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아무도 듣지 않을 때
◎ 소리로 가득 찬 세계
우리가 사는 세계는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 아스팔트 위를 지나는 버스가 내뿜는 거친 숨소리, 설레는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연인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이는 소리. 우리는 수많은 소리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소리의 바다 한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소리에 일일이 반응하거나 신경 쓰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 듣기 편한 소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소리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소리들을 ‘소음’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소음은 듣고 싶지 않은 소리, 거북한 소리, 불편한 소리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소음이란 것 자체가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음 중 그 어떤 것은 누군가에겐 자신의 존재를 건 일생일대의 투쟁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 비참한 바디매오의 인생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한 남자가 부르짖습니다. 이 남자에 대해서는 성경은 단 세 가지 정보만을 제공해줍니다. 첫째,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Βαρτιμαῖος)다. 둘째,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다. 셋째, 그는 여리고성 어귀에서 빌어먹던 거지다. 사실 ‘바디매오’란 이름도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별명입니다. ‘바디매오’에서 ‘바’(Βαρ)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디매오’(τιμαῖος)’는 히브리어 ‘타메(טָמֵא֒)’에서 유래했는데 그 뜻은 ‘불결,’ ‘더러움’입니다. 즉, ‘바디매오’를 직역하면 ‘더러움의 아들’ 우리 피부에 와 닿는 언어로는 ‘더러운 새끼’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그 정도로 인식되기 충분한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바디매오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바디매오를 더 자세히 알려고도, 더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바디매오는 여리고성 밖 어귀에 홀로, 외로이 앉아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빌어먹으면서, 즉 구걸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처럼 시각 장애인 직업훈련이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기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으실 겁니다. 당시 시대에서 장애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죄인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리거나 또는 신체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버려지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 하나인 바디매오의 인생 역시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가 길가에 앉아 겪었던 그 고통을 가늠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했던 것은 가난과 배고픔보다는 소외와 멸시 그리고 외로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에게 주어진 존엄은 온데간데 없고, 인간으로서 누리는 그 어떤 권리도 그에겐 과분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 인간으로서 바디매오가 겪은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 들으시는 주님, 좋으신 주님
그런데 마침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식이 바디매오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사람, 예수.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내쫓으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이 소문을 들은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행렬이 지나가는 기회가 오자 젖 먹던 힘을 쥐어짜며 이렇게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목소리에 담긴 간절함을 한 번 상상해봅시다. 그의 절박함이 과연 느껴지십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의 외침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나사렛 예수 그분 안에서 자신의 비참한 인생이 회복되리라는 확실한 희망이 담겨있었습니다. 만일 그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바디매오는 부르짖지도, 소리치지지도 않고, 그저 침묵만을 고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복음말씀을 듣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분 안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천국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순간 뿐 아니라 모든 신앙의 삶은 시간 낭비이고,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둔 곳에 우리의 가치를 투자합니다. 그렇게 바디매오는 자신의 희망을 예수님께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리, 그의 외침은 예수님에게 닿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둘러친 벽에 막혀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소리가 아닌 소음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보통 꾸짖는 행위는 아랫사람에게나 하는 행동이니 바디매오는 모든 사람에게 천대받은 존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바디매오가 발생시킨 소음을 못마땅한 것으로, 불편한 것으로 여겼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존재는 이제 영원히 지워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외치다’, ‘부르짖다’라는 말은 단순히 큰 소리로, 목청껏 누군가를 부르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알고 계십니다. 이 외침은 그 존재의 사활을 건 일생일대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이 한순간에 집중시킵니다. 햄릿의 한 대사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그의 외침은 그저 불편한 소음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의 불편한 기색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롯이 나사렛 예수 한 분께만 목적을 두고 나아갑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단 한 가지의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저분 안에 구원이 노라!!
그의 구원을 향한 간절함은 마침내 사람들의 벽에 막혔던 외침을 예수님의 귓가에 닿도록 만듭니다. 같은 외침, 같은 소리이었지만 사람들과 예수님이 보인 반응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꾸짖은 반면,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를 자신에게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바디매오의 절규를 소음이 아닌 소리로 들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를 부르신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바디매오는 얼마나 기뻤는지 유일하게 자신이 의지하던 한 벌의 겉옷까지도 내팽겨치고 달려옵니다. 마치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듯이, 그는 자신의 인생과도 같았던 겉옷을 버리고 주님께로 다가갑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세상은 그 소음에 귀를 닫았지만, 귀를 열어 여과 없이 그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세상이 불필요한 존재로 여겼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 존재 자체를 따뜻하게 맞아 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약하고, 억눌리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병든 이들의 처지를 굽어 살피시는 분, 그들의 아픔을 아시는 분, 그들의 고통에 애끓는 마음으로 공감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교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Bonum Dominum Habemus
우리는 좋으신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거지 바디매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성경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고쳐주신 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눈을 뜬 그는 이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가 눈을 떴다는 것은 비단 육체의 눈을 떴음을 뜻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둠 가득했던 그의 삶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으로 채워집니다. 길가에 앉아 비참한 인생을 살았던 그가 이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됩니다. 망가졌던 그의 인생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됩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가 가져온 한 존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는 언제나 제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 오늘도 바디매오는 존재한다
그러나 주님과 달리, 바디매오를 꾸짖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실존 상태를 가리켜 죄가 아니라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들려오는 작음 소음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삶 속에서도 누군가가 외치는 고통의 아우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그저 소음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제 부끄러운 과거를 일화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6년 전, 즈음에 지하철 환승을 할 때였습니다. 아직도 그 역이 기억납니다. 1-5호선 환승역이던 신길역. 환승하는 계단이 얼마나 가파르던지 사람들은 계단을 옆에 두고 일제히 에스컬레이터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긴 에스컬레이터는 운행이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알고 보니,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점거, 점령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피곤하고, 짜증난 마음으로 계단 한 칸 한 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시위를 하는 건 좋아! 그런데 사람들에게 불편은 주지 말아야지?” 정말이지 굉장히 짜증났던 것이죠. 그 높은 계단을 오르면서 점점 힘은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며 올라가던 그 편안함이 그리웠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계단을 뚜벅뚜벅 올랐습니다.
이제 기분이 짜증에서 힘듦으로 바뀌어 갈 때 즈음, 제 귀에는 그들이 외치는 구호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 “이동권은 생명권이다” 사실 장애인들은 교통시설 제반, 특히 지하철 이용에 있어서 많은 권리를 침해받고 있었습니다. 가령,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있다면, 엘리베이터나 휠체어 승강기를 이용해야 하는데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장애인들은 자신이 왔던 그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효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공공시설들은 비장애인들만을 위한 것이 되어 버렸고, 상대적으로 소수자인 장애인들은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제한되었던 것입니다.
계단을 다 올라갔을 때 즈음, 그들의 소음은 이제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불편한 소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소리 말입니다. 아마 이렇게라도 일반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영원히 우리 귀 밖에 머무는 소음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겪었던 그 불편 때문인지 이제 그들의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아팠던 건 어느 중년의 남성께서 그들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그 남성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이런 행위들이 몰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남성분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갔습니다. 그 마음이 종전의 제 마음이었으니까요. 좋은 방식으로,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시위하면 더욱 좋겠지요. 근데 이들이 불편을 주지 않았을 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은 정작 우리가 아니었는가? 그들의 외침을 소리가 아닌 소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정작 나 자신이 아니었는가?
사실 그보다 2-3년 더 전 즈음에 광화문역을 지날 때에 스쳤던 피켓들이 떠오릅니다. 그때 장애인분들은 역 한구석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호는 똑같았습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 그런데 저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이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8년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시위를 진행했고, 그것도 안 먹히니 재작년부터 열차지연 시위를 진행하면서 많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면서까지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시위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들의 소음을 외면한 역사도 버젓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우리는 오늘의 바디매오에게 꾸짖으라 말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공효진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이경미 감독의 영화 <미쓰 홍당무>(2008)에는 이런 재밌는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여러분, 모든 일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모든 비상식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상식이건, 비상식이건 우리는 그것을 판단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그 존재의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것이 오늘 바디매오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태도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선적 헤아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그 사람의 심정, 상황을 한번 헤아려보자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과연 그럴 여유와 마음의 너비가 충분합니까?
◎ 하나님의 자비: 존재를 향한 집중
‘거리의 의사’로 알려진 정혜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서울: 해냄, 2018)란 책으로 유명한. 이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꽤나 많이 반성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6년째 매해 똑같은 새해 목표가 있습니다. ‘올해는 더 따뜻한 사람이 되자, 예수님을 닮아’ 이 목표가 생긴 이유가 바로 앞서 말한 시위를 통해 얻은 반성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냉소, 그것을 무너뜨리는 따스한 공감과 헤아림. 저는 스스로 사람들에게 제가 차가운 사람이라 누차 이야기합니다. 제 스스로를 잘 알기에,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거창한 목표를 매년 세우고 있습니다.
정혜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집중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죽지 않는다” 내 마음에 집중해주는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그 마음에 반응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괜찮다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그분께서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여러 가지 기적을 베푸셨지만, 이 기적들의 근원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살펴보면, 한 존재를 향한 집중, 그를 향한 마음 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 곧 자비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보시고, 자신의 심장이 아플 정도의 그런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이런 것 없이 일으키는 기적은 진정성 없는 자기 과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일으킨 구원의 근거는 바로 자비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 자비는 바로 소음을 소리로 듣는 태도, 존재에 대한 집중에서 시작됩니다. 이를 공감이란 말로도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족한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공감에 관하여서는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h Arendt, 1906-1975)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쉽게 말해서, 악이란 무엇인가? 악은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능력, 공감의 결여로부터 시작된다. 악은 사악한 악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것에서부터, 즉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아렌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악은 너무나 평범하다.’.
존재를 향한 집중, 그를 향한 공감과 경청의 근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 보여주셨던 그 모든 것은 그분의 자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비가 없는 곳에서 악마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서 6장 3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6: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아버지처럼 자비롭습니까? 아니면 무자비한 악마의 졸개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자비를 품어 그로부터 누군가의 생명과 영혼을 구하게 되길 기대합니다. 아버지의 자녀로 부끄럼 없이 자비롭게 살아갑시다.
◎ 우리 구원의 근거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 형제 된 여러분, 매년 저의 새해 목표, ‘올해는 더 따뜻한 사람이 되자’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 그분을 닮고 싶습니다. 때로는 그렇지 못해서 참 괴로울 때가 많지만, 이 또한 제가 짊어져야 과제겠지요. 고통에 반응하고, 또 냉소적이지 않은 그런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바디매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에게 잠잠하라고 꾸짖고 있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을 때, 유일하게 그 소리를 들으셨던 주님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단지 그분을 닮고, 오로지 그분을 따르고, 그분이 가져오는 구원의 질서 안에서 가져오고, 그분의 사랑을 내 안에 가득 품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좀 더 주님을 닮아 세상의 온기를 더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소음이 아니라 소리로 듣는 것. 한 존재를 향한 집중,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늘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