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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31~36절/정말 자유 합니까?
미국에서 흑인 노예 해방 운동을 일으킨 배후에는 엉클 톰슨 캐빈, 우리말로 『톰 아저씨의 오막살이』라는 말로 번역된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스토우 부인이 썼는데 이 부인은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며서 귀한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이 부인을 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얼마 자라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부인은 마음이 얼마나 슬펐는지 언제나 딸 생각에 살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게 아픈 것을 생각하다가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슬픔을 당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노예들의 형편을 보았습니다. 흑인의 어머니는 딸이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팔려감으로써 가족끼리 사방으로 흩어져 생이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스토우 부인은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이렇게 슬픈데, 살아서 자식들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흑인 어머니들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는 것을 소설에 그대로 묘사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어 많은 사람이 읽게 될 때에 그야말로 미국 사람의 양심을 찔러 깨웠습니다. 미국의 도처에서 흑인 노예는 반드시 해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약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져 인류 해방과 자유의 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이 쓰인 이후 19세기 초부터 지구촌에 강력한 민족자결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각처에서 강대국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약소민족들이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자유를 향한 대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3.1운동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남의 나라의 속국이 되고, 사람들의 종이 되고, 물질의 종이 되고, 욕망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되고, 사단의 종 등이 되어 산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오늘 온갖 것에 메어 종노릇 하는 데서 벗어나 참 자유 함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잘 알려진 말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유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속박을 당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시간이나 물질이나 사람들의 속박을 당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에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많은 오해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속박을 당하고 계시며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불편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솔직한 대답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사람이 처음에 범죄할 때부터 거기에는 자유의 정의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4~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단의 유혹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왜곡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결국 인간을 죄의 속박 아래로 데리고 갔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왜곡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물고기가 물에서 벗어나면 죽는데 죽기를 원하는 갈망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말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종교에 구속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팖으로써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악마는 ‘네 영혼을 팔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주고 너의 종이 되겠다고 하지만, 결국 종이 되는 것은 파우스트입니다.’ 마귀가 교활해서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줌으로써 그를 완전히 지배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마귀의 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자유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은 절대 자유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그렇다면 이런 생각들이 왜곡된 자유에 대한 것이며, 오해들이라는 전제에서 다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자유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위의 왜곡과 오해 속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의 진의를 깨달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죄의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십니까? 아마, 두 가지 정도로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첫째는 자아의 문제입니다. 이미 인간이 타락하면서 하나님께서 차지하셔야 하는 자리에 우리는 자아라는 우상을 놓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아를 기쁘게 하고, 자아를 숭배하며, 자아를 높이고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먼저 묻는 것은 여러분은 바로 이 자아를 높이고 자아를 만족시키고 자아를 숭배하는 일에서 자유로우신가 묻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세상의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정말 거대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고 괜찮게 만들어줄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이 세상 속에는 존재합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이러한 문제들 앞에서 자유로우십니까? 조금의 흔들림도 없으십니까?오늘 주님의 말씀은 약간 당황스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30절에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말씀 했는데, 주님께서는 지금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31~32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지만, 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이 말은 신자가 올라가야할 다음 단계는 제자라는 것을 가르쳐줍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참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신 것은 저들이 믿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도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또 그럴 의지가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된 제자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신앙고백은 있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믿음이 말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있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 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31절에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주님의 말씀은 단도직입적으로 “너희는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말입니다. 참되게 믿는 모든 성도들은 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거 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 말씀에 복종하여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나 도전적인 말씀인지 모릅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내 말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없고, 따르지 않을 것이라면 너희는 내 제자도, 신자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이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는 것은 놀랍습니다(59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좋을 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하게 됨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심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상황을 제자들이 보았을 때에는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30).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상황 가운데 이미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가 버렸고 계속해서 이런 길로 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 자유에 대해서 주시는 교훈은 자유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아래로 들어와 거기에 복종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사실 자유에 대한 왜곡된 갈망을 가지고 죄를 지은 후에, 그가 얻고자 했던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낙원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찾는 것은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오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참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는 항복 선언 혹은 복종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으신다면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도 믿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고백만으로는 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셔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1절은 조건적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라는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상, 단도직입적인 선언입니다.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반응한 것을 보면 그들이 이것만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3절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놀라운 자기 부인입니다. 사람이 자유라는 문제가 나오면 자존심이 발동하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주전 586년 이래로 잠깐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자유 국가와 민족이 아니라 제국들의 통치 아래 복종해야 하는 나라의 국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정치적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34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니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영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을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칩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들 자신이 죄의 주인이라고, 마귀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마귀가 자기의 종들을 다스리는 방식은 종종 사람들이 마귀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살게 하는 방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라는 것은 ‘원하는 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타락한 육신의 통제(압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자유’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얻게 될 때 비로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주님의 참 제자가 되고, 그들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살 때, 그 말씀에 순종할 때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진리에 순종해야만 우리는 그 진리를 깨닫습니다. 진리는 머릿속의 진리가 아니라, 나의 전존재를 자유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전에 나를 속박하고 있는 것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었는데, 나를 속박해왔던 나의 옛 주인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벗어나게 되어 새로운 주인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자유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으면 말씀이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곧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2.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이제 여러분에게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이 진리를 경험하셨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런 자유함을 느끼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이런 자유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며 살아가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다면,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으셨습니까?예수님을 믿고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대한 변화는 중심의 변화입니다. 중심에 자아가 있었는데, 자아는 주변으로 내려오고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아가 가장 중요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아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자아가 인정을 받는 것에 대한 이전의 관심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속박하고 있던 주인으로부터 우리가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 주인을 섬기게 될 때에만, 참 주인을 섬기게 될 때 거짓 주인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들어오시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자아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높이고 기쁘게 하는,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앙고백은 있을지 몰라도 아직도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지 않으며 주님의 참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불신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아를 섬기지 않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람을 성경은 신자,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아(자기)를 위해서 살거나 죽을 수 없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인생이냐, 영생이냐 하는 문제도 생각해보십시오.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영원에 관한 지평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죄의 종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인생이 다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자, 영생이 보입니다.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거두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결국 인생이 잘 살았는지의 여부는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가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압니다. 인생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원에 모든 것을 겁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보여주는 삶의 태도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목숨을 걸고 살아보십시오. 때로는 비굴함을 견뎌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도 결론은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고후5;9)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냐, 영혼이냐 하는 구분은 플라톤적 사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에 좋은 것이 언제나 영혼에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참 제자는 압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육신에 좋으면 언제나 좋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영혼에 유익한 것인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영혼에 유익하지 않다면 육신에 유익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환영하지 않습니다.결국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가치에 헌신하고 사는가, 하늘의 가치에 헌신하여 사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세상에 있는 가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필요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이며 가령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감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여기에는 허영의 문제가 포함됩니다. 집, 차, 옷, 소유 기타 이런 눈에 치중하고 눈의 자극을 만족시키는 삶입니다. 자기의 외모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인상에 치중하는 삶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기 영광의 추구입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하고 악한 죄 즉 교만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영적이어서 자기 자랑거리들, 출신, 학력, 직업이나 교양, 가문, 근면이나 성공, 명성, 사회적 지위, 영향력, 유명한 사람……이런 것들에 의해서 생각이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되었다면, 그가 참으로 진리를 알게 되었다면 그는 이런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를 얻은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유의 태도이며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빌3;7~9)
자아와 세상의 것들로부터의 자유함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냥 하는 소리라고 여기시지는 않습니까? 잘 보신 겁니다. 이런 일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은 이렇게 개조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유함이 인간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실로 주님께서 하신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은혜의 기적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6절에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매우 담대하게 그리고 확신 있게,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주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우리를 죄의 종으로부터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발밑에 내려놓게 되는 일이,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의 종이 되어 살다가 그것의 주인이 되어 사는 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돈의 종이 하나님의 종이 되는 순간에 그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돈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 이전에는 나를 주장하고 나를 지배하던 모든 가치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된 사람,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 그가 섬기는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이 일이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일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났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여러분은 죄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종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자유롭게 하시는 은혜를 입으셨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는 참된 주님의 제자입니까? 여러분은 그 진리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자아에 묶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더욱 아는 일에 더 부심하며 사십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한 까닭에 이 세상이 작게 보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염려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아직도 신앙은 고백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던 유대인들과 같은 자리에 계신 것은 아닙니까? 한 가지를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죄의 종은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길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시는 아들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오는 자를 거절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