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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22) 달란트
진석의 머리에서 그려진 성모자애병원이 우뚝 세워져
- 1963년 4월 당시 인천 부평의 연백성모원.
진석은 신학기를 무사히 보내고 첫 방학을 맞았다. 진석이 갈 곳은 단 한 곳이었다. 입학 전부터 몸담고 있던 인천 부평의 연백성모원(고아원)이다. 전쟁 중 어머니를 찾던 부산에서 만난 김영식 신부님께 고아원 일을 도와드리겠노라 약속했었다. 진석은 신학교에 갔다고 그 약속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 신부님과 인연으로 사제 성소까지 찾았고 이로써 새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 연백성모원은 진석에게 두 번째 고향이었다.
무엇보다 고아원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야 하는 김 신부님께는 진석의 도움이 절실했다. 진석이 신학교에 가 있는 몇 달 동안은 미군에게 부탁해 물자를 얻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고아원 부식 창고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서 진석은 고아원에 와서 학교 짐을 풀기가 무섭게 미군 부대로 가서 식자재나 부식을 얻어오며 구걸(?)을 했다.
1954년 첫 방학에 진석이 고아원에 갔더니 김영식 신부님께서 잠시 부르셨다.
“미군이 병원을 지어 준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리도 한번 물자를 받아서 병원을 지어보자. 연백성모원의 고아들과 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병원을 지을 수 있고 운영할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지요?”
“먼저 신청서를 내면 미군이 서류를 심사한다고 해. 그러니 필요한 서류를 네가 한 번 작성해봐.”
“네.”
진석이 알아보니 영어로 작성해야 할 신청서가 한 보따리나 될 만큼 복잡한 서류들이었다. 진석은 김 신부님이 시키신 대로 신청서를 쓰기 위한 자료들을 갖고 와 영어로 하나하나 작성하기 시작했다. 신청서는 자세하고 정확하게 준비해서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 작성했다. 그런데 신청서 중에는 설계도를 첨부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진석이 김 신부님에게 서류를 들고 갔다.
- 진석이 그린 병원 설계도에 의해 완공된 성모자애병원 전경.
“신청서의 설계도, 네가 그려봐”
“신청서에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데요?”
“너는 공대생이잖아, 네가 그려봐.”
“네?”
진석은 갑작스러운 주문에 당황했지만, 김 신부님이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직후에 건축 설계사를 어떻게 찾겠는가.
김 신부님은 곧장 진석에게 커다란 방안지(모눈종이) 하나를 주셨다. 그때는 그런 종이를 파는 가게도 근처에 없었고, 고아원 주변도 허허벌판이었다. 진석은 김 신부님이 이미 그 커다란 방안지를 다른 곳에서 구해오셨을 것으로 생각했다.
종이를 받아들고 방으로 돌아온 진석은 그 큰 방안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답답했다. 신부님께서 설계도를 그리라고 해서 한 장을 가져왔지만 이전에 다른 설계도를 자세하게 본 적도 없고 지금에라도 어디 가서 참고할만한 것을 구해 볼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어디에도 모델을 삼을만한 건물이 없었다. 진석은 일단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설명서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모두 그려 넣었다. 건물의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 등 여러 장을 그렸다. 그리고 다른 신청서와 함께 신부님께 드렸다. 재미있게도 진석이 다음 방학 때 고아원으로 돌아오니 병원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황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정식 설계도도 아니고 추측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허락을 해줬으니 심사를 담당한 미군은 참 너그러운 사람이었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자 진석은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진석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완공된 성모자애병원은 1955년 6월 축복식을 가졌다. 김영식 신부가 초대 병원장으로 부임했고, 내과ㆍ외과ㆍ소아과ㆍ방사선과 등 4개 과 41병상의 입원실과 수술실을 갖춘 어엿한 종합병원의 형태를 갖췄다.
- 1958년 3월 19일 진석의 외삼촌 이정규(비오) 신부 사제 서품식 날 대신학교 본관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부터 정진석 신학생, 이홍규(진석의 둘째 외삼촌), 이정규 신부, 김영일 부제. 서울대교구 제공.
허허벌판에 종합병원이… 기적같아
의사 2명, 간호사 2명, 직원 5명으로 병원은 시작됐다. 진석은 자신이 애를 써서 설계도를 그릴 당시 분명 성모님께서 도움을 주셨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허벌판에 병원이 우뚝 세워진 것을 보면 마치 기적과 같았다.
연백성모원에서 진석이 열심히 봉사한 이유는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 잊지 못할 경험을 하며 진석은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석은 그렇게 소중한 체험을 가슴에 품으며 1952년 8월 15일 연백성모원의 문을 두드린 때부터 1961년 3월 18일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방학 때마다 이곳에서 묵으며 일했다. 방학 내내 신부님의 일손을 돕고, 성모원 고아들과 김 신부님의 조카인 김영일(발타사르) 신학생과 함께 지냈다.
연백성모원에서 룸메이트로 지낸 김 신학생은 진석보다 한 학년 선배였다. 그와 함께 쓴 방은 둘이 함께 누우면 누구 하나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이곳에서 내내 같이 생활했으니 둘은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한 살 터울의 나이에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성격도 판이하게 달라 다툼이 있을 법도 했지만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그만큼 서로를 위하고 존중해 줬기 때문이다. 성모원 방 한 칸에 마련된 성당에서 주일마다 함께 미사 준비를 하면서도 둘은 부딪치는 법이 없었다. 글쓰기 좋아하고 꼼꼼한 진석은 주보를 제작하고 성당 곳곳을 꾸몄고, 사람 좋아하고 활달한 김 신학생은 미사 성가 준비를 도맡는 식이었다.
방학 동안 필요한 물자를 가져다 놓고 시간이 나면 진석은 영문 서적의 한역 작업에 매달렸다. 대체로 가톨릭 성인들의 이야기나 철학을 다룬 종교 서적이었다. 김영식 신부님께서는 신학생인 진석이 책을 쓰는 것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석은 방학 때 마음 편하게 번역할 수 있었다. 방학 때 한역한 책이 한 권 나오면 번역비로 용돈이 조금씩 생겼는데, 그 덕분에 진석은 다른 데 손 벌리지 않아도 됐다. 가장 기쁜 것은 먹이고 입힐 식구가 많은 김영식 신부님께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석은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진리를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당시 가톨릭 신자는 국민의 1%도 안 됐다. 국내 어디를 가든지 가톨릭 신자들은 소수였다. 진석은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만일 가톨릭 교회의 진리를 알기만 한다면 믿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날이 커졌다. 이런 생각이 진석이 책을 집필하는 데 큰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매년 한 권씩 책을 출판하자’ 약속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살아온 동기들이 신학생 생활 막바지에 이르러 마침내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 감격에 들떠 있던 어느 날 동창인 박도식 부제가 진석에게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이렇게 성직자가 됐으니, 이 빛나는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알려주자. 그래서 우리가 사제품을 받으면 매년 한 권씩 가톨릭 진리를 알리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로 하면 어때?
“좋은 생각이야! 열심히 계속 공부해서 신자들의 신앙에 필요한 책을 많이 쓰면 좋겠다.”
두 사람은 매년 한 권씩 책을 낸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약속인 줄 알면서도 열정이 가득 찬 젊은 부제의 혈기로 주저 없이 합의했다. 박도식 부제는 신부가 된 후에도 끊임없이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진석과 부제 때 한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 진석도 그 약속을 늘 기억하며 살게 됐다.
[추기경 정진석] (23) 주님의 은총
정진석 니콜라오 “네, 여기 있습니다!”
- 1961년 3월 18일 명동대성당에서 거행된 사제 서품 미사에서 첫 강복을 주는 새 사제들.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정진석 신부다.
“정진석 니콜라오.”
“네, 여기 있습니다!”
혜화동 신학교에 들어온 지 7년, 진석은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사제품을 받게 됐다. 당시에는 보통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맞춰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는데, 마침 1961년 3월 19일은 성지주일이었다. 성주간 첫날 서품식을 할 수는 없어 그 해에만 토요일인 18일에 서품식이 진행됐다.
진석은 수품성구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를 택했다. 상본 앞면은 진석이 지은 첫 책 「장미 꽃다발」의 표지로 대신했다.
사제 서품 예식은 명동대성당에서 있었다. 수품 후보자 중 가장 먼저 이름이 불려 제단 앞에 섰다. 명동대성당 제대 앞에 서 있으려니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보미사(복사)를 했던 것부터 유년 시절 흔들리던 신앙을 되찾은 것까지 성당에서의 추억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첫 기도는 복음화율 10%
이윽고 성인 호칭 기도를 바치기 위해 모든 수품 후보자들이 땅에 엎드렸다. 아름다운 성가대의 기도 소리가 흘러나오고 마치 천국에 다다른 듯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진석은 엎드려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 가톨릭 신자가 적어도 10%가 넘는 날을 본 후에 죽는 은총을 주소서. 저도 복음 선포에 제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중학생 시절 각 반을 돌아다니며 가톨릭 신자를 찾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을 뿐이다. 한 반에 한두 명도 되지 않아 실망하던 어린 진석의 꿈은 가톨릭 신자인 친구들이 많아지는 것이었다. 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10%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느님께 떼를 쓰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 1961년 3월 19일 첫 미사 후 대신학교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 정 신부 오른쪽이 모친 이복순 여사, 정 신부 왼편에 선 이는 외삼촌 이정규 신부.
서품 미사를 마치고 새 사제들이 첫 축복을 신자들과 선배 신부들에게 단체로 주었다. 그 후 성당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던 가족, 신자들과 만났다. 첫 축복을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는 제의를 입은 새 사제 정진석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셨다. 사제가 되면 개인 첫 축복은 보통 어머니께 드린다. 이 순간이 새 신부들에게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라 눈물을 참지 못한다. 진석은 기도를 바친 후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여 어머니의 머리에 안수했다.
“하느님! 어머니를 강복해 주세요.”
어머니께서 따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진석은 알고 있다. 그 순간 어머니도 진석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눈물을 간신히 참던 진석과는 다르게 작은 체구에 한복을 곱게 입으신 어머니는 오히려 의연했다. 이제 자기 아들을 온전히 교회에 바쳤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진석은 바로 다음날 신학교 대성당에서 첫 미사를 주례했다. 성지주일 장엄 미사였다. 서울대교구 수품자 중에서 가장 연장자는 이곳에서 첫 미사를 하게 돼 있었다. 신학교 대성당은 진석의 수품 한 해 전에 완공돼 진석이 부제로서 가장 앞줄에 앉아 매일 미사를 보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려니 진석은 무척 감격스러웠다. 존경하는 교수 신부님들과 후배 신학생들이 새 사제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의미로 거룩하고 우렁찬 성가로 맞이했다. 첫 미사를 집전하는 진석은 그동안의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제로 살기를 다짐했다.
그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신학교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지난 7년 동안의 신학교 생활을 생각하면 정말 천국처럼 휴식과 같은 삶이었다. 서품을 앞두고 많은 사람이 신학교 생활에서 힘들고 고민되던 순간을 물었지만, 진석은 분명하게 ‘그런 적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앞으로의 일생을 선택해야 하는 수품 후보자들이 고민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때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신부가 돼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석은 전쟁 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인생을 덤으로 얻어 살고 있었다. 보통 서품을 앞두고 얼굴이 핼쑥해질 정도로 고민한다지만, 전쟁 중에 온갖 비참과 이기적인 인간 군상을 경험하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진석은 스스로 하지 않은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그래서 진석에겐 신학교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련 속에서 단련하며 준비시키시듯 나 또한 그렇게 하셨는가 보구나….’
진석은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과 시련의 시간을 주님께서 주신 ‘선행학습’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의 은총은 실로 놀랍고 위대했다.
사제로서 첫 발걸음
진석은 역사가 깊은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신부로 발령받았다. 진석의 첫 부임지가 된 약현본당은 1887년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 공소로 출발했다. 약현본당에서 분리된 본당만 해도 수십 개나 돼 그야말로 한국 초대교회의 반석과 같은 곳이었다. 성당은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처형지이자 대표적인 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지금의 서소문 순교성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약현본당 신부들은 서소문이 있었던 지역을 가리키며 교우들에게 그곳을 지날 때마다 성호를 긋고 순교자께 기도를 바치도록 가르쳤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거룩한 장소에서 햇병아리 신부인 진석의 사제 생활이 시작됐다.
모든 것이 처음 체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임인 신인식 신부와 신자들이 잘 대해줘 생활에 불편 없이 나날이 행복하게 살았다. ‘신자들과 함께 산다는 체험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과 행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당 총회장이 병자성사가 있다며 급하게 진석을 찾았다. 서둘러 준비해 회장과 함께 갔더니 폐결핵을 앓고 있는 16살 소녀가 있었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소녀에게 진석은 병자성사를 열심히 주었다. 성사를 마치고 성당으로 돌아오니 회장이 소주 한 잔을 건네주셨다.
“신부님, 이거 드시고 소독하셔요. 폐결핵이 무서운 병이에요.”
당시에 폐결핵은 치료가 잘되지 않아 죽는 사람이 많았다. 전염병이라 사람들은 환자와의 접촉을 꺼렸다. 회장은 걱정되는 마음에 진석에게 소주를 준 것이다. 그 마음을 거절할 수 없어 진석은 단숨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고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제관 입구에 주임 신부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정 신부!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총회장님과 폐결핵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다녀오는 길입니다. 병자성사를 줬습니다.”
“뭐야? 폐결핵 환자? 신부, 밖으로 나와!”
주임 신부의 호통에 진석은 어리둥절하며 따라 나갔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진석이 마당으로 다 나오자 신 신부는 진석의 온몸에 파리약을 뿌렸다.
“왜 정 신부가 거기에 가? 내가 가야지! 나한테 이야기해야지, 전염이라도 되면 어떻게 하려고 해. 다음엔 나에게 이야기해. 알았어?”
상기된 얼굴로 크게 야단을 치셨지만 진석은 주임 신부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주임 신부의 아버지 같은 사랑에 진석의 두 뺨에는 눈물이 주룩 흘렀다.
[추기경 정진석] (24) 구름 같은 시간
아버지 같은 은사 신부의 갑작스러운 선종에 가슴이 먹먹
- 김영식 신부.
영문도 모른 채 사랑의 ‘파리약 세례(?)’를 받은 정진석 신부는 주임 신부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채고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주임 신부는 그런 새 신부의 어깨를 묵직한 손으로 툭툭 치고 말없이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한없이 품어주시는 감사한 마음과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은 죄송한 마음이 한데 섞여 그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물들여졌다.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신부로서의 생활은 행복했다. 하루하루 체험하는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은 그의 사제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제는 주임 신부에게 세세하게 허락을 얻어 병자 영성체도 가고, 신자들의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챙기기도 했다. 분주하지만 기쁨 가득한 하루하루를 신자들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신자들의 삶을 살피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나날은 정진석 신부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을 만큼 가슴 뿌듯하게 즐겁고 감사한 나날이었다.
갑작스런 인사발령
새 신부로서 약현의 신자들과 함께한 지 두 달째가 되던 날, 갑자기 교구청에서 소신학교로 가라는 인사발령이 났다. 당시 소신학교 부교장 김정진 신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던 것이다. 김 신부는 고1 라틴어를 담당하면서, 고1 담임도 맡고 있었다. 학생들의 수업을 하루라도 비울 수 없으니 바로 그 빈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고, 정진석 신부가 적임자였다.
- 1962년 한국 천주교회 교계제도 설정 당시 명동성당 입구에 설치된 경축문.
“수품을 받은 지 두 달째인데 미안합니다. 급한 상황이니 바로 신학교로 와주십시오.”
교구청에서 걸려온 전화에 정진석 신부는 앞으로 지낼 일이 아득하기만 했다. 본당은 본당대로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새로운 발령 직후부터 휴일이 단 하루도 없게 됐다. 토요일이면 본당에 와서 주일까지 미사 주례와 본당 사목을 하고, 월요일 아침에 다시 소신학교로 돌아가서 강의했다. 임태경 신부가 보좌 후임으로 부임한 1961년 9월까지 그는 그렇게 본당 보좌와 소신학교 선생을 오가며 소임을 다했다. 이후에야 비로소 소신학교에 상주하게 됐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세계 교회 역사와 비교해볼 때 매우 놀랍다. 교황청에 편지를 써 사제를 보내달라고 직접 청할 정도로 조선 땅의 평신도들이 열성적이고 굳센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염원은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가 북경교구로부터 조선 지역을 독립시키고 조선대목구를 설정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1880년대 조선 땅에 조금씩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조선의 가톨릭 교회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1911년에는 둘로 분할됐다.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을 바꿔 북부 지역을 맡았고, 경상도, 전라도 등 남부 지역은 독립된 선교지로 분할돼 이를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설정됐다. 대목구(代牧區)는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구로, 교황청이 직접 관할한다.
한편 1961년 6월 6일 인천 지역이 서울교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대목구가 됐다.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에서 이 지역 사목을 맡았고, 1962년 정식 교구로 승격됐다. 서울교구가 관할하던 인천 지역의 독립으로 정진석 신부의 아버지 신부인 김영식 신부(베드로, 1909∼1963)가 설립하고 운영하던 고아원과 성모자애병원이 인천교구 지역에 속하게 됐다. 정진석 신부도 일손을 거들며 직접 건물 설계까지 했던 기관들이었다. 김 신부는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하고 두 기관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 운영권을 넘겨주었다.
- 중림동약현본당 보좌 시절 신자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맨 왼쪽).
1953년 10월 30일 설립된 한국인 남자수도회인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당시 서울 제기동본당 주임 신부였던 방유룡 신부가 창설했다. 방 신부는 1946년 개성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한 이후 곧 남자 수도회를 창설하려 했으나 6ㆍ25 전쟁으로 늦어지다가 서울 제기동성당 부속 건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5명의 창설 회원과 함께 남자 수도회를 시작했다. 방 신부는 김영식 신부의 선배인데, 두 사제는 각각 이웃이라 할 수 있는 연백본당과 개성 지역에서 사목했다. 6ㆍ25 전쟁 전에는 연백군과 개성이 38선 이남이어서 남한에 속했는데, 전쟁이 터지자 두 사제가 함께 피란을 내려온 것이다.
연백본당 주임이었던 김영식 신부는 고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갔다가 휴전선과 가까운 부평에 고아원을 세웠다. 연백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부평에 고아원 둥지를 텄고, 머지않아 통일이 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으로 김 신부는 자신이 주임을 맡고 있던 본당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김영식 신부는 일생의 사업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아원과 성모자애병원을 갑자기 수도회에 인도하려니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직원이 큰 문제였다. 성모자애병원은 전쟁 직후부터 10년 가까이 부평에서 유일한 종합병원이었다. 전쟁 때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을 고용해 고아원과 병원에서 함께 일해왔다. 고아원도 오래 운영됐고, 병원도 계속 성장 중이어서 그야말로 딸린 식구가 많았다. 갑자기 떠날 상황이 되어 막막했던 김 신부는 조카 김영일 신부에게 인수인계 업무를 맡겼다. 김영일 신부는 회계와 행정 능력을 발휘해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닥친 사람들을 모두 잘 챙겼고 무난하게 처리했다.
당시 김영식 신부는 인천교구가 분리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보통 교구 설정은 갑자기 시행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해당 신부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김영식 신부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이후 김영식 신부는 후암동본당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이 흘러가고
그런데 1963년 1월 7일 김 신부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정진석 신부는 자신을 사제의 길로 이끌어준 영적 아버지인 김 신부와의 이별이 몹시 슬펐다. 하늘을 바라보니 차갑지만 맑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김 신부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는 것 같았다. 김 신부와 우연히 처음 만났던 시간부터 함께 미군 부대에 구걸하러 다닌 일, 고아들과 함께 지냈던 일 등 동고동락했던 시간들이 구름과 함께 흘러갔다. 당시 김 신부는 건강이 나빴지만 5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알았을까. 진석은 마음속으로 하느님께서 김영식 신부의 영혼을 받아주시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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