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몽매에도 잊지못할 매여동의 추억
기억에도 아물한 먼~1970년대초반이다.
삼경이 야심한 밤 새미기재에서 매여동쪽 산허리를잡고 7부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아이들과 어른들이 어울어져 산허리를 감싸며 돌고 있을때 하늘에서는 수많은 찬란한
별들이 마구 솟아졌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야기로만 듣던 먼 나라의 풍경이다.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는 고운 추억이다.
매여동 산허리를 끼고 7부등선을 따라 도는데 서쪽하늘을 바라보니 거기에 정말 소설책에나
나오는 무릉도원이 있지않는가! 놀랍고 황홀한 광경이다.그곳이 직선으로 튕구면 촌이수로 약
삼십리 밖 밤풍경이다.바로 지금의 동대구쪽이다.아마 내가 보았던곳은 동대구 쪽 칠성시정이었을것으로
지금 짐작이 간다.그 밤풍경은 너무도 황홀했다.깊디깊은 산촌에 호롱불밑에서 생활하던 나에게는
그 황홀한 밤풍경이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무릉도원으로 다가왔다.거기에 온통 마음을 뺏앗기고 있을때
등뒤에서 다급한 마을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구쪽을 바라보지 말고 말밑을 단단히 보고 걸으란다.
깜짝놀라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자갈이 쫙 깔린 산허리다 밑을 보니 아찔하다.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친구 몇명과
우리조의 조장을 따라 산허리를 돌고돌아지만 마음은 여전히 대구의 도심 불빛에 뺏앗기고 있었다.
그렇게 산속에서 한참을 헤메다보니 동쪽의 여명이 어슴프레 밝아온다.매여동 꼴자기 막막바지에 내려서니
흐미한 여명속에 초가집이 간혹 한채씩 보인다.율하천을 따라 계속내려가니 반야월이 나온다.
그 때의 반야월은 하양면보다도 더 형편없는 야촌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니 동촌다리가 나온다.이때만 해도 여기는 한적한 야촌이다.어른들이 낙동강 물이마른
동촌다리밑으로 몸을 쉴겸 그리로 몰려 들었다.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조장을 따라 다시 매여동 꼴짜기를 타고
대곡2동 마을로 돌아가란다.우리는 친구몇몇과 조장등 한 5명이 다시 율하천을 따라 매여동으로 접어들었다.
뛰염뛰염한 매여동 초가집이 보였고 냇가로 물이 흐르고 감꽃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아마 늦은 봄인모양이다.
들리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 형님과 동네 이장을 하던 허동수라는 사람외 몇몇친구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도 매여동 산골짜기 아래 초가집 어느집에 들려서 우리는 대구에서 연구차 나온 교수들인데
먹을 밥이 있으면 달라고 하면서 허풍을 매여동 촌사람들에게 뽐내듯이 마구 쳤다고 들었다.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것처럼 자주 그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 처럼 그 당시는 매여동이 대곡2동보다 더욱 적막하고 외진 꼴짜기다.지금은 그 모습을 감추고 없지만
그 당시 매여동은 가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는 배고픈 산골의 오지였다.
우리가 어릴때 이때는 60년대 초반같은데 마을에 놀다보면 매여동쪽 또는 대곡 무지개산 넘어
그러니가 은하동이나 남하1동 뒷산쯤되는 곳에 비행기가 잘 떨어졌다.쿵하고 연기가 물씬 피어오르면
동네의 청년들과 어른들은 모두 일거리를 놓고 산으로 산으로 내 달렸다.
비행기에서 나오는 알류미늄이나 미군들이 갖고 있는 시계 뭐 이런것들을 주워서 돈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비행기가 떨어진 산골로 내어 달렸다.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 형님도 그 비행기를 주으러 갔는데 미군
신체가 불에 붙어서 살려달라고 미국말로 마구 중얼거리드라는것이였다.겁이 드럭나서 달아나 버렸단다.
그리고 또 쿵하면 비행기가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나이많은 할머니가 제일먼저 보고 매여동산쪽으로 달려 올라갔단다.
초 저녁이니까 산허리에 올라서면 캄캄한 어둠이다.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할머니는 겁에질려 헛개비에게 홀려서
내내 산속으로 헤며여 다니다.날이세자 헛개비는 간곳이 없고 산속으로 다니면서 신발이며 옷 머리가 모두 엉클어져서
아들이 어머니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진짜 도개비는 자기 어머니드란다.모든것이 엉망이 되어 있드란다.
그런 어두운 시절을 우리도 비켜가지는 못했다.그래서 지금도 생각나는것이 감꽃이 뚝뚝뚝 떨어지는 매여동 골짜기며
굽이굽이 돌아 반야월로 나가는 율하천 게곡이며 동대구쪽 칠성시장쪽 그 밤 불빛을 아직도 옹이가 되어 가슴에 박혀 있다.
가슴속에 박힌 옹이가 되어 가끔씩 되살아나곤 한다.그 당시 우리의 조장은 그래도 놀라지는 않았을것이다.
대구에서 경북고를 갓 졸업하고 집에와서 살았으니까 이 친구의 애틋한 사연은 경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지리학과에 합격은
했는데 돈이 없어 가지 못한 친구다.나에게는 조카뻘 되는데 나이는 우리보다 7살쯤 위다.이제는 모두 고인이 된 사람이 많다.
그렇게 매여동 추억은 70년속으로 파뭍여 갔다.
지금은 서울이나 미국의 뉴욕을 봐도 그렇게 놀라움에 가슴이 들떠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또하나 우스운 이야기는 처음에 서울에 올라갔을때 (남대문에 쪽 상가)아동복을 하러 다니던 1978년때
이야기인데 서울역에 척 내려서니 새벽인데 서울맞은편 건물이 아마 (대구빌딩)이라고 기억하는데 이 건물이 막 내 앞으로 넘어지는것이였다.
겁이 드럭나서 남대문 지하쪽으로 급히 달려 내려갔던 기억도 생생하다.이렇게 이제 시간은 나를 머나먼 2020년대 막바지로 데려다 놓았다.
이제 촌사람은 아니지만 매여동 추억과 대곡2동의 추억을 생각하면 상전벽해같은 느낌이 쫙 온다.지금은 하양서사동만 보아도 미국의 뉴욕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세월따라 멀리 와 버렸다.그래도 그 때의 그 추억은 어떤것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채색되어 있고 어떤것은 몹씨 배고픈 가난 때문에 암울하고 어두운 색으로
내 가슴에 채색되어 있다.이제는 도심 어느곳에도 아름다운 밤하늘을 볼수가 없다.도시에는 편리만 남고 아름다운 정서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아 ~다시한번 그리운 매여동의 추억이여~
첫댓글 1970초반만 해도 하양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하양으로 가는 버스는 정말 고속버스라고 불렀다.그 당시 차량은 (버스)참으로 느렸고 새로 70년데 초반에 들어온 버스는 씽씽 나는것 처럼 빨랐다.그리고 또 80년대는 금락동 하양다리위에서 보면 대곡2동이 까마득하게 보였다.마산에서 고향으로 가려고 하양까지 왔다가 까마뜩한 골짜기를 보고 그만 가기가 싫어서 도로 대구로 들어가서 성당동에서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내려갔다.당시의 고속버스는 창녕을 중간지점으로 하고 마산까지 도착하는데 보통 급행이 3시간30분 완행은 5시간~6시간이 걸렸다.그런데 하양에서 택시를 주문하면 무조건 20000원을 받았다.그 때의 2만원은 마산까지 가고도 돈이 많이 남아 돌았다.그래서 젊은 마음에 다시 마산으로 돌아서고 말았다.70년도 초반은 하양에 내려가는것도 겁이 났다.여간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양에 내려가면 하양아이들이 촌놈이 왔다고 호주머니 조사부터 먼저 했다.무조건 돈을 달라고 했다.없다고 버티었다.그래서 호주머니에 돈이 2000원정도 나오면 꿀밤을 주면서 가져가려고 했다.나는 완강히 안됐다고 버티었다.그들은 지독한 놈이라면서 그냥 가버렸다.하양아이들 텃세 서사동 아이들 텃세 이런 좋지 않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할일은 또다 했다.그리고 좀더 세월이 흘러 남하동에 있을 때였다.하양장에 가니 드낫없이 하양아이가 자기 따라 오란다.이때는 좀 간이 크서 됐다. 한바탕 혼을 내어주자 하고 못이기는척 하고 따라들어가서 골목안에서 결투가 벌어졌다.하양아이가 맥없이 쓰러졌다.보복으로 이놈을 끌고 가서 술까지 얻어먹었다.그런일이 그 당시는 비일비재했다.그런데 하양에도 내가하는 친구가 몇이 있는데 이들은 정말 고마웠다.깍듯이 인사했고 하양에 까부는 놈이 있으면 자기한테 데래 오라고 했다.든든한 우군이였다.한번은 대곡에서 장작을 한짊을 지고 하양에서 팔았다.70원이였다.참으로 큰 돈이 였다.이것으로 책도 사보고 신문도 받아보고 했다.나는 이제 옛날의 그 한실 촌놈이 아니었다.도시물을 약간먹은 사람이다.그러니 하양 아이들에게는 더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