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나가보니 쫓고쫓기는 생활…살기 힘들었어요"
이젠 스님과 사니까 편해…염불 외느라 정신 없어
강원도 산골의 한 사찰. 법명조차 안 밝히려는 주지스님이 기자를 대웅전 법당으로 이끌었다. 기자가 고개 숙여 합장한 뒤 앉으려고 하자, 그는 “허, 이곳에 들어왔으면 마땅히 부처님께 절을 드려야지요”라고 제지했다. 엎어지듯 일배를 하고 일어났을 때 “부처님 앞에서는 적어도 삼배는 해야지요”라는 말이 들렸다.
한낮의 땡볕 더위인데도 법당의 열린 문으로는 바람이 통했다. 한 처사(절에서 일하는 사람)가 소반에 수박과 삶은 옥수수를 담아왔다. 보름쯤 문전 박대 당했을 때와 비하면 융숭한 대접이다. 주지스님이 기자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속세 사람들이 자기네와 상관없는 일에 궁금해하니 먹고 살기가 넉넉한가봐, 쯧쯧”이라고 중얼거렸다.
얼마 뒤 키가 140cm될까말까, 잿빛 승복이 커보이는 영자(19)가 들어왔다. 박박 깎은 머리가 익숙하게 동글동글했고 이마에는 조그만 여드름이 솟아있다. 도대체 열아홉 처녀라기보다는 개구쟁이 소년 같은 냄새가 더 났다. 기자를 향해 합장하는 그의 뺨에 홍조가 번졌다.
그가 이 암자로 온 지 넉 달이 됐다. 아직 행자의 신분이지만 ‘도혜’라는 임시 법명을 받았다. 올 초 산중에 홀로 남아 있던 그의 부친이 살해된 뒤 경찰에서는 그가 의탁할 곳을 물색했다. 독지가도 여럿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택한 곳은 절이었다.
―왜 하필 절로 가겠다고 했나요.
“아버지가 불경이나 책을 읽고 얘기해줬어요. 그때도 절이 그리웠어요. 이제 스님과 살아보니까 좋고…, 스님께 빨리 머리 깎아 달라고 졸랐어요.”
그러면서 “전생의 인연인가 보지요, 뭐”라고 툭 한마디했다. 절에 온 지 20일 만에 머리를 깎았다. 그때 한번 삭발을 해준 뒤로는 혼자서 머리를 깎는다고 했다.
수행의 하루는 빡빡하다. 새벽 2시50분쯤 일어나 도량석(경내를 깨우기 위해 도는 의식)을 시작으로 새벽 예불, 공양, 경전 공부, 울력(노동)…. 잠자리는 9시에 든다.
―여기서 평생 살 결심인가요.
“여기서는 행자 생활만 하고 큰절로 스님 공부하러 가야지요. 절에서 살고 절에서 죽을 거예요.”
―스님이 되면 무얼 할 거예요.
“도를 깨치는 거죠, 뭐.”
이 답변에 좌중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는 “스님이 되려는 것은 다 깨치기 위한 거지, 속인처럼 자기 몸을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반문조로 말했다. 이제 그는 금강경, 반야심경을 외워 독경할 줄도 알게 됐다. 주지스님의 말로는 “(불교)공부를 오래 한 사람처럼 천성적으로 낭창낭창한 가락이 있다”는 것이다.
―독경할 때 무슨 생각을 해요?
그는 입 안에서 속삭이듯 “성불하는 것, 그리고 업장소멸시켜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처녀가 과연 업장소멸이라는 뜻을 알까. 이번에는 웃을 수 없었다.
―아버지 생각은 나세요.
“가끔 나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세상 나가보니 어땠어요?
첩첩산골의 외딴 집에 살다가 매스컴의 스타가 된 그는 작년 말 가출했다. 그 뒤 혼자 남은 아버지는 돈을 노린 강도에 의해 피살됐다. 털어간 돈은 12만4000원이었다.
“세상이 욕심으로 가득 찼어요. 서로 이용하고, 나를 위해 남을 죽이려 하고…. 나는 그 속에 살 수가 없었어요.”
“(그들이) 용서될 것 같아요”라는 질문에 고개만 저었다. 질문은 이어졌으나 그는 아예 못들은 척 무시했다.
―사람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은가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쫓고 쫓기면서 사는 게 불쌍해요.”
―접해본 스님들은 어땠어요.
“스님은 도를 깨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지내지만, 속인은 먹고 놀고 자기 욕심만 차리잖아요.”
―속세에 있을 때는 문학서적을 많이 봤다면서요.
“시나 소설을 읽었어요”라고 대답했다가, “그런데 속인 시절의 것을 왜 물어보시오?”라고 퉁을 줬다.
―문학 책에 대한 미련은 끊었나요. 그는 “절에 들어오면 다 내버리고 들어오는 거예요. 속세에 있던 것은 다 잊어버리고”라고 의젓하게 말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주지스님이 “처음 절로 들어올 때 소지품이 제법 됐어요. 어떻게 하나 버려두자, 얼마 뒤 제게 갖고 왔어요. ‘왜 지금 와서 그러냐’라고 물으니, ‘삭발하고 나서 제가 마음을 바꿨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해요. 그래서 불태웠어요. 생긴 것은 천상 개구쟁인데 간혹 툭 던지는 말이 예사롭지 않아요. 당초 이곳에 스님이 한 분 더 계셨는데 서울로 떠나자 ‘스님이 바랑을 메고 떠난 뒤로 소식조차 없네’라고 해 한참 웃었지요”라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가 제대로 먹지 못해 발육이 되지 않은 점을 걱정했다. 한번은 “키가 얼른 더 커야 할 텐데”라고 말하니, “키 작으면 스님 노릇 못해요?”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아직 행자니까 막식(고기를 가리지 않고 먹는 것) 해도 된다”고 권해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절에 올 때 아버지와 살았던 산골 집에서 기르던 닭 두 마리도 데리고 왔다. 절에서 닭을 기른다는 게 가당찮았지만, 주지스님은 요사 뒤편의 안 보이는 곳에 닭장을 만들어줬다. 여기서 나오는 달걀을 먹이려 해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 공부는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또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기자는 최근 출판된 그 부녀의 시집을 보여줬다. 그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시를 읽고, “내가 쓰긴 했는데 달라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집 안에 삽입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눈물이 주르르 굴렀다. 울음에는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10여분간 달래 눈물을 그치게 하자 그는 울었던 사실을 잊고 금방 명랑해졌다.
―이곳 생활이 재미있다고 했는데 뭐가 재미있어요?
“스님과 생활하는 거요.”
―그게 뭐가 재미있담?
“스님이 공부를 잘 가르쳐 주시니까. 잘못할 때는 야단치시기도 하지만.”
―야단 맞으면 섭섭해요?
“그런 생각이 없지 않지만,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이니까요.”
주지스님이 “바로 어제 절에서 키우는 점박이 개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았어요.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는데, 신기한지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래서 야단쳤어요. 좀 심했다 싶어 ‘너 아까 서운했지’라고 하니, ‘서운했지만 스승님의 가르침으로 알겠습니다’라고 답변해요. 머리에 무엇이 있는지”라고 거들었다.
―TV도 봐요?
“스님이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고 했어요. 그런 걸 보면 잡념이 생겨 안 돼요.”
―컴퓨터는요?
“집에 있던 것을 갖고 왔지만 사용을 안 해요. 염불 외워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있어요?”
그러면서 “애물단지죠, 뭐”라고 덧붙였다. 순간 폭소를 터뜨리는 기자 쪽으로 손짓하며, “우하하, 뒤로 넘어가겠어요”라고 웃어댔다.
―아침마다 거울은 봐요?
“속세 사람이나 거울 보지요. 화장을 할 건가, 내가 뭘 하려고 거울을 봐요? 아이참, 별거 다 물으시네.”
그녀는 합장을 한 뒤 일어섰다. 인터뷰가 끝나 기자는 경내를 서성거렸다. 여름 해는 길다. 그와 주지스님은 밀짚모자를 쓴 채 객은 아랑곳없이 울력에 나섰다. 절 앞 채마밭에서 홍화를 거둬들이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이들의 평온을 더 이상 깨뜨려서는 안 된다. 주지스님이 떠나는 기자 일행에게 삶은 옥수수를 싸주라고 시킬 때, 이 무구한 행자는 “스님, 고추도 주세요”라며 경내에 심어놓은 고추를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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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자는 누구?
첩첩산중 살다 TV 출연…CF 나와 스타로
도시의 탐욕에 희생, 아버지 죽음후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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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삼척의 첩첩산중에서 문명과 떨어져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이영자. 작년 여름 ‘그 산골엔 영자가 산다’라는 TV프로가 방영되면서 일약 스타가 됐다. 도시인에게 자연의 순수함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잇따라 다른 TV 프로에 등장하고, CF를 찍고,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팬레터가 쇄도하고 휴대전화·컴퓨터·녹음기·화장품이 산골로 배달됐다.
하지만 매스컴에 노출된 지 석달 만에 그는 산을 벗어났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그를 인도한 것은 도시의 탐욕이었다. 그의 후원회를 조직해 돈벌이하려는 한 인간에 의해 이용되고 망가졌다. 그러는 사이 산중에 혼자 남은 그의 아버지는 강도에게 변을 당했다. CF까지 나왔으니 돈이 많을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그는 도시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불과 1년도 안된 짧은 기간에 그는 삶의 모든 얼굴을 봤던 셈이다.
그 뒤의 후일담으로 그가 출가했다고 전해졌다. 그의 처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숨은 듯했다. 그런데 한 출판사에서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라는 제목의 시집을 펴냈다(출판사가 영자 부녀에게 원고료 10만원을 건네준 것으로 계약서에 나와 있다). 중이 됐다는 그는 과연 이런 시집이 나왔다는 걸 알았을까.
한때 그를 보호했던 강원도 삼척경찰서의 허만영 서장은 온갖 매스컴의 요청을 거절해 지금껏 입을 다물어왔다. 아마 앞으로도 함구할 것이다. 비록 입장은 달랐지만 그의 자세에 십분 동의했다. 영자의 소재를 찾게 된 과정은 다 밝힐 수 없다. 이틀에 걸쳐 절을 방문했으나 입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쫓겨나는 걸음이었지만 양보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의 주지스님에 대해 내심 존경심이 느껴졌다. 직접 밭일까지 하는 보기 드문 수행자였다.
여러 곡절 끝에 보름 뒤 기자는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언론과의 만남은 이번이 끝이라고 스님은 단언했다. 그 뜻을 이번 인터뷰에서 전하려고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