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아름다워(112) - 일본의 최남단을 다녀와서
1. 애환이 서린 현해탄을 건너며
지난주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의 규슈지방을 4박5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때는 장마철, 한반도의 장마전선이 바다건너 일본까지 뻗치고 있어서 규슈지방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가까운 이웃임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규슈지방 여행은 이번이 일곱 번째다. 1994년 여름, 우리대학의 연수행사로 처음 돌아본 것을 비롯하여 조선일보사 주관의 일본에 뿌리내린 한국문화탐사, 교회어린이들과의 체험학습, 양로원 식구들과의 바깥나들이, 가족들과의 휴양 등 여러 형태로 규슈의 관문인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주로 규슈의 북쪽지방을 다녀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제식민시절에 한일 간의 주된 통로인 부산 - 시모노세키 항로를 거쳐 규슈남쪽의 미야자키현과 가고시마현을 돌아보는 페키지 여행에 나선 것이다. 여행사가 정한 행사 명칭은 국내의 모창가수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곁들인 가수 이벤트란다.
우리 일행(나와 아내, 누님과 처제)은 7월 5일(화) 낮에 각기 서울, 대구, 광주를 출발하여 오후 다섯 시 부산역에서 합류한 후 오후 여섯 시 넘어 부산항터미널에서 시모노세키 행 여객선 하마유호에 승선하였다. 길이 160m, 폭 50m에 16000톤의 큰 배는 정원이 460명이라는데 탑승인원은 200명 남짓, 지난 3월의 동일본대진여파로 이용자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준비해간 김밥과 라면, 과일 등으로 저녁식사를 들고 TV와 신문을 보고 있노라니 저녁 9시 넘어 배가 출항을 한다. 11시경에 취침하여 잠을 깨니 새벽 네 시, 선실 밖으로 나와 현해탄의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난간에 서서 상쾌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선대들이 온갖 애환과 시름을 안고 건넜을 해협을 응시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때에 맞춰 선내에 비치된 국제신보에는 현양(검은 바다)이라는 제목으로 현해탄을 설명한 글이 실려 있다.
'현양은 검은 바다라는 뜻. 부산 코앞, 규슈의 너른 앞바다를 부르는 이름이다. '검은 바다여울' 현해탄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바다가 검은 까닭은 쿠로시오(흑조) 탓이다. 필리핀 루손 섬에서 방향을 튼 북적도 해류의 생명 넘치는 검푸른 물결이 이 바다를 지난다. 탄(여울)은 물살이 세찬 곳을 이르는 말. 부산과 규슈 사이에 해협이 있어 갑자기 좁아지는 바람에 현해탄물살은 무척 거세다. 일본의 대륙진출을 노리던 우익지도자 도야마 미치루가 만든 조직이름이 현양사, 대륙으로 나가는 길목의 현양은 그들에게 희망의 바다였겠다. 그러나 삶의 벼랑 끝에 서서 건넌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게 이 바다는 눈물바다, 통곡의 바다였다.'(국제신보 2011. 7. 5 임형석의 한자박물지에서)
2. 태평양을 마주한 아열대의 미야자키
7월 6일, 오전 8시에 입국수속을 마치고 9시에 규슈남쪽의 미야자키로 향하는 대절버스에 올랐다. 우리 일행 33명이 탑승한 버스는 가늘게 내리다가 점점 굵어지는 빗속을 뚫고 일본 본토의 최서단에 있는 시모노세키에서 규슈로 연결되는 해상연육교를 통과하여 규슈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린다.
한 시간여를 서쪽으로 달리니 규슈최대도시 후쿠오카가 나타난다. 우리가 탄 버스는 후쿠오카 인근 휴게소에서 잠시 멈춘 후 서부의 나카사키 쪽으로 가다가 중부의 구마모토 쪽으로 방향을 튼다. 버스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남쪽으로 가는 고속도로 좌우에 웅장하게 늘어선 험준한 산속을 길이가 6km나 되는 긴 터널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터널을 여러 개 지나친다. 일본여행전문가인 이진희 가이드는 일본이 한반도보다 산이 더 높고 비율이 많은 산악국가라고 일러주어 여러 차례 일본을 여행하면서도 눈여겨보지 않던 것을 깨치게 된다. 일본에는 3776m의 후지산을 비롯하여 3000m가 넘는 고산들이 여러 개이고 규슈에도 1000m이상의 산악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그 중에는 '한국악'이라는 이름의 산도 있다.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들고 계속 달려 오후 두 시 넘어 미야자키 남단에 있는 무도신궁에 도착하였다. 초대 일본천황의 아버지를 모셨다는 무도신궁은 강원도의 낙산사처럼 해안의 절경에 자리 잡은 신사로 일본의 건국신화가 서린 명소라고 한다. 신사입구에는 일본남해국립공원이라고 적힌 팻말이 보이는데 가이드는 미야자키가 한국의 제주도처럼 신혼여행지로 손꼽히던 곳이라고 설명한다.
미야자키 주변에는 칠레 이스타 섬의 세계문화유산 모아이상을 재현(칠레대지진 때 일본이 도와 준 것을 감사하여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건립을 허락한 것이라고 함)한 '선메셋 미치난'이라는 아름다운 해변동산과 진흙이 굳어서 빨래판처럼 펼쳐진 아오시마의 아열대식물군락지가 볼만하다. 한적한 들판에 때 이르게 벼이삭이 펴고 남국에서 자라는 야자수들도 눈에 많이 띄어 이곳이 제주도보다 훨씬 남쪽지방인 것을 일깬다. 고속도로변에 위도 32도라는 표지가 보이기도. 제주도는 33도쯤 되는가? 오후 들어 빗줄기가 가늘어져서 명소들을 오가며 살피는데 큰 지장이 없어 다행이다.
오후 5시까지 두세 군데 명소들을 돌아보고 미야자키에 있는 숙소로 향하였다. 숙소는 미야자키시 해안 숲속에 자리 잡은 선 피닉스 호텔인데 국제회의장과 공연장, 대욕탕을 갖춘 대규모시설이어서 물가가 비싼 일본이라 초라한 숙소라도 감수하리라 마음먹은 것을 기분 좋게 날려버린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과 저녁 뷔페식사가 훌륭하고 객실과 대중목욕탕도 넓고 쾌적하구나.
3. 반가운 소식, 평창이 해냈다.
7월 7일,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트니 평창이 2018년 동계올림픽개최지로 결정되었다는 낭보가 뜬다. 전날 밤 뉴스에 잠시 평창의 이름이 스쳐 결정여부가 궁금하던 차린데 자정 이후에 결정되었다네. 두 번의 실패를 딛고 압도적 다수표로 1차 투표에서 결정되었으니 너무나 자랑스럽다. 이어서 서울의 동생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뜬다. '평창이 해냈습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쾌거를 자축합시다.' 온 국민이 고대하던 희소식을 이국땅에서 들으니 더 반갑다. 이를 위해 수고한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대한국민, 파이팅.
오전 8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미야자키 서쪽방향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가고시마로 향하였다. 비가 그치 고 구름이 낀 서늘한 날씨가 차창의 경치를 더 싱그럽고 아름답게 보게 하누나.
가고시마는 일본의 가장 먼 곳에 있는 오키나와와 바다로 연결되고 유럽의 동양을 항해하는 배들이 가장 먼저 접근하는 해상 요충으로 일찍부터 선진문물에 접한 지역이어서 일본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담당한 지역이다. 변두리가 중심으로 등장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까?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의 선봉에 선 인물들이 규슈의 가고시마와 죠수아 번 출신들롤 알려지고 있다. 가고시마를 대표한 인물은 사이고 다가모리, 가고시마를 내려다보는 사로야마 언덕에는 그가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반대파에 몰려 자살한 동굴이 있고 그 옆에 육중한 몸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고시마의 음식과 묘지에는 유구로 알려진 오키나와의 풍습이 숨어 있고.
가고시마시에서 해상으로 4km 떨어진 사쿠라지마는 지금도 분화구에서 연기가 나는 활화산으로 유명하다. 배를 타고 15분 걸려 섬에 이르니 20세기에도 두 차례나 대폭발한 분화구에서 흘러 내려온 용암들이 널려 있다. 금년에도 588회나 검은 연기가 분출한 화산을 끼고 사는 주민들은 집집마다 방공호대피시설을 갖추고 초등학생들은 방탄모를 착용하고 등하교를 한다고 한다. 비지터 센터에서 사쿠라지마의 탄생역사를 보여주는 기록영상을 보았다. 이는 최근에 분출한 화염의 위험과 지난 3월의 동일본대지진의 참사를 더욱 실감나게 일깨우는 산 교육이라 여겨진다.
가고시마 탐방을 마치고 선 피닉스호텔에 돌아오니 저녁 6시, 서둘러 저녁식사를 하고 몸을 씻은 후 저녁 8시에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가수 이벤트에 참석하였다. 나훈아, 조용필, 주현미의 이름을 글자하나 다르게 붙인 모창가수들이 출연하는 이벤트는 호텔 측이 특별히 마련한 행사로 5일과 6일에 부산에서 출발한 여행자 500여명이 합석하여 한 시간 반가량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공연 도중에는 평창올림픽 유치를 환영하는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고 경품을 추첨하여 나눠주기도 하였다.
작년에는 가수 남진을 불러 공연하는 등 호텔에서 여름철에 공들여 추진하는 행사라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모방하는 삶보다 창조하는 삶의 가치를 강조하는 편이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는 모창가수들에게 가벼운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도 스스로의 작품과 이름으로 활동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내보이고.
4. 현장에서 느끼고 책에서 깨친다.
7월 8일, 아침 8시에 호텔을 나서 내려온 길을 되짚어 북쪽으로 향하였다. 올 때는 폭우와 안개로 재대로 살피지 못한 경관이 맑은 날씨에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곳곳에 쭉쭉 뻗은 삼나무들과 무성하게 뒤덮은 숲의 기상이 씩씩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기운이 온 몸에 전해지는 느낌이다. 여행을 통하여 활력을 얻고 삶의 지혜를 깨칠 수 있으면 좋은 일 아닌가?
네 시간 쯤 북쪽으로 달려 12시경에 후쿠오카 인근의 다자이후시에 도착하였다. 면세점에 들러 필요한 쇼핑을 한 후에 학문의 신을 모셨다는 다자이후 천만궁으로 향하였다. 8세기의 유명한 학자를 배향한 다자이후 신사는 공부의 신을 추앙함일까, 수험생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들이 널려있다. 이곳의 특장은 1000년 넘는 수령의 녹나무들이 여러 그루 오랜 연륜을 견디며 꿋꿋하게 시 있다. 지금도 우뚝 솟은 거목에 무성한 잎들이 창창하다.
오후 두시 반에 다자이후를 출발하여 후쿠오카시내에 있는 하카다시티로 향하였다. 금년 3월에 개관하였다는 하카다시티는 지하철과 일반철도, 신간선을 이용하는 역이면서 규슈최대의 생활용품점인데 10층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 시내를 전망하고 내려오는 길에 8층의 서점에 30여분 머물렀다. 대형서점에는 신간서적과 화제의 책들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었고 한쪽에는 일본의 역사와 지리를 살펴볼 수 있는 코너도 있다. 잠시 이번 여행지인 미야자키의 지리와 가고시마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훑어보며 이틀간의 규슈 남쪽여행을 되새겨보기도 하였다. 신간서적들에는 일본대지진의 여파를 다룬 원자력과 일본의 위기를 다룬 책들이 눈에 띄기도.
한 시간여 하카다시티를 돌아보고 야구경기장인 후쿠오카 돔(1994년에 직접 경기를 관전한 적이 있다)과 한국 및 중국 교역항구로 유명한 하카다 항을 차창으로 살핀 후 시모노세키로 향하였다. 5시 반에 출국절차를 마치고 배에 오르니 오후 6시, 입국할 때 사진을 찍고 지문을 누르는 등 꼼꼼하게 다루는 것과 대조적으로 출국절차는 간소하다.
선내에서 제공하는 저녁을 들고 잠시 쉬니 7시에 배가 출항한다. 갑판 위에 올라 한 시간여 해협을 빠져나오는 바다를 돌아보며 밤 새워 달릴 한반도 쪽의 서쪽하늘을 응시한다. 카운터의 직원에게 물으니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는 215km라고 일러준다. 멀리 작은 섬이 나타나고 그 앞의 고기잡이배에서 밝힌 불빛들이 환하다.
5. 얻을 것이 많은 일본통의 가이드와 품위 있는 노신사들
여상을 나와 직업전선에서 일하다가 결혼 후 일본에서 공부하고 가이드생활 10년이라는 이진희 가이드는 일본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지식과 여행안내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으로 내가 겪은 어떤 가이드보다 해당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사람을 다루는 노하우가 풍부한 직업인이어서 마음에 든다.
한 방에 묵은 8순의 어른들은 건강과 품위를 갖춘 노신사들이어서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다. 나이 들었다고 내세우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겸손한 자세가 몸에 벤 듯. 그 중의 한 분은 일본역사에도 정통하여 가이드를 보완하여 설명하는 내용이 깊이가 있다. 점차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세태에 나이 들어서도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여행과 취미를 살려서 여럿이 함께 즐길 수 있으면 좋은 일 아닌가? 같은 버스에 탄 일행 중에 과격한 언사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 이들이 있어 안타까웠다.
여행 중 젊은 외국여자가 ‘스미마센’하며 말을 건넨다. 일본인으로 여긴 듯. 프랑스에서 왔노라고 말한다. 수학여행 온 듯한 여학생은 손을 흔들며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데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일본인들의 자연스런 미소와 친절은 어려서부터의 훈련에 기인한 것일까, 흉내를 내려고 해도 잘 안된다고 덧붙인다.
우리가 탄 배는 7월 9일 새벽 3시 못 미쳐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하여 네 시간가량 정박하였다가 아침 7시 지나 부두에 접안한다. 8시에 출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8시 반, 누님과 처제는 부산역에서 기차로 서울과 대구로 떠나고 우리는 광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남부지방과 지리산 일대에 250m의 호우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맞아떨어져 광주로 오는 네 시간여 줄기차게 폭우가 내린다. 가는 날 개었다가 도착한 날 비오고 다음날 흐리다가 그 다음날 맑더니 마지막 날 다시 비가 오는 장마철에 먼 길 무사히 다녀 온 것을 감사한다. 더운 여름철에 건강하게 보내시고 더 좋은 날들을 이루어가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