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제의 갈등을 보고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정장영
그날은 밝고 맑은 화창한 가을날씨였다. 국화향기 그윽하던 날은 미당문학제(2016.10.28~30)가 열리고 있었. 오늘은 문인협회회원들이 문학기행 삼아 모처럼 짬을 내어 많이 참석했다. 여러 행사 가운데 백미(白眉)라 할 기념식과 미당문학상 시상식에 이어 학생백일장, 미당문학특별강의가 있었다.
중앙일보가 주관하는 올해의 미당문학상은 시인 김행숙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제1회 신인작품상에는 시조 ‘독거노인’의 김태수(알래스카 거주)와 시 ‘감자’의 박선희(전북 남원) 두 분에게 돌아갔다.
축제가 무르익어 가는데 축제장 밖에서는 소란이 벌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지역회원들의 시위였다. 경찰과의 대치. ‘차라리 일장기를 걸어라, 고창국화축제를 중단하라, 서정주문학제를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간 전북의 친일문인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아무리 배고파도 민족을 팔 수는 없는 일이다. 민족을 팔아넘기는 일에 앞장서고, 전두환 독재정권에 비굴한 아부를 서슴지 않았던 미당 서정주를 기리는 고창국화축제와 미당축제는 중단되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장의 수많은 독립애국투사와 녹두장군 전봉준이 태어난 의열(義烈)의 고장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놀음인가?’ 그들의 외침들을 듣고 곰곰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어 보였다. 같은 지역에 있어서 기득권과의 갈등이랄까? 이 지역이 안고 있는 현실적 갈등이라고 생각되었다.
살포된 유인물(광고지)에는 그간 발표된 글과 언론을 통해본 실제 증거를 들어 서정주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히고 있었다. ‘❶ 자살특공대 가미가제에 조선청년을 내몰다. ❷ 학생들에게 학업을 중단하고 일제침략전쟁에 나아가 죽어라. ❸ 천황페하와 궁성요배를 부추기는 글. ❹ 일제침략전쟁의 징병제찬양. ❺ 일장기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조장. ❻ 일본 군인이 되는 것은 기쁘고 부러운 일. ❼ 독재자 이승만의 전기를 썼다. ❽전두환에 대한 아부와 아첨의 ※종결자다. ❾ 끝없는 변명과 궤변의 ※종천순일파’란 죄목 등을 들추고 있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름 있는 식자(識者)들이 수천 년 간 지정학적으로 약소민족이란 테두리에 사대사상(事大思想)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의도적인 곡필을 더러 해왔다. 일제침략과 같이 직접적 침략통치 때도 아니었다. 특히 대(對) 중국과의 외교에 따른 모화(慕華)의 곡필(曲筆)을 도청도설(道聽塗說)로 여겼다. 뒤늦게나마 알게 되어 놀란 바 있었다.
한국 최초의 사대곡필은 ① 당 태종에게 보낸 태평송(太平頌).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뒤를 이은 법민을 통해 *“삼오(三五)의 덕”이라 칭송한 외교문서를 전했다한다. ② 최치원의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를 중국의 큰 좀벌레라 비하했다. ③ 정몽주는 절원귀명(絶元歸明) 상소문에 명의 사신을 천사라 부르며 *귀부(歸附)하자는 상소문을 썼다. ④ 최만리는 한글제정반대 상소문에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를 이룬 마당에 훈민정음을 만든다하여 우리 민족을 중국 변방의 오랑캐라 비하했다.
또한 퇴계(李滉)의 친명 유학곡필(儒學曲筆)은 천자(天子)라 지칭하고 우리는 종주국으로 비하했다. 그리고 단군성조를 허황하다 부정하고, 기자조선의 통치를 아주 극찬했다. 율곡(李珥)의 친명 유학곡필은 율곡전서 공로책(貢路策)에 퇴계가 주장한 곡필을 인용하면서 중국을 상국(上國), 우리나라를 하국(下國)의 군신으로 규정하고 왕에게 더욱 충성할 것을 상소했다.
기자실기(箕子實記)에 퇴계와 같이 단군을 부정하고 기자를 개국조상으로 기록했다. 명나라 가정제(嘉靖帝)를 제사하는 제문(祭文)은 존경받는 대유학자 율곡이 아닌 동명이인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는 평도 있었다. 이 원문에 따르면 두루 생략하고 그 한 대목에 ‘해외첩생(海外鮿生)’이라 하여 스스로를 ‘송사리 같은 사람’으로 비하했다.
이제 와서 차원이 좀 다르다지만 오늘날 최치원, 정몽주, 이황(퇴계), 이이(율곡),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극악하고 혹독했던 일제통치 아래 젊은 나이에 저질렀다 할까? 이 일을 친일문인이라 낙인찍고 있다.
목숨을 걸고 희생이 따르는 독립운동에 비하면 이도 안일(安逸)한 곡필이었다 할까, 그 이상 이하랄까? 시대상(時代相)과 처지를 이들과 비교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 아닐까?
전시(展示) 역시 다른 문학관과는 달리 친일작품과 전두환 찬양시를 곁들여 사실 그대로 전시하고 있었다. 친일여부는 그들의 패망을 앞둔 발악, 총독통치 문화정책을 고려해 방문객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 같다. 아무튼 곡필은 어떠한 사정에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문인과 식자(識者)들에게는 경고다. 오늘의 시위는 타산지석(他山之石), 거울삼아야할 일이려니 싶다.
인생은 짧고 역사는 영원하다. 하지만 시류(時流)는 유동하고 시각이 변해가니 앞을 내다보고 살 일이다. 어느 시대나 겨레와 민족정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축제의 갈등을 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느낀 바 매우 크다. 지난 일들이 삶의 거울 같다. 각자가 나름대로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판단이 필요한 세상살이가 아닐까?
(2016. 10. 29.)
※‘전통시대 지식인들의 사대곡필’에서 참고(전,독립기념관장 김상웅).
*삼오의 덕은 三皇五帝의 덕.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
※종결자는 명사로 최고의 수준에 오른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킹왕짱'과 비슷함.
※‘종천순일파’라는 말은 미당이 스스로 행적의 변명에 쓴 말이다. 종천은 세상이 끝이라는 뜻이고, ‘영구(永久)를 이르는 말. 순일파는 사전에도 없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