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1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나의 왕
요 19:19~22
<로마의 십자가 위에는>
지난 주간에 우리 교회 성도 중 한 분의 모친께서 소천하시었습니다.
망인의 자녀 중에는 목회자도 있지만 믿지 않는 분도 계시다 들었습니다.
이럴 경우 장례식장 위패를 어떻게 쓰느냐를 두고 형제간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안 믿는 자녀들은 안 믿는 식으로 위패를 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 믿는 자녀들은 고인이 생전에 교회를 가끔 나가셨으니 교회식으로 하자고 합니다.
안 믿는 이들은 ‘학생 OOO 신위’라고 위패를 씁니다.
왜 학생이라는 말을 쓸까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유교의 영향 때문입니다.
유교에서는 벼슬했느냐 안 했느냐가 기준입니다.
벼슬을 안 한 사람은 모두 학생입니다. 벼슬을 위해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사기업에서 중역을 지내고 사장을 지냈어도 그 직함을 쓰지 않습니다. 모두 학생입니다.
기독교 장례예식은 위패에 교회 직분을 적습니다.
‘집사’ ‘장로’ ‘권사’ ‘목사’ 등의 직분명을 기재합니다.
교회에서 직함을 받지 않은 분들은 ‘성도’라고 적습니다. 묘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집사, 장로, 권사, 목사 모두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참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정하시는가입니다.
목사라도 목사만도 못한 신앙과 행실을 드러낸 사람 많습니다.
위패에 ‘목사’ 두 글자를 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지요!
☞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뭐라고 써서 달아야 하느냐?
☞ 이 문제를 두고 본디오 빌라도와 유대인 대제사장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 생애 끝, 죽음 앞에서 그 사람 이름이 뭐냐? 동서고금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에는 어떤 이름이 붙었을까요?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십자가 명패>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하느냐?
그 결정권은 로마제국에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정하고 새겨서 붙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뭐라고 썼습니까?
(19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렇게 썼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결정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이름입니다. 예수는 흔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출신 지역을 앞에 썼습니다.
뒤에 유대인의 왕은 죄목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 그것이 죄목이다. 그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다!’
이런 뜻입니다. 로마제국 입장에서 빌라도는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소하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 대제사장들,
그들에게는 이 명패가 못마땅했습니다. 앞부분 나사렛 예수는 불만이 없습니다.
뒷부분 유대인의 왕이 문제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입니다. 그들에게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꼭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에게 한국인의 왕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당시 한국인에게 왕은 일본의 천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도 강요당했습니다.
“너희 식민지 백성에게 왕은 일본의 천황이다. 아뭇소리 말고 신사참배 해라!”
나라를 빼앗긴 설움은 고대시대나 현대에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나라 왕을 받들지 못하고 다른나라 왕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집니다. ‘유대인의 왕’을 추대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왕’을 섬길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왕은 오로지 로마 황제뿐입니다.
(15절)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스라엘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하면서 한 말입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대제사장들이 그때 이렇게 말한 것은 참 가슴아픈 일입니다.
사실은 자존심, 쓸개, 다 빼놓고 한 말입니다.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가장 서글프고 가장 비참하고 침통한 말입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로마 총독에게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역사상 최고로 비참한 때입니다.
나라에 왕이 없습니다. 왕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의 기막힌 현실입니다.
☞ 오늘 설교 제목이 “나의 왕”입니다.
<나의 왕>
저는 초등학교 시절 ‘단종애사’를 읽으면서 속으로 많이 의아했습니다.
단종은 나이가 열 두 살에 불과합니다. 임금으로 자리에 있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그런 때 삼촌 수양대군이 나서서 왕이 되면, 그게 어떤가?
왜 그걸 반대하는지 의아했습니다.
① 수양대군이 나중에는 단종을 죽일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종이 귀양가고 죽게 되는 것은 그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입니다.
② 수양대군은 왕통의 흐름을 거역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숙부입니다. 같은 핏줄입니다.
③ 충신은 한 임금만 섬겨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라고 여겼습니다.
단종의 고조할아버지는 태조 이성계입니다.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렸습니다.
고려 입장에서 보면 이성계는 역적입니다.
그럼에도 생육신이 있습니다. 사육신이 있습니다.
서울 노량진에 가면 사육신 묘소가 있습니다. 서울에 살 때 자주 가봤습니다.
생육신, 사육신 모두 단종만이 임금이라면서 수양대군은 왕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죽음으로써 부인했습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한사코 단종만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다짐했을까요?
☞ 오늘 설교 제목과 연관이 있습니다. “나의 왕”
그렇습니다. 사육신이나 생육신에게 “나의 왕”은 오직 단종입니다.
단종을 내쫓고 그 자리에 앉으려는 수양대군이 아무리 훌륭해도 인정 못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나의 왕”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진정으로 다스려 줄 수 있는 이가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 사람이 ‘나의 왕’이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바람입니다.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중에 사람들은 저마다 “나의 왕”을 정합니다.
“당신이 ‘나의 왕’이 되어주세요!”
이렇게 한번 정한 왕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한번 정하면 그 왕이 설령 잘못해도 눈에 잘못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의 왕”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왕들이 있습니다.
왕조시대의 왕들, 현대 입헌국가의 대통령, 수상 등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에게 “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왕들, 역사는 말합니다. “그들도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결함이 많았습니다. 부족함 투성이었습니다. 성격도 뿔난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의 왕”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유대인의 왕>
2천년 전,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모두 “나의 왕”을 간절히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나의 왕” 바로 “유대인의 왕”입니다.
그런데, 눈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서른 세 살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이 못박히는 십자가 위에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유대인 대제사장이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유대인들이 바라는 ‘나의 왕’ ‘유대인의 왕’은 이 청년이 아닙니다.”
(21절)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저 사람, 예수는 우리의 왕, 나의 왕, 유대인의 왕이 아니다.
저 사람, 예수가 자기 스스로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러니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다오!
이 요청을 들어줘야 합니까, 거부해야 합니까?
지금 빌라도는 화가 나 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우깁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군중심리에 밀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했습니다.
빌라도 보기에 예수님이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유대인의 왕이든 아니든 빌라도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형을 요구합니다.
빌라도는 “그래, 너희 유대인의 왕을 십자가 못 박아 주마!” 이런 어깃장 심리가 있어요!
“너희에게는 로마 황제외에는 왕이 없다면서? 내가 보기에는 예수가 너희 유대인의 왕이다!”
이런 심보가 있어요! 왜지요? 지금 빌라도는 화가 나 있습니다.
자기 보기에는 무죄인데, 유대인이 사형시키라 하니 화가 나 있습니다.
빌라도가 뭐라고 대답하지요?
(22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내가 쓸 것을 썼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불쌍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는 가난해서 불쌍합니다.
나는 취업을 못해서 불쌍합니다. 나는 많이 못 배워서 불쌍합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못 받으니 불쌍합니다. 나는 아내의 존경을 못 받으니 불쌍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해서 나는 불쌍합니다. 등등…
이유가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을 모두 뭉뚱그려 보면 하나의 대답이 나옵니다.
“나는 ‘나의 왕’을 못 만나서 불쌍합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진정한 나의 왕이라고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나보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고아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불쌍합니다.결혼할 때, 나는 남편을 나의 왕으로 알고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아닙니다. 그러니 나는 불쌍합니다.
선거할 때, 나는 이 후보가 진정한 우리나라의 왕이라고 생각하고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게 아닙니다. 엉터리라서 나는 불쌍합니다.
인류가 행복해지는 길은 “나의 왕”을 만나는 오직 한 길 뿐인 줄 믿습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나의 왕”을 만났습니까?
“나의 왕”이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
진정한 “나의 왕”이 나를 다스릴 때, 사람은 비로소 행복합니다.
누가 진정한 나의 왕입니까? 누가 나의 진정한 왕입니까?
이 질문의 대답이 본문에 나옵니다! ~ 내가 쓸 것을 썼다
뜻 밖에도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머리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왕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왕입니다.
12월 성탄의 계절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창조주이시고 성자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왕”으로 만날 때, 그때부터 행복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나의 왕,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