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부산 글로리 콘도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새벽 길을 아내가 운전하는 차의 뒷 좌석에서 운기조식을 한다. 엊 저녁 늦게 마친 세미나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다. 세벽 길을 재촉하는 이유는 오늘 정오에 성백문 형 내외와 그의 유년 시절의 고향을 찾는데 동행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가창초등학교를 포함해서 다녔던 상원 교회와 상원리 상동 텅스텐 광산 주위에 성장지 옛 집터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더 가슴이 시리도록 그리운 일은 그 옛날 국민학교 학예회 발표 연습 때 합창 할 때마다 바로 옆에서 노래를 연습할 때 하도 예뻐서 손을 한 번 꽉 잡을려고 며칠 벼루다가 겨우 큰 맘 먹고 오늘에야 거사를 결심하고 합창단 연습할려고 줄을 섰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따라 선생님이 자리를 바꿔서게 해서 거사를 못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게 했던, 그 때 그 사람 '구옥자'의 소식도 들을 겸해서다.
우린 정시식 형의 안내로 우선 점심을 가창면 행정리에 유명한 보리밥 집 '곤지곤지'로 갔다. 동리 입구부터 성 형은 감탄사다. 아직도 그린벨트 지역이어서 그런지 과거의 그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눈치다. 시골 구석까지 차량 행렬이 줄을 서고 붐비는 식당의 손님으로 보아 한 눈에 맛으로 승부하는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산촌의 분위기가 성 형이 자란 분위기에 맞는지 연방 찬사다.
"뉴욕에서는 없는 향기다. 아 그리운 고향의 냄새가 바로 이것인가!"
봄 바람에 실려 온갖 방초의 향기와 싱그러운 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식당이 차지하고 있는 넓은 부지엔 온갖 녹음방초가 꽃을 피우면서 향기를 내 뿜고 있다. 석류 꽃이 탐스러워 자리를 뜨지 않는 부인 곁에서 성 형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리고 카메라의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정시식 형의 사진에 대한 프로페셔널 답게 셔텨 누르는 소리가 삼삼칠박수다. 한 장면에 대해 보통 세 네번은 된다.
상원리 초입 동리 촌로에게 길을 물어 성형이 살았던 동리 상원 2리 입구를 찾았다. 한국 근대사의 경제부흥의 효자였더 상동광산이 지금은 폐허다. 성 형이 자랐던 잡초 속의 옛 집터엔 다북 쑥과 찔레꽃이 피어 사람의 접근을 외면한다. 성형의 옛집 자리에서 사진을 멋 있게 찍으려 하나 키 보다 더 자란 찔레 가시가 가까이 접근을 거부한다.
" 이 윗 쪽이 몸채고 이 아래는 둑 따라 코스모스가 만발 했었어...., 여기서 검정 고무신을 신고 가창국민학교까지 시오리 길을 책보를 어깨에 빗겨 메고 마구 달린 기억이 선해..!"
" 그렇군요. 아 멀군요. 학교까진.." 하면서 대꾸를 해주시는 부인의 정성이 놀랍다.
산골 높은 위치인 동구에서 바라보는 가창국민학교 가는 길은 먼 곳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아득하다. 한창 익어가는 누런 보리밭 고개를 넘어 그래도 더 멀리 얕은 산 저 너머 학교의 희미한 영상이 보인다. 상동광산의 우람한 콘크리트 구조물인 폐광 입구에서 찬 바람이 나오는 곳에 한 참 서있다. 성형의 춘부장께서 옛 날 이 장소에서 찍어둔 사진이 있다고 하면서 같은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었다. 찾고 싶은 사람 가운데 '정삼식'이란 친한 친구의 안부를 몰라 안타까워 하던 중, 마침 이 마을 주민을 만나 통성명을 하니 찾는 분의 조카라고 하면서 작년에 고인이 되셨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의 배우자도 일년을 사이에 두고 다 고인이되셨단다. 슬픈 소식을 안고 광산을 내려왔다. <계속>
첫댓글 동행하지 못한게 참 한탄이 될려는 찰나일쎄---.
중국 황산 갔다오니 달성광산이 상동광산으로 둔갑해 버렸군---
그 아름답던 시절에로 돌아가는 설레임 그공간과 거기에 가득했던 얼굴들, 사건들, 관계들. 이렇게 나의 추억과 얘기들을 사진과 글로 기록해 주는, 그리고 나의 회상을 도와 준, 두 신사- 정시식과 강수균-의 자상함에 감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