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나는 어느 노부인의 청에 따라 구명시식을 집례한 적이 있었다. 노부인의 나이는 65세. 남이 보기에 경제적으로 넉넉할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성공한 남편과 잘 성장한 자식들을 둔 기품을 갖춘 한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그 누구도 그분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은 늙어갈수록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노부인은 경남 양산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부잣집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일찍이 명의로 소문이 나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녀가 자란 99칸짜리 기와집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맏딸인 그녀는 풍족한 환경 속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새 그녀에게도 혼기가 다가왔다.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매파를 통해 의사를 물어왔다. 그렇게 해서 본 선만 해도 스물네 번이 넘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 누군가가 선을 보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키는 작았지만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하이칼라인 신식 청년이었다. 비록 꿈속이긴 해도 모습이 또렷했다. 그런데 청년이 선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고모라는 게 아닌가. 꿈속이었지만 서운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청년이 서 있는 배경에는 왕릉과 같은 크나 큰 고분과 연못이 펼쳐져 있었다.
이상한 꿈을 꾼 그날 아침, 아저씨뻘 되는 먼 친척이 찾아왔다. 경주에 산다는 신랑감을 중매하기 위해 온 것이다. 경주라는 말에 그녀는 문득 지난밤 꿈이 생각났다.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난 아침, 할아버지가 그녀를 찾았다. 영문도 모른 채 불려 간 그녀에게 할아버지가 느닷없이 말했다.
“너, 오늘 개울에 나가 빨래를 하거라. 그런데 반드시 너 혼자만 가야한다. 그리고 북청색 유똥 치마에 양단 저고리를 입고 가거라.”
그녀의 집 앞에는 통도사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있었다.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그녀는 자존심도 상하고 내키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개울가에 나가 빨래를 했다. 그러자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멀찌감치 서 있는 남자를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순간, 그녀는 전율을 느꼈다.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 거기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틀림없이 하이칼라 그 사람이었다.
또 며칠이 지난 뒤 할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속마음으로 하이칼라와의 혼사를 매듭짓기 위해 부른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하이칼라 이야기를 비치지도 않고 엉뚱하게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했다. 늘 고분고분하던 그녀였지만 결혼만은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하고 싶었다. 예상대로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
그녀가 물러서지 않자 할아버지는 그와의 결혼을 계속 고집하면 한 푼도 보내주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그녀는 결국 하이칼라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선언한대로 그녀 몫의 재산을 주지 않고 간단한 세간 살림만 딸려 손녀딸을 보냈다. 그래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한없이 즐거웠다.
우여곡절을 겪고 경주에 있는 신랑집에 온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시집은 천마총(天馬冢), 즉 대릉원이라는 신라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 가까이에 자리잡은 600여평의 집이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고분이었다. 지금은 비록 연못으로 변하고 집도 없어졌지만 틀림없는 그 집이었다.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그 무엇이 그녀를 억눌렀다. 오랜 세월에 훼손되어 가는 고분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곤 했다. 특히 달빛이 교교한 밤에 천마총을 바라보노라면 저며 오는 서러움에 그녀는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 무렵, 남편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의 집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몰락해 갔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했다. 결혼 생활이 해를 거듭할수록 그녀의 가슴속에 왠지 모르게 남편에 대한 불만이 자라고 있었다. 남편을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건만, 남편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늘 냉정하게 대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혔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남이 보는 겉모습과 달랐다. 남편은 국책 은행의 임원으로서 이른바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녀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로, 부부간의 대화도 “니 밥 묵었나? 자자.” 정도가 전부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도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의 무관심과 냉정함까지 겹쳐 그녀를 절망으로 몰고 갔다. 영원한 평행선,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는 구명시식을 할 돈마저도 없었다. 그만큼 남편이 그녀에게 무관심했던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시작된 영혼 탐색을 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전생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천마총의 주인공은 그녀의 남편과 그녀였던 것이다. 그들은 전생에 왕과 왕비였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1000년을 두고 반복된 윤회 법칙 속의 주인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인 지상의 군주로서의 남편과 지고한 자세는 비록 지금은 이승의 필부에 지나지 않지만 아무도 모르는 전생의 기품으로 나타나 아녀자의 눈에 냉정함으로 비쳐졌던 것이리라. 사랑하면서도 말로 표현하지 않고 괴로워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는 왕과 왕비의 절도가 그들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지 못하게’ 한 비밀이었다. 서로의 마음의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마음의 빗장을 풀어놓았다. 평화를 구한 것이다. 구명시식 후부터 그녀의 가정에도 평화가 깃들이기 시작했다. 큰딸의 결혼 생활이 극적으로 정상으로 돌아왔고, 아들네도 평안을 유지했다. 막내딸도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마총이 파헤쳐진 1973년 그때를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우리집이 도둑을 맞는 게 보였어요. 마치 내 몸에서 뭔가 날아가는 느낌을 받았지요.”
그리고 이튿날, 금관을 비롯한 많은 소장품이 발굴되었다는 보도가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고분이 있던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시집이 있던 자리는 연못으로 변했다. 그때의 서운함을 그녀는 지금까지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그 영혼 여행을 통해 다시 한 번 인간의 환생 법칙에는 일정한 기준이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인간은 역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평소 필자의 소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