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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쓴 단편동화이고,(아마도 2016년?)
여러 작가들의 책을 모은 책 '백년 후에도 읽고 싶은 동화(예림당)'에도 실린 것입니다.
3월부터 하게 될 강의에서 그곳 공모반 수강생들에게도 소개를 하였다고 하네요. 하여 이곳에도 소개하면 좋을 듯하여 올려봅니다. 부끄럽지만 이런 동화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네요.
아, 그러고보니 이 동화는 베트남 달랏에 머물고 있을 때 쓴 거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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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샤워 안선모 |
구불구불 90도로 휘어진 산길을 따라 사륜구동 지프를 타고 가는 동안 엄마는 끊임없이 탄성을 토해냈다. 컨디션이 근래 들어 최고였다.
"어머, 저 소나무 좀 봐! 우리나라 소나무랑 똑같네."
마치 소나무를 처음 본 사람처럼 호들갑을 떠는 엄마 모습에 박하는 약간 짜증이 났다. 왜 하필이면 산에 올라가자고 하는 거지? 그것도 2천 미터가 넘는 산엘 말이다. 생일날이면 쓰언흐엉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거나 아니면 달랏 시장에 가서 쇼핑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박하는 자꾸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불만을 꾹꾹 눌렀다. 빽빽한 소나무 숲에 감탄하던 엄마는 이제 채소밭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어머, 너무 예쁘다! 채소들이 어쩜 저렇게 줄을 딱딱 맞춰 서 있을까?"
사람이 그렇게 심었으니까 그렇지. 채소들이 설마 줄 맞춰 서 있을까? 다른 때와는 달리 들떠 있는 엄마를 보면서 박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따뜻한 기온 그리고 사철 피어나는 꽃들. 엄마 같은 환자가 요양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그래, 달랏! 날씨가 좋으니까 여기서 잠깐 살아 줄게. 엄마 몸이 나아지면 난 미련 없이 너를 떠날 거야.
산꼭대기에 오르자 아빠가 엄마를 부축해서 전망대로 갔다. 눈이 모자랄 정도로 아득하게 펼쳐진 풍경을 감상할 차례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올랐다. 늘쩡거리며 다가온 안개가 발끝을 따라 기어오르더니 엄마의 온몸을 휘감았다. 안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엄마를 삼켜 버렸다.
"엄마! 가지 마!"
박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땀으로 잔뜩 젖은 베개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 우기 끝자락에 놓인 10월 햇빛이 보란 듯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박하는 방 안으로 들어온 햇빝을 내쫓으려 신경질적으로 거튼을 잡아당겼다. 책상 위의 달력은 우기가 시작되는 5월에 머물러 있었다. 암으로 투병하던 엄마가 하늘 나라로 간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그 짧은 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빠는 세 식구가 일 년 이상 함께 살았던 비싼 월세 아파트를 내놓았다. 그리고 박하를 데리고 미스 트응과 딸 씨티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미스 트응은 박하네를 맞이하기 위해 0층과 1층뿐이었던 작은 집에 2층을 올렸다.
"박하, 이제부터 여기를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한국말을 제법 하는 미스 트응의 말에 박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세 사는 사람하고 날마다 같이 밥 먹는 주인도 있나? 결혼했던 사람이 여전히 미스라고 하는 것도 못 마땅하고, 그 많은 이름 중에 미스 트응이 뭐야? 차라리 미스 트림이 낫겠다. 박하는 '나, 삐뚤어질 거야!'라고 선포한 사람처럼 온몸에 가시를 세웠다.
끼니마다 정성껏 한국 음식을 내놓는 미스 트응에게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아빠에게도, 박하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씨티같이 촌스런 아이와 한집에 살아야 하는 것도 영 못마땅했다. 박하는 알고 있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려면 베트남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좁은 집에서 복닥거리며 살아야 하는 건지.
박하는 2층 자기 방에 틀어박혀 스스로 섬이 되기로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빠를 힘들게 하고 싶었다.
'이제부터 마음대로 살 거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 베트남에 살게 되었어. 그건 모두 아빠 때문이야!'
이젠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던 때가 가물가물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때는 공부도 제법 하고, 자신감 넘쳤는데.....
지금은 완전 폐인이 되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사업 때문에 베트남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아빠 때문일까. 몸이 아파서 달랏으로 요양을 왔지만 결국 하늘 나라로 떠난 엄마 때문일까?
박하는 아슴아슴한 상태에서 노트북을 켰다. 오늘은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이메일이 와 있을 것이다.
'신짜오! 박하사탕!'이라는 제목이 눈에 팍 꽂혔다. 역시 꿋꿋하게 이메일을 보내 주는 건 하늘이뿐이다.
여기 한국은 완전 단풍 천국이야. 베트남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지.
언젠가 홈그라운드 경기와 어웨이 경기(원정 시합)에 대해서 네가 말해 준 것이 기억 나.
베트남 엄마 때문에 주눅 들었던 나에게 그랬잖아.
나의 홈그라운는 한국과 베트남 두 개라고. 그러니 얼마나 축하할 일이냐고!
그러니까 어웨이 경기에 출전한 선수처럼 긴장하지 말라고, 어색하게 굴지 말라고!
너도 이제 홈그라운드가 두 개 된 거지? 그건 분명 축하할 일 맞지?
얼른 네 원래 모습을 찾아. 너, 박하사탕은 당당하고 쿨하고 싸한 향기가 느껴지는 아이였다고!
박하는 '당당하고 쿨하고 싸한 향기'라는 글귀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웃어보는 거였다. 박하는 노트북을 닫고, 2층 입구에 있는 아빠의 서재로 들어갔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다. 오래전에 박하 농장을 시작한 아빠 서재에는 박하에 대한 자료로 가득했다. 한국에 살 때는 박하라고 하면 박하사탕밖에 몰랐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박하는 청량제, 사탕, 과자뿐 아니라 담배와 치약, 화장품에도 들어갔다. 아빠의 목적은 박하의 잎과 줄기를 증류하여 박하유를 빼내는 것이었다. 그게 상당히 돈이 된다면서 아빠는 엄마와 딸보다도 식물 박하 얘기를 더 많이 했었다. 벽에 붙어 있는 박하 농장 사진 속에는 아빠의 노력과 땀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얼마나 박하에 빠져 있으면 '내 사랑 박하'일까? 박하는 책상 위에 놓인 '내 사랑 박하'라고 쓰여 있는 공책 표지를 흘낏 바라보다, 자석에 끌리듯 다가갔다.
겉장을 넘긴 박하는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기에는 아빠의 하나밖에 없는 딸의 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태어났을 때 사진, 유치원 입학과 초등학교 입학 사진 그리고 엄마와 함께 셋이서 찍은 사진까지. '목숨과도 같은 내 딸 박하'라는 글씨를 보자 박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박하는 천천히 1층으로 발을 내디뎠다. 2층 계단 밑에 있는 씨티의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씨티는 박하보다 한 살 많지만 체구가 작았다. 겨우 한 사람 정도 누울 수 있는 방 벽에는 한국 남자 아이돌 사진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0층으로 내려가려는데 침대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촌스런 표지의 한국어 기초 책. 얼마나 많이 본 걸까? 책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덜거렸다. 나랑 이야기하려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거였어? 까무잡잡한 얼굴에 꾀죄죄한 옷을 입었어도 항상 웃는 씨티 얼굴이 떠올랐다.
박하는 평상시에는 화장실과 세탁실, 부엌이 있는 0층에는 잘 내려가지 않았다. 밥은 항상 씨티가 방으로 올려다 주었다.
"박하, 식탁 위에 밥 차려 놓았으니 한 숟갈이라도 먹어 봐."
꾸불꾸불 유치원 아이 글씨 같은 미스 트응의 편지가 식탁 위에 놓여 있다. 맞춤법은 분명 아빠 도움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고소한 참깨죽이다. 박하가 입맛 없다며 밥을 안 먹을 때마다 엄마가 끓여 주던 죽이었다. 박하는 숟갈을 들어 참깨죽 맛을 보았다. 엄마가 끓여 주던 맛과 신기하게 똑같았다. 한참 먹다 보니 바닥이 거의 드러났다.
부릉부릉!
오토바이 소리에 박하는 1층으로 올라가 밖을 내다보았다. 미스 트응의 하얀 오토바이가 대문 밖에 멈춰 섰다. 박하는 미스 트응을 맞닥뜨리는 것이 왠지 어색해 얼른 2층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뜻밖에 오토바이에서 내린 사람은 씨티였다. 씨티가 박하 입에 붙은 푹 퍼진 밥알을 떼어 내며 활짝 웃었다.
"박하, 죽 먹었구나!"
흥! 한국어가 제법이네. 박하가 쌩, 찬바람을 일으키며 올라가려는데 씨티가 팔을 꽉 잡았다.
"미스터 리 아저씨가 무척 힘들어 해, 농장에 같이 가 보자."
그러면서 씨티는 컵라면과 침낭 등 바쁘게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박하가 지금 죽어 가고 있어. 우리가 도와줘야 해. 빨리, 서둘러!"
씨티의 단호한 말에 박하는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햇빛이 강해 눈부셨지만,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얼마나 걸려?"
박하의 물음에 씨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걸려가 뭐야?"
"몇 시에 도착하냐고!"
"금방!"
씨티는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에 합류해서 속도를 올렸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땐 이 냄새가 얼마나 지겹고 짜증 났는지 모른다. 근데 지금은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박하 농장은 생각보다 엄청 넓었다. 물 빠짐이 좋지 않아서 비를 맞고 쓰러진 박하가 꽤 많았다. 아빠의 지휘에 따라 일꾼들이 쓰러진 박하를 세우고 있었다. 미스 트응도 함께였다.
"어, 박하 왔네."
미스 트응이 반갑게 손을 흔들자, 아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키워 낸 박하가 저 모양이니. 아빠 눈에 눈물은 보이지 않지만 가슴 속에는 꽉 차 있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아렸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씨티는 어느새 일꾼들 속으로 들어갔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박하도 파도에 밀리듯 밭으로 들어갔다. 쓰러진 박하를 세우고 흙으로 돋워 꼿꼿하게 세워 주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잘 세웠다고 생각하며 돌아서면, 조롱이라도 하듯 피식, 하고 쓰러졌다.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보지 않았다는 미스 트응도, 씨티도 그리고 박하도 서툴기는 매한가지였다.
"쉬는 시간입니다. 오셔서 간식 드세요."
어느 틈에 오두막 앞에 새참을 준비한 미스 트응이 일꾼들을 불렀다. 오기 전에 죽 한 그릇을 다 비워서 그런지 박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아빠의 꿈과 땀이 가득한 박하 밭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아빠가 베트남에서 박하 농장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달랏대학교 교수로 있는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빠는 혼자 베트남으로 와서 땅을 빌리고 박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라곤 지어 본 적이 없는 아빠가 낯선 땅에서 고생하는 동안 박하는 한국에서 사고 싶은 것 다 사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살았다. 엄마가 마지막 요양지로 사계절 날씨 좋은 달랏을 선택하기 전까지 말이다.
갑자기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어떡해, 어떡해."
손에 우산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당황스러울 줄 몰랐다. 한국 같으면 아무 데나 잽싸게 뛰어들었겠지만, 너른 박하 밭은 어디에도 비를 피할 장소가 없었다. 그때 눈에 익은 바나나 나무가 보였다. 비가 올 때면 한국에서는 토란 잎을 우산 대용으로 썼다는 걸 책에서 읽은 것이 떠올랐다. 바나나 잎은 토란 잎보다 더 길고 커서 우산으로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나는 머리가 잘 돌아. 박하는 바나나 나무로 달려가 가장 큰 잎을 덥석 잡았다.
"이게 왜 안 잘리지?"
바나나 잎은 생각보다 훨씬 질겼다. 열매는 한없이 부드러운데 잎은 쇠심줄 같았다. 바나나 잎을 쥐고 이리저리 비틀다 손까지 베었다. 겨우 한 잎 잘라 머리에 쓰려는데 후드득 쏟아지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세상에 이렇게 시치미를 떼다니! 배신 당한 느낌에 박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이미 비는 맞을 만큼 맞았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씨티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우산 같은 거 필요 없어. 이건 망고샤워니까."
"망고샤워?"
"잠깐 내리는 비."
한국말이 짧은 씨티는 설명도 짧았다. 박하는 씨티와 함께 축축한 머리카락을 털며 간식이 준비되어 있는 허름한 오두막으로 갔다. 미스 트응이 준비한 것은 얼음 넣은 바나나 주스와 바게트 빵이었다.
"어서 와. 어디 갔는지 씨티한테 찾아보라고 했는데, 금세 데려왔네."
언제 들어도 다정한 목소리다. 미스 트응은 박하가 꼭 쥐고 있는 바나나 잎을 보더니 싱긋 미소 지었다.
"인생은 망고샤워와 같아. 언제 비가 쏟아질지 예고하지 않거든.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지. 단지 놀라고 당황하고 옷이 좀 젖을 뿐이야. 근데 옷은 또 금방 마르기 마련이잖아?"
이렇게 길게 말하는 미스 트응은 처음이라 박하가 눈을 동그렇게 뜨고 쳐다봤다.
"어, 미스 트응! 한국말 많이 늘었네요."
아빠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씨티가 말했다.
"박하, 하늘을 봐. 망고샤워가 지나고 나면 하늘이 더욱 파래져."
씨티의 또박또박 한국말을 들으면서 박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열두 살 생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박하는 흘깃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빠도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댓글 베트남에 얼마나 있었나요? 날씨와 환경을 잘 엮어서 썼군요. 잘 읽었습니다. 오타 두개만 고치셔요
오타가 두 개가 아니고 세 개나 있었어요.ㅠㅠ
예전에 동생이 호찌민 한국학교 교감으로 있어서 짬 나면 갔었지요.
@바람숲 좋은 기회였군요. 작가는 역시 새로운 환경을 종종 접해봐야 합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