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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들의 믿음(히 11:13-16)
히브리서 11장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사라의 믿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믿음의 기적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사라는 나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식을 하나도 낳지 못했습니다. 잉태하는 힘이 없어 죽은 자와 방불했습니다. 정말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름도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잉태할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현실이 죽은 자와 방불할 정도로 어둡고 암울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와 같은 믿음의 조상들은 선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믿음에 대해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삶을 통해 증거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죄악에 오염되지 않았으며 세찬 사탄의 공격에도 정복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졌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았기에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성도의 아름다운 신앙을 잃지 않았으며 오직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거꾸로 살았습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으로 갔지만 그 땅에서 마저도 발붙일 만큼의 땅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곳에서 나그네처럼 장막생활을 했으며 많은 시련과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모든 역사의 창조자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성취하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은 "이 사람들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로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아벨과 에녹과 노아 등을 포함한 믿음의 선진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이들의 믿음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1. 그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13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말씀은 선진들의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들의 삶의 능력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말씀이 서라하면 서고 가라하면 갔습니다. 많은 유혹과 시험속에서도 맣끝까지 변절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성도로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살았으며 또한 그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음의 선진들은 실제로 약속된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큰 민족도, 창대한 이름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축복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으며"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라에게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를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을 이렇게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장은 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자는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사도바울은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증언했습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특권이자 당연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선진들은 이같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신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환경이나 사람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주목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믿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지막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렇습니다.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능력은 바로 믿음입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세상을 이길 힘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따라 살고 믿음을 따라 죽을 수 있습니다. 변함이 없는 믿음, 한결같은 믿음, 선진들이 가졌던 그 믿음을 이어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들은 땅위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13절 하)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고 그 본향을 소망하는 선진들은 이세상에서는 낯선 "외국인"처럼, 이곳저곳으로 정처없이 옮겨 다녔기 때문에 "나그네"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족무덤을 구입하면서 헷족속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야곱도 애굽의 바로왕 앞에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믿음의 선진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외국인이란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토박이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기도 하고 온갖 불이익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꾹 참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정처없이 옮겨 다니는 삶, 결코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여행길에는 정담을 나눌만한 친구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외롭고 쓸쓸한 것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하나님을 사모하며 찾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광야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외롭고 고독한 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그네는 의사 소통이 자유롭지 못하고 생활 환경이 생소합니다. 누군가 의지할 사람도 없고 주위에 보호해줄 안식처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고 미지의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은 그런 삶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생애를 낯선 이국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산 것은 그들이 소망하는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이 땅위에서는 나그네일뿐 자신을 확보하는 지위는 저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던 목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레이큰이라는 목사요 에딘버러 대학의 총장을 지낸 분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신이 직접 죽을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여관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 세상에서의 삶이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과 같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는 그의 소원대로 워비크레인에 있는 "벨"이라는 여관에서 74세의 나이로 나그네와 순례자로서 평안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사람들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 나그네 길이 마치는 날 천국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살기 바랍니다.
3.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되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15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나온바 본향"은 바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를 가르킵니다. 그가 비록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기는 했으나 막상 그 풍요로운 땅인 갈대아 우르를 떠남으로 인해 다가온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많이 고향생각이 났겠습니까? 만일 아브라함이 그 정든 고향에 연연하고 있었다면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길을 떠나서 하란에 있을 때 그의 부친 데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가친척없는 장례를 치렀을 때 그는 외롭고 고단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한때 두 길 사이에서 고민했을 법도 합니다.
그가 그의 부친을 평안히 모시지 못해서 병이 났다고 생각했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에서 큰 흉년을 만났을 때도(창12:10), 애굽으로 갈까 고향 갈대아 우르로 되돌아갈까 고민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는 한동안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시고 떠나라고 했는데 복은 고사하고 이런저런 환난이 겹쳤을 때 되돌아 가버리고 싶은 충동 없었겠습니까?
"나는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인 모양이지, 옛날로 돌아가서 그냥 살자"라는 사탄의 유혹도 수없이 들렸을 법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숱한 어려움을 참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땅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결코 뒤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는 가나안에서의 나그네 삶이 숱한 어려움으로 가득 찬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광야 길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자 저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했습니다(민14:4). 이삭의 장자, 에서는 세상에 눈이 어두워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습니다. 돌짝밭 위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고 성경은 말합니다(눅8:13).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은 한번 출발한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되돌아갈 기회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기회는 수없이 있었지만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 뜻앞에 자기의 삶을 맡겼습니다. 믿음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주목하고 그 뜻에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5-39를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그래서 인내를 믿음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복음성가에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 중에 “주님뜻대로 살기로 했네”가 있습니다.
1.주님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2.이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이세상사람 날 몰라줘도 이세상사람 날몰라줘도 뒤돌아 서지 않겠네
3.세상등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등지고 십자가보네 세상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제 뒤돌아설 수 없습니다. 소돔성을 떠난 룻의 아내처럼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처럼 예루살렘을 떠나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다. 이제 우리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세상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뒤돌아 보지 맙시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 믿지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요 6:65)고 말씀하시자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많은 믿지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의 선진들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되돌아서지 맙시다. 오직 에녹처럼, 노아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 "더 나은 본향"은 저 영원한 천국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두개의 본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요, "더 나은 본향"은 우리가 장차 가서 살 영원한 천국 본향입니다.
지상의 본향은 눈에 보이기는 하나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상이요, 하늘의 본향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믿음의 선진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아브라함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보면,
첫째, 히 11장10절, 그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둘째, 14절에서 그는 그 본향을 찾았습니다. 셋째, 16절에서 그는 그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의 몸은 비록 세상에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벌써 저 천국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만큼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전남 여수 애양원에서 수많은 나환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목회했습니다. 고통당하고 냄새나는 그들의 뒷바라지에 고생스럽기도 하고 힘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 순교의 제물로 먼저 보내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괴로웠겠습니까? 그가 작사하여 불렀다고 전해지는 ‘주님 고대가’를 생각하면 금방 가슴이 뭉클합니다.
주님 고대가/손양원 목사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도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5. 신부 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목장 예배 나눔중에 권사님 한 분이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먼저 가신 가족들을 만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가신 분들은 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들은 모두가 다 사모하는 "더 나은 본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소망이 있습니까? 언젠가 가서 영원히 살 천국집이 있느냐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그 영화롭고 아름답고 크고 웅장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괴로운 세상을 떠나 영원히 행복한 하나님 나라, 하늘 아버지의 집인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저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세상에서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저들은 어떤 경우에도 뒤돌아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한번 뿐인 우리의 삶을 후회없이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면 후회없이 살 수 있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처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삽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향해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