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월
- 유재영
목이 긴 그 가을
씨방엔
잘 여문
갈색 안부가
점자처럼 모여 있고
아직도 은조롱
마른 잎사귀에
파랗게
묻어 있는
지난 여름
비단 벌레
기어가던 소리
오오,
누구의
별자리냐
멀리 기우는
북극성
문득
창을 여는
아이의 이마가
환하다
* 시월
-장민호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이 오고
세계는 조금씩 녹슬어간다
새들은 허공에
밑줄을 긋거나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다
먼 곳을 생각하며
서로의 깃을 고르고
떨어진 깃털 하나
저녁의 푸른 공기 속에
가라앉을 때
나무들은 둥근 귀를
둥글게 열고
잎 마르는 소리를
듣거나 멀리
열매 떨어지는
소리를 뿌리로 듣는다
그 뿌리 흔들리는 순간
저녁은 어움으로
녹슬어가고
어둠은 모든 빛나는
것들을 빛나게 해
등불이 등불을 부르고
별들은 서로를 껴안고 성
좌를 이룬다
간혹 유성이
흐르기도 하지만
미동도 않는
대지 위에서
사람들은 불빛을
향해 흐르고
나는,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들을
생각하며
옛 애인에게 전화를 한다
* 10월
- 임영준
혹시
다 마셔버렸나요
반 잔을 앞에 두고
후회하고 있나요
옆구리가 시리고
뼈마디가 아린가요
차분히 지켜보세요
저 깊은 하늘소(沼)에서
붉은 술이
방울져 내릴 겁니다
다시 잔을 가득 채웁시다
그리고 남은
날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 10월
- 문인수
호박 늘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 10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슴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 시월
- 피천득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 10월의 시
- 이재호
왜
그런지 모르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가을비는 싫다
새파랗게
달빛이 라도 쏟아지면
나는 쓸쓸한
느낌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낙엽이 떨어진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또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잃어비린 것도 없이
허전하기만 한 것은
군밤이나
은행을 굽는 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왜
살부빔이 그리운가
사랑이란 말은
왜 나에게
따뜻하지 않은가
바람이 분다
춥다
옷깃을 여민다
내 등뒤에는
등을 돌리고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울음처럼 들린다
잃어비린 것이 너무 많다
* 시월을 추억함
- 나호열
서러운 나이
그 숨찬 마루턱에서
서서 입적한
소나무를 바라본다
길 밖에 길이 있어
산비탈을 구르는
노을은 여기저기 몸을 남긴다
생이란 그저
신이 버린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주저 앉은 풀꽃이 있을까
하염없이 고개를 꺾는
죄스런 보습
아니야 아니야
머리 흔들 때마다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검은 씨앗들
타버린 눈물로
땅 위에 내려앉을 때
가야할 집이 막막하구나
그렇다 그대 앞에 설 때
말하지 못하고
몸 뒤채며 서성이는 것
몇 백 년 울리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던가
향기를 버리고
빛깔을 버리고
잎을 버리는 나이
텅 빈 기억 속으로
혼자 가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구나
* 시월에
- 김노연
무사한 말 줄임표를 놓고
침묵으로 응수하던 연모의 정
초록 숲이 변질되여
수줍음으로 눈뜰 때
이브인 나는 그 가장자리에서
연분홍 치마 자락을 흔들리라
티끌의 공백도 허락하지 않을
이율배반 속에서
바람 실은 가을밤이 짙어지면
헤어짐을 미리 준비하는
모진 맘으로
천근같은 이별을
한 잎 두 잎 떨구리라
어긋나지 않을 진리
만남 뒤에 오는 이별을
아는 까닭에
늘 안타까움이 서리듯
슬퍼 보였으리
표현할 길 없는 사랑을 어이할까
못다한 고백에
핏빛의 멍든 마음을
각혈하는 지독한 사랑을 앓은
여인의 숨결
시월이 짓는 아름다움 뒤로
붉레 붉게 스미고 있다
스르르 인연의 끈을 놓고 있다
* 10월 아침에
- 윤보영
10월이 되었습니다
10월을
기다렷던 사람도 있을 테고
지독한 외로움
때문에. 나처럼
반갑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당당하게 10월을 맞이하고
10월의 주인이
되기로 했습니다
매년 그러했듯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인 10월
지금부터 내 10월을
나를 위한 10월로 만들겠습니다
모임에도 자주 나가고
낙엽 보이는
창가에 앉아
부드러운 커피도 마시면서
내 안에 찾아온 10월을
즐기면서 보내겠습니다
생각 한 번 바꾸었는데
쓸쓸한 표정 짓던 10월이
꽃다발 같은
미소로 다가섭니다
"그래, 10월!
우리 한 번 잘해보자!"
꽃밭 같은 마음 내밀고
10월을 맞이합니다
* 10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이채
가을밤
청정한 소나무를 타고
우물 속으로 떨어진 달이
처연히도 빛나노라
간 두레박을 내려
그 모습 길어 올리면
나무가지에 걸려버리는
내 하얀 목선
묵언의 몸짓으로
혼자 감당해야 할
아침까지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겨울로 가는
달빛의 슬픔이 한층
차가워지는 만큼
그만큼의 긴 고뇌를
10월의 달과 함께
견뎌내고 싶은 것일까
우물가에 기대어
달과 나의 시차를 극복하고
이슬 한 방울로
만나고 싶은 꿈의
안부를 묻는 중이다
매일 매일 신이
내게 던진 주문을 읽으며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지만
기적을 바라지 않기에
애당초
기적 같은 건 없는 거라고
오래 비워둔
내 방의 꽃병에
푸른 달빛을 채우며
꽃을 꽂는다.
그리고
역사는 내 안에서
이루어질 뿐이라고 혼자
중얼거리지
하늘의 달이
지상의 달이 될 때
나의 고백은
서늘해질 수밖에 없지만
나뭇가지에 걸려버린
내 하얀 목선 같은
달빛이여!
내일이 가는 길과
그 길의 바람의 온도를
묻고 싶을 뿐이다
* 시월
-목필균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 시월의 시
-류시화
그리고는
가을 나비가 날아왔다
아, 그렇게도 빨리
기억하는가
시월의 짧은 눈짓을
서리들이 점령한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태양의 영토가 아니다
곤충들은
딱딱한 집을 짓고
흙 가까이
나는 몸을 굽힌다
내 영혼은
더욱 가벼워져서
몸을 거의 누르지도
않게 되리라.
* 10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아둔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내 부처님 눈썹 하나
* 10월의 창호문
-유안진
찬서리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는가
어느덧 우리 사랑은
창호문의 꽃무늬
대장부 천금 목청
대닢으로 푸르러 있고
그 옆에 향기 높아
국화는 나의 뜻
절반은 고전이요
나머지는 현대이나
아직도 한 채의 한옥 같은 내 사랑아
이제부터 불빛이
긴 밤을 지킬지니
낙엽 같은 맨발로
홀연 돌아오는 밤도
창호문 바른 솜씨 보아서 아시라.
* 시월
-나희덕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산문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이름 뿐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 시월의 거러기 비에 젖는다
-홍수희
시월의 거리가 비에 젖는다
음악도 없이 보낸 하루
귀에서는 먹먹한 빗소리 뿐
시월의 거리가 비에 젖는다
어차피 타인인 우리
만나면 반갑게 인사나 하자
시월의 거리가 비에 젖는다
만나면 차운 등 토닥여 주고
부디 안녕이라는
말만은 말기로 하자
시월의 거리가 비에 젖는다
처음 본 이도 항상
거기 있었던 듯
있었던 이도 전혀 낯선 얼굴인
타향의 거리가 비에 젖는다
그대의 야윈 어깨 위에는
은행잎 하나
쓸쓸히 젖은 몸을 말리고 있다
이방(異邦)의 거리가 비에 젖는다
어차피 낮설은 이 거리에선
우리 모두 어깨 비비며 웃자
* 시월
-전동균
백련산 밀 공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길
숲길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저물 녘이면 울음을 참듯
묵언수행하는 스님들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쳐올 뿐
오늘처럼
그길 앞에서 서성이다 서성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늦도록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를 받아주던 어떤 손을 생각하며
홈통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도
소주잔을 건네는 것이다
* 10월의 엽서
- 이해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익은 석류를 쪼개 드릴게요
좋아한다는 말 대신
탄탄한 단감 하나 드리고
기도한다는 말 대신
탱자의 향기를 드릴게요
푸른 하늘이 담겨서
더욱 투명해진 내마음
붉은 단풍에 물들어
더둑 따뜻해진 내 마음
우표 없이 부칠 테니
알아서 가져가주실래요?
서벅했던 아들끼리도
정다운 벗이 될 것만 같은
눈부시게 고운 10월 어느 날.
첫댓글 류시화시인의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림은 새들이 날아갈 때 딱 지켜봐요. 정말
뒤돌아 보는 새를 아직 못 봤어요.~~~~ㅎㅎ^^
그냥 가볍게 날아갈 뿐.
그림이님 잘 지내고 계시죠
그림님에게 축하 받을 일이 있지요
2025 학년 어떤 중학 교과서에
꼬부기가 올라 있지요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습니다.
많이 축하해 주세요..ㅎㅎ
어머나~~~
축하드리구요~~
화순 친구 언니 동시가 초등 교과서에 실렸는데
뭣이냐, money를 학기 초(학년 말 인가?)에 얼마를 준다고 해서
놀랐어요.
"교과서에 실리는 것도 가문의 영광이지 근데 돈도 준 단다. 액수도 많아 ~~"
하고 친구가 그림 한테 말 하던데요.~~^^
꼬북님의 글을 좋아하는 그림에게도 기쁨입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