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관동별곡 진달래 처럼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驛)을 내세워 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의 애환을 달랬다.
기다렸던 혹은 오지 말아야 할 막차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역의 실루엣은 작가들의 단골 소재다.
80년대 나온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 와 임철우의 중편소설 사평역 은 해방과 6.25,
조국 근대화에 멍든 민중들의 아픔을 역의 대합실을 통해 서정 적으로 그려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 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
곽재구의 이 시는 당시 대전발 0시50분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분위기를 묘사한 듯하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사람들이었다.
방학철에는 캠핑이나 귀향하는 학생들로 새벽열차가 북적대기도 했다.
0시50분열차는 지금 없다.
1년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03시05분발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레코드사 사장에까지 올랐던 최치수씨와 김부해씨는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가수 안정애씨만이 과거 영광을 뒤로하고 생업에 전념하고 있다.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선 지금도 쉰 목소리의 대전블루스가 흘러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