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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선은 역시 빠르군요.”
양사부(楊師父)가 쌍돛대와 뱃머리에 돛을 활짝 펴고 잔잔한 바다위를 나는 듯이 달려가는 탐라선(耽羅船)의 뱃전에 서서 탐라선의 빠름에 감탄했다.
“탐라선은 태백산(한라산)의 왕벚나무와 산뽕나무를 써서 배를 만들기 때문에 배가 아주 단단하지요. 신라의 배는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인데 탐라선은 첨저선(尖底船)이라 속도도 훨씬 빠르지요.”
법화사의 배를 이끌고 있는 선장(船長) 조원스님이 옆에서 대답했다.
법화사 상단의 배 2척과 탐라 상단의 배 3척이 함대를 이루어 잔잔한 바다를 가르며 송악으로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신라 남서쪽 해안 항로는 해적들이 지배하고 있어서 황해 중간을 가로질러 송악 예성강포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탐라선만이 할 수 있는 원거리 항해기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뱃길이지요. 탐라의 원거리 항해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예로부터 뛰어났습니다. 장보고(량궁복)장군께서 당나라와 대륙 남부의 오월(吳越)의 뛰어난 조선술을 탐라선에 접목하여 당대 최고의 우수한 배를 만들고, 탐라의 뛰어난 항해술을 발전시켜 중국, 신라, 왜의 바다를 지배한 장보고 상단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원스님이 장보고 상단의 후예답게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조원스님과 뱃사람 승려들은 모두 구레나룻과 두발을 풍성하게 기르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스님 같지 않아 보였다.
금오(梁金烏)는 사방에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가보게 되는 송악에서 앞으로 지낼 일들을 찬찬히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짚어 보았다.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외조부가 되는 황해용왕에 대한 일들은 그동안 양사부와 궁사범을 통해서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황해용왕으로 불리우는 대현무(大鉉武)는 발해제국(渤海帝國)의 제후국(諸侯國)인 고리국(高麗國)의 왕이다.
고리국(高麗國)은 옛 고쿠리(高句麗)의 안시성과 요동성, 비사성이 있던 요동지방 즉 발해제국의 서쪽 지방에 위치해 있는 발해제국(渤海帝國)의 제후국(諸侯國)이다.
량만춘 성주의 배려로 탐라로 피신해 있던 걸걸(夫)씨들은 당나라로 잡혀갔던 걸걸중상의 아들 걸걸조영이 발해제국을 건국하고 해동성국이라고 불리며 번성하자 대부분 탐라에서 발해제국으로 돌아왔다.
현재 탐라의 걸걸(夫)씨의 숫자가 다른 씨족보다 작은 이유이다.
걸걸조영(乞乞祚榮)이 발해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성을 대(大)씨로 바꾸었기 때문에, 부여말갈의 왕족이던 걸걸(夫)씨들도 황족(皇族)이 되어서 성을 대씨로 바꾸었고, 이후 이백여 년을 탐라에서 온 대(大)씨들의 후손이 고리국(高麗國)을 다스리고 있었다.
고리국(高麗國)은 150여 년 전에는 당나라의 수군 요새이자 최대 무역항인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등주자사를 참살할 정도로 무력도 강력했고 발해의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강력한 나라였다.
그러나 오백년 전까지는 요하 상류(遼河上流)인 시라무렌(西刺木倫, Siramuren) 남쪽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점차 강성해져 요서지방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자신들을 키탄족이라고 불렀는데, 세계 최초로 철기를 사용했던 중동의 햇(히타이트)족의 일부가 샤카(스키타이)족의 일부와 함께 동진해온 민족으로 추정되며 뛰어난 철기 제조 기술과 금세공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쿠리(高句麗)에 대한 당나라의 침략 때에는 번번이 당나라 편에 서서 마침내 고쿠리를 멸망시키는데 일조를 하기도 하였다.
고쿠리 멸망 이후에도 근거지 영주(營州)를 중심으로 거란은 점점 더 강력해져 발해제국에 대해 끊임없이 침략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발해제국의 서쪽에서 거란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고리국(高麗國)이 그 첫 번째 희생양이 되어 이십여 년 전에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황해 전역의 바다를 장악하여 황해용왕이라고 불리던 고리국왕(高麗國王) 대현무(大鉉武)는 이 전쟁에서 영토 모두와 아들 모두를 포함한 친족 대부분과 고리국(高麗國) 육군 전력 모두를 거란에게 잃었다.
이후로도 발해제국 전체가 계속 거란에게 침략을 당하여 언제 발해제국이 망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는 지경이었다.
고리국왕 대현무(大鉉武)는 남아 있는 수군과 상선단을 이끌고 천혜의 포구가 있는 신라 패강(浿江,대동강) 하구 룡강(龍岡) 지방으로 피신했다. 룡강(龍岡)은 천혜의 항구 진남포(현재의 남포)와 오석산성 등 고쿠리(高句麗) 시대부터 평양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해온 요새가 널려있는 요충지이다.
신라도 나라 내부가 계속 혼란하여 북도(평안도)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고리국왕 대현무(大鉉武)가 룡강(龍岡) 지방으로 피신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북방의 요충지인 옛 고쿠리의 수도 평양(平壤)까지도 무주공산(無主空山)인 상태였다.
그러나 룡강(龍岡) 지방은 언제 거란이 침공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안전한 신라 예성강 쪽으로 상선단을 점차 이동시키고 신라조정에 뇌물을 써서 실권은 없는 이름뿐인 송악태수 자리를 얻어서 송악을 중심으로 재기의 발판을 만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송악태수 자리는 고리국의 재정을 맡아보던 을지문성이 왕륭(王隆)이라는 가명으로 우선 맡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대동강, 예성강 모두를 패강(浿江)이라고 불렀는데 삼국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강력한 육군,수군 연합의 패강진전(浿江鎭典)을 패서지방에 설치하여 이 지방을 관리해 왔다.
패강진전(浿江鎭典)의 군관(軍官)조직은 최고책임자로 두상대감(頭上大監)을 두고 그 밑에 대곡성두상(大谷城頭上)을 두었으며, 다시 그 아래에 대감(大監)·두상제감(頭上弟監)·제감(弟監)·보감(步監)·소감(少監)을 두었다.
두상대감과 대곡성두상은 급찬(級飡)으로부터 사중아찬(四重阿飡)까지로 삼았다. 대감은 7인으로 관등은 태수(太守)와 같은 까닭에 중아찬(重阿飡)에서부터 사지(舍知)까지로 삼았다.
두상제감은 1인으로 사지로부터 대내마(大奈麻)까지로 삼았으며, 제감은 1인으로 당(幢)으로부터 내마에 이르기까지이다. 보감은 1인이며 그 관등은 현령(縣令)과 같은 까닭에 사찬(沙飡)으로부터 선저지(先沮知)까지로 삼았다.
소감은 6인으로 관등은 선저지로부터 대사(大舍)에 이르기까지로 삼았다.
나름 강력한 군사조직이던 신라의 패강진전(浿江鎭典)도 신라조정의 무능으로 인하여, 신라조정은 통제력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은 황주(黃州,황해도 황주)의 황보제공(皇甫悌恭)이 장악하고 있었다. 황보제공(皇甫悌恭)은 할아버지 때부터 장악한 패강진전(浿江鎭典)을 잘 관리하여 원래의 강력했던 패강진전(浿江鎭典)의 위용을 되살려 놓았다.
문란한 행실과 실정(失政)으로 신라를 더욱 몰락케한 진성여왕이 작년에 죽고, 출신이 불분명한 효공왕이 즉위하니 신라는 더욱 불안해져 이제 금성(金城,서라벌)주위 삼백리 정도에만 영향력이 미칠 뿐이었다.
지방에서 세금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국가재정은 파탄상태이고 민심은 흉흉했다.
신라는 수도 근처를 제외한 모든 지방에서 호족이 발호하여 각자 그 지방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한심한 처지였다.
특히 패서(浿西 황해도,경기도)지방 호족들은 몇 대에 걸쳐 쌓아올린 군사력, 경제력을 바탕으로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다.
패서(浿西 황해도,경기도)지방의 중요한 호족들은 황주(黃州,황해도 황주)의 황보제공(皇甫悌恭), 평주(平州,황해도 평산)의 박지윤(朴智胤), 신천(信川,황해도 신천)의 강연창(康衍昌), 정주(貞州,경기도 파주 교하와 개풍군)의 유천궁(柳天弓), 광주(廣州,경기도 광주)의 함규(咸規) 등이었는데 이들의 무력과 경제력은 이제 시작인 송악(松岳)보다 훨씬 강했다.
대현무(大鉉武)는 고리국(高麗國)에서 패전(敗戰)하여 비참하게 피난 온 이후, 룡강(龍岡)에서 군사력을 송악(松岳)에서 경제력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거란과의 오랜 전쟁으로 육상병력을 모두 잃어버려 지난 십여 년간 보병과 기병을 양성하였으나 그 숫자는 기병 오백 명 보병 이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더 큰 문제는 육상전투를 이끌 우수한 장수가 거의 없는 것이었다.
수군도 상단 호위병력 정도이고, 세금을 거둘 지역이 송악(松岳) 인근뿐으로 아직 넓지 않아 해상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그저 현상유지 정도였다.
“예성강 포구가 보입니다.”
돛대 위에서 망을 보던 선원이 외쳤다.
예성강 포구에서 배를 내린 금오 일행은 송악으로 향했다. 마중 나온 송악 관리가 말을 준비해 와서 모두 말을 타고 이동했다.
“어서 오너라.”
대현무(大鉉武)는 송악의 신하들 십여 명을 거느리고 금오일행을 송악태수가 집무를 보는 동헌의 뒤쪽, 인적이 드믄 내실에서 맞이했다.
“양군사(楊軍師), 궁장군(弓將軍). 지난 십년간 집을 떠나 고생이 많았소. 금오가 탐라의 용호아지발도가 되었다니 두 사람의 노고가 참으로 크시었소.”
대현무(大鉉武)가 흐믓하게 금오 일행을 바라보며 치사를 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마지막 후계자 양성을 위하여 대현무 휘하의 문무의 1인자들을 과감하게 파견한 것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대현무(大鉉武)는 나이가 이미 칠십을 넘었고, 평민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초라한 늙은이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일단 말을 하기 시작하자 제왕(帝王)의 위엄이 나타나고 안광이 형형하여 좌중을 압도했다.
“금오를 지금 이 자리에서 고리국(高麗國) 왕세자로 임명한다. 원래 이름이 량금오(梁金烏)이었지만 이제 너의 이름은 태무진(大武神)이다. 고쿠리의 태무진(大武神) 태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원래 왕이 되기 전 태무진 태왕의 이름은 무휼(無恤)이었다. 무휼(無恤)은 동정심이나 자비심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고리국의 부활을 위하여 일체의 연민도 없는 강철과 같은 강인한 사내가 되어야 한다. 천손(天孫) 량(梁)씨가 천성이 착하고 정이 많은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태무진(大武神) 너는 이제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가 되어야 한다. 태무진 너에게 고리(高麗)국의 부활을 맡긴다.”
“존명(尊命).”
금오는 단호히 명을 받든다고 맹세를 하였다.
몰락한 고리국왕의 다급함과 처절함이 대현무(大鉉武)에게서 느껴졌다.
이어서 송악의 신하들과 양사부, 궁사범의 왕세자(王世子) 태무진에 대한 충성 맹세가 이어졌다.
“자, 지금부터는 환영식이다. 질탕하게 놀아보자.”
대현무(大鉉武)가 분위기를 바꾸려 자못 쾌활하게 말하며 주안상을 들였다.
그동안 고생한 금오 일행을 위무하며 조촐하게나마 밤늦게까지 잔치가 벌어졌다.
이튿날 아침. 대현무(大鉉武)가 태무진(大武神)을 다시 내실로 불렀다. 내실에는 어제 모였던 인원들이 다시 모여 있었다.
“우리 모두의 염원(念願)인 고리(高麗)국의 부활(復活)을 위해서 우리는 송악(松岳)과 룡강(龍岡)을 발판으로 힘을 기르려 한다. 지금은 신라 내에서 조용히 활동해야 하므로 아래와 같이 하명한다.”
황해용왕 대현무(大鉉武)는 엄숙한 자세로 명을 내렸다.
“양군사(楊軍師)는 송악태수(太守)로 임명한다.이름은 그간 사용하던 왕륭(王隆)을 그대로 사용한다. 을지문성은 양군사(楊軍師)보다 다섯 살 아래이니 왕륭(王隆)의 동생이 되어 왕륭(王隆) 송악태수(太守)를 보필한다. 이름은 왕평달(王平達)이라고 하라.”
“존명(尊命).”
“궁장군(弓將軍)은 룡강(龍岡)으로 가서 정예병사 오백명을 선발하여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하고 훈련하라. 유사시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전투를 수행하는 특임대(特任隊)이다. 궁장군을 고리국(高麗國) 육군 별동대(別動隊) 장군(將軍)에 임명한다.”
“존명(尊命).”
“태무진(大武神) 왕세자(王世子)는 송악태수(太守) 왕륭(王隆)의 아들이 된다. 이름은 왕건(王建)이라고 한다. 앞으로 호칭은 왕공자(王公子) 또는 왕공(王公)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존명(尊命).”
“모두 알고 있지만,우리 고리국(高麗國) 재정(財政)은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왜국(倭國)의 전 천황인 대인상황(大仁上皇)이 스님이 되어서 왜국에 법화종을 창설하였다. 아들인 대지천황(大智天皇)에게 정치를 맡기고 본인은 황실과 귀족들의 돈과 토지를 강제로 시주 받아 거대한 부(富)를 조성하고, 왜국 법화종(法華宗) 절마다 강대한 승병 조직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목적은 천황가를 위협할 정도로 커진 각 지방의 무신(武臣), 호족(豪族) 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력(武力)을 보유하는 것과 불법(佛法)의 힘을 빌어 천황가에 대한 충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 왜국 법화종(法華宗)에서 일년 전에 은밀하게 우리 송악상단에게 언월도(偃月刀) 이천자루를 사겠다고 연락이 왔다. 왜국에서는 언월도를 나기나다(なぎなた 長刀 또는 薙刀)라고 부르는데, 원래 천축말로 독사의 칼이라는 뜻이다. 왜국 법화종(法華宗) 승병들의 무장용으로 구입하는 것인데, 언월도(偃月刀) 한 자루 당 금 30량(1량-37.5g)을 준다고 한다. 총 금 육만량 거래인데 예약금으로 1할(割)인 금 육천량은 이미 받았다.”
“우리 송악상단에서는 언월도 이천자루의 제작을 신라에서 가장 철 제련기술이 뛰어난 지리산 아래 남원경(南原京) 량씨(梁氏) 집안에 맡겼는데, 언월도 이천 자루의 제작이 모두 끝났다는 비문(秘文)이 며칠 전에 도착하였다.”
“신라 남원경(南原京)은 150여 년 전 량우량(梁友諒)공이 탐라에서 와서 남원부백(南原府佰)이 된 이후로 그 후손인 량씨들이 지배권을 잘 유지하여 현재는 팔대손인 량성무(梁誠武)가 지배하고 있다. 그 세력은 남원경(南原京)을 중심으로 지리산 서북지역과 하동군을 포함한 섬진강(蟾津江) 일대까지 미치고 있다. 교룡(蛟龍,이무기 또는 지랭이)처럼 은인자중(隱忍自重)하고 있으나, 그 실력은 신라 남쪽 지방 호족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든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남원경(南原京) 량성무(梁誠武)에게 지불할 금액은 언월도 한 자루당 금 석량이다. 그러니까 이번 왜국(倭國) 언월도 항차는 열 배 장사인데, 남원경(南原京)에 지불할 총액 금 6천량 중 예약금으로 2할(割)인 천이백량은 이미 지불되었다.”
“왕건(王建)은 송악상단의 대행수(大行首)가 되어 상선(商船) 다섯 척에 각종 교역품을 싣고 남원(南原),금성(金城,서라벌),왜국(倭國)을 순행하여 교역을 하고 은밀히 언월도 이천 자루를 왜국 법화종(法華宗)에 전달하고 대금을 받아 오도록 하라.”
“존명(尊命).”
대현무(大鉉武)는 승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고리국(高麗國)의 왕세자로 금오(梁金烏)를 임명하였으나,이미 망해버린 것과 같은 고리국(高麗國)의 왕세자는 허울뿐인 자리인 것이다.
량금오(梁金烏) 자신이 본인의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충성하는 신하들은 많지 않을 것이며, 민심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강력한 호족들이 신라의 각 지방마다 일어나고 있는 이 혼란한 시기에 살아남기 위하여 민심은 금세 강한 자를 따라갈 것이다.
왕건(王建)이 된 량금오(梁金烏)는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내어야 비로소 송악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삼일 후 출발준비를 모두 마친 왕건(王建)은 송악상단이 정박해 있는 예성강 포구로 이번 항차를 같이 할 상단 행수들과 상단 호위군사들을 거느리고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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