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는 한국의 모 여자 교수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미국인들이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한국인이 계산에 빠르고, 영리한 편에 속한 이유가 구구단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은 유치원 어린이들도 구구단을 쉽게 외운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여줌으로써 칭찬과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국의 여자 교수를 몇 차례 지켜보던 미국 교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미국에서 구구단을 외우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그 여자 교수는 미국 교수의 질문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직감하고 되물었다. “그럼 구구단을 외우도록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까?”
미국 교수가 다시 말했다. “김 교수가 학생은 구구단을 당연히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물어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 교수는 미국 교육이 잘못이거나, 한국이 미국보다 월등하다는 것으로 비약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미국 교수의 이야기. 첫째,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은 각자 서로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구단의 원리는 누가 봐도 간단합니다. 그런데 어린이가 “2x2=4부터 9x9=81”까지 입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줄줄 외우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겠습니까. 한마디로 지금 전 세계 어린이들이 구구단을 열심히 외우는 수준이라면 지구의 앞날은 암담하다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구구단을 암기하면 그만큼 자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빼앗긴 것이 됩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생각할 기회는 하루든, 일 년이든, 평생이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각 개인의 소중한 시간을 결과가 훤한 것을 외우는데 소모하는 것은 사고력과 창의력과 잠재력을 동시에 망치게 됩니다. 평생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더라도 단순히 과거의 것들을 알고만 끝난다면 이는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인류 미래적인 관점에서 엄청난 낭비입니다. 특히 한정된 인간(어린이)의 시간 투자(할애)가 각 개인의 가치 신장과 상호 협력과 발휘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결실과 전체적 보람으로 집중되지 않고 개인 암기나 이익에 한정되는 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만일 한국인들이 암기에 치중하다가 끝나버리는 실상의 전반을 제대로 확인한다면 아마 경악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한국처럼 정답 맞추기에서 끝나지 않고 상호 비교와 과열 경쟁까지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교육을 동시에 거스르고 망치는 짓입니다. 물론 미국에서도 일부 교사들은 구구단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우도록 시키지는 않습니다. 만일 학생이 구구단을 외우는 시간 동안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 삶의 의미나 가치, 다양한 상상에 투자했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존엄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했다면 한국은 지금쯤 세계에서 최상의 선진국과 동시에 모범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삶은 9x9=81 이란 정답보다 9를 아홉 번 더함으로써 과정에 충실한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은 곧바로 정답을 얻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정해진 정답(결과)을 빨리 얻는 것보다 과정에 충실하면 결과(정답)는 얻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수학은 정답만 맞추게 하지 않습니다. 풀이(과정)에 충실해야 하며 100점 만점에 150점도 주기 때문에 수학에서 100점 이상 받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는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충실한 것을 존중해주는 의미입니다. 또한 선생에 따라서는 풀이(과정)는 맞았는데 실수로 정답을 틀린 경우는 1-2점만을 깎고 점수를 인정해주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풀이가 맞아도 정답(숫자)만 틀리면 0 점을 받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과정이 어떻든 커닝을 해서도 정답만 맞으면 됩니다. 한국인들이 투기든, 일확천금이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심지어 “개 같이 벌어서..”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국 사회는 남의 지식만을 얻어서 차지한 지위, 학벌, 연줄만으로도 사회공헌도에 관계없이 평생이 결정되거나, 기득권까지 형성해서 굳어져버리는 사회입니다. 결국 속담에서처럼 "개 같이 벌어들인"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며, “개 같은 사람들”이 방치되어왔으며, 다른 국민들도 “개처럼이라도 벌어보려고” 경쟁하고 비교하고 우열을 가리는 등 비열한 국민성과 사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국인들 스스로 “콩 나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알면서도 “개 같이 버는 사람”을 “정승처럼”으로 표현해주는 기막힌 나라입니다.
셋째, 개인이 지닌 존엄성은 매우 다양하고 특이하고 절묘합니다. 그런데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을 다수가 동시에 외우거나, 이를 목적으로 일률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참다운 교육이 아닙니다. 이는 교사가 학생에게 사고력(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초라한 역할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육은 교사와 학부모와 교육 당국이라는 삼박자의 수준이 일치한 결과이며 결국 국민성과 사회분위기에서 심각한 부작용들로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다수가 함께 노력해서 투자(공부, 교육)한 대가로 양적인 생계 해결에 그쳤으며 국민의 질적인 향상과 보람으로 향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경쟁과 비교에 교육이 집중됨으로 인해서 영리한 머리들이 오히려 자기 목적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바보 같은 교육입니다. 유기적 시스템인 민주주의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능력이 항상 미래를 위한 종합적인 잠재력과 창의력으로 집결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아예 한국은 간단한 암기나 개인 실력(성적)으로 우열을 가려서 더욱 큰 사회로 나가면 결국 낱낱이 개인 목적(생계, 호의호식, 입신양명, 부귀영화 등)으로 흩어져버릴 정도로 얄팍한 의식수준이고 교육입니다. 때문에 한국은 오밀조밀한 인구나 인간관계에 비해서 사회와 역사를 자율적으로 바꾸고 만들고 향상시킬 자질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물론 이는 과거 조상 대대로 문제였기 때문에 오직 국민의 책임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교육까지 받은 국민들이 해결할 몫인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한국의 국민성이라면 차라리 육체에 의존해서 개인의 근면과 성실로 살아가는 농경지 사회가 합당할지도 모릅니다.
어린이는 자신들의 단합된 존엄성이 창의적인 목표와 창조적인 공통 작품으로 모아지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함께 살아야 할 가장 가까운 철부지 친구끼리 서로 경쟁하고 비교해서 우열을 나누는 것부터 익혀지면 차라리 배우지 않음만 못합니다. 물론 원인 제공에는 교육 정책도 문제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후진적인 국민의식입니다. 이런 비교와 경쟁은 유교, 불교, 기독교, 천주교,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출처불명의 것들입니다. 이런 국민성은 과거 무지와 빈곤과 차별과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을 정리하지 못한 채 숨기고 위장했던 국민 개개인의 비겁한 의식수준 그대로입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후진국들은 지도자로 나선 사람이나, 정치인이나, 공무원이나, 이를 비판하는 언론이나, 시민단체나 일반 국민 역시 민주주의에 무능하고 자질이 떨어지는 등 도토리 키 재기 수준입니다. 한국 역시 산적한 문제들이 계속 꼬여서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정리하기 어려우며 정리할 능력도 부족합니다. 심지어 진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조차 없어서 비난과 분열과 원망 속에 더욱 엉망이 되고 있습니다. 단지 미국에 와서 수박 겉핥기로 공부한 사람들이 많지만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한 지식 위주입니다.
넷째, 인간이 개인적으로 타고난 머리는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100자리 수 곱하기 100자리 수를 개인 머리로 풀어낼 사람은 없습니다. 설사 이를 풀더라도 수학이나 과학의 깊이, 계산기의 속도로 따지면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구구단을 아무리 잘 외우더라도 엄청난 과학 단위나 공식이나 원리나 속도로 보면 지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수없이 복잡한 계산과 다양한 공식과 정교한 원리들을 잘 활용하고 응용하는 능력을 배워야 합니다. 인간의 짧은 머리로 간단한 수학 문제를 풀어서 점수를 받기보다 수많은 공식과 원리를 실제 목적에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복잡 난해한 계산을 자기(개인) 머리로 기어코 풀어서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이미 사회 공헌보다는 타인과의 비교와 경쟁과 이기심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어쨌든 미미한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답답한 자기 목적(자기 이익과 계산)보다는 다양한 원리를 응용하고 협력해서 더욱 큰 과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세상을 더욱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다섯째, 어떤 나라(A)에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이 천만 명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이웃 나라(B)에는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은 별로 없지만 다양한 원리를 활용하고 응용하는 사람이 천 명이 있다고 합시다. 이 때 A나라는 취직을 잘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선진국에 진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B나라는 개인적 능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쉽게 선진국 진입이 가능합니다. 또한 A나라는 훌륭한 능력이나 자질에 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B나라는 불필요한 낭비 없이 자기 분야로 나가기 때문에 국가적인 소모는 많지 않습니다. 좋은 사회란 우수한 개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생산적이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체제를 잘 갖추느냐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국은 전반적으로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구조와 미래 가치를 외면해왔습니다. 이는 과거 신분 사회였던 것을 암기와 지식과 학벌로 재료만 바꿔진 셈입니다. 한국은 거의 모든 국민이 대학을 나왔지만 전체 모습은 점점 선진국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취업해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이 많아도 수학이나 과학이나 학문의 발전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때문에 세계사에 이바지는커녕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거나,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까지 노출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동남아에서도 점점 뒤쳐질 정도여서 인간의 질적 삶과 가치는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구구단으로 시작되어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한국인의 우수한 머리를 아까워하는 나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한국인들이 무지와 빈곤에 너무 오래 갇혔던 나머지 근시안적인 목적과 욕심에 치우쳤습니다. 그래서 매우 우수한 지능으로 세계를 이끌어가기보다 작은 승부와 돈벌이에 급급하다 함께 몰락하면서 망국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수학과 철학 등 학문은 기원전부터 생겨나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수준과 의식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정도와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교육은 분명 정책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러나 그런 정책은 그 이전의 국민성이 반영 집약되어 만들어집니다. 문제가 터지면 정책을 원망하지만 사실은 그를 방관했던 국민성이 원인입니다. 때문에 국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국민의식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부작용을 당하면서도 책임전가나 원망과 분열과 구경꾼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겪어본 한국인들은 구구단을 외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 자랑처럼 여겼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은 구구단을 외우느냐 외우지 못하느냐에 의해서 부모에게 꾸중을 듣거나 스스로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수준에서 형성된 것이 한국의 국민의식이며 총체적으로 한계에 빠진 것입니다. 존엄한 인간이 구구단에게 눌려 지내거나, 욕을 먹거나, 위축되거나, 자랑처럼 여기는 것은 존엄성이나 교육을 거론할 자격도 없습니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구구단이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의 폐해는 보통으로 심각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국민의식의 건전한 기반을 말살시켜버린 요소였습니다.
특히 개인 천성(지능), 과거 성과로 평생을 편히 먹고살겠다는 생각이 바로 기득권 의식이며, 기득권 사회이며, 기득권 문화입니다. 따라서 한국은 기득권 세력은 일부일지 몰라도 기득권 사고나 기득권 습성은 전체 국민이 거의 모두 동일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시간이 흐르고, 인물이 바뀌고, 지식을 동원하고,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도, 결국은 한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 지금도 한국에서는 각종 문제를 보면서도 총체적인 원인 분석이나 실질적인 대안 없이 잘못만을 따져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부작용과 잘못과 병폐가 누적되고 쌓여서 엉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한국에 상주하는 동안 나를 아는 사람들을 상대로 계속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배우려고 하거나, 반성하거나, 진지하게 경청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가 나와서 입장이 곤란해지면 변명과 합리화와 감정적인 자존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대화 진행도 어렵습니다. 나는 그간 많은 한국인들을 가르치며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열심히 가르쳐주면 오직 자기 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배움과 동시에 곧바로 자신이 얻을 이익(점수, 대학, 취직, 결혼, 출세)으로 연결시키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12년에서 16년을 배워서 알기만 하면 곧바로 얻고 차지하고 출세하고 패거리를 조성해서 평생 떵떵거릴 정도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교육은 빵과 직업을 위해 지식으로 무장시키는 위험한 교육이기도 합니다.
나는 한국의 교수나 제자나 친구들에게 “당신은 한국에서 지식인에 속하는데 사회 전반에 그토록 무관심할 수 있냐?”라는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이에 대한 솔직한 내 심정은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어쨌든 후진국은 교수, 정치인, 공무원, 학생, 국민의 수준은 백지장 차이입니다. 지금 당장 최악의 빈민국가에서 공부를 가르쳐서 점수와 순위를 따지더라도 서로 백지장 차이 수준일 것입니다. 사실은 상류층과 지식층으로 올라갈수록 빗나간 관행과 권위와 특권까지 물들어 있기 때문에 누굴 기대할 것조차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나와 오랜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엉뚱하게도 정치인이나 공무원을 비난하거나, 갑자기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들먹이거나,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며 스스로 결론을 내립니다. 심지어 내내 강조했던 불만이나 문제조차 자기 논리로 뒤엎어버립니다. 이런 태도는 사회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관심과 책임과 의지와 정리가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나라의 주인이 왕이었던 왕권주의에서 마치 평민이나 머슴처럼 무책임하게 길들여진 채 살아버린 습성의 연장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일본의 식민지 생활에서 노예근성까지 얻은 이후 강대국의 탓만을 해왔던 대가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국민들은 마치 구경꾼인 것처럼 “귀찮고 피곤한 것은 싫다”면서 무능으로 일관해왔습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공격과 비난과 불신과 원망은 적극적입니다. 하지만 연구와 반성과 책임에서는 구경꾼이나 철부지 수준입니다. 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오늘날을 예고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국민이 반성하지 않으면 이후 국민의 절반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할 것이며, 희망이나 미래가 없이 단지 먹고사는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며,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축이 되어줘야 할 서민들이 소모품 구실밖에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일러주었습니다. 그간 나를 거쳤던 한국의 지식인들이 한국에서 과연 어떤 자세와 태도로 임하는지는 보고 듣지 않아도 눈에 훤합니다. 그들은 내가 아무리 강조해줘도 반성하는 기색 없이 오직 머리로만 받아들여서 자기 무지 해결, 자기 지식 보충, 개인의 이익, 변명이나 구실로 여겼습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한국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 평소 생각했던 것, 서로 대화할 때의 내용이나 약속, 실제 행동이 전혀 다른 위선자 집단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나는 처음에 한국을 좋아했고 많은 애정을 쏟아서 충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너무나 영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눈앞에서 잠깐 동안의 태도(처세)뿐 진정으로 달라지고 개선된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최소한의 봉사나 기부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나와의 만남을 슬슬 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영리한 머리가 어두운 과거와 빗나간 환경 탓에 엉뚱한 쪽으로 발달된 것입니다. 결국 한국인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고, 우열을 따지고, 당락을 결정짓고, 꾸중 듣고, 매까지 맞고, 능력으로 인정받고, 지위를 차지하고, 세력이 형성되고, 지식인이나 전문가로 불러지는 등 답답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모두 함께 개과천선하는 방법뿐입니다.
변명 한 마디 못한 한국인 여교수 한국의 여자 교수는 입도 뻥끗 못하고 듣기만 했다. 자신도 역시 다양한 변명과 합리화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이해는 물론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와 세상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 너무나 명확하고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었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정리해서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에게는 반론이나 변명이나 합리화할 틈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의 여자 교수는 그 교수에게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문제와 방안을 계속 배우겠다.”고 부탁해서 승낙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이나 미국에는 세상과 인생과 자기 분야에 대한 포괄적인 애정을 바탕으로 월등한 철학이 동반된 학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무의미하고 답답한 문제에서 훨훨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 평판과 유명세나 권위보다 미국이라는, 전 세계라는, 학문의 방향과 발전이라는, 지구의 장래와 후손들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대단한 역할과 책임을 동시에 수행해주고 있다. 학자들이 연구비를 착복한다든지, 논문심사에 대접을 받고 용돈을 받는다든지, 잘못들을 주변에서 뻔히 알면서도 방관 묵인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절대 책임을 지는 법이 없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겨우 역할론 수준에서 머문 채 기회주의적 활동에 맴돌고 있다. 그래도 지식인의 무능과 무책임은 신랄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인의 침묵은 국민과 나라의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침묵을 깨뜨리는 방법은 계속 호소하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첫댓글한국인 여교수가 변명을 왜 못했는지 이해가 가질않는군. 구구단 그거 외우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외우는 시간 동안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 삶의 의미나 가치, 다양한 상상에 투자한다는니 개소리 지껄이는데 그걸보고 가만있나 구구단 하나가지고 별 개 잡스러운거 다 끄집어내서 장황하게 씨불인거밖에 안보인다. 이거 출처는어디냐? 한국의 교육문화가 포괄적으로 변화를 꾀해야함에는 동의하나 구구단 하나에 저런 개 잡소리 다 씨불이는 우리 미쿡 교수님도 안습이구나. 구구단을 앞세워 뭔가 한국교육이 미국교육보다 상위개념에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발언에 자랑스러운 우리 미쿡프로페서께서 흥분 하셨구만.
하지만 한국에 대한 이해는 물론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와 세상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 너무나 명확하고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었다.-마지막에 이문구 큰 웃음 선사하네 청소년 연구하는데 흥분해서 할말 안할말 다끄집어내놓고 뭐 명료? 명확? ㄲㄲ 글 내용으로봐서 한국인 교수도 잘한건 없어뵈지만 이글 전반에 싸질러놓은 미쿡인 교수 발언내용/논리전개-해석방식/태도 하나하나 구려 터졌구만
내가 생각하는 증거 1 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는 한국의 모 여자 교수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 미국 사람이 본, 중국 지식인이 본, 한 외국 잡지의 식으로 나오는 전형적인 불특정한 '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 우리나라에서 청소년 연구하는 교수, 그것도 여자면 누군지 쉽게 나온다. 근데 누군지 말을 못 한다.
증거 3.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구체적인 부분까지 기억하지 않는다.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명사 같은 주요 단어 이외에 부사에 마침표까지 포함하여 세세한 토씨 하나 그대로 옮겼다. 지금 여기 있는 훌리 중에서 최근 일주일 안에 진지하게 이야기 했던 내용을 글로 써보라. 자세항 상황 묘사에 토씨까지 그대로 옮기는게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다.
증거 4. 떡밥이 잘 물린다. 원인과 결과가 바뀐 증거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떡밥이 잘 물린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떡밥을 문 물고기...아니 물방개 같은 경우에는 사고와 논리가 상당히 바르고 뛰어난 편이나 떡밥의 구분 없이 잘 무는 편이다. 떡밥 구분 능력이 없다기 보다는 떡밥을 구분할 의사가 없는 쪽이긴 하나 어쨌든 닉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ㅋ 낚시꾼 입장에서 어리버리하게 민족이니 여자 이야기면 나오는 무조건 무는 물고기 보다는 물방개가 확실히 더 가치 있다.
딴건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는데 증거 2에 있는 1인칭과 3인칭 부분 좀더 자세히 설명해볼게. 글 시작에는 한국 교수와 미국 교수의 대화를 관찰하는 3인칭 시점이었는데 미국인 교수가 말하는 부분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뀐게 보이지? 그런데 마지막 문단에서는 다시 한국인 교수를 관찰하는 3인칭 시점으로 바꼈지? 소설의 ㅅ 자도 모르는 낚시꾼이 인칭을 저딴 식으로 바꾸니까 저질 소설이 나오지. 그리고 대화하면서 문단 구분하고 말하고 듣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냐? 세미나나 학술대회 가봐도 발제문이나 논문 읽을 때나 문단 구분되지 프리젠테이션이나 질의응답 시간만 가도 문단은 커녕
토론? 서강대 총장 앞에서 토론 패널로 나서 본 적도 있고 한국수사학회 학회장한테 상도 받아봤다. 이 정도면 토론 참가자로서 자격이 부족하니? 그리고 병신아, 근거와 전제가 사실인냥 꾸미는 구라인데 저걸 믿으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교수니 뭐니 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 말하지 미국 교수와 글쓴이를 동일화시켜서 여자와 한국 교육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건 뭔데? 인터넷에서는 지방대 시간강사도 교수가 되는 세상이라두만 이건 뭐 소설가 새끼 보고 그 사람이 교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네.
첫댓글 한국인 여교수가 변명을 왜 못했는지 이해가 가질않는군. 구구단 그거 외우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외우는 시간 동안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고민, 삶의 의미나 가치, 다양한 상상에 투자한다는니 개소리 지껄이는데 그걸보고 가만있나 구구단 하나가지고 별 개 잡스러운거 다 끄집어내서 장황하게 씨불인거밖에 안보인다. 이거 출처는어디냐? 한국의 교육문화가 포괄적으로 변화를 꾀해야함에는 동의하나 구구단 하나에 저런 개 잡소리 다 씨불이는 우리 미쿡 교수님도 안습이구나. 구구단을 앞세워 뭔가 한국교육이 미국교육보다 상위개념에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발언에 자랑스러운 우리 미쿡프로페서께서 흥분 하셨구만.
하지만 한국에 대한 이해는 물론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와 세상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 너무나 명확하고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었다.-마지막에 이문구 큰 웃음 선사하네 청소년 연구하는데 흥분해서 할말 안할말 다끄집어내놓고 뭐 명료? 명확? ㄲㄲ 글 내용으로봐서 한국인 교수도 잘한건 없어뵈지만 이글 전반에 싸질러놓은 미쿡인 교수 발언내용/논리전개-해석방식/태도 하나하나 구려 터졌구만
훌천에서 '학벌패거리' 라는단어 사용하는건 훌리건 퇴치밖에없지?? 글 내용으로봐서 훌리건퇴치 세컨쯤되는새끼아닌가 생각했었다. 네놈에게 무식하다는소리 들으니 기분이 새롭구나 ㅋㅋ 네놈인걸 안이상 별로 대화를 나누고싶지않군 풉... 이거 출저는어디냐 훌퇴야?
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ㅔㅔ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네놈은 저정도 글도 못쓰면서
이걸 보고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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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소설 같네.
내가 생각하는 증거 1 청소년 문제를 연구하는 한국의 모 여자 교수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 미국 사람이 본, 중국 지식인이 본, 한 외국 잡지의 식으로 나오는 전형적인 불특정한 '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 우리나라에서 청소년 연구하는 교수, 그것도 여자면 누군지 쉽게 나온다. 근데 누군지 말을 못 한다.
증거 2. 1인칭과 3인칭, 구어체와 문어체의 섞임. 소설의 경우 보통 시작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의도적으로 객관적인 눈을 가진 것처럼 보이려 애쓰나 소설을 쓰는 중간에 소설가가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1인칭으로 바뀐다.
증거 3.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구체적인 부분까지 기억하지 않는다.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명사 같은 주요 단어 이외에 부사에 마침표까지 포함하여 세세한 토씨 하나 그대로 옮겼다. 지금 여기 있는 훌리 중에서 최근 일주일 안에 진지하게 이야기 했던 내용을 글로 써보라. 자세항 상황 묘사에 토씨까지 그대로 옮기는게 가능한가? 절대 불가능하다.
증거 4. 떡밥이 잘 물린다. 원인과 결과가 바뀐 증거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떡밥이 잘 물린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떡밥을 문 물고기...아니 물방개 같은 경우에는 사고와 논리가 상당히 바르고 뛰어난 편이나 떡밥의 구분 없이 잘 무는 편이다. 떡밥 구분 능력이 없다기 보다는 떡밥을 구분할 의사가 없는 쪽이긴 하나 어쨌든 닉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ㅋ 낚시꾼 입장에서 어리버리하게 민족이니 여자 이야기면 나오는 무조건 무는 물고기 보다는 물방개가 확실히 더 가치 있다.
물방개 정도면 사고와 논리가 상당히 바르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넌 그렇게 생각 안 하냐? 그리고 강아지 너는 누구냐?
너가 저 소설 썼냐? 본인이 누군지 제대로 밝히지도 못 하고 쥐새끼 마냥 내가 누군지는 알거 없다면서 도망치면서 무논리니 뭐니 짖는거야? 개처럼 짖을거면 강아지라고 닉 계속 하고 쥐새끼처럼 숨을거면 쥐새끼로소이다라고 닉 바꿔라.
딴건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는데 증거 2에 있는 1인칭과 3인칭 부분 좀더 자세히 설명해볼게. 글 시작에는 한국 교수와 미국 교수의 대화를 관찰하는 3인칭 시점이었는데 미국인 교수가 말하는 부분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뀐게 보이지? 그런데 마지막 문단에서는 다시 한국인 교수를 관찰하는 3인칭 시점으로 바꼈지? 소설의 ㅅ 자도 모르는 낚시꾼이 인칭을 저딴 식으로 바꾸니까 저질 소설이 나오지. 그리고 대화하면서 문단 구분하고 말하고 듣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냐? 세미나나 학술대회 가봐도 발제문이나 논문 읽을 때나 문단 구분되지 프리젠테이션이나 질의응답 시간만 가도 문단은 커녕
토론? 서강대 총장 앞에서 토론 패널로 나서 본 적도 있고 한국수사학회 학회장한테 상도 받아봤다. 이 정도면 토론 참가자로서 자격이 부족하니? 그리고 병신아, 근거와 전제가 사실인냥 꾸미는 구라인데 저걸 믿으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교수니 뭐니 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 말하지 미국 교수와 글쓴이를 동일화시켜서 여자와 한국 교육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건 뭔데? 인터넷에서는 지방대 시간강사도 교수가 되는 세상이라두만 이건 뭐 소설가 새끼 보고 그 사람이 교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네.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 수두룩하게 나오는데 무슨 얼어죽을 문단 구분은 문단 구분....
나 훌퇴랑 상관없거든??????
일단 저 글 쓴 사람 미국사람 아니다에 한표 미국놈들이 우리나라에 저렇게 관심이 지대하면서 우리사회의 문제를 콕콕 찝어서 자세하게 설명할리가 없다. 한국학 교수래? ㅋㅋㅋ 소설 같은걸 우리나라사람이 쓴.
포괄적인 개념이 너무나 명확하고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었다. <... 어딜봐서?
구구단하나로시작해서 지랄을떨고있네.
미친새끼 화살 쏘아놓고 과녁 그리긴 이새끼나 훌팩이나 마찬가지네 하여간 김승기 븅신새끼..
뭐래니 개병신티내냐
저 미국교수가 하는소리는 왜 기초적인걸 해야하냐 응용할줄을 알아야한다 이런소리 같은데..(대충 읽어보니까..)그럼 자연과학부 다없에고 다 공대만들지??
.............우리 전후세대가 구구단도 외우지 못했다면.. 무슨 머리로 포스코와 삼성전자를 차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