그 league of nations 의 위임통치에 우리가 들어가겠다 라고 했는데 거기에 주도세력이 일본제국이었어요.
박환: 이 청원서는 이승만이 그 당시 미주에 대한인국민회라고 있었어요. (대한인국민회-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이승만-안창호 등에 의해 창설된 독립운동단체), 거기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을 제출할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비자가 발급이 안돼서 파리까지는 가지 못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한테 제출한 것인데 위임통치안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신채호가 이승만에 대해서 강력하게 인사검증에 있어서 청문회에서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이죠. 조금 더 말씀을 드리면 저의 학계에서는 위임통치안에 대해서 굉장히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서 그 당시에 이승만이 했다는 설도 있고 그 당시 직접적으로 바로 3.1운동이라든가 독립운동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되는데 이때 이런 위임통치 라고 하는 것은 국민의 정서 라든가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해서 학계의 대부분은 위임통치안에 대해서 부적절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최원정: 학계에는 아직 논란이 있군요.
류근: 지금 독립을 하겠다고 다 모였는데 거기서 지금 국제연맹의 통치를 받겠다는 거니까 그 자체가 일단 모순되는게 아닙니까.
이윤석: 저도 조금 이상하고 아쉽긴 하지만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지금 당장 급한게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는거니까~ 직접적인 일본의 통치를 끊어내고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과도기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박환: 그래서 그 부분은 전략적 차원으로 해석하는 분도 있고 그럴 때에는 긍정론으로 가고요, 그러나 1919년 6월 29일을 그걸 월슨 대통령한테 청원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과연 조국의 독립을 추구하는 애국지사가 할 말인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심용환: 위임이 가능한가~?
박환: 위임은 국민정서상 있을 수 없는 부정적으로 보는~
최원정: 그러네요. 말씀 들어보니까 전략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서적으로는 신채호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이거는 거리감이 있지 않았나~
심용환: 관념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책인가에 논란이 많다.
최원정: 아무튼 이 문제는 학회에서도 논란이 있다고 해서 평가는 학계에 놔두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가 된 거잖아요. 어떻게 국무총리가 되었을까요?
심용환: 그게 사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이 당시 저명했던 독립운동가 였구요 다음은미국 대통령과 어떤 인연이 있었다는 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밖에 없죠. 왜냐면 외교독립에 대한 기대가 높고 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풀어야겠다는 독립방략을 아주 강력하게 선포하는 시대였으니까 또 하나는 어떻게 됐던 아까 나왔던 임시정부나 이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구성원들을 보면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 이면서 독립운동가에다가 박사학위를 갖춰서 미국에 어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여러 흠격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택함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라고 귀결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박환: 그 당시 임시의정원에 총29명이 있었는데요. 구성원 상으로는 지역적으로는 기호파 VS 서북파로 나누고요. 기호파는 일반적으로 서울-경기-충청, 서북파는 평안도 쪽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승만 같은 경우는 기호파에 가깝고요. 기호파가 그 당시에 과반수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지역적인 특징 같은 경우도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임명되는데 작용했다고 보고 있죠.
이윤석: 지역, 종교, 학벌 이런게 영향을 미쳤다는 건데 이런 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부분인 거 같아서 씁쓸하다고 봐야 될까요.
박환: 제가 한 말씀 드리고 싶은게 주로 해외지역 있잖아요. 만주라든가 러시아라든가 중국 본토 같은 경우도 해외에서는 밀정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같은 지역 출신들 끼리는 지역으로 뭉칠 수 밖에 없는 그런 불가피성도 있었고 그것이 하나의 독립운동을 이끌어가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역성이라는 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최원정: 출신을 통한 검증이 필요했겠어요. 확 이해가 되네요.
심용환: 요즘처럼 지연 학연은 이해관계가 걸려있는데 독립운동은 이해관계가 걸려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의거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어떤 형태 덩어리로 그냥 생각하는게 좋을 것 같애요.
류근: 그런데 우연찮게 3월 26일 뭘 녹화를 하나했는데 오늘이 이승만 태어난 날이예요. 하여튼 제가 들은 카더라 중에는 이승만이 단지 이씨라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다 라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이승만이 양녕대군 16대 후손이라는 거예요. 새로운 나라의 최고 자리에 왕족이 앉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는 거죠.
최원정: 공화국 세우라고 운운하면서 왕족을 세우라고 하는 건 진짜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네요! 이걸 카더라로 만듭시다.
심용환: 이 이야기가 변명일지 모르지만 저희 할머니께서 양년대군파이신데 자손이 적어요. 그래서 양녕대군 손들은 우리 양녕대군파에서 초대 대통령을 배출했대 라는 자부심으로 제가 어렸을 적부터 저에게 많이 전달해 주었어요. 그런 문화를 무시할 수는 없는 거죠.
박환: 그런 걸 복벽주의 라고 합니다. (복벽주의-나라를 되찾고 임금을 다시 세우자는 생각), 임금의 그런 어떤 것을 회복한다. 복귀한다 해서 복벽주의 라고 하는데 이승만이 그 당시에 국무총리에 임명된 것은 이승만의 개인의 능력과 시대적인 상황, 그 당시에 국제연맹이라든가 파리강화회의 라든가 저희가 어떻게든지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서 조선의 독립을 회복해야 되겠다 그래서 이승만이 가졌던 개인적인 능력과 정치력 이런 여러가지 것들이 국무총리로 임명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압니다.
최원정: 국무총리 인사청문회는 이 정도로 통과되고요.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마무리 하고 다른 인물로 가보겠습니다.
박재민: 최재형 선생 있잖아요. 정말 존경하는 분이거든요.
최원정: 아세요? 어떻게 아세요?
박재민: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일본군에게 잡혀가던 그 집이 있거든요. 그 장소에 직접 가봤구요. 최재형 선생님의 손녀딸도 직접 만나서 인연을 맺고 온 분이랑 최재형 선생의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최원정: 박환 선생님이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일가견이 있으시거든요.
박환: 제가 뭐 최재형 선생을 최초로 역사 속에서 발굴하고 그리고 논문 쓰고 책을 쓰고 그 다음에 최재형 기념관을 제가 전시를 전체적으로 자료를 제공하고 감수도 하고 최재형을 역사에 등장시킨 사람입니다.
박재민: 왜냐하면 그때 손녀 딸께서 묻혀져 있었는데 한국에서 발굴이 돼서 최근에야 이렇게 보러 오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박환 교수님이 그분이셨구나!! 퍼즐이 지금 맞아 떨어지네, 손녀 딸이 얘기 하신 분이 누군가 했더니 지금 여기 계시구나!
류근: 아무리 그래도 이게 (엄지 손가락 두개를 박재민씨에게 흉내내면서) 뭡니까
최원정: 여기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불굴해낸 교수님들 자리!
류근: 매주 이런 깨알 자랑이 등장!
박환: 그만큼 최재형은 한국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인물입니다.
최원정: 오늘 약간 미리 보기 예고편으로 최재형의 인물에 대해서 10초 동안 소개 부탁드립니다.
박환: 최재형은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구요. 단적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후원자, 러시아 지역에서 의병조직에 가장 대표적인 동의회를 만들었고 (동의회-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항일의병 조직) 민족언론인 대동공보의 사장, 1912년대 항일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단체인 권업회의 총재 (권업회-1912년 시베리아에서 조직된 한국인 애국단체),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그 정도로 러시아 지역에 한인동포들한테 큰 역할을 했고 특별히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투자하고 기부하고 기증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산증인입니다.
박재민: 10초는 부족하네요. 거기에 갔을 때 모든 한인들의 집에 페치카 라고 해가지고 벽난로가 한인들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벽난로에는 최재형선생의 초상화가 집집 마다 있었대요.
박환: 최재형의 애칭이 벽난로(페치카) 잖아요. 난로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베풀었다. 그런 인물 페치카 최재형!
이윤석: 일단 막강한 부를 개인 혼자를 위해 쓴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놨다는 사실 자체가 재무총장 자격에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제가 궁금한 분이 교통총장 문창범인데, 이분은 어떤 분입니까?
류근: 교통총장은 뭐하는 자리입니까?
박재민: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박환: 상해 임시정부 같은 경우는 국내 라든가 만주 라든가 러시아 라든가 또는 미주 이렇게 전체적으로 각지로 퍼져 있던 독립운동 연계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통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철도나 버스나 이런 게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들의 상호간의 소통과 연계를 책임지는 자리로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자리라고 볼 수 있죠.
심용환: 독립운동 자금도 거기서 다 왔다 갔다 하고!
박환: 네,
심용환: 문창범 선생은 단적으로 얘기하면 이동휘 선생과 더불어서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상징과 같은 분인데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막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도 유사 임시정부기구를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단체가 대한국민의회 라는 단체인데 (대한국민의회-1919년 3월 17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첫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이 되신 분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대통령), 너무나 영향력이 대단하셨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그냥 대통령~
박환: 제가 잘난 척 하나 더 하면 문창범(文昌範)도 제가 최초로 발굴을 해서 논문을 썼는데 문창범은 최재형보다 한 세대 아래 그러니까 1919년 당시에 최재형은 60세, 문창범은 50세, 그래서 새로운 신세대, 신세대의 리더로서 러시아 지역 항일독립운동을 최재형에 이어서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렇게 요약된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류근: 요약 정리 감사합니다. 오늘 사실 보니까 오늘의 위인이셔~ (일동 웃음) 역사적인 훌륭한 위인들을 정말 두 분이나 발굴했다는 거 아닙니까!
심용환: 아직 더 많이 밝혀질 게 있죠 (학계에서 더욱 심층적인 연구필요),
박환: 학계에서 재평가를 제대로 못받고 있었죠.
류근: 이제 시작이죠.
박재민: 듣다보니까 좀 특이한 얘기가 있었는데 대한국민의회, 러시아에 정부가 따로 만들어진 건가요. 아니면 또 하나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건가요?
심용환: 조금 정확히 할 필요가 있는데, 3.1운동의 여파 속에서 러시아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서울에서도 한성정부,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해 임시정부 이렇게 3기관이 나타나구요. 이외에도 실체는 없는데 일명 전단정부 라고 해서 정부가 있다고 선포하는 이런 약간의 유령단체들도 다 합치면 총8개 정부가 선포가 된 거예요.
박재민: 정부가 8개 였어요?
최원정: 임시정부 아주 완전히 풍년이네요~
이윤석: 그런데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료인데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개~ 뭐 이런 노래가 있는데 마무리가 어떤 게 진짜인지 몰라 몰라 몰라~ 이런 노래가 있거든요. 그런데 국가가 하나인데 정부가 무려 8개나 수립이 되었잖아요. 국민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웠지 않았을까?
류근: 조선 8도란 말을 들어봤어도 조선 8정부는 처음 들어봅니다.
박환: 그래서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정부와 상해 임시정부가 또 한성정부가 어떻게 잘 통합할 것인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서 떠올랐다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심용환: 문제는 뭐냐하면 통합을 할려면 결국은 어디를 거점으로 삼을 것이냐 어느 지역으로 뭉칠 것이냐 이런 건데 장단점이 정확해요. 왜냐하면 예를 들면 대한국민의회는 연해주에 있으니까 한반도와 맞닿아있죠 국내 진공하기 유리하죠. 그 지역에 한인들이 많으니까 탄탄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죠. 반대로 상하이 쪽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게 약점이긴 하지만 좀 안전하고 일본군이 침입하기에 불편하고 그리고 또 하나는 아마도 말씀 했지만 국제외교활동을 하는데 아주 유리한 지점이니까 장단점이 비슷해요. 이 얘기하면 저 얘기가 나오고 저 얘기하면 이 얘기 나오고 해서 임시정부 통합하는데 의견대립이 심각했고 협상이 쉽게 풀리지가 않았어요. 이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때 1919년 5월 임시정부 소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 사람이 상하이에 도착하는데 그가 누구냐?
이윤석: (이때 이윤석씨가 갑자기 고함침), 잠깐! 지금부터 안창호 내무총장의 취임연설이 있겠습니다.
박재민/안창호役: 안창호입니다. (안창호 변신중), 독립운동이 일어나 우리나라 최고 기관을 세우려할 때 서로 교통이 불편하므로 동서에서 기관이 일어났으니 오늘날은 이를 다 통일해야겠소. 북간도에서도 따로 하고 서간도에서도 따로하고 어디, 어디에서 따로만 일하면 이는 우리가 스스로 멸망을 취함이외다.
일동: 옳습니다!! 맞습니다! 안창호! 안창호! (연호)
최원정: 실제 안창호 선생이 이러셨을 거 같애요. 지금 딱 얘기만 들어도 당장 통합이 될 거 같은~
심용환: 드디어 안창호 선생이 등장 했습니다. 러시아 지역 대한국민의회에 통합정부를 제안합니다. 여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한국민의회는 원세훈을 대표로 해서 대표단을 상하이에 파견이 되는 거죠. 본격적인 실무협상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겠고요. 이제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안창호 선생께서 협상카드로 한성정부 카드를 딱 내놓게 됩니다.
일동: (놀람) 오! 오!
최원정: 상해도 아니고 연해주도 아닌 한성정부요?
심용환: 그냥 좀 과격하게 얘기하면 연해주와 상해를 모두 해산하고 한성정부를 기반으로 새롭게 시작해보자. 제3의 대안을 제시한 거죠.
류근: 한성정부 지금 왜 갑자기 튀어 나와요?
심용환: 자, 저 도표를 보십시오.
한성 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내무부총장 이동녕
외무부총장 박용만
재무부총장 이시영
교통부총장 문창범
군무부총장 노백린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이 표가 한성정부의 내각명단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시면 한성정부의 내각에 어떤 구성원들이 상당부분이 상해 임시정부의 내각과 일치합니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한성정부의 내각을 기반으로 해서 상하이 임시정부하고 러시아의 국민의회 정부하고 통합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보인다는 것이죠.
최원정: 많이 겹치네요.
류근: 그래도 저쯤되면 한성정부가 단순히 임시정부 내각과 닮았다 라는 이유만으로 대한국민의회 설득 하기는 좀 어려웁지않았을까 싶은데~
박환: 근데 인제 저기 표에서 보시는 것처럼요.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영입을 하고 있고 또 교통부총장으로 문창범 이라고 하는 러시아 지역의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를 영입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런 걸 통해서 안창호가 러시아 지역의 대한국민의회 정부의 사람들을 회유할려고 하는 측면도 조금 있었는데요. 한성임시 정부 같은 경우는 13도의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고 또 국민대표회의 비슷하게 국민대회를 엽니다. 일정한 절차를 거친 거죠. 그래서 한성 임시정부를 내세웠던 것이죠.
최원정: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까 신의 한 수 인데요~ 사실 한성이란 곳은 3.1운동이 시작된 곳이고 그리고 상해도 연해주도 한성의 명분을 반대를 못하는 거예요. 이 제안을 거절 못하는~
류근: 일제 탄압 때문에 협동은 좀 미약했을 수는 있겠으나 정통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도죠.
최원정: 이걸 누가 어떻게 반대하냐구요.
박재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사실 가장 먼저 논의가 시작된 곳은 정부를 상하이에 둘 것이냐 또는 러시아에 둘 것이냐 이것에 대한 것 같은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건가요?
박환: 안창호 선생님께서 상해 임시정부 쪽에서는 정부 소재지를 상하이에 두겠다 왜냐하면 여러가지 프랑스 조계의 외교라든가 망명정부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대한국민의회가 강력하게 반대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의회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둘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1917년부터 22년까지 러시아는 완전히 내전기간이거든요. 이런 여러가지 상황으로부터 일단 의회도 상해쪽으로 하면서 대한국민의회 러시아 쪽의 사람들을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런 쪽으로~ 그러다 보니까 대한국민의회 쪽에서도 저런 안창호의 이야기가 상당히 수긍이 가거든요. 1919년 8월 30일경에 러시아 지역의 대한국민의회를 해산하고 급속도로 서로 간의 상해 임시정부 쪽으로 대한국민의회가 합쳐지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이윤석: 안창호 선생님은 참 대단한 협상가네요. 정통성을 강조로 해서 두 정부를 통합을 하고 정부의 위치는 상해로 옮겨올 수 있도록 만들고 해결이 딱 됐네요.
류근: 기름과 물이 섞이지 않을 때 융화제 한방울 딱 떨어뜨린 거예요. 그 역할을 하신 거 같애요.
최원정: 이걸 두고 이다안 이라고 그래요. 이래서 다들 안창호 하는거예요~
심용환: 안창호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 같애요. 요즘에 봐도 배울게 많은 귀감이 되는 선생님이십니다.
최원정: 많은 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안창호 선생님을 꼽는데요.
이윤석: 대한국민의회의 결단과 추진력도 칭찬받을 만하네요. 시원시원하고~
심용환: 그 결단도 보통아니예요. 드디어 통합된 임시정부의 내각을 보시면;
통합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재무총장 이시영
노동국총판 안창호
조금 바뀌었죠. 집정관 총재였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구요. 대한국민의회의 대표격이었던 이동휘가 국무총리 자리에 취임하게 됩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직을 보게되면 상해 임시정부 하고 연해주에 있었던 대한국민의회가 어떻게 합쳐졌는가에 대해서 확연히 드러나는 내각의 구성명단을 볼 수 있는 거죠.
박재민/안창호役: 이의 있습니다. 안가, 창호입니다. 내가 내무총장이었던 것 같은데 노동국 총장도 아니고 총판은 어떻게 된 일이오?
박환: 많은 분들이요 통합의 가장 큰 역할을 하신 분이 안창호 선생님 아닙니까 (총판-한 조직의 수장, 지금의 장관과 차관 사이), 그래서 안창호 선생님이 혹시 대통령이 되는게 아닐까? 그러면서 사실은 안창호 선생님을 야심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산 안창호 같은 경우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지위 라든가 명예는 중요치 않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노력하는게 중요하지 않느냐 그래서 노동국 총장이라는게 아니고 나는 노동국 총판을 스스로 하겠다 그래서 바로 공복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통합정부에 머슴이 되겠다 라는 그런 어떤 자세를 보이셨어요.
최원정: 독립운동가의 품격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류근: 오늘 임시정부의 생일 잔치의 준비는 안창호 선생님이 한 거예요.
심용환: 사람들한테 가서 강연을 하면 도산 안창호 알죠? 하면 네 알아요 하는데 반대로 그럼 뭘 하셨어요? 하면 당황해 해요 왜냐하면 호 밖에 없고 그 유명한 주석이나 대통령 같은 유명한 지위가 없느냐 사람들이 유명은 하신대 뭐 하셨는지 그런데 오늘 이렇게 딱 들어보면 이유가 있는거죠. 정말 중요한 독립운동을 본인이 다 해놓고 자리를 취하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그냥 도산 안창호 로만 기억이 되는 거죠.
박환: 안창호는 멋진 독립운동가세요!
최원정: 진짜 우리 100년전 독립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어린 그 이야기를 들어보셨는데 자, 이렇게 어렵게 지켜낸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세요?
박환: 임시헌장 제3조를 보면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모두 평등임 이라고 명시를 하고 있어요. 아까 제가 잘난 척을 했던 최재형의 신분이 뭔지 아세요?
류근: 자본가 라면서요~
최원정: 사업가라면서요~
박환: 자본가고 사업가죠. 그런데 사실 최재형의 아버지는 함경도의 노비였어요. 어머니는 기생이었어요. 자식은 가장 천민(賤民)이죠.
심용환: 천출이죠.
박환: 그런데 1919년 4월 11일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최재형이 임명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 그리고 대한제국 이라는 황제의 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民의 나라로 새롭게 탄생하는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심용환: 최재형이 임명됐다는 건 왕족의 테두리를 막 찢으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든 거죠. 저도 사실 3조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전 남녀라는 단어가 되게 인상적이었는데 흥미로운게 뭐냐 1922년 2월 8일날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우리가 지난번에 얘기했었던??
최원정: (손들고) 저 알아요! 김알렉산드라
일동: 아니?
최원정: 김마리아!
류근: 이게 웬 마리아!
이윤석: 아니란 마리아!
류근: (PD를 향해) 재미있으라 한 거예요. 역사를 위해서
최원정: 다음부턴 헷갈리지 말아요 김마리아,
심용환: 그런데 임시의정원에 의해서 김알렉산드라가 아니라 김마리아가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이 됐구요. 지금까지 확인된 여성 의원이 7명, 우리가 지향한 민주공화국의 가치, 남녀신분 이런거 따지지 않는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천민도 장관이 될 수 있고 여성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 이 과정을 만들어간 게 너무 감동적입니다.
박재민: 100년전 오늘 3월 1일, 정말 전국민이 독립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일어났었잖아요. 이 국민들이 저 멀리서 독립을 이끌어줄 사람들이 나타났다 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을 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지 상상이 안돼요.
박환: 임시정부가 참 어렵게 통합이 됐잖아요. 통합 이후에 어려운 일들도 많이 있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온 문창범 같은 경우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는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또 대통령으로 임명됐던 이승만 같은 경우도 오는 것도 늦어지고 그런 가운데서 국제적인 어떤 정세도 상당히 변화하면서 통합임시정부의 행보가 여러가지 또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하~하~
이윤석: 장밋빛 미래를 기대했는데~
최원정: 통합이란 대업을 이뤘는데 그 이후는~ 좀 침체되고 분열되고 이런 걸 지금 느꼈는데~
박환: 그러면서 고난과 역사 속에 새로운 또 뭐가~
류근: 아무튼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최원정: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후 이야기는 제가 다음주에 계속~,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획 2부에서 많은 기대 바라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6회,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정리).
① 1919년 3.1만세운동 후 수만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이기 시작, 민족대표 33인대표 현순, 문학가이자 언론인 이광수, 3균주의 창시자 조소항, 근대공화주의자 대표 신익회, 민족사학자 신채호, 신한청년단 여운형,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시영까지 총 29명의 독립운동가들 한자리에.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회의를 10시부터 시작해 밤을 새가며 열띤 토론을 거쳐서 다음날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공포, 2019. 4. 1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② 1919년 4월 11일 내각 조직 국무총리 수반 내각책임제,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이승만 워싱턴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수료, 한국 최초 국제정치학 박사, 당시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이었을 때, 이승만은 학생, 최초 박사고 미국 대통령과 인맥, 이력으로 봐서 임시정부 대표로 손색없는 인물,
③ 대의원 29명 중 한사람 신채호 이승만의 국무총리 임명 격렬히 반대, 그 이유는 아래의 청원서 때문, the peace conference will take such action as will free Korea from the present domination of Japan and place Korea under the mandatory of the League of Nations with the guarantee of complete independence in the future.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간절히 기원(이승만 청원서 中), 국제연맹의 4개 상임이사국에 일본, 거기 주도세력이 일본제국,
④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첫째는 당시 저명한 독립운동가, 둘째는 미국 대통령과 인연으로 외교독립론, 셋째는 상당수 독립운동가들 기독교인들, 이런 세가지 요인이 작용, 최재형은 러시아(연해주)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후원자, 러시아 지역 대표적 의병조직 동의회 만들었고, 민족언론 대동공보의 사장, 1912년대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단체 권업회 총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전 재산 독립운동에 투자, 기부, 기증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산증인,
⑤ 문창범은 이동휘 선생과 더불어서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상징, 1919년 3월 17일 러시아(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 의장 대한민국 첫 임시정부 한인들 대통령. 임시정부 통합하는데 의견대립이 심각했고 협상이 어려울 때, 1919년 5월 임시정부 소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창호가 등장, 1919년 8월 30일경 러시아 지역의 대한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상해 임시정부 쪽으로 대한국민의회가 합쳐지는 급물살, 통합임시정부 내각 구성합의
⑥ 상해 통합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국무총리 이동휘,내무총장 이동녕,외무총장 박용만,재무총장 이시영,노동국총판 안창호, 집정관 총재였던 이승만이 대통령. 대한국민의회의 대표격이었던 이동휘가 국무총리, 대통령과 국무총리직을 보게되면 상해 임시정부 하고 연해주에 있었던 대한국민의회가 어떻게 합쳐졌는가에 대해서 확연히 드러남, 내각 구성명단 참조.
⑦ 도산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지위나 명예는 중요치 않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노력하는게 중요하다, 노동국 총장이 아니고 나는 노동국 총판을 스스로 하겠다. 공복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통합정부에 머슴이 되겠다 라는 자세,. 독립운동가의 품격 안창호, 100년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은 안창호의 작품, 사람들한테 강연을 하면 도산 안창호 알죠? 하면 네 알아요 하는데 반대로 그럼 뭘 하셨어요? 하면 당황해 해요. 왜냐하면 호 밖에 없고 그 유명한 주석이나 대통령 같은 유명한 지위가 없어요 사람들이 유명은 하신대 뭐 하셨는지 그런데 오늘 이런걸 보면 이유를 알게 된다. 안창호는 정말 중요한 독립운동을 본인이 다 해놓고 자리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도산 안창호로만 기억이 되고 있다. 안창호는 멋진 독립운동가!
⑧ 100년전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는, 임시헌장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모두 평등 이라고 명시, 최재형의 신분은 천민, 그런데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장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황제의 나라에서 民의 나라로 새롭게 민주공화국 탄생, 임시의정원에 김마리아 외 여성 의원 7명, 우리가 지향한 민주의 가치, 남녀신분 철폐 새로운 세상 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