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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만점을 받고 서울에 소재한 명문 의대에 재학 중인 학생이 교제해 오던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는 말을 하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살해로 관계를 마감한 비극적인 사건이 보도돼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사건은 단순히 감정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 우발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 행위자는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기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사전에 기획하는 과정에서 이 행위자가 배운 의학 지식이 정밀하게 악용됐다. 행위자는 사전에 살해 도구인 칼을 구입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생명을 실수 없이 끊기 위해서는 경동맥을 찔러야 한다는 의학적 지식까지도 치밀하게 적용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이성을 통해 획득한 지식의 무력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수능에 만점을 받기까지 터득하여 축적한 어마어마한 학습량이 마음속의 일시적 좌절과 분노의 힘 앞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버릴 수 있는가? 이 어마어마한 학습량 안에는 지식의 방향을 바른길로 안내하는 작은 나침판 하나조차도 장착돼 있지 않았는가? 살인으로 귀결된 이 사건이 일상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바닷물에 떠 있는 거대한 빙산의 수면에 드러난 일각(一角)과도 같다. 이 일각은 그 밑에 거대한 몸체, 곧 특정한 시대사조와 이 시대사조에 장악된 교육이 만들어 낸 뒤틀린 인간형이라는 몸체를 숨기고 있다.
의지와 양심으로부터 유리된 이성과 감정
인간의 정신 기능이 지성과 감성과 의지로 구성돼 있고, 이 세 기능은 양심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인격의 중심에 의해 조절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서구의 철학적 전통이 견지해 온 인간관의 핵심이다. 그런데 서양 철학의 역사를 개관해 보면 인간 이해가 지성과 감성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해 왔을 뿐, 의지와 양심에 대해서는 매우 빈약한 통찰밖에는 보여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희랍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덕을 강조하긴 했으나 그가 말한 실천적 덕은 지성적 덕의 하위 개념으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칸트가 그의 도덕철학에서 실천이성의 이름으로 의지를 강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지를 실천이성으로 파악했다는 것은 의지가 이성에 압도돼 있음을 뜻한다.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의지로 철학의 중심점을 옮기긴 했으나 이들에게 있어서 의지는 도덕적인 의지가 아니라 악을 향한 의지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악마적이기까지 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희랍의 주류 철학자들은 이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사유를 전개하고 교육을 시행했다. 이성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너무나 강고한 나머지 이성적 사유를 통해 파악한 지식은 신적인 완전성을 가진 지식으로 숭배됐고, 이성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도덕적인 실천은 자동적으로 이뤄진다는 신념으로까지 나아갔다. 이 입장을 주지주의라고 한다. 고대 희랍 교육뿐만 아니라 현대 교육의 방법론이 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주지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산파술은 인간의 이성은 절대적으로 선한 지식의 인식 주체라고 보고, 반복되는 논리적인 질문을 통해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자극하고 꺼내어 주는 것이 교육의 요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이성을 중시한 주류 철학자에 대응해 소피스트들은 쾌락을 강조했는데, 쾌락을 강조했다는 것은 감정을 중시했다는 뜻이다. 현대 철학은 모더니즘과 이에 반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성된다고 분석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이 이성에 중심을 둔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감정에 중심을 둔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반복되는 철학의 진자운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철학은 감정의 자의성을 이성을 통해 견제하고, 이성의 비인간성을 감정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극복하고자 한다. 둘째, 이 운동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이 작업이 실패했다는 뜻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수능 만점 의대생의 살인이다. 이 의대생은 실연에 대한 분노와 좌절의 감정을 이성의 기능을 통해 통제하는 일에 실패했으며, 또한 자신의 감정을 통해 이성의 비인간성을 극복하는 데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의 산물인 정교한 의학적 지식이 악용되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 의대생은 주지주의와 감성주의 철학에 함몰된 현대 교육의 자화상이다.
이성과 감정의 조절은 양심을 면밀하게 살피고 양심의 지도하에 의지를 세울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며, 양심의 각성과 의지를 세우는 힘을 계발하는 데 실패할 경우에 도덕 생활은 불가능하며, 도덕이라는 이름하의 훈련은 반도덕이 되며, 이성의 악용과 통제 불능의 감정 폭발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이성과 도덕을 동일시하는 모더니즘이나 감성과 도덕을 동일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도덕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반도덕과 도덕 해체가 될 수밖에 없다. 현대 교육은 도덕으로 위장한 반도덕과 도덕 해체의 수렁에 빠져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수렁 속에 더욱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덕의 문제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고도 그것을 행할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임을 말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 입장을 주의주의(voluntarism)라 한다. 주의주의의 핵심은 로마서 7:18-19에 천명돼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 말씀의 핵심은 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그것이 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고자 원하는 생각도 있는데, 그것을 행할 의지가 없는 것이 인간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지혜 교육과 감정 절제 교육의 필요성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은 두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하나는 진정한 교육은 지식 교육에 한정돼서는 안 되고 지혜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희랍 사회에서는 주지주의 전통에 따라서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신비스럽게 특별한 지식을 지닌 자를 지혜자로 부름으로써 지식과 지혜를 동일시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특별한 지식을 갖춘 자를 지혜자로 부르지 않는다. 야고보서 3:13에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지혜와 총명이라는 단어에 이미 암시돼 있다. 지혜와 총명은 동의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지혜로 번역된 ‘소포스’는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영위하고 바른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을 뜻한다. 총명으로 번역된 ‘에피스테메’는 희랍권에서는 이성을 통해 획득한 지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됐으나 야고보서에서는 지식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지식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사실 성경은 지식 교육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지혜 교육만을 말한다.
그러면 지혜와 총명을 갖춘 자는 누구인가? 야고보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는 자’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지혜자를 세 가지 용어를 통해 정의한다. 첫째는 선행을 하는 자인데, 선행이란 도덕적으로 선한 생활 방식을 따라 사는 자를 의미한다. 둘째는 온유한 자로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자를 가리킨다. 셋째는 행함을 보이는 자다. 이 정의들은 모두 지성을 통해 얻는 지식을 말하지 않고 지식을 바른 삶과 인간관계를 위해 활용하고 적용하는 도덕적 태도를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성경이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할 것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욕구를 인내로써 통제하고 제어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데, 고린도전서 13:4-8에 등장한 15가지 사랑에 대한 정의를 살펴 보면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참는 것을 거쳐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으며, 다른 12가지 항목도 인내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덕목들이다.
현대의 교육은 새로운 정보 획득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는 반면에 정보의 선한 도덕적 적용과 바른 인간성 함양을 위한 내용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현대 교육은 인내하는 가운데 감정을 통제하기보다는 통제를 억압으로 해석하고 이 억압으로부터 감정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표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현대 교육의 진자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만 움직일 뿐이며, 인간 정신의 보다 근원적인 기능인 도덕적 의지와 양심의 강화를 위한 방안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지식과 감정 강화 교육으로부터 의지와 양심 강화 교육으로의 전환
수능 만점 의대생 사건은 지식과 감정 강화 교육으로부터 도덕적 의지와 양심의 강화를 위한 교육으로의 전환을 요청한다. 이 전환의 방향은 신명기 4:5-6에 명쾌하게 제시돼 있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이 본문은 지혜는 어떤 신비스러운 전문 지식 습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인데, 행해야 할 지침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규례와 법도의 중심은 도덕적 규범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제시한 규범의 교육과 규범의 실행이 지혜의 길이라는 뜻이다.
일반 공교육 - 마음의 도덕법에 근거한 규범 윤리
현대 교육이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의 항모는 나침판을 잃고 갈 바를 알지 못해 표류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은 규범 윤리의 회복에 있다. 규범 윤리의 회복은 두 영역에서 진행돼야 한다. 하나의 영역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함께하는 공교육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규범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거의 실종됐다. 그러면 이 영역에서 어떤 규범을 가르쳐야 하는가?
로마서 2:15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도덕법을 새겨 주셨다. 이 말은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도덕법이 실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 도덕법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도덕법은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손상됐으나 하나님은 손상된 마음의 도덕법을 대체하기 위해 명료하게 기록된 도덕법 - 사랑의 대강령, 황금률, 십계명, 성윤리 관련 계명들 - 을 주셨는 바, 이 도덕법은 성경에 기록돼 있다. 성경에 기록된 도덕법과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새겨진 도덕법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나 명료성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성경의 도덕법은 명료하나 마음의 도덕법은 많이 손상되고 왜곡돼 있어서 마치 전혀 다른 두 법체계인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도덕법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사랑의 대강령 중 첫 번째 강령과 십계명 중 1-4계명이 여기 해당한다. 이 법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비신자에게 이 법을 소개한다는 것은 이 법의 전제인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초청하는 전도의 형태를 먼저 취하고 그다음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사랑의 대강령 중 두 번째 강령, 황금률, 십계명 중 5-10계명이 여기 해당한다. 공교육의 현장에서 일하는 기독교인은 마음의 도덕법에서 기원한 도덕적 규범을 발굴하고 가르쳐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공교육은 규범 윤리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교회 교육 - 성경의 도덕법에 근거한 규범 윤리, 복음과 성령을 통한 의지와 양심 강화
다른 하나의 영역은 교회 교육이다. 현재 공교육은 도덕적 원칙을 거의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규범 윤리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가능한 한 규범 윤리를 배제시키고자 한다. 게다가 공교육에서 가까스로 규범 윤리를 적극적으로 채용한다 하더라도 죄로 말미암아 손상된 마음의 도덕법 자체가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뒤틀려 있기까지 하다. 공교육은 대체로 시류를 따라가고 시류를 교과 내용에 반영하는 것이 통상적이기 때문에 공교육 현장에서 규범 윤리를 실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교회 교육이다.
교회 교육에서는 풍부하고 명료한 자원을 가지고 규범 교육을 시행하는 게 가능하다. 교회 교육에서는 성경에 명료하고 풍부하게 제시된 규범적 원리를 확실하게 교육시킬 수 있으며, 구원의 원리와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의지를 실질적으로 강화시키고 양심을 예리하게 버릴 수 있는 능력을 풍부하게 주입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