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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4강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 / 마가복음 9:2-29
요절 / 마가복음 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에게는 두 귀가 있습니다. 잘 듣도록 하신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얼마나 주님이 답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도록 계속해서 돕습니다. 예수님이 겪게 될 고난, 버림받음, 죽음, 그리고 부활은 마가복음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제자들이 깊이 새기고 깨달아 알아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친히 말씀해 주십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은혜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여기, 높은 산은 헬몬산으로 추정합니다. 9장 1절을 보면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지 ‘엿새 후’입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이라 했으니 시간이 한참 많이 남은 줄 알았는데 바로 ‘엿새 후’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확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고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사53:2). 그러나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3절을 보면, 그 옷이 광채가 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어떤 세탁소 사장님도 그렇게 깨끗하게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영광과 거룩하신 모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원래 가지셨던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3-16절을 보면, 밧모섬에 유배 중이던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부활 승천하셔서 천상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세 명의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예수님은 고난받고 버림당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로서의 본연의 자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좋더라도 많은 고난을 받고 희생해야 한다면 누가 이런 인생을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버림당함, 죽음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영광과 거룩함의 모습도 비교가 안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이 제자로서의 본연의 자세로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에 겪게 될 힘든 일들만 생각하다 보면 끝까지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장차 주어질 영광을 소망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 영광은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엿새 후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 자기 생애를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 종처럼 낮아져 섬기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평생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만 지고 고생만 하다가 인생 종 치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참 부담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편한 생활, 여유로운 생활, 풍요로운 생활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옷이 희고 광채가 나는 거룩함과 영광의 예수님, 부활의 예수님, 죄와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예수님, 하늘 보좌에서 언제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응원하고 계시는 예수님, 장차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예수님을 소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런 소망으로 우리 심령에 충만할 때 비로소 주와 복음을 위해 마음 드려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말씀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는 고난도 있지만, 결국에는 부활 생명과 영광과 승리가 주어짐을 확신하고 소망 가운데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 영광 가운데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제자들에게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역사를 이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전수해 준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선지자로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애쓴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런 구약의 위대한 종들이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 광경은 너무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가 말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본문의 ‘여기’는 신비스럽고 영광스럽고 황홀한 장소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이런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기를 바랐습니다. 문제 많고 반대 세력이 많은 산 아래로 내려가 더 이상은 고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니” 여기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결심해야 합니다. 산 위의 영광과 황홀함에 취해 ‘여기가 좋사오니’ 할 것이 아니라 문제 많은 산 아래로 내려가 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제자로서의 본연의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 제자가 엘리야와 모세를 직접 본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니 깜짝 놀랐고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니 세 제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이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라고 하실 때,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을 세 사람 모두 신속하게 붙들고 서로 물어보며 토론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10)
그리고 11절에서는 예수님에게도 묻습니다.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할 것이라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제자 세 명이 질문하며 토론도 하고 예수님에게 묻기도 하는 걸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반발하던 때에 비하면 학습 태도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그들의 질문을 교정해 줍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구약성경을 나름 꼼꼼하게 읽고 연구한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온다’라는 말씀을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예언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모세와 직접 대화하신 예수님의 해석은 서기관들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미래에 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함부로 대우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먼저 오리라고 한 엘리야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헤롯 왕이 생일 잔치에서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인 사건에서, 이미 엘리야가 왔는데 그를 함부로 대우한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당대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아주 깔끔하게 옷을 입었지만 잘 살펴보면 그 옷에 더러운 것이 많이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결 예식을 하면서 늘 손을 씻고 옷을 빨아 입었지만, 그들 마음속은 위선으로 가득했습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였습니다(막8:38). 그러니 맞는 말을 하기보다 틀릴 때도 많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잘 듣지 못하니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이미 먼저 왔는데 그들은 온 지도 몰랐습니다. 먼저 온 엘리야인 세례요한을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죽이고서도 그가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이런 서기관들의 말을 듣고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고 100% 무흠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그 어떤 세탁자도 따라할 수 없는 희고 정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위선으로 가득한 서기관들, 음란과 죄 많은 그 세대와 예수님은 비교당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또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직접 대화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모세나 엘리야로 대표되는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그것을 근거로 백성들을 가르쳤다면,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직접 대화하는 분입니다. 아니, 오늘 본문에 보면(4), 엘리야와 모세가 찾아와 보고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고난, 버림당함, 죽으심, 그리고 이후 부활 승천의 영광의 주님임을 듣고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장차 주어질, 또는 가까이 있는 영광과 승리를 소망하면서 예수님의 제자의 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세 제자가 이제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 아래 남아있던 제자들을 보았는데,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논쟁하던 주제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나아와 대답합니다. 귀신이 아들을 사로잡으면 그를 바닥에 내던졌고, 거품을 물고, 이빨을 갈고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의 생각에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똑같이 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고 말씀하십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혈루증 앓던 여인이나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에 대해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버지는 칭찬받지 못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불신의 사람 중 하나입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귀신 들려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큰 슬픔에 빠졌고 운명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무능한 지도자들을 원망하고 깊은 불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세대 전체가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던 서기관들, 지켜보던 무리까지 모두 ‘믿음 없는 세대’였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믿음이 없는 풍조였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귀신 들린 아이는 불신 시대의 희생물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그 세대의 실상이 어떠합니까? 20,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는 아이로 하여금 즉시 몸부림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던 대로였습니다. 땅 위에 엎드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야말로 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지금 아들이 발작을 하고 난리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요? 아버지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한시라도 빨리 고쳐주시지, 왜 이런 질문을 할까요? 참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어릴 때부터요.” 시간이 오래될수록 체념과 절망, 불신은 점점 깊어만 갑니다.
22절을 보면, 귀신의 목표는 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과 물에 자주 던졌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불에도 뛰어들고 물에도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으니 노심초사였을 것입니다. 아들과 자신 둘 다, 그 힘들고 고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아들과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아버지는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 아이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또 아버지로서 삶이 얼마나 딱합니까? 주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도와주세요. 가슴이 뭉클해지는 아버지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지금 ‘할 수 있거든’이라고 했니? 지금 그렇게 말할 상황인가?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단다! 이런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믿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던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 아이를 둔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혈루증 앓던 여인 같은 경우입니다. 이들을 믿는 자로 생각해 본다면, 본문의 아버지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고 믿음의 말을 해야 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처럼 예수님이라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고, 죽은 딸아이를 앞에 둔 회당장 야이로에게 끝까지 믿도록 말씀하신 것처럼, 본문의 아버지는 예수님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실 수 있다는 것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귀신에 들린 아들을 고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견해는 ‘믿는 자’를 예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세대는 믿음이 없는 세대이지만, 온전한 믿음을 가지신 예수님에 의해 변화되고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신약학자 하워드 마샬 교수는 ‘믿는 자’를 위의 견해 둘 다로 해석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의도적인 모호함’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두 가지를 다 말씀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마음의 상태는 고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 제자를 표현하는 완벽한 상징일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신앙과 불신앙은 상반되지만, 기독교적 경험상 그것들은 동시적인 실제입니다. 즉 믿는 자는 항상 불신앙과의 전투에 동시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래서 하워드 마샬은 24절의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역설적이게도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또 믿음 없음을 고백하며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앙과 불신앙이 함께 있는 것이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믿는 자 예수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히12:2a)’,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비인격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운명과 같은 그런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지극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저 하늘 보좌 높은 곳에 앉아 우리에게 지시만 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늘 함께하시고 우리의 작은 기도에도 귀를 기울여 주시는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운명적인 요소가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계적인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신 예수님,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세상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진실한 믿음의 간구를 받아주시고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28)?”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9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여기 ‘이런 종류’는 귀신의 세력, 악한 영의 훼방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런 영적인 현상이나 영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오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기도 외에 다른 것’을 먼저 찾기 쉽습니다. 기도하라고 하면 그런 뻔한 답 말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말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기도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일하면 사람이 일하는 것뿐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전능하신 주님이 일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세대는 ‘믿음이 없는 세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도 신앙과 불신앙이 공존하는 게 실제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고난을 받으셨고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또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지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말씀은 100% 정결하고 확실하고 신실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 속에서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현실 문제들이 해결받고 변화되고 회복되는 역사들을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게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