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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산당의 독특한 성격
실제 역사의 PCF는 1920년대에 모스크바의 가장 충실한 수행원 중 하나로 변모했습니다.
이 변모의 과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PCF를 창당한 지도부 — 대부분 SFIO 출신의 프랑스 사회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인물들 — 는 1920년대 중반까지 코민테른의 "볼셰비화(bolchevisation)" 압력 하에서 체계적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뤼도비크-오스카르 프로사르(Ludovic-Oscar Frossard)는 1923년 탈당했고, 알베르 트렝은 1928년 축출되었으며, 마르셀 카샹(Marcel Cachin)은 순응하여 생존했지만 지도력을 잃었습니다.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가 1930년대에 당수로 부상한 것은, 바로 이 "볼셰비화"에 가장 충실한 인물이 선택되는 모스크바의 논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요인이 이 과정을 억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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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코민테른의 교조적 통제 자체가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11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룩셈부르크가 살아서 모스크바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있었고, 소비에트 체제 자체가 다원적이었으므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유일한 올바른 형태"를 강요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웠습니다. 21개조의 가장 강경한 조항들이 완화된 상태에서 출발한 PCF는 지도부 강제 교체의 빈도가 낮았습니다.
이것은 PCF 내부의 정치적 생태계를 실제 역사와 질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볼셰비즘화"는 당 내부의 이론적 다양성을 제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 프랑스 사회주의의 고유한 전통(조레스적 인도주의, 블랑키적 혁명주의, 생디칼리스트적 직접 행동론)이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단일한 교리로 대체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대체가 불완전하게 이루어졌으므로, 프랑스 사회주의의 고유한 전통이 PCF 내부에서 더 오래, 더 강하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질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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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프랑스 노동운동의 독자적 전통이 강했습니다.
프랑스 노동운동의 전통은 러시아와 독일의 그것과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아나르코-생디칼리슴(anarcho-syndicalisme)의 깊은 뿌리, 노동총동맹(CGT)의 조직적 자율성,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의 기억, 그리고 프랑스 특유의 혁명적 경험에 대한 자부심 — 이 모든 것이 "모스크바에서 무선전신으로 지시를 받는 당"에 대한 문화적 저항을 형성했습니다. 1906년의 아미앵 헌장(Charte d'Amiens)이 노동조합의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은, 프랑스 노동운동이 정당 정치와의 관계를 독일이나 러시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설정했음을 보여줍니다.
쥘 레뷔(Jules Raveau), 마르셀 카샹이 이끄는 PCF 내부에서 "프랑스적 공산주의의 길"을 주장하는 분파가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포쿠아에게 이 "프랑스적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개인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궤적은, 프랑스 혁명 전통이 러시아 혁명의 단순한 모방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감각에 기반해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파리 코뮌의 정보와 조직의 부족을 보완하는 경험을 제공했지만 코뮌의 정신을 대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포쿠아가 GPU의 해외 정보 부문에서 활동하면서도 "프랑스적" 감수성을 유지한 것은 이 이중적 정체성의 표현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도구를 사용하되, 프랑스의 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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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이 PCF를 온건하게 만든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모스크바의 전술적 지시에 덜 종속됨으로써 PCF는 프랑스 노동계급의 급진적 심리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정당이 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사회파시즘 노선"(SFIO를 파시즘의 동조자로 규정하는)의 채택은, 역설적으로, PCF를 급진적 수사에서는 강경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SFIO와 협력할 수 없으므로 의회에서 소수파로 남았고, CGT와도 분열했으므로 노동운동에서의 영향력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사회파시즘 노선"이 채택되지 않았으므로, PCF는 선거 전술에서 더 유연했고 노동조합 운동에서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1920년대 프랑스 정치에서 PCF의 위상: 선거에서 10-15%를 안정적으로 얻는 대중 정당이었지만, SFIO(15-20%)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의회 내에서 소수파이되, 파업과 노동 쟁의에서 CGTU(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unitaire, 통일노동총동맹)를 통해 거리와 공장에서의 영향력이 선거 결과를 초과했습니다.
이 "의회에서의 소수파 + 거리에서의 다수파"라는 구도는, 6장에서 서술한 독일 KPD의 전략 — 라이히스타크보다 경제평의회에서의 영향력을 추구하는 "평의회 공산주의" — 과 구조적으로 유사했습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은 독일의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같은 구조적 문제 — "의회적 경로만으로는 혁명이 불가능하고, 의회 밖의 경로만으로는 권력이 불가능하다" — 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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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분열과 재편
투르 대회의 여파로 CGT도 분열했습니다. 1921년, 혁명적 소수파가 CGT를 이탈하여 CGTU를 결성했습니다. 이 사실은 실제 역사와 동일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분열의 깊이와 재통합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CGT-CGTU 분열은 1936년 인민전선 승리 직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5년간의 분열이 1930년대 내내 프랑스 노동운동을 약화시켰으며, 이 약화가 고용주와 우파 정부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사업장에서 두 노조가 조합원을 두고 경쟁하고, 같은 파업에서 두 노조의 전술이 충돌하며, 같은 교섭 테이블에서 두 노조가 서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 이 소모적 분열이 노동자의 이익을 체계적으로 훼손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요인이 재통합을 더 일찍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CGTU가 모스크바의 지시에 의해 SFIO 조합원들을 "사회파시스트의 하수인"으로 공격하는 가장 극단적인 전술이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CGT와 CGTU가 경쟁하되, 동일한 사업장에서 조합원을 잃지 않기 위해 협력하는 사안 —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 이 반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두 조직이 실무적 협력을 한 사례들이 있었지만, 여기서 그 빈도가 더 높았습니다. 특히 금속 노동자와 광부 노조에서, 동일한 사업장의 CGT 조합원과 CGTU 조합원이 파업 중에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관행이 형성되었습니다.
둘째, 뤼시앵 에르(Lucien Herr), 알폰스 메렝(Alphonse Merrheim)을 중심으로 CGT 주류에서 "노동운동의 통일 없이는 사회주의의 실현도 없다"는 노선이 더 일찍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과 볼셰비키가 — 아무리 갈등이 많더라도 — 같은 연립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논리의 경험적 근거로 인용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함께할 수 있다면, 프랑스에서 CGT와 CGTU가 왜 함께할 수 없는가?" — 이 질문이 노동운동 통일파의 수사적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통합이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1928-30년에 두 조직이 합의를 이루더라도, 내부의 분파 다툼은 더 격렬해졌습니다. 분열하여 두 적이 싸우는 것보다, 통합하여 한 조직 안에서 두 노선이 경쟁하는 것이 더 소진적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험이 프랑스 노동운동에 제공한 교훈의 어두운 면이기도 했습니다. 7장에서 서술한 분파 규제의 사문화가 보여주듯이, "분파의 자유"는 곧 "분파 투쟁의 영구화"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분파들이 같은 당 안에서 끝없이 경쟁하면서 결정의 지연을 만들어냈듯이, 프랑스에서 CGT와 CGTU가 같은 조직 안에서 경쟁하면서 노동운동의 에너지를 내부 다툼에 소진시킬 위험이 있었습니다. 통합은 외부의 적에 대한 힘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내부의 적에 대한 싸움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치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이 프랑스의 노동운동 재편을 — 예측 가능하게도 — "다원주의의 국제적 확산"으로 해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쿠아의 관찰은 달랐을 것입니다. 그의 원리는 통합의 역설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었습니다.
통합은 외부의 적에 대한 힘을 결집시키지만, 내부의 적에 대한 싸움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치르게 만든다.
이것은 1920년대 프랑스 노동운동에 대한 관찰인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 자체의 다당 연립에 대한 자기 진단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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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초군사화와 프랑스의 전략적 이중성
5장에서 간략히 언급된 폴란드 초군사화의 의미를 여기서 더 상세히 다루어야 합니다.
프랑스는 독일-소련의 라팔로 협력이 강화될수록, 동쪽에 강력한 완충국이 필요하다는 강박을 키웠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프랑스-폴란드 동맹(1921년 2월)은 프랑스 동방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프랑스의 폴란드 지원은 약속에 비해 제한적이었습니다 — 1920년대의 프랑스 군사 원조는 주로 장교 훈련과 무기 수출에 국한되었고, 대규모 재정 지원은 프랑스 자체의 전쟁 채무와 재정 위기에 의해 제한되었습니다. 여기서 독일의 좌경화와 독-소 축의 강화가 프랑스의 불안을 증폭시킨 만큼, 폴란드에 대한 지원의 규모는 실제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초군사화된 폴란드는 그 자체로 지역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습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의 폴란드는 프랑스의 돈과 무기로 강해질수록 독자적 야심도 키웠습니다. 1920년의 바르샤바 전투(Bitwa Warszawska)에서 이미 드러났듯, 폴란드는 프랑스의 수동적 동맹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서부, 발트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팽창주의가 1921년 리가 조약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분출했습니다. 1920년 10월 젤리고프스키(Żeligowski)에 의한 빌뉴스(Vilnius) 강제 병합은 이 팽창주의의 전형적 표현이었으며, 프랑스의 군사 지원이 이러한 행동의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역설은, 프랑스의 폴란드 지원이 독-소 협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독일 입장에서 강대한 폴란드는 동쪽의 위협이었고, 소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동의 위협 — 폴란드의 팽창주의 — 에 대한 공동의 경계심이 양국 협력체제의 군사적 협력에 정치적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6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자본이 마른 독일은 러시아의 자원이 절실했고, 러시아는 독일의 기술이 절실했습니다. 이 경제적 상호 의존에 더해, 프랑스가 무장시킨 폴란드라는 공동의 안보 위협이 독-소 동맹의 군사적 차원을 강화했습니다. 카잔(Казань)의 비밀 전차 학교와 리페츠크(Липецк)의 비밀 비행 학교 — 실제 역사에서도 존재한 독일군의 소련 내 비밀 훈련 시설 — 이 여기서 더 규모가 크고 더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입니다.
프랑스가 폴란드를 강화할수록 독-소가 더 긴밀해지는 구조 — 프랑스의 전략이 자신이 막으려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설은 국제 정치의 고전적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의 변주였습니다. 한 국가의 안보 강화가 상대국의 불안을 증가시키고, 상대국의 대응이 최초의 안보 강화를 무효화하거나 역효과를 낳는 악순환. 프랑스-폴란드-독일-소련의 4각 관계에서 이 딜레마가 가장 극명하게 작동했습니다.
표트로프에게 폴란드라는 이름은 여전히 바르샤바를 환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5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트로츠키가 이끈 적군이 비스와 강 앞에서 패배한 기억은, 표트로프에게 "혁명이 총검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경계선"이라는 쓰라린 교훈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돈으로 더 강해진 폴란드가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서 있다는 것은, 그 경계선이 더 두꺼워졌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보가 표트로프에게 어떤 정치적 판단으로 전환되었는지는 — 그는 이론가가 아니었으므로 — 알 수 없습니다.
파리에서 이 역설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한 것은 외무성(Quai d'Orsay) 관료들이었습니다.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은 1924년 이미 "더 유연한 대소 정책 없이는 독-소 라팔로 체제를 해체할 수 없다"고 내부 보고서에서 주장했습니다. 브리앙은 프랑스 외교사에서 가장 유연한 정치인 중 하나였습니다 — 그는 로카르노 조약(1925년)을 주도하여 독일과의 화해를 추구했고, 켈로그-브리앙 조약(1928년)으로 전쟁의 포기를 국제법으로 명문화하려 했습니다. 그의 유연성은 이념적 확신이 아니라 지정학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회와 여론의 벽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채무를 갚지 않는 볼셰비키 정권과 협상하는 것"은 선거에서 자살 행위였습니다 — 러시아 채권을 가진 프랑스 중간계급 수백만 명의 표가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러시아 채권 문제"의 정치적 무게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약 160만 명의 프랑스 개인 투자자가 차르 시대의 러시아 국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채권이 혁명에 의해 무효화된 것은 프랑스 중간계급에게 단순한 재산 손실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러시아에 투자한 돈을 돌려받겠다"는 요구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정치적 지지를 받았으며, 어떤 정부도 이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 구조적 함정이 프랑스 대외 정책의 1920년대 전체를 관통했습니다.
포쿠아는 이 함정을 — GPU의 해외 정보 부문에서 활동하면서 —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한 인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프랑스 출신으로서 프랑스 정치의 내부 역학을 이해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정보 기구의 일원으로서 그 역학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대소 정책이 "공식적 경직성 + 비공식적 유연성"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포쿠아에게 비공식 채널을 통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 채널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의 구체적 내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이후 궤적이 프랑스-독일-소련의 삼각 정보 공간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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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 점령 (1923년): 정당하지만 역효과적인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가 루르 지방을 점령했습니다.
배상금 체납을 이유로 한 이 행동은 실제 역사와 동일하게 발생했습니다 — 배상금 부담은 독일 내부 체제에 의해 변하지 않으며, 프랑스의 안보 계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레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 수상에게 루르 점령은 단순한 배상금 징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르사유 체제의 이행을 물리적으로 강제하는 행위이며, 프랑스가 대륙에서 여전히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시위였습니다. 6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여기서 독일의 좌경화가 프랑스의 불안을 증폭시킨 만큼, 푸앵카레의 결단은 더 강한 확신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루르 점령의 정치적 후폭풍이 달라졌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루르 점령은 독일에서 초인플레이션과 국민적 굴욕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극우 운동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1923년 11월의 뮌헨 폭동이 바로 이 맥락에서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바이에른이 극우의 요람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6장), 루르 점령의 민족주의적 반발은 다른 형태를 취했습니다 — 카리스마적 대중 선동이 아니라 의회 정치 내에서의 우경화. DNVP와 독일 국민주의 세력이 강화되었지만, 나치즘과 같은 거리 폭력과 결합한 대중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국내에서 루르 점령의 효과도 이중적이었습니다.
푸앵카레 정부의 강경 정책은 단기적으로 국민적 지지를 얻었지만, 독일의 소극적 저항(Passiver Widerstand)과 막대한 점령 비용이 결합하여 재정 위기를 심화시켰습니다. 1924년 선거에서 좌파(Cartel des gauches, 좌파 카르텔)가 승리한 직접적 원인 중 하나가 이 재정 위기였습니다.
에두아르 에리오(Édouard Herriot)가 이끄는 좌파 카르텔의 승리(1924년)는, SFIO와 급진당(Parti radical)의 선거 연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PCF는 이 연합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우파의 패배"라는 결과에는 기여했습니다. 여기서 SFIO-PCF 관계가 덜 파열적이므로, PCF의 전술적 유연성이 더 컸고, 이것이 좌파 카르텔의 승리 폭을 약간 확대시켰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루르 점령은 독-소 협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독일이 프랑스에 의해 사실상 점령당하고 있는 동안, 소련과의 비밀 군사 협력 — 카잔 전차 학교, 리페츠크 비행 학교 — 이 독일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적"이라는 공유된 경험이 독-소 동맹의 감정적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1930년대 프랑스 정치의 향후 전개를 잠시 짚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전략적 함정 — 폴란드를 강화할수록 독-소가 긴밀해지고, 루르를 점령할수록 독소협력이 강화되는 — 은 1930년대에 더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대공황이 유럽을 강타하고, 각국에서 권위주의적 조류가 부상할 때, 프랑스가 직면하는 위협은 실제 역사와 형태가 달라집니다. PCF 내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소렐의 유산이 어떠한 조류를 만듭니다. 프랑스에서 이 조류가 1934년부터 어떤 형태로 출현하는지는 미래의 이야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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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텔 데 고쉬 (1924-1926): 에리오의 딜레마
1924년 5월 선거에서 급진당(Parti radical)과 SFIO가 연합한 좌파 카르텔(Cartel des gauches)이 승리했습니다. 에두아르 에리오(Édouard Herriot)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 결과는 실제 역사와 동일합니다. 에리오는 리옹 시장이자 급진당의 지도자로서, 푸앵카레의 루르 점령 정책에 대한 반발과 재정 위기에 대한 불만을 결집시켜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좌파 카르텔"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보다 이 연합은 취약했습니다 — 급진당은 중간계급 정당이었고, SFIO는 노동자 정당이었으며, 두 정당의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에리오가 처한 내부 압력의 구조였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카르텔의 좌파 파트너인 SFIO는 의회의 지지는 제공하되 정부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에리오는 급진당의 총리로서 좌파의 지지를 받았지만, 좌파 정책을 실행할 연립 파트너가 없었습니다.
블룸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정부에 참여하면 부르주아 정당(급진당)의 정책에 공동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정책이 실패하면 노동자계급의 신뢰를 잃는다. 밖에서 지지하되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노동자 정당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논리는 원칙적으로 정합적이었지만, 실천적으로는 카르텔 정부를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여기서 SFIO와 PCF의 관계가 덜 파열적이었으므로, 좌파 블록의 내부 역학이 달라졌습니다.
SFIO가 정부 참여를 더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생겼습니다.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는데, 프랑스에서 급진당과의 연립이 왜 불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이 SFIO 내부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PCF도 "부르주아 급진당과의 연립은 배신이다"라는 코민테른의 강경 노선을 덜 강요받았으므로, 적어도 외부에서의 지지는 허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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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오의 두 가지 핵심 행동이 여기서도 발생했습니다: 소련의 외교적 승인(1924년 10월)과 로마에서의 가톨릭 외교 정상화 시도.
그러나 소련 승인의 정치적 의미가 달랐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소련 승인은 프랑스 우파에게 "볼셰비키 독재의 묵인"으로 공격받았습니다. 여기서 소련이 인민대표대회를 보유하고 좌파 사회혁명당이 연립 파트너로 있었으므로, 이 공격의 날이 무뎌졌습니다. 대신 다른 공격이 등장했습니다 — "이 국가는 독일과 비밀 군사 협력을 하고 있으며, 채권 상환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 더 구체적이고 반박하기 어려운 비판이었습니다.
채권 문제는 여기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정부의 분파 구성이 아무리 다양해도, 차르 시대 채무를 상환하거나 몰수된 재산을 반환하는 것은 혁명의 근본적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어떤 분파도 이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에리오는 승인과 채권 협상을 연계하려 했지만, 모스크바는 약속은 하되 이행을 끊임없이 지연시켰습니다. 이 패턴이 1920년대 프랑스-소련 관계의 구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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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오 정부의 한계는 외교가 아니라 재정에서 왔습니다.
루르 점령의 비용, 전쟁 채무, 그리고 통화 불안정이 결합하여 카르텔 정부는 금융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프랑스 금융 자본의 구조적 저항 — 급진당 정부가 추진하는 어떤 정책도 채권 매입 거부와 자본 도피로 응답하는 — 이 에리오를 소진시켰습니다.
이 "금융 자본의 구조적 저항"은 6장에서 서술한 독일의 "자본 파업(Capital Strike)"과 구조적으로 유사했습니다. 독일에서 석탄·철강의 사회화가 자본 도피를 촉진했듯이, 프랑스에서 카르텔 정부의 조세 개혁 시도가 금융 시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경우 모두 "사회 개혁의 고전적 딜레마" — 노동자를 위한 제도가 자본의 이탈을 촉발하고, 자본의 이탈이 노동자의 일자리를 파괴하는 — 가 작동했습니다.
1925년 4월, 에리오 정부가 붕괴했습니다. 이후의 정부들은 불안정했습니다 — 1924-1926년 사이에 10개 이상의 내각이 교체되었습니다.
이 불안정 자체가 제3공화정의 구조적 특징이었으며, 여기서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의회제는 비례대표 없이도 다당 체제를 운영했으며, 이것이 만성적 연립 불안정의 원인이었습니다. 10장에서 서술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봉합의 반복" — 건설적 불신임 관행의 정착에 이르기까지의 3주, 5주간의 권력 공백 — 이 프랑스에서는 훨씬 더 빈번하고 일상적인 형태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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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앵카레의 복귀와 안정화 (1926-1929)
1926년 7월, 푸앵카레가 국민연합(Union nationale) 정부를 구성하며 복귀했습니다.
프랑화 안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실은 실제 역사와 동일합니다.
푸앵카레의 재정 안정화는 프랑화를 전전 가치의 약 5분의 1 수준에서 고정시킨 것이었습니다(1928년의 법정 안정화). 이것은 실질적 평가 절하를 공식화한 것이며, 프랑스 채권자와 저축자에게는 재산의 80% 손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안정화 자체가 불확실성을 종식시켰으므로,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이 안정화를 둘러싼 정치적 의미 부여였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푸앵카레의 복귀는 좌파에게 "금융 자본이 민주적 선거 결과를 전복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인식이 1930년대 인민전선의 핵심 서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인식도 형성되었지만, 그 강도가 달랐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금융 자본의 민주주의 전복"이 유일한 사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소비에트 체제에서도 자본 도피와 NEP맨의 비공식적 영향력이 유사한 패턴을 만든다는 것을 프랑스 좌파 경제학자들이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금융 자본의 저항"은 자본주의의 특수한 병리가 아니라, 자원 배분을 둘러싼 보다 일반적인 투쟁의 한 형태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인식이 더 구조적이고 덜 음모론적인 자본주의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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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앵카레 안정화 이후의 1926-1929년은 상대적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독일의 도스 계획(Dawes Plan)과 로카르노 조약에 의해 배상금 문제가 부분적으로 해소되었고, 경제가 회복되었습니다. 이 번영이 프랑스 좌파 — SFIO와 PCF 모두 — 에게 시간을 주었습니다. 조직을 재건하고, 이론을 발전시키고, 1920-1923년의 격렬한 시기로부터 배운 교훈을 소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프랑스 지식인들과 소련 모델의 관계였습니다.
앙드레 지드(André Gide), 앙리 바르뷔스(Henri Barbusse), 폴 니장(Paul Nizan)이 소련을 방문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들의 소련 방문기는 열광과 환멸 사이를 오갔습니다 — 혁명의 이상에 열광하지만 일당 독재의 현실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지드의 1936년 저작 소련에서 돌아와(Retour de l'U.R.S.S.)는 이 환멸의 가장 유명한 기록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방문하는 소련은 달랐습니다. 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마르토프가 (1926년 사망 전까지) 연설하며, 분파들이 공개적으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다.
이 인상이, "그것은 아름답지만 우리와 무관하다"는 인상보다 강하게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이 소련을 바라보는 방식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 이상화된 찬탄이 아니라, 실패와 타협을 인정하면서도 참조 가능한 실험으로서의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PCF의 주류는 대단히 빠르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에서 찾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로베스피에르를 옹호한 바뵈프와 부오나로티의 저작과 기록이 빠르게 북고되었고, PCF는 집회에서 삼색기를 흔들고 라마르세예즈를 불렀습니다.
칼유스테에게 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방문은 — 교육인민위원부의 실무자로서 — 직업적 관심사이기도 했습니다. 바르뷔스 같은 지식인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교육 실험에 관심을 가지고 문해 교육 현장을 방문했을 때,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칼유스테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혁명의 전시"와 "교육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관리하는 것은 — 소우제니츠키의 이름으로 글을 가르치면서 소우제니츠키의 진실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사의 딜레마와 마찬가지로 — 칼유스테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과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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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소련: 불편한 거울 관계
1920년대 전체를 통해 프랑스는 소련을 어떤 단일한 태도로도 규정하지 못했습니다.
외교적으로 승인하면서 채권 상환을 요구하고, 채권을 받지 못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독-소 라팔로 협력을 위협으로 인식하면서도, 소련을 잠재적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를 반복했습니다. 좌파는 소련을 영감의 원천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직접 모방하는 것에는 저항했습니다. 우파는 소련을 문명의 위협으로 규정하면서도 현실 외교에서는 채권 협상을 위해 접촉을 유지했습니다.
이 이율배반을 가장 날카롭게 요약한 것은 1927년 브리앙의 내부 메모였습니다:
우리는 러시아를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러시아를 필요로 한다. 두 감정이 교대로 우리의 정책을 마비시킨다.
마비의 원인은, 소련의 성격이 "완전한 타자"로 규정될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일당 독재라면 거부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선거가 있고, 의회가 있고, 좌파 정당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소련은 —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 프랑스 좌파가 자신들의 이상 일부를 투영하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이 거울이 불편한 것은, 거울 속의 이미지가 자신들과 닮았지만 더 멀리 나아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꿈꾸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 그것도 불완전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시도하고 있다.
이 인식이 단순한 거부도, 단순한 찬탄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불편한 거울이 프랑스를 여기의 다른 나라들과 구별하는 특징이었습니다.
독일은 분명 이념적 유사성도 있기는 하였지만 소련과 실용적 동맹 관계에 있었으며, 그 관계가 양국의 제도적 실험에 지식인적 자원을 공급했습니다. 영국은 소련을 무역 파트너로서 실용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미국은 소련을 이념적 적으로 규정하며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프랑스만이 소련을 동시에 위협, 기회, 영감, 경고로 경험했습니다. 이 다중적 경험이 프랑스 좌파의 이론적 풍요함과 실천적 마비를 동시에 만들어냈습니다.
포쿠아에게 이 "불편한 거울" 관계는 — 개인적 차원에서 — 가장 깊은 아이러니를 품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으로서 소비에트 정보 기구에서 활동하는 그 자신이, 이 거울 관계의 인격화였습니다.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파리 코뮌)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의 혁명적 현실(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일하는 사람 — 그는 거울의 양쪽에 동시에 서 있었습니다. 이 이중적 위치가 그를 정보 분석에서 탁월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 두 세계를 모두 안에서부터 이해하는 사람은, 어느 한쪽만 아는 사람보다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같은 이중적 위치가 그를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의 궤적과 결말은 이중적 위치의 최종적 귀결이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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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적 길의 역설
여기서 프랑스의 이야기는 변혁이 아니라 변조(modulation)였습니다.
투르의 분열은 덜 파열적으로 일어났습니다. PCF는 덜 모스크바 종속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SFIO와 PCF는 더 일찍 협력의 경험을 쌓았습니다. 인민전선은 더 빨리, 더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구조들 — 제3공화정의 의회적 불안정, 금융 자본의 구조적 저항, 채권 문제로 인한 대소 관계의 마비, 라팔로 체제에 대한 지정학적 불안, 극우와 가톨릭 보수주의의 조직적 기반 — 은 그대로였습니다. 개혁은 반복적으로 시도되고 반복적으로 좌초했습니다.
이 점에서 프랑스는 이 이야기의 전체의 핵심 명제를 가장 명확하게 예증합니다:
혁명이 다른 방식으로 성공했고, 그 성공 때문에 다른 종류의 모순을 떠안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됩니다:
러시아의 변화가 프랑스 좌파에게 새로운 참조점을 제공했지만, 그 참조점이 프랑스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영감은 해결의 대체물이 아니다.
프랑스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변화가 아니라 거울로서의 역할에 있었습니다.
소련이 스스로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프랑스 좌파도 소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에게 불완전한 거울이었으며, 그 불완전성 속에서 20세기 유럽 좌파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양립 가능한가 — 이 해소되지 않은 채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이 프랑스의 이야기였습니다. 승리도 패배도 아닌, 끝나지 않는 질문.
그리고 1934년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요구될 것이었습니다. 프랑수아 드 라 로크(François de La Rocque)의 오랜 고민의 결과물입니다. "사회주의적 사회주의"가 실재하는 세계에서 대중주의 극우는 자신을 "더 진정한 사회혁명"으로 재포장해야 했습니다. "국민혁명(Révolution nationale)"이라는 수사가 프랑스 정치에 침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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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b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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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포를 이해하라!
11장의 다른 절들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소비에트 모델의 반향을 추적한다면, 11b장은 그 반향이 가장 역설적으로 굴절된 곳을 다룹니다.
미국은 소비에트 모델을 이념적 적으로 규정하면서도, 바로 그 적대의 과정에서 자국 민주주의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노출했습니다. 소련이 미국을 바꾼 것이 아니라, 소련의 존재가 미국이 스스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된 거울이 되었습니다.
11a장(프랑스)이 "불편한 거울"이라는 은유를 사용했다면, 미국에게 소련은 더 단순하고 더 폭력적인 거울이었습니다 — 프랑스가 거울 속의 이미지와 씨름했다면, 미국은 거울 자체를 깨부수려 했습니다. 그리고 깨부수려는 시도가 거울보다 자신을 더 많이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련을 단순한 독재가 아닌 "이념의 적" —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존재 — 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미국에서는, 반공주의도 반러·반소 감정도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심했습니다. 유럽에서 소련의 존재가 "불편한 참조점"이었다면, 미국에서 소련의 존재는 "존재 자체가 도발"이었습니다. 사유 재산과 자유 기업이 미국적 정체성의 핵심이었으므로,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체제의 성공 — 비록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성공이라 해도 — 은 미국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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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딩의 생존: 작은 변화가 큰 균열을 만든다
미국에는 묘한 나비효과가 있었습니다.
1923년 여름, 워런 G. 하딩(Warren G. Harding) 대통령은 서부 순방 도중 심각한 건강 위기를 겪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하딩은 1923년 8월 2일, 샌프란시스코 팰리스 호텔(Palace Hotel)에서 심장마비 혹은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57세였습니다. 그의 죽음의 정확한 원인은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입니다 — 부인 플로렌스 하딩이 부검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사망 당시 티팟 돔 스캔들(Teapot Dome scandal)의 전모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으며, 하딩의 사망은 그를 스캔들의 직접적 피해로부터 사후적으로 보호하는 효과를 가졌습니다.
여기서 하딩은 살아남았습니다.
의사들의 처치가 조금 더 빨랐습니다. 7월 혁명 이후로 아나키스트 테러가 다시 증가세였기 때문에 대통령 경호가 약간 더 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두 발로 열차에 올라 워싱턴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입니다.
하딩의 생존이 미국 정치에 미치는 효과는 — 러시아의 변화가 미국에 미치는 간접적 영향과 결합하여 — 실제 역사와 상당히 다른 1920-30년대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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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딩이 살아 있는 동안, 행정부 비리가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내무장관 앨버트 폴(Albert Fall)의 뇌물 수수 — 해군 석유 비축지를 사기업에 비밀 임대한 티팟 돔 스캔들. 재향군인국장 찰스 포브스(Charles Forbes)의 횡령 — 재향군인 병원 건설 자금의 유용. 법무장관 해리 도허티(Harry Daugherty)의 각종 비위 — 금주법 위반자로부터의 뇌물 수수와 사법 방해. 이 모든 것이 하딩의 "오하이오 갱(Ohio Gang)" — 그의 고향 친구들로 구성된 비공식 자문단 — 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하딩의 사망으로 깨끗한 이미지의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가 뒤를 이어받으며, 스캔들의 파장을 최소화했습니다. "조용한 캘(Silent Cal)"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쿨리지는 전임자의 잔해 위에 청렴한 행정부를 세워 국민의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여기서 하딩은 여전히 백악관에 앉아 있었고, 모든 스캔들의 화살은 고스란히 그에게 꽂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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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하딩은 1924년 대선에 재출마했습니다.
상대가 분열된 민주당이라는 덕이 컸습니다.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정치사의 전설적 참사로 기록될 터였습니다 — 이것은 실제 역사와 동일합니다. 보수적인 윌리엄 매캐두(William McAdoo)와 도시 진보파 앨 스미스(Al Smith)가 103차 투표까지 교착하며, 결국 양쪽 모두가 아닌 타협 후보 존 W. 데이비스(John William Davis)를 내세웠습니다. 이 자기 파괴적 전당대회는 민주당의 내부 분열 — 남부 농촌 개신교도와 북부 도시 가톨릭 이민자 사이의 문화 전쟁 — 을 전국에 중계한 것이었습니다.
하딩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실제 역사에서 쿨리지가 거둔 압도적 승리(대중 투표 54%)와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신승이었습니다.
공화당 브랜드에는 씻을 수 없는 흠집이 새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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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 보라, 그리고 방파제 없는 대공황 (1928-)
하딩의 2기 행정부는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비리로 마비되었습니다.
의회 청문회가 줄을 이었고, 결국 탄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하딩은 2기 임기 후반 — 1927년경 — 에 사임했습니다.
하딩의 사임은 닉슨(Richard Nixon)의 1974년 사임보다 50년 이상 앞선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닉슨의 사임과 마찬가지로, 형사 소추를 회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하딩의 경우 탄핵이 실제로 진행되기 전에 사임이 이루어졌으므로, 절차적으로는 닉슨보다 "깨끗한" 퇴장이었습니다.
쿨리지가 자리를 승계했지만, 남은 임기는 1년 반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그 1년은 하딩 비리의 뒷수습과 의회 청문회의 마무리로 소진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 "공화당 = 부패"라는 등식이 각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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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대선은 삼파전으로 치러졌습니다.
스캔들에 질린 공화당 내 진보 계파가 마침내 당을 이탈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1924년에 위스콘신의 로버트 라폴레트(Robert La Follette) 상원의원이 진보당(Progressive Party) 후보로 출마하여 전체 투표의 16.6%를 가져간 선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쿨리지의 인기와 경제 호황이 진보파를 주변부로 밀어냈지만, 여기서는 쿨리지의 성공적인 1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다호의 윌리엄 보라(William Borah) 상원의원 — 공화당 내 고립주의적 진보파의 거두 — 가 제3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보라는 미국 정치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공화당원이면서 연방준비제도의 비판자였고, 고립주의자이면서 소련 외교 승인의 지지자였으며, 보수적 가치관을 가지면서도 독점 자본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매력은 기존의 좌우 축으로 환원되지 않는 "포퓰리스트적 독립성"에 있었습니다.
민주당 후보 앨 스미스 — 뉴욕 주지사,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 — 는 두 가지 상반된 힘 사이에 끼었습니다.
공화당 표가 보수파 후보 프랭크 로든(Frank Lowden, 전 일리노이 주지사)과 진보파 보라 사이에서 분열된 덕에, 스미스는 북동부의 가톨릭 이민자 밀집 주(뉴욕, 뉴저지, 매사추세츠, 코네티컷)와 일부 중서부 산업 주에서 삼파전의 어부지리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반가톨릭 감정은 정당 충성도를 초월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솔리드 사우스(Solid South) —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을 지지해 온 남부 주들 — 의 핵심부(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루이지애나, 아칸소)는 사수했지만, 변경부(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텍사스, 플로리다)에서는 반가톨릭 감정이 당 충성을 압도하여 패배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 주들은 스미스에게 등을 돌린 바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미국 정치의 구조적 특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1920년대 미국의 정치적 분열선은 유럽의 계급 정치와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유럽에서 정치의 축은 자본 대 노동, 좌파 대 우파였지만, 미국에서 정치의 축은 종교(개신교 대 가톨릭), 인종(백인 대 비백인), 지역(남부 대 북부, 농촌 대 도시), 그리고 이민(토착 미국인 대 이민자)이라는 문화적 분열선에 의해 교차되었습니다. 이 문화적 분열이 계급적 분열보다 강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유럽식 사회주의 정당이 성장하기 어려웠습니다 — 그리고 이 사실이 소비에트 모델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유럽과 질적으로 다르게 만든 구조적 조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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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삼파전과 어떤 후보도 과반을 얻지 못한 선거
1928년 대선의 결과는 미국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어떤 후보도 선거인단 과반(266명)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민주당의 앨 스미스가 186명, 진보당의 윌리엄 보라가 85명, 공화당의 프랭크 로든이 260명을 획득했습니다.
이 결과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세 후보의 지지 기반이 어떻게 분포되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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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의 186명은 두 가지 원천에서 왔습니다.
남부의 솔리드 사우스 핵심부 — 앨라배마, 아칸소,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사우스캐롤라이나 — 가 민주당 충성을 사수했습니다. 이 6개 주는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 이외의 후보에게 투표한 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으며, 스미스의 가톨릭 신앙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당 충성이 유지되었습니다.
북동부와 중서부의 도시 —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욕, 일리노이, 미주리 — 에서 삼파전의 어부지리가 작동했습니다. 공화당 표가 로든과 보라 사이에서 분열된 덕에, 스미스가 이 주들을 가져갔습니다.
뉴욕은 주지사 출신 스미스의 홈그라운드이자 가톨릭 이민자 최대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가 불과 2.4% 차이로 승리한 가장 치열한 경합 주였으며, 여기서 보라가 공화당 표의 12-15%를 분리해 내자 스미스가 편하게 승리했습니다. 일리노이는 가장 논쟁적인 결과였습니다 — 시카고의 가톨릭 이민자 인구(아일랜드계·폴란드계·이탈리아계)와 보라의 공화당 표 분열이 결합하여 스미스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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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85명은 1924년 라폴레트의 지지 지도와 거의 겹쳤습니다.
라폴레트가 위스콘신만을 이긴 것은 쿨리지의 인기와 경제 호황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쿨리지의 성공적 1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하딩 스캔들이 공화당 브랜드를 오염시킨 상태였으므로, 라폴레트가 2위를 차지했던 서부·중서부 주들에서 보라가 1위로 올라섰습니다.
위스콘신(1924년 라폴레트 54% 승리)을 본거지로, 미네소타(농민-노동당 전통), 아이오와·네브래스카·노스다코타·사우스다코타(농업 불황의 직격탄을 받은 중서부 농업 주들), 그리고 아이다호·몬태나·콜로라도·네바다·워싱턴·오리건(서부 진보 전통)이 보라에게 갔습니다.
캘리포니아(13명)는 보라에게 가장 유리했으나 아깝게 놓친 주였습니다. 1924년 라폴레트가 33%를 득표한 강력한 진보 기반이 있었고,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하이럼 존슨(Hiram Johnson)의 암묵적 지지가 보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존슨은 공화당 탈당을 공식적으로는 거부했고, 남부 캘리포니아의 보수적 유권자가 결집하여 로든이 근소한 차이로 사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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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든의 260명은 과반(266)에 6명이 부족했습니다.
로드아일랜드(5명)와 코네티컷(7명) 중 어느 하나만 지켰어도 로든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혹은 아이오와(13명)에서 보라를 1% 차이로 눌렀더라도. 공화당으로서는 하딩 스캔들이 남긴 상처의 크기를 정확히 계량할 수 있는 숫자였습니다 — 6명, 딱 그만큼이 하딩의 대가였습니다.
로든의 승리 주에는 예상 밖의 선물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반가톨릭 이탈 남부 7개 주(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텍사스, 플로리다, 켄터키, 오클라호마, 합계 85명)였습니다.
이 주들의 유권자는 공화당에 투표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었습니다. 남부 민주당 지도부는 이 이탈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개신교 목사들의 강단 설교와 KKK의 문전 캠페인이 더 강력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 7개 주 중 5개가 후버에게 넘어간 바 있었습니다 — 여기서 그 패턴이 반복된 것은 반가톨릭 감정의 구조적 깊이를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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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헌법 제12조: 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다
결과적으로, 수정헌법 제12조(Twelfth Amendment)에 따라 대통령 선출은 하원(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넘어갔습니다.
수정헌법 제12조는, 어떤 후보도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하원이 상위 3명의 후보 중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각 주가 1표씩을 행사합니다 — 인구에 관계없이 1주 1표. 이 절차가 마지막으로 적용된 것은 1824년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의 선출이었습니다 — 100년 이상 전의 일이었습니다
하원에서 각 주가 1표씩을 행사하는 투표가 벌어졌습니다.
남부 민주당 대표단은 가톨릭 스미스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공화당 후보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스미스가 하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그것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은 승리가 아니라, 선거인단도 대중 투표도 아닌 하원의 밀실 거래로 뽑힌 대통령이었습니다. 취임 첫날부터 스미스의 정당성에는 물음표가 따라붙었습니다.
첫댓글 슈트라서랑 룀...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 ㅎㅎ... 저거 토지개혁때 실패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잘 되서 다행이었죠.
나치당에 있을 애들이 이쪽으로 붙으니 뭔가 어색한...
독일 혁명이 뭔가 너무 순조로운 느낌이...?
그리스 살리기 성공적.. 왕정 지지가 강해지다보니 입헌군주정으로 가는 약간의 부작용이 있지만 그리스도 영향권에 들어오는군요. 흑해는..이제 소련의 문이 되어줄 것...
가이어로 성 변경에 이런 큰 그림이 있을줄이야.. 표트르는 진짜 독일에 기반을 두게 생겼네요 ㄷ
독일 혁명의 상징이 된듯...
@931117 흑흑 러시아 농민으로 태어나 가이어라는 성을 들고 혁명을 이끌다니, 독일의 그라쿠스라도 된 기분이군요(?)
@통장 그라쿠스랑의 차이는 살해는 피하는.
@931117 티베리우스의 비극은 이미 기벨슈타트가 겪었으니 안심...? 하지만 표트르의 미래는 렌지파일 님께서 쓰실 거라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미래를 피할 수 있는지 지켜봐야겠습니다 ㄷㄷ
만약 표트르가 러시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입양되었다면 어찌됐을 지 궁금하네요… 그 피지컬에 학식까지 갖춘 사람이라면.. ㄷㄷ
@E.E.샤츠슈나이더 루돌프 폰 골덴바움...흠흠(..)
사실 표트르의 학식이 높았다면 오히려 리미트가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머리가 안좋으니 당의 세계혁명을 위해 그렇게 충실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솔직히 누가 독일 참총 내려놓고 중국 갔다가 은퇴하겠습니까? 바보예요 바보(..)
프랑스-이탈리아 노동자 노선이라는 말이 계속 복선으로 깔리는 걸 보니 이쪽이 민족생디칼리즘의 추축이 될 모양이군요. 독일은 일단 적화되겠지만 룩셈부르크/카우츠키/리프크네히트의 후예들이 정권을 지킬지 아니면 이번에 등장한 개노답 삼형제들과 괴벨스 등이 권력을 탈취해 뭔가 촉진주의적인 구도를 만들지…
근데 오스트리아 좌익들이 파쇼 쪽으로 틀었다는 묘사가 나온 걸 보면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ㅋ…
탈취까진 어렵겠지만 큰 사고를 치긴 할 겁니다 ㅋㅋ
@렌지파일 아 참, 혹시 파트롱 나오나요? (…)
@E.E.샤츠슈나이더 고민중이긴 합니다. 아시다시피 여기 소련에서는 보그다노프(레플의 벨라루스의 촉진주의 지도자 바흐다나우죠)가 정계에 복귀하고, 아방가르드 미술의 주축인 프롤레트쿨트가 소련 문화예술의 최고봉(...)이 되어버렸거든요. 마야콥스키와 가스테프도 당연히 거기서 활동중이고요. 아나키스트들조차 한패가 되었으니..
다만 제가 그런 쪽 광기를 묘사할 자신은 별로 없어서(....) 나오더라도 순한맛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렌지파일 소련 인민위원장 가스테프
독일 주석 괴벨스
이탈리아 두체 무솔리니
프랑스 파트롱 아르토
영국 호국경 모슬리
일본 태정대신(…) 기타 잇키(?)
이런 조합도 “이론 상” 실현 가능하긴 하겠군요…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사실 보그다노프가 '시시해서 죽고싶어졌다' 선언하고 인민위원장 출마해버리면 아무도 못 막는 짬밥이라(볼셰비키가 가장 어려웠던 1903년-1909년에 2인자였고, 유일하게 맞먹는 트로츠키는 본래 멘셰비키 출신이죠...) 아방가르드주의 소련도 '가능은' 합니다. 카탈루냐 찬가에서 나온 것처럼 성당을 폭탄으로...
@렌지파일 개인적으로 레플모드에서 제일 정신나갈것같은 루트가 “일국” 루트이긴 합니다. 보그다노프 쪽은 제가 플레이를 안해봐서 잘 모르지만 적어도 기계주의는 아니겠지만요..? ㅋㅋ
수정완
미국 이야기는 소확행의 여러 변주에서도 정말 전혀 다룬 적이 없는 비밀스러운 것이었는데 결국 그 일부가 나오네요 ㅋㅋ (물론 스미스 대통령은 그 독일 RPG에 있었던것 같지만..)
@렌지파일 약간 20세기 극초반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느낌이네요. 밭은 노동계급한테 갈고 표는 딕시한테 받았던…
미국이 아주 혼란스러워졌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