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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드라마 제중원을 즐겨 봅니다. 원래 메디컬 드라마를 좋아하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드라마를 좋아해서... 장희빈 류의 드라마는 말고...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내용 전개가 마음에 들고 특히 제 마음에 꼭 들었던 것은 고종 당시 제중원을 배경으로 낯익은 선교사들이 나와서 극의 재미를 더해 주어서요...
학교 때 배운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등...거기에 나오는 헤론, 호돈, 에이비슨(어비신) 등은 새롭게 떠오른 인물들이었어요.
그래서 개화기 당시 선교사들을 찾다가 헤론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 깊은 감동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다시금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등 많은 선교사님의 생애를 읽다가 그만 눈물이 나고 말았지요...
당시 선교사님들은 조선이 이렇게 복음화될 줄은 몰랐을 거예요...
1885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복음의 깃발을 들고 제물포에 상륙한 지 이제 1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네요.
예수께서 그러하셨듯 그분들의 피가 한국 복음의 기초를 다져 놓았지요.
그러면서 제가 너무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은 좀더 믿음의 선진들의 삶에 대해 묵상해야겠어요...그리고 이번주 안으로 양화진에 한번 가보려구요...
주님의 고난에 기꺼이 목숨으로 동참한 그들의 삶의 체취를 느끼고 싶네요...
그리고 국토순례 때 우리 아이들도 먼저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연구하고, 그 체취를 함께 느꼈으면 좋겠어요.
아래 글은 제가 조사한 헤론의 삶과 드라마에 나오는 백정 출신 의사의 모델이 된 박서양과 제중원에 대한 간략한 소개예요..
존 헤론의 삶
영국태생의 존 헤론(John W. Heron.)은 미국으로 건너가 27세이던 1883년, 테네시종합대학교 의과대학을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교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지만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위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보낸 이수정의 편지내용이 실린 선교잡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를 읽으면서 크게 감동을 받았다. “미국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슴깊이 새기며 조선을 향한 불같은 선교적인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밤에 환상가운데 마케도니아사람이 손짓하는 것을 보고 아시아에서 유럽을 향한 사도바울의 발걸음이 유럽을 찬란한 기독교문화로 꽃피우게 했을 뿐 아니라 세계선교의 발판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론은 약혼녀까지도 병원이나 약국도 없는 가난하고 무지하며 미개한 나라에 왜 우리가 가야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그의 굳은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884년 봄, 그는 최초로 장로교 조선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후 일본으로 가서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의 역할을 한 이수정을 만났다. 조선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히며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이 1진으로 조선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침내 헤론선교사 부부는 1885년 6월 21일 제2진으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한편 ‘갑신정변’으로 생명의 위기에서 민영익을 서양의술로 구해낸 알렌은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의 초대원장이 되었다. 그 후 알렌이 고종의 주치의가 되면서 그 뒤를 이어 1887년, 헤론이 제2대원장이 되었다. 그 후 병원이름을 ‘제중원’으로 바꾸고, 특권층뿐만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한편 헤론은 1890년 6월 25일, ‘한국선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여 기독교 문서출판을 제일 먼저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쁘게 5년간을 격무에 시달리던 헤론은 가족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휴가를 갔는데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밤중에 제중원에서 말을 몰고 달려온 사람이 죽어가는 위급한 환자가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즉시 발길을 재촉하여 제중원을 향하였다. 비를 맞으며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제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끝내 전염성 이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하나님께 맡기고 1890년 7월 26일,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뜻밖의 슬픔을 당한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의 논의 끝에 헤론을 조선 땅에 묻기로 하고 사저에 가매장하였다가 고종의 윤허로 양화진이 외국인묘지로 지정됨에 따라 1893년 10월 24일 양화진에 잠들게 되었다.
이로써 헤론은 양화진에 첫 번째로 묻힌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조선선교사역 5년은 조선백성들에게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이었다. 오늘날 한국이 5만 교회 1000만의 성도로 성장한 것은 ‘누가 나를 위해 가겠느냐?’ 는 주님의 물음에 용감하게 나섰던 헤론 선교사와 같은 이들의 희생의 대가이다. 오늘도 세상의 소리 앞에 귀기울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헤론선교사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일깨우고 있다.
헤론은 이렇게 한국의 복음화를 위하여 의료 선교에 뛰어 들었고 그는 그렇게 이질에 걸려 질병으로 숨졌다. 그는 5년간이라는 짧은 선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뼈를 묻었다. 그는 조국보다도 자신의 가족보다도 더욱 한국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서울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같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많은 선교사들의 묘비에는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신들의 묘비에 적으면서 순교의 길에 들어갔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D. 언더우드
"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B. 헐버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A.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켄드릭
이곳에는 선교사들을 따라왔다가 부모와 함께 순직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며, 채 꽃피우지 못하고 부모도 함께 한국에 묻힌 아이들도 많다. 이곳에 한국 복음의 선교를 위하여 숨진 사람들의 묘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제중원
1885년 서의(西醫) N. 앨런이 고종의 윤허를 받아 활인원(活人院)과 혜민원(惠民院)을 개편해 한성(漢成)의 제동(齊洞)에 왕립으로 세운 광혜원(廣惠院)의 새로운 이름.
10년이 지난 1908년(융희 2) 6월에 처음으로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것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교의 시초였다. 에이비슨이 본국에서 구한 기금으로 1904년 9월 4일 세브란스 병원을 신축하고 진료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제중원의 명칭은 실질적으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의 서양의학은 왕립병원인 광혜원·제중원 시대를 거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백정 출신 의사 박서양
국내에서 배출된 첫 의사이면서,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활약하다 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 펼친 실존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백정 의사’ 황정은 제중원 초기(1885년)에 알렌과 함께 일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황정의 모델이 된 박서양은 사실 제중원의 뒤를 이은 세브란스의학당의 1회 졸업생으로서 그가 세브란스의학당에서 배운 시기는 1904년, 즉 20년 뒤의 일이다. 극적 재미를 위해 극작가가 20년 뒤의 인물을 제중원 초창기로 ‘시간이동’시킨 결과다. 제중원 초창기에 알렌을 도운 인물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약 처방을 할 수 있는 조선인’이 한 사람 있던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실존 인물 박서양은 백정 박성춘의 아들이다. 박성춘은 1893년 당시 제중원을 맡고 있던 에비슨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감화돼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회를 다녔다. 당시 에비슨은 편지에서 “박성춘이 백정 친구를 교회로 많이 데려와 사람들이 ‘백정교회’라 부른다”고 하기도 했다. 아버지 박성춘은 아들을 에비슨에게 부탁하고, 에비슨은 박서양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인품을 본 뒤에야 세브란스 입학을 허락한다.
박서양은 1908년 세브란스의학당 1회 졸업생 중 한 명으로, 한국 최초로 의사 면허장을 받으며, 이어 모교에서 전임 교수로 화학·해부학을 가르치고 외과 환자를 진료하다가, 1918년 간도로 독립운동에 나선다. 백정에서 한국이 배출한 최초의 서양 의사를 거쳐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 아닐 수 없다.
2008년 박서양은 광복 63주년을 맞아 항일 의료활동을 전개한 공로로 국가보훈처가 주는 건국 포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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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저도 드라마제중원..집에서 볼 수 없을 때는 핸드폰 DMB로도 봐야하는 애시청자거든요.^^*
요새 참 재밌죠.ㅎㅎㅎ
감동입니다.
우앙...저두 제중원 욜심히 보는데... 이러한 숨은 드라마가 있었군요... 정말 하나님께서 기획하시는 드라마는 결국 우리의 역사로군요 감동과 환희가 심장을 뛰게 하네요 글구 덕분에 선교사님 이름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쌩유~
써니샘 TV를 잘 안보는데 제중원 봐야겠네요!!감사해요...
써니샘, 감동입니다. 감사^^ 양화진은 신현호목사님이 두레초등부를 섬길때 우리 초둥이들과 모든 샘들과 함께 두어번정도 다녀온 기억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서교동에 위치한 서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양화진에 대한 어렸을 때의 무수한 소문을 듣고 자랐지만 이렇게 자료를 올려주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시는 많은 선인들을 기리면서~ 써니샘덕분에 미국에 계신 신현호목사님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