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세상'이 싫어 고국을 떠났습니다' - 순국선열 왕산 허위선생 후손 재미동포 허도성씨
“길 닦아 놓으니 똥개가 먼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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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허위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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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독립기념관 | 일제의 폭압정치에서 벗어난지 갑년을 맞고 있지만 우리가 '일제시대'로부터 얼마나 해방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직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정부에 대해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며 수 년째 '수요집회'를 열고 있으며, 친일청산을 둘러싸고 우리사회의 논란도 여전하다. 또 일본은 잊을만하면 한번씩 역사왜곡 발언으로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필자는 지난 5년 동안 항일유적 답사를 위해 중국 대륙을 세 차례 누볐다. 항일 독립군이 대첩을 거둔 봉오동-청산리 전적지를 비롯해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처단한 하얼빈역 플랫폼, 옥수수밭이 된 신흥무관학교 옛 터, 상하이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 등을 직접 둘러보았다.
이역의 산하에서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우다 이름도 없이 잠든 무명 독립투사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필자는 참으로 가슴뭉클한 그 무엇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나라 안팎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고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 역시 가눌 길이 없었다.
광복된 나라에서 마땅히 주역이 돼야 할 독립투사나 그 후손들이 주역은커녕 3·1절이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구색을 갖추는 단하의 사람으로, 아니면 이역의 산하에서 아직도 일제 강점기나 다름없이 떠돌고 있었다.
필자가 교류해온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미국 휴스턴에 거주하는 왕산 허위(許蔿) 선생 손자 허도성(70)씨가 있다. 필자는 광복60주년을 맞아 허씨와 이메일로 대담을 나눴다. 허씨는 고국을 떠나게 된 이유, 조부가 독립운동에 나선 이후 가족이 겪은 수난사 등에 대해 소상히 답변을 보내왔다.
노년에 접어든 허씨는 현재 그리 넉넉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음은 허씨와의 대담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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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9월 일시 귀국 때의 허도성 선생(왼쪽), 허 선생의 조카 허벽씨(가운데), 필자. 서울 종로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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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도 | - 허 선생님, 안녕하세요. 세상이 좋아져서 강원도 산골에 앉아서 휴스턴에 사시는 허 선생님과 이메일로 대담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해외에서 광복 60주년을 맞는 소감을 들려주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광복'이라는 말을 들으니 몸살기 같은 오한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광복' 때문에 우리 집안이 4대에 걸쳐서 된서리를 맞았으니 말입니다.
언젠가 고국에서 광복절 행사를 마치고 순국선열 유족들과 식당에 들어갔지요. 마침 식당의 TV에서 광복절 행사 뉴스가 나오는데, 이갑성옹이 기념사하는 장면이 나오자 제 옆자리에 앉았던 유우석(유관순의 친오빠)씨가 말하기를 "길 닦아 놓으니 똥개가 먼저 지나간다"고, 점잖으신 입이 험구로 변하였습니다.
'이갑성, 저 자가 일본 헌병의 밀정 노릇하던 자인데 민족대표 33인에 끼였다고 해서 광복회장이 되더니 이제 기념사를 해?'
광복의 주역이나 그 후손들은 밀려나고 광복을 방해하거나 저지시키는 일을 한 민족반역자나 친일파들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으니 유우석씨가 분노할 수밖에 없었지요.
'광복 60년'이면 반백년하고도 십년이 지난 세월입니다. 이 긴 세월에 나라가 민족반역자를 솎아 내고 제대로 된 반듯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는데, 아직도 고국에서는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날뛰고 있다니 '광복'이 참으로 된 건지 순국선열 유족은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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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허위 선생에게 내린 건국공로훈장(대한민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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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허도성 | 친일파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다
- 허 선생님은 언제, 왜, 미국으로 건너 가셨습니까? "1978년 고국을 떠났습니다. 한 마디로 친일파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오랜 기간 동안 일제통치의 연장선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주로 친일파를 정부 요직에 기용하여 친일정국을 만들었고, 일제 식민사학자인 이병도, 신석호, 이선근 등이 우리 사학계를 주름잡았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우리 가족이 연명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할 수 없어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 조부이신 왕산 허위 선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른바 '을사조약'이 체결될 무렵 이완용, 송병준 일파들이 나라를 말아 먹었을 때 고종황제께서 친히 조부님을 발탁하셨습니다. 조부님은 정치가로서 국권회복에 투쟁하다가 하야한 후, 무력투쟁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전국의 의병을 조직하여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1908년 서울에 있는 일제 통감부를 깨트리고자 친히 의병대를 이끌고 진두지휘했습니다. 하지만 일제 헌병들의 신식무기를 제압치 못하고 경기도 연천에서 은거 중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서 감옥이 생긴 이래 제일 처음으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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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선생의 유묵,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은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 무신(1908년) 5월 22일 경성헌병대에 갇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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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허도성 |
| - 이후 왕산 선생 가족이 겪은 수난사를 간략히 소개해 주십시오. "1908년 조부님이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한 이후, 우리 임은 허씨 집안은 일제 순사와 밀정들에게 시달려서 고향 구미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임은 허씨 일족들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야반도주하듯 서간도로 망명했습니다.
저는 북만주의 눈보라치는 동짓달에 땅골막(웃막)에서 태어났습니다. 그후 저희 집안은 만주에서 이곳저곳 남의 집 곁방살이로 전전했지요. 가장이신 아버지는 독립운동하느라고 몇 년 만에 한번씩 어깨에 담요 한 장을 걸치고 나타나곤 했다가, 또 며칠 후에는 바람처럼 사라졌지요. 그야말로 불고가사(不顧家事: 가사를 돌보지 않음) 불고처자(不顧妻子: 처와 자식을 돌보지 않음)의 혁명가의 길을 걸어갔지요.
그 때 러시아 쪽으로 간 나의 숙부(허국) 가족의 근황을 몇 달 전에 들으니 지금 키르키즈스탄에서 트럭 운전수로 연명한다 합니다. 어찌 이런 수난이 우리 집안뿐이겠습니까? 언젠가 지금은 고인이 된 신수범(단재 신채호 선생의 둘째 아들, 작고)씨가 선친인 신채호 선생의 유고(遺稿)를 들고 와서 저에게 '이것 맡기고 어디서 돈을 좀 구할 수 없겠느냐'고 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국에서 건강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박 선생님도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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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나라에 가서 그저 일거리나 하나 얻었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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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운전사로 떠도는 허위 선생 손자 허블라디슬라브씨 근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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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르키즈스탄 비쉬켁에 사는 왕산 손자 허블라디슬라브, 트럭기사로 일하고 있다 |
| 키르키즈스탄의 KBS 통신원 전상중씨와 필자는 주로 왕산 집안의 일로 지난해부터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지내고 있다. 아래글은 전상중씨가 보내준 메일로 중앙아시아를 떠돌고 있는 왕산 허위 선생의 손자 허블라디슬라브씨의 근황이다. 필자가 원문을 다소 축약하였음을 밝힌다...필자 주
안녕하세요? 키르키즈에 살고 있는 전상중입니다.
구한말, 의병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인 허위 선생의 손자 ‘허블라디슬라브’는 중앙아시아를 떠돌다 이곳 키르키즈스탄의 비쉬켁에 정착하여 살고 있습니다.
허위 선생이 장렬하게 순국하신 후에 허위 선생의 가족들은 큰아들 허학(1890~1941)과 작은 아들 허국(1899~1970)이 고향에서 일본의 압제에 견디지 못하고, 1910년대에 중국 동북지방으로 망명하여 살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러시아로 이주했습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에 떠밀려 우즈베키스탄으로, 다시 러시아로, 북한으로, 중국으로, 키르키즈스탄으로 아직도 왕산 유족들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허블라디슬라브는 1951년생이며 지질학자로 일하다가 소련체제 붕괴 후에 먹고 살길을 찾느라고 지금은 이곳에서 낡은 트럭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내가 만난 그는 거창하게 집안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간절한 소망은 "잘 사는 할배(할아버지) 나라에 가서 그저 일거리나 하나 얻었으면…"라고 말하는 아주 원초적인 소망으로 가솔의 끼니를 걱정할 뿐이었습니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 끼니 걱정을 하는 초라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모습을 보면서 고국에서는 아직도 부친의 친일행적을 속이고 3대가 떵떵거리며 사는 위선자들의 소식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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