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스가 군함 3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병인박해( 丙寅迫害)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이 중국으로 도망쳐 이 소식을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스(Roze)에게 알렸고, 이들은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에 분노하여 이를 문책하러 온 것이었다.
이중 군함 2척이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나자 한강 입구로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까지 접근했다.
놀란 조정에서는 군함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포대에서 쏜 대포성능이 한심해서 포탄이 배에 미치지 못하고 모조리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스 군함에서 쏜포탄은 정확이 조선수비대를 박살내고 말았다.
강화도의 초지진이고 한강의 양화진이고 조선 포대에 설치되어 있던 대포는, 270여 년 전인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 설치되었던 대포와 거의 같은 모델이었다.
그 대포는 사정거리가 700~800m 정도로 서양 함정에 장착된 최신식 대포 사정거리의 10분의 1밖에 안 될 정도의 한심한 대포였다.
잠깐 사이에 조선의 포대를 침묵시킨 프랑스 군함들은 9월18일부터 10월1일까지 서울 양화진(楊花津)의 서강까지 올라와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 끝에 해도(海圖)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서양선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도성에서는 난리가 났다.프랑스 함포의 위력을 보고 배들은 모두 도망쳐 강에는 단 한척의 배도 볼 수 없었고, 조운선(漕運船)들의 뱃길이 막혀 도성에 식품 공급이 끊겼으며, 이에 물가가 치솟아 백성들은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더구나 난리 소문에 도성 주민 태반이 피난길에 나서서 도성은 텅 비다시피 했다.
한 나라가 배 3척에 이 꼴이 된 것이다.
로즈는 10월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11일에 제2차 조선 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 최인서(崔仁瑞), 심순녀(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여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성을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 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천명을 죽이겠다." 는 강경한 응징의 보복의지를 보였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조선 정부는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해 출정케 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로 있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통진부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였다.
강화성은 고려조부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왕실이 도피하여 나라를 지켜왔던 곳인이었는데, 프랑스군 몇백 명에게 어이없이 함락되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26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와 군인, 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강화부사와 병사들은 다 도망치고 무기고에는 자그마치 대포 80여 문과 화약, 그리고 총, 투구, 갑옷 등 무기들이 그대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런 무기들을 가지고 싸움도 한 번 안해 보고 모조리 도망쳐 버린 것이다. 일반 창고에도 식량과 물품이 그득그득 쌓여 있어, 프랑스군들의 기록을 보면 편자값만 따져도 프랑스 돈으로 18만 프랑은 될 것이라 했으니, 아마 창고에 있던 수백만 프랑의 물품이 고스란히 프랑스군 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양헌수는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려면 기병작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 험준한 요새에 병력을 배치해서 육박전을 대비)'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작전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점거하였다. 드디어 11월 7일, 프랑스군대가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549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김기명 지휘하의 포수 161명, 동문에는 이렴 지휘하의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이대흥 지휘하의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가 정족산성(鼎足山城)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Ollivier)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포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격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의 승리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화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 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해 근대식 병기로 무장을 갖춘 프랑스군을 격퇴했다는 것이다.
둘째,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했지만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재공략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 할때 외규장각 고서(주로 의궤)와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 가고 나머지 서적들은 불에 태워버렸다.
지금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고서적이 보관되어 있는데, 한국의 반환요청을 들은 척도 안하고 있던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 형식으로 반환하기로 합의했고, 2011년 4차례에 걸쳐 297권의 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로즈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외교적 입장에서 보면, 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입장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 켜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통상수교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병인양요(丙寅洋擾)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나라의 문을 닫아 거는 통상수교 거부정책과 천주교 금지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서양의 오랑캐가 일으킨 전쟁을 뜻하는 '양요(洋擾)'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커진 것이었다.
게다가 5년 뒤에는 미국까지 군함을 이끌고와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조선으 더욱 강력한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