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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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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10장에서 서술한 소비에트 러시아 국내의 "봉합의 반복" — 건설적 불신임 관행의 정착, 곡물 위기의 미해결, GPU의 견제와 우회 — 은 러시아 안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러시아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혁명이 만든 체제의 성격 — 다당 연립, 인민대표대회, 분파 자유, 강제 집단화의 부재 — 은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형 전체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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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인터내셔널
이 변화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중간 지대에 즉각적인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빈 인터내셔널(Internationale Arbeitsgemeinschaft Sozialistischer Parteien, 사회주의정당국제노동공동체)은 1921년 프리드리히 아들러(Friedrich Adler)의 주도로 빈에서 결성된 국제 조직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조직은 1923년 함부르크 대회에서 베른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의 후신인 사회주의노동자인터내셔널)과 합병하여 소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빈 인터내셔널의 운명은 달랐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빈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는, 베른 인터내셔널의 의회주의와 코민테른의 일당적 규율 사이에서 제3의 공간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코민테른의 21개조 가입 조건은 너무 가혹했고, 베른 인터내셔널의 의회주의는 너무 보수적이었으므로, "혁명적이되 교조적이지 않은" 국제적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스크바는 더 이상 단순한 분열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인민대표대회라는 — 유명무실하되 실제로는 무시할 수 없는 — 다당 기구, 멘셰비키 국제파와 좌파 사회혁명당의 제한적 존속, 그리고 코민테른 내부의 비교적 느슨한 노선 조정은 빈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러시아가 완전히 닫힌 체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에 맞서 따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의 무게를 이해하려면, 빈 인터내셔널의 구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조직에는 독일 USPD(이후 SAPD),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좌파, 프랑스 SFIO의 일부, 그리고 러시아 멘셰비키 국제파가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혁명을 지지하되 볼셰비키의 방법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볼셰비키의 방법이 —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 다원주의적으로 변화했다면, "반대"의 근거가 약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빈 인터내셔널은 통째로 베른으로 흡수되지도, 집단적으로 코민테른으로 이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좌우 분기가 가속되었습니다.
우파는 "여전히 러시아 혁명은 국가 권력의 과잉이다"라고 보며, 베른과의 재결합을 선호했습니다.
좌파는 "적어도 이제 모스크바와의 대화는 원칙적 배신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중심부는 바로 그 둘 사이의 중재를 자신들의 역사적 임무로 재정의했습니다.
빈 인터내셔널은 이로써 과도기적 조직이 아니라, 유럽 사회주의가 혁명과 의회주의의 관계를 다시 사고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논쟁의 장이 되었습니다.
바레츠노프가 이 조직에 소비에트 측 대표로 가담한 것은, 바로 이 논쟁의 장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다원적 성격을 전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멘셰비키 국제파라는 소수 분파의 일원이 소비에트 측 대표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전시 가치를 가졌습니다. 사회혁명당이 가담해있던 제2인터내셔널이 파괴된 이후에는 멘셰비키 국제파(사회민주노동당)만이 국제정당조직에 가담한 사례로는 당연한 예외인 볼셰비키당을 제외하면 유일했으니까요.
보라, 우리의 체제에는 멘셰비키도 대표로 보내는 공간이 있다.
바레츠노프는 이 전시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고, 동시에 자신이 전시물이라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전시물은 전시실이 존재하는 한 보호받지만, 전시실이 닫히면 보호도 끝납니다. 바레츠노프에게 빈 인터내셔널은 정치적 활동의 장인 동시에, 러시아 밖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 유럽의 사회주의자들과의 접촉이, 나중에 러시아를 떠나야 할 때 갈 곳이 있다는 확신을 조금씩 쌓아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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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과 중부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스웨덴과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이들에게 러시아의 변화는 따라가야 할 모델이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노선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게 만드는 역설적 사례였습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ocialdemokratiska Arbetarepartiet)은 "러시아조차 일당적 폐쇄로 곧장 수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의회와 노조, 지방자치와 점진적 개혁의 결합이 결코 배신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인민의 집(Folkhemmet)" 구상 — 국가를 모든 시민의 "집"으로 만든다는 복지국가적 비전 — 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이 구상은 러시아의 경험을 참조하되 모방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보다 산업화된 환경에서 노동자 정당이 국가 운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자신들의 경험을 러시아와 대비하면서,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되 그 형태를 보편화하려는 시도에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 특히 빈의 시정 실험을 이끌던 세력에게 러시아는 더더욱 복합적인 대상이었습니다. 카를 자이츠(Karl Seitz)와 후고 브라이트너(Hugo Breitner)가 이끈 "적색 빈(Rotes Wien)" — 1919년부터 시작된 빈 시정부의 사회민주주의적 실험 — 은 주택, 교육, 보건, 지방 재정 개혁을 통한 "생활세계의 사회화"를 추구했습니다. 이들은 모스크바의 혁명적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도시적 사회주의 — 칼 마르크스호프(Karl-Marx-Hof) 같은 대규모 공공 주택 단지로 상징되는 — 가 러시아의 내전형 사회주의와는 다른 길임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러시아의 온건화를 계기로 코민테른 쪽으로 일제히 이동한 것도, 반대로 집단적 반볼셰비즘으로 굳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각국은 러시아를 거울로 삼아, 자기 사회의 조건에 맞는 사회주의의 언어를 더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그것이 빈 인터내셔널이 오히려 더 강화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이 현상을 자신의 다원주의 이론의 국제적 확인으로 해석했습니다 — 예측 가능하게도.
유럽 사회주의가 러시아 모델을 일방적으로 모방하지도, 일방적으로 거부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다원주의가 국제적 차원에서도 작동한다는 증거이다. 사회주의는 단일한 형태가 아니라 복수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 복수성 자체가 사회주의의 강점이다.
이 해석은 논리적으로 가능했지만, "사회주의의 복수성"이 실제로 강점인지, 아니면 통일된 행동 능력의 부재를 미화한 것인지는 — 위기가 도래했을 때 시험받게 될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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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축 자체의 이동
이 점에서 1920년대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 변화는, 세력의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논쟁의 축 자체의 이동이었습니다.
이전의 질문이 "모스크바를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였다면, 이제의 질문은 "러시아의 경험이 혁명과 민주주의, 당과 국가, 의회와 소비에트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정의하는가"가 되었습니다.
빈 인터내셔널은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제도화한 공간이었고, 프랑스의 SFIO는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토론한 정당이었으며, 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것을 가장 신중하게 거리 두며 흡수한 세력이었습니다.
모스크바가 유럽 좌파의 유일한 중심이 되지 못한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단순한 타자에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러시아, 이후 소련은 유럽 사회주의의 모든 흐름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한 번쯤은 통과해야 하는 불편한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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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매력적 모델
유럽 밖에서, 소비에트 모델이 가장 자연스러운 공명을 일으킨 곳은 인도였습니다.
"독재 없는 계획경제 + 다민족 연방" — 이 조합은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의 좌파에게 매력적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는 1920-30년대에 소련의 5개년 계획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927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네루는 산업화의 성과에 감명받았으나, 동시에 정치적 억압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습니다. 그의 자서전 발견의 인도(The Discovery of India)에서 그는 소련을 "거대한 실험"이라 불렀습니다 — 이 표현에는 존경과 유보가 동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여기서 대숙청과 인위적 기근이 없는 버전이라면, 네루의 유보가 줄어들고 존경이 더 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도 내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되, 인도의 독자적 정치 역학 — 간디의 비폭력 운동, 무슬림 연맹과의 긴장, 카스트 문제 — 이 러시아 모델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인도 국민회의 내의 좌파 — 네루,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자야프라카시 나라얀(Jayaprakash Narayan) — 는 사회주의적 경제 계획과 반제국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간디(Mohandas Gandhi)의 비폭력 대중 운동이라는 독자적 전통 안에서 이 결합을 추구했습니다. 러시아 모델은 참조점이었지 청사진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7월 혁명의 "대중 봉기" 모델은 간디의 비폭력 대중 운동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졌습니다 — 둘 다 전위당의 정밀한 계획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했습니다.
이 유사성이 네루와 인도 좌파가 소비에트 모델을 참조할 때 "우리의 방식과 양립 가능하다"는 인식을 강화했습니다. 실제 역사의 10월 혁명 — "정밀한 쿠데타" — 은 간디의 비폭력 대중 운동과 양립하기 어려웠지만, 7월 혁명의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소금 행진(Salt March, 1930)이나 비협조 운동(Non-Cooperation Movement)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었습니다. 물론 폭력과 비폭력의 차이는 결정적이었지만, "대중이 먼저 움직이고 지도부가 뒤따른다"는 패턴의 유사성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칼유스테에게 인도와의 이 연결은 — 아직은 간접적이지만 — 의미 있는 것이었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인도 출신 학생들과 접촉한 경험이 있었고, "다민족 환경에서의 교육"이라는 그의 전문 영역이 인도의 다언어·다종교·다카스트 환경에서도 수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칼유스테의 관심은 이 시기에 주로 중국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인도와의 연결은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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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의 성격 변화
"사회파시즘 노선"의 부재와 룩셈부르크의 비판에 의해, 코민테른은 모스크바의 일방적 지령 기구가 아니라 다소 느슨한 국제 네트워크로 진화했습니다.
6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소비에트 러시아 자체가 다당 연립정부이므로 모스크바가 다른 나라의 좌파 정당에게 "일당 순수성"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었으며, 21개조 가입 조건이 약화되었고, 각국 공산당의 자율성이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은 각국 공산당의 자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조직적 규율을 약화시키는 이중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이중성의 구체적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 역사에서 코민테른의 교조적 통제가 각국 공산당에 부과한 비용은 막대했습니다. "사회파시즘" 노선에 의한 SPD-KPD 적대, 일국일당제 노선에 따른 민족 공산당들의 파괴, 중국에서의 국공합작 강요와 이후의 파국적 분열, 각국 공산당 지도부의 모스크바 지시에 의한 교체 — 이 비용이 제거되거나 감소하는 것은 명백한 이득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조적 통제가 제공한 것도 있었습니다 — 재정 지원, 간부 훈련, 지하 활동의 기술적 노하우,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혁명의 참모부"라는 상징적 통일성.
코민테른이 느슨한 네트워크로 변하면, 약소 공산당 — 동남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 이 모스크바의 재정·조직적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독자적 생존이 어려워질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통제가 약해진다는 것은 모스크바의 지원도 약해진다는 것이며, 자율성과 자원 사이의 교환이 모든 각국 공산당에 유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대규모 공산당(KPD, PCF, PCI)은 자율성의 이득이 지원 감소의 비용을 초과했지만, 식민지의 소규모 공산당에게는 반대일 수 있었습니다.
포쿠아는 이 교환의 비대칭을 가장 명료하게 이해한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GPU의 해외 정보 부문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각국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정보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관찰은 이랬습니다:
자율성은 강한 당에게는 자유이지만, 약한 당에게는 고립이다. KPD는 코민테른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자금과 훈련 없이는 6개월을 버티기 어렵다. 우리가 통제를 완화할 때, 우리는 KPD에게 선물을 주고 인도네시아 공산당에게서 생존 수단을 빼앗는 것이다.
이 분석은 코민테른 정책의 핵심 딜레마를 정확하게 포착했습니다 — 그리고 포쿠아가 이 분석을 어디에 제출했는지(GPU 내부? 코민테른 사무국?)는, 그의 직업적 위치의 복합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칼유스테는 이 교환의 비대칭을 교육의 관점에서 경험했습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식민지 출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이 학생들이 모스크바에서 받는 교육이 — 이론적 훈련만이 아니라 — 귀국 후 활동에 필요한 실무적 기술(인쇄, 비밀 통신, 조직 기법)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코민테른의 통제가 약화되면 이 교육의 공급도 줄어들 것이었고, 줄어든 공급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 각국 공산당의 자체적 교육 역량이 형성되기까지 —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율성을 주되 교육을 빼앗는 것은, 자유를 주되 문해력을 빼앗는 것과 같다.
이것은 칼유스테가 교육인민위원부 동료에게 한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육자의 관점에서 본 국제 정치의 역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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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코민테른 21개조 요구, 1920년
| 코민테른은 각국 공산당의 국제적 연대, 경험의 교환, 공동 행동의 조정, 혁명적 노동운동의 상호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은 세계 혁명운동의 단일한 지휘기관이 아니라, 가맹 정당들의 자발적 결합에 기초한 국제적 협의 기구이다. 아래 조건들은 가맹 정당의 공통된 최소 원칙을 정하는 것이며, 그 구체적 적용은 각국의 정치적·법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해당 정당이 결정한다. 제1조 — 선전·선동의 공산주의적 성격 가맹 정당의 일상적 선전·선동은 공산주의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 당 기관지와 이론지는 당의 기본 노선에 반하는 개량주의적 입장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편집 방침과 운영의 구체적 형태는 각국 정당이 자국의 정치적 조건에 따라 정한다. 제2조 — 개량주의 세력과의 관계 가맹 정당은 공공연한 개량주의자와 중앙파 세력을 지도적 위치에 두지 않는다. 다만 반혁명과 반동에 맞선 노동계급의 방어적 공동 행동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개량주의 세력과의 전술적 공동 행동은 허용된다. 지도부의 정치적 독립과 대중 행동의 전술적 협력은 구별된다. 제3조 — 합법·비합법 활동 가맹 정당은 탄압 아래에서도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조직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비합법 기구의 형태와 규모는 각국의 법적·정치적 조건에 따라 해당 정당이 정한다. 합법적 의회 활동과 공개 활동의 활용은 본 조에 반하지 않는다. 제4조 — 군대 내 활동 가맹 정당은 군대 내에서 공산주의적 선전과 조직 활동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 구체적 방법과 강도는 각국의 조건에 따르며, 탄압의 위험이 극심한 경우 해당 정당이 자율적으로 조정한다. 제5조 — 농촌에서의 활동 가맹 정당은 농촌과 농민 대중 속에서 체계적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농민의 이해와 요구를 파악하지 못하는 공산당은 자국의 혁명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농민 운동의 구체적 성격과 강령은 각국의 토지 관계와 계급 구조에 따라 정한다. 제6조 — 사회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가맹 정당은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민족방위 노선이 자국 제국주의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임을 폭로해야 한다. 이 비판은 노동계급 내의 광범위한 민족적 감정을 기계적으로 무시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민족 문제에 대한 혁명적 처리는 국제주의와 대중적 설득을 결합해야 한다. 제7조 — 타 사회주의 세력과의 관계 가맹 정당은 코민테른과 노선이 다른 사회주의·노동운동 세력을 반혁명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반혁명과 반동에 맞선 공동 행동이 필요한 경우, 이들과의 전술적 협력은 허용된다. 협력의 범위와 조건은 코민테른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해당 정당이 판단한다. 제8조 — 식민지·반식민지 문제 가맹 정당은 자국 부르주아지의 식민지 정책에 명백히 반대해야 하며, 식민지 및 반식민지 민족의 해방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 해당 정당은 자국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실질적으로 원조할 의무를 진다.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의 결합 방식은 각 지역의 구체적 조건에 따라 판단한다. 제9조 — 민주집중제의 원칙 가맹 정당은 민주집중제에 따라 활동한다. 결정 이전에는 자유로운 토론과 경향의 형성이 보장되며, 결정 이후에는 통일된 행동이 요구된다. 민주집중제는 내부 토론의 억압이 아니라 공개적 논쟁과 집단적 결정을 결합하는 원칙이다. 제10조 — 코민테른과 가맹 정당의 분파 문제 코민테른의 공식 기구 안에서 상설 분파를 조직하여 인터내셔널의 결의를 병렬적으로 대체하는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가맹 정당 내부의 합법적 경향과 분파 활동은 각 정당의 내부 규율에 따라 처리한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개별 정당 내부의 분파를 직접 해산할 권한을 갖지 않는다. 제11조 — 비혁명적 요소의 처리 가맹 정당은 코민테른의 기본 원칙과 결의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그 이행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자를 지도적 위치에서 배제할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이유로 한 대규모 숙청의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혁명적 노동운동 안에서 성실하게 활동하는 동지를 개량주의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본 조의 남용이다. 제12조 — 당의 명칭 가맹을 원하는 정당은 원칙적으로 ‘공산당(코민테른 지부)’이라는 명칭을 채택하거나 기존 명칭에 이를 병기한다. 다만 특정 국가에서 역사적·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명칭 변경이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경우, 예외는 해당 정당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협의를 통해 인정될 수 있다. 제13조 — 반코민테른 조직 활동에 대한 처리 가맹 정당은 국제주의 원칙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거나 코민테른에 대한 반대를 조직적으로 수행하는 자를 지도부에서 배제해야 한다. 코민테른의 특정 전술 또는 개별 결의에 대한 공개적 이견 표명 자체는 배제 사유가 되지 않는다. 제14조 — 언론 기관의 원칙 가맹 정당의 기관지는 인터내셔널의 결의와 토론을 은폐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편집부는 당 중앙의 정치적 책임 아래 운영된다. 이 원칙은 당내의 이견 표명과 소수 의견의 보도를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제15조 — 전당 대회의 정기적 개최 가맹 정당은 정기적으로 전당 대회를 소집해야 한다. 비상 상황에서 전당 대회의 소집이 불가능한 경우, 확대 중앙위원회 회의가 이를 대신할 수 있다. 당원 대중은 당의 노선과 지도부를 민주적으로 결정할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 제16조 —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의의 지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는 가맹 정당에 대한 구속력 있는 지령이 아니라, 국제적 경험과 공동 토론에 기초한 권고이다. 가맹 정당은 이를 자국의 구체적 조건에 비추어 적용하며, 이견이 있을 경우 공식 채널을 통해 재심과 논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집행위원회는 일개 국가 당의 내부 노선 결정을 대체하지 않는다. 제17조 — 인터내셔널 귀속의 공개 가맹 정당은 자신이 코민테른 가맹 정당임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인터내셔널에 대한 귀속을 은폐하면서 가맹의 이익만을 얻으려는 이중적 태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제18조 —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 가맹 정당은 노동조합 운동 안에서 공산주의 분파를 조직하고 노동자 대중의 신뢰를 얻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국가의 도구도, 당의 단순한 전달 벨트도 아니라 노동자 자신의 자율적 조직이다.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침해하거나 지도부를 당이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방식은 본 조에 반한다. 제19조 —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어 가맹 정당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에 반대하며 그 방어를 지지해야 한다. 이 의무는 소비에트 정부 또는 소비에트 체제의 모든 개별 정책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뜻하지 않는다. 소비에트 정책에 대한 공개적 비판과 이견 표명은 국제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 제20조 — 가맹 조건의 공식 심의 이 조건들을 수락하는 정당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임시 전당 대회 또는 확대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 코민테른 가맹의 조건과 그 함의를 공식적으로 심의해야 한다. 해당 결정은 당의 공식 절차를 통해 비준되어야 한다. 제21조 — 전체적 거부와 당적의 문제 이 조건들의 전체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그 이행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자는 코민테른 가맹 정당의 당원으로 남을 수 없다. 개별 조항에 대한 공개적 이견과 공식적 논쟁은 배제 사유가 아니다. 개별 조항에 대한 논쟁은 코민테른의 공식 기구 안에서 계속될 수 있다. 부칙 — 준회원에 관한 규정 준회원은 제1조, 제11조, 제12조, 제13조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준회원은 제19조와 관련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공격에 반대한다”는 의무만을 부담하며, 소비에트 체제 전반에 대한 지지 의무는 부담하지 않는다. 준회원의 권리와 의무의 세부 사항은 별도의 협정으로 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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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a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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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불편한 거울
독일 장(6장)이 "룩셈부르크의 생존"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달리, 프랑스의 이야기는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재계산으로 이루어집니다.
러시아에서 온 소식이 프랑스 좌파의 내부 논쟁을 변형시키고, 변형된 논쟁이 프랑스 정치 지형을 조금씩 다르게 만들며, 달라진 지형이 대공황과 마주치는 방식을 바꿉니다. 그러나 그 어느 지점에서도 역사의 방향이 깔끔하게 뒤집히지는 않습니다.
프랑스는 여기서 가장 많이 바뀌면서 동시에 가장 적게 바뀐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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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전략적 곤경: 베르사유 체제의 수호자
1917년 7월,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발생했을 때, 프랑스 정부가 먼저 한 계산은 이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부전선이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그것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 프랑스의 모든 것을 규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프랑스에게 러시아 혁명의 첫 번째 의미는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것이었습니다. 동부전선의 붕괴는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1918년 춘계 공세에서 그 결과가 현실화되었습니다. 프랑스는 4년간의 참호전에서 약 140만 명의 전사자를 냈고, 전쟁 세대의 남성 인구 중 약 27%가 사망했습니다. 이 경험은 프랑스 정치에 한 세대 이상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프랑스에게 지정학적 악몽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위협의 성격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단순한 볼셰비키 독재가 아니라, 다당 연립을 유지하면서 좌경화된 독일과 실용적 동맹을 발전시키는 사회주의 국가가 동방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6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독일의 좌경화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협력 체제 심화가 프랑스에게 안보적 악몽이었으며,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여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확대했습니다.
이것이 프랑스 지배층에게 더 불길한 이유는 역설적이었습니다 — 완전한 독재라면 "야만적 볼셰비즘"이라고 기각할 수 있었지만, 의회와 선거의 외양을 부분적으로 유지하는 사회주의가 독일과 협력하여 성공한다면, 이것은 베르사유 체제 전체를 위협하는 이념적 대안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5장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회주의는 반드시 독재다'라는 기존 명제가 흔들리면,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의 논리적 근거도 재구성되어야 했습니다 — 그리고 논리적 근거가 약해지면, 물리적 탄압이 강화되는 것이 권력의 일반적 반응입니다.
프랑스에서 이 역학이 가장 명확하게 작동했습니다.
프랑스의 불안은 따라서 이중적이었습니다.
안보적 차원에서, 독일-소련의 군사·경제적 협력이 베르사유로 묶어둔 독일을 실질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념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적 외양을 갖춘 사회주의"의 성공이 프랑스 내부의 좌파에게 새로운 참조점을 제공했습니다.
두 불안이 결합되면서, 프랑스의 대소 정책은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이율배반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공식 외교는 조심스럽게 유연해지되, 정보기관과 경찰을 통한 국내 좌익 감시는 더 집요해졌습니다. 폴란드에 대한 군사 지원은 더 막대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모스크바와의 채널은 완전히 닫지 않았습니다.
이 이율배반은 프랑스만의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 영국도 유사한 딜레마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차르 시대 러시아 국채의 최대 보유국이라는 경제적 요인이 추가되어 상황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5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약 13억 루블에 달하는 프랑스인 개인 투자자의 러시아 채권이 혁명에 의해 무효화되었으며, 이 "러시아 채권 문제"는 수십 년간 프랑스 정치의 쟁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정부와 외교적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시도는 항상 "우리의 채권을 되돌려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했습니다.
이 이율배반이 1920년대 프랑스 대외 정책의 핵심 구조였습니다.
마르텔 포쿠아에게 프랑스의 이 이율배반은 — 프랑스 출신으로서 —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모스크바와의 채널을 닫지 않으면서도 국내 좌익 감시를 강화하는 것은 — "이중 게임"의 전형이었으며, 이중 게임은 포쿠아가 가장 잘 이해하는 종류의 정치였습니다. GPU의 해외 정보 부문에서 유럽 작전의 영역을 넓혀 가고 있던 그에게, 프랑스는 조국이면서 동시에 작전 대상이었습니다 — 이 이중성이 그의 직업적 정체성의 핵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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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 대회: 분열은 일어나지만, 다르게 일어난다
1920년 12월, 투르(Tours)에서 프랑스 사회당(SFIO, 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의 제18차 전국대회가 열렸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대회의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대의원의 약 3분의 2 — 3,208표 대 1,022표 — 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하여 프랑스 공산당(PCF, Parti communiste français)을 창당했고, 나머지 3분의 1이 SFIO를 유지했습니다. 레옹 블룸(Léon Blum)의 유명한 연설 — "우리는 낡은 집을 지킨다(Nous garderons la vieille maison)" — 이 이 순간의 상징이었습니다.
여기서도 투르 대회는 여전히 분열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분열의 형태가 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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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직접적 원인을 이해하려면, 코민테른의 21개조 가입 조건을 봐야 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21개조의 핵심 조항들은 가혹했습니다. 당명에 "공산당"을 포함할 것, 의회 활동을 당 중앙의 통제에 종속시킬 것, "개량주의자"를 축출할 것, 비밀 조직을 설치할 것, 코민테른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할 것. 이 조건들이 SFIO 내에서 분열선을 그었습니다 — 수용파와 거부파.
여기서 코민테른의 교조적 통제가 약화되어 있었으므로, 21개조의 내용도 달랐습니다. 핵심 요구 — 혁명적 강령의 채택, 개량주의자의 배제 — 는 남아 있었지만, "모스크바의 직접 지시에 복종"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조항들이 완화되었으며, 다른 정당들과의 협력이나 중도주의자들에 대한 태도 등도 내용이 달랐습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투르에서 프랑스 대의원들이 바라보는 러시아의 모습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체레텔리와 스코벨레프가 수개월간 연립정부에 참여했으며, 마르토프가 인민대표대회에서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있었으며, 좌파 사회혁명당이 인민위원회의의 파트너였습니다.
이것이 "모스크바에 합류하는 것"의 의미를 바꿨습니다 — 일당 독재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게나마 다원적인 혁명의 진영에 합류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었습니다. 투르의 대의원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정부를 운영하는 나라"에 합류하는 것을, 실제 역사에서처럼 "볼셰비키 독재에 복종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투르의 표결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실제 역사의 3:1(공산파:사회주의파)이 아니라, 대략 2:2에 가까운 교착이 발생했습니다. 가입파가 과반을 차지했지만 실제 역사만큼 압도적이지 않았고, 이탈파도 실제 역사의 레옹 블룸이 이끄는 소수파보다 더 강한 조직 기반을 유지했습니다. 이것은 공산당이 덜 매력적이어서가 아니라, 기존의 조직 내에서도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만드는 것은, 두 정당 간의 관계가 처음부터 덜 파열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독일의 SPD-KPD 관계가 1919년 1월의 "혈채"에 의해 구조화되었다면, 프랑스의 SFIO-PCF 관계에는 그 정도의 원초적 상처가 없었습니다. 투르의 분열은 고통스러웠지만, 피가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유권자 기반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되, 서로를 "파시즘의 동조자"나 "모스크바의 앞잡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 적어도 처음에는.
이것은 6장에서 서술한 독일의 경험과 구조적으로 유사했습니다. 독일에서 "혈채"의 부재가 SPD-KPD 관계를 적대가 아닌 경쟁으로 만들었듯이, 프랑스에서 투르의 덜 파열적 분열이 SFIO-PCF 관계를 처음부터 다른 궤도에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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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블룸은 SFIO 잔류파의 지도자로서, 더 강한 위치에서 출발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블룸은 패배한 소수파의 지도자로서, "우리는 낡은 집을 지킨다"는 방어적 프레이밍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비슷한 규모의 두 정당 중 하나의 지도자로서,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길"이라는 더 적극적인 강령을 내걸 수 있었습니다. 블룸의 지적 권위 — 그는 조레스(Jean Jaurès)의 정치적 후계자이자, 프랑스 사회주의의 가장 정교한 이론가였습니다 — 가 방어가 아니라 공격에 사용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폴 루이(Paul Louis), 알베르 트렝(Albert Treint)이 이끄는 공산파는 모스크바에 가입하되, 초기부터 프랑스적 독자성을 더 많이 주장했습니다.
11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코민테른의 통제가 약화된 환경에서 유럽의 대규모 공산당은 자율성의 이득이 지원 감소의 비용을 초과했습니다. PCF는 이 이득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 중 하나였으며, 모스크바와의 긴장이 실제 역사보다 이르게, 그러나 덜 파국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PCF가 모스크바의 지시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복종한 것 — "사회파시즘" 노선의 충실한 이행,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한 즉각적 지지 — 과 대비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레츠노프에게 투르의 이 결과는 빈 인터내셔널에서의 활동과 직결되는 정보였습니다. SFIO가 실제 역사보다 강한 조직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빈 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 — SFIO의 좌파 — 가 더 유의미한 세력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레츠노프가 유럽 사회주의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러시아 밖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었다면, 프랑스의 SFIO는 그 탐색에서 무시할 수 없는 접점이었습니다.
첫댓글 이거 보니까 제가 한일들이 여기저기 영향을 마구 끼치고 있었군요...걍 트로츠키가 지도자가 될까봐 미리 연대 구축한것 뿐이었는데...
독일 혁명 파트에 들어섰으니 이제 곧 국민혁명으로 넘어가겠군요.
그렇습니다. 그쪽도 전개가 꽤나 달라질 듯 합니다. 특히 장제스가 초기에는 국민당 좌파와 한패 취급을 받았던 것을 감안해서요..!
@렌지파일 그럼 제 프로듀서 일도 다르게 나오나요?
@카라멜 마끼아또 그렇겠죠?
지금 몇몇 인물도 좀 다르게 나오고 있으니까요
책을 읽기 시작한 나이부터 궁금했다니, 1917년에 갈리아 전기를 다 읽은건가?엌ㅋㅋㅋ(..) 제가 서툴게 쓴 선동문보다 훨씬 깔끔하네요 ㄷ
레닌 동지의 조율이 장난 아니네요. 트로츠키가 잘나갈만한 상황에서 일리야와 솔제니친이 위험할뻔 한걸 살려서 견제시키고, 반트로츠키로 밸런스가 무너지려 하니 흐트려버리고 여윽시 주석 동지 ㄷㄷ
중간 본문에서 레닌, 스베르들로프, 솔제니친과 솔제니친..이란 부분에서 솔제니친이 두번 들어간 것 같습니다 ㄷ
괜히 레닌이 아니죠...
@931117 이게 지도자다....
@통장 실제로 레닌이 자신의 사후 원했던 구도는 스탈린을 실각시키고 트로츠키를 중심으로한 집단 지도체제였잖습니까.
다들 트로츠키를 존나게 싫어한데다 레닌이 진짜 허둥지둥 만든 구상이라 무산됐다고 하지만.
혁명이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 굳이 제거할 상황이 아니다 이거겠죠.
@통장 아이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저기서 언급되는 책은 한 페이지마다 세계 불가사의(피라미드같이)랑 황제 같은거 사진하고 그림 나오는 나오는 일종의 그림책입니다.
@렌지파일 ㅇㅎ 저도 어릴때 비슷한 책을 좋아했었죠 ㅋㅋ 표트르, 생각보다 이지적이었군(?)
브레히트가 여기서 나오네요 ㅋㅋㅋ
기립하시오! 당신도..!
사실 그 시는 빨간 사람(...) 아니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지라, 작중에 인용된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같은 시는 꽤나 그럴듯합니다.
수정완
11장은 분량조절의 가장 큰 실패로 11장과 11a b c d e(.......)까지 있습니다.
@렌지파일 와우(...) 내일 출근 전에 미리 읽어야겠네요 ㄷㄷ 지금보다 늘리면 이중 부하 (독자의 문제, 플렛폼의 문제) 가 있으니...
이탈리아는 어떤 꼴일지 좀 궁금하네요 오..
사실... 국제사회 파트를 그래서 f랑 g도 이론상 넣긴 해야합니다 (?)
는 어차피 다들 아시겠지만, 독일 묘사가 지난번 독일 RPG를 따라갔죠.(거기 소련도 7월 혁명 체제고..) 즉? 이탈리아도 그쪽을 따라 갑니다.
+
11a = 프랑스
11b = 미국
11c = 중국
11d = 조선과 극동 시베리아
11e = 독일(한번 더 다룹니다)
현재 이 상태이고, 일본은 중국/조선파트에서 같이 설명됩니다 영국하고 지중해(이탈리아, 튀르키예, 그리스 등..)가 아마 f랑 g로 나올 겁니다. 여기서도 오스만은 박살이 나서..
@렌지파일 생디 이탈리아 ㄷㄷ..
오.... 이러면 권가연도 소련에 발작하듯이 혐오하면서 대들 이유는 없죠
[그러나 교조적 통제가 제공한 것도 있었습니다 — 재정 지원, 간부 훈련, 지하 활동의 기술적 노하우,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혁명의 참모부"라는 상징적 통일성.
코민테른이 느슨한 네트워크로 변하면, 약소 공산당 — 동남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 이 모스크바의 재정·조직적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여 독자적 생존이 어려워질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통제가 약해진다는 것은 모스크바의 지원도 약해진다는 것이며, 자율성과 자원 사이의 교환이 모든 각국 공산당에 유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대규모 공산당(KPD, PCF, PCI)은 자율성의 이득이 지원 감소의 비용을 초과했지만, 식민지의 소규모 공산당에게는 반대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당이 조선공산당이라는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실제 현실은 꽤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읍읍..
@렌지파일 헉! 조공이 원역사보다 좀 더 소련에 종속적이게 될 수 있다는 거군요 아님 원역사 이상의 분파주의로 사라지든가(.....)
@dnjdss “네 이놈! 제15차 조공의 원수! 죽어라!”
“크윽! 제13차 조공을 살…”
(?)
@E.E.샤츠슈나이더 그걸 관망하는 어떤 권모씨는 돌연 카우츠키의 서적이 아닌 판네쿡의 저서를 읽게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