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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遼東]의 천리[千里] 변을 지나 열하[熱河]를 굽어보며 제[第] 이[二]
열하[熱河]는,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오천년[五千年] 역사[歷史]속에서, 마지막 황조[皇朝]였던 청[淸]나라 황제[皇帝]들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던 곳이다.
1860년대[千八百六十年代]는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時期]이다. 이때 청[淸]나라 황제[皇帝]는, 유럽 연합군[聯合軍]의 공격[攻擊]으로 연경[燕京]이 함락되자.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던 열하[熱河]로 도망[逃亡]을 갔다.
이 일대의 전변[戰變]이 일어난 곳은 지금의 북경[北京]이 아니다. 서[西]쪽으로 저 멀리 만여리[萬餘里] 떨어진 오늘날의 발하슈호 동[東]쪽 지역 이었다.
이것은 당시[當時]을 살았던 우리 선조[先祖]들의 생생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다.
이러한 열하[熱河]는, 조선[朝鮮] 삼경[三京]의 하나였던 지금의 북경[北京] 지역으로 옮겨와 있다.
그 혼란[混亂]한 난세[亂世]의 시기를 틈타 왜[倭]놈들과 양이[洋夷]들은, 동방[東方]의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하였다.
이 자들은, 유구[悠久]하고 장엄[莊嚴]한 대륙[大陸]의 역사[歷史]인 우리 역사[歷史]의 맥[脈]을 끊어 버리는 음흉[陰凶]하고 사악[邪惡]한 음모[陰謀]를 진행하며 침략[侵略]과 강탈[强奪]의 야욕[野慾]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朝鮮]이 없는 광활한 대륙[大陸]의 땅을 침략[侵略]하고, 그 발판을 굳히기 위하여, 왜[倭]놈들은 반도[半島]의 조선[朝鮮]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에 부역[附逆]하는 반역자[反逆者]들을 모아, 왜[倭]놈들은 합법[合法]을 가장하여, 반도[半島]에서 한일합병[韓日合倂]이라는 치욕[恥辱]의 조약[條約]을 만들고, 한반도[韓半島]를 강탈[强奪] 하였다.
마치 우리의 역사[歷史]인 일만년[一萬年]의 조선사[朝鮮史]가 반도[半島]에서 전개 되었고,
이러한 역사[歷史]를 지닌 조선[朝鮮]은, 예로부터 주권[主權]과 자주성[自主性]이 없는 국가[國家]였으며,
이러한 나라이기 때문에 왜[倭]놈들에게 나라를 들어 바친 것으로 만들어 놓고,
양이[洋夷]와 한패가 되어 이를 세계[世界]에 선전하며, 이것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역사[歷史]의 왜곡[歪曲]과 역사[歷史] 조작[造作]의 사악[邪惡]한 음모[陰謀]를 실행[實行]에 옮긴다.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소위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하는 자들은, 양이[洋夷]와 왜[倭]놈들의 이러한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거짓의 악의적[惡意的]인 사악[邪惡]한 음모[陰謀]를 충실히 이행하는 주구[走狗]들일 뿐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서서히 들어나고 있는 반도조선[半島朝鮮]의 시말[始末]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역사[歷史]인가 ?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식민[植民]의 추악[醜惡]하고 더러운 잔재[殘在]일뿐, 그 이상[以上]도 그 이하[以下]도 아니다.
무엇이 우리의 역사[歷史]인가 ?
대륙[大陸]의 역사[歷史]인 우리의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가, 하루 아침에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로 전락[轉落]하고,
조작[造作]되는 그 일면[一面]들이, 우리 역사[歷史]의 본[本] 모습이 들어나면서, 서서히 그리고 분명[分明]히 보여 지고 있다.
당시[當時]에, 중화[中華]가 하나가 되어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을 몰아내고, 이 땅위에 새로운 대국[大國]을 건설[建設]해야 한다는,
우리 선조[先祖]들의 피 맺힌 울분[鬱憤]과 절규[絶叫]의 기록[記錄]은, 지금도 눈앞으로 생생[生生]히 다가온다.
열하[熱河]와 요동[遼東]에 대하여, 전회[前回]에 게재 한 내용을 보충[補充]하면서,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연경[燕京]과 열하[熱河]로 가던 길을 살펴보고,
청[淸]나라 황제[皇帝]들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던 열하[熱河]를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朝鮮]에서 출발한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평안도[平安道]의 의주[義州]에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요동[遼東]의 학야천리[鶴野千里]를 지나, 연경[燕京]과 열하[熱河]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는 압록강[鴨綠江], 천참[天塹]으로 불리워진 압록강[鴨綠江]의 구룡연[九龍淵] 모습이다.
압록강[鴨綠江] 의주[義州]의 통군정[統軍亭]은, 요동[遼東]과 연경[燕京]을 내리 누르고 있다고 하였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의주[義州]의 압록강[鴨綠江] 건너, 연경[燕京]과 열하[熱河]로 사행[使行]의 길을 떠났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의주[義州]의 구룡연[九龍淵]에 성[城]을 쌓았다.
간이집[簡易集]
統軍亭感懷
통군정[統軍亭]에서 감회[感懷]에 젖어
루[樓]에서 나를 붙들고 내려왔던 이 그 누구였는가 ? 問誰扶我下樓兒
검은 머리에 흰 모자 그때에 거꾸로 썼는데 頭黑當時倒接離
오늘 다시 찾아와서 흘리는 초신[楚臣]의 눈물 此日再來垂楚泣
서[西]쪽으로 진[秦]나라 군을 청하러 가는 길 惟期西去乞秦師
삼한[三韓]의 강역 다한 곳에 펼쳐지는 중원[中原]의 땅 中原界卽地形盡
천참[天塹]의 한 줄기 강[江]물이 임하여 있구나. 一道江應天塹爲
어인 일 인고 바다에 나와 횡행하는 고래[鯨鯢]들 獨奈鯨鯢出海橫
황령[皇靈]의 탕육[蕩戮]은 이에 이르러 더디기만 하구나. 皇靈蕩戮至今遲
압록강[鴨綠江]의 구룡연[九龍淵]에서, 의주[義州]로 흘러가는 구룡연[九龍淵] 입구의 모습이다.
평안도[平安道]의 의주[義州]가 용만[龍灣]으로 불리게 된 이면에는, 압록강[鴨綠江]의 줄기에 이러한 큰 호수[湖水]가 천연[天然]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동명집[東溟集]
携龍灣李府尹登統軍亭
용만[龍灣]의 이 부윤[李府尹]과 함께 통군정[統軍亭]에 오르다.
흐르는 강[江]은 멀리 백두산[白頭山]서 흘러오고 江流遠自白頭山
동[東]으로 푸른 바다 천지[天地] 사이에 들어온다. 東入滄溟天地間
압록[鴨綠]은 모두 삼대수[三大水]라 말 전[傳]하고 鴨綠共傳三大水
용만[龍灣]은 절로 하나의 웅관[雄關]이 되었구나. 龍灣自作一雄關
중원[中原]과 예맥[穢貊]은 각각 남[南]과 북[北]쪽에 있도다. 中原穢貊各南北 [중략]
상촌집[象村集]
義州統軍亭。臨三國之界。山川奇壯。求之天下。亦鮮其儷
의주[義州]의 통군정[統軍亭]은 세 나라의 경계[境界]에 위치하면서 경치가 장관[壯觀]이니 온 세상[世上]에서 다 찾아보아도 그 짝을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상촌[象村] 선대[先代]는 당시[當時]에, 의주[義州]의 통군정[統軍亭]에 대하여 위와 같이 말했다.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통군정[統軍亭]은, 현재[現在] 한 개의 나라가 더 늘어 러시아, 카자흐스탄, 중국[中國], 몽고[蒙古]의 4개국[四個國]의 국경[國境]이 교차하는 곳이 되어 있다.
조선[朝鮮]의 서관[西關]인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의 앞을 지나,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로 흘러드는 압록강[鴨綠江]의 모습이다.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도 이곳을 건너 요동[遼東]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동명집[東溟集]
신이옹[申泥翁] 시[詩]의 서 신유[申濡]이다.[申泥翁詩序 濡]
강계[江界]는 훈육씨[獯鬻氏]와 접해 있으면서 큰 강[江]으로 경계[境界]가 나뉘어 있으므로 강계[江界]라고 부른다.
이 강[江]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천여리[千餘里]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천하[天下]의 삼대수[三大水]를 논[論]한 가운데 이 압록강[鴨綠江]이 들어 있으니, 참으로 천하[天下]의 장관이다.
백두산[白頭山]에서 발원[發源]하는 압록강[鴨綠江]은, 평안도[平安道]의 의주[義州]에 이르러 요동[遼東]의 천리대야[千里大野]를 관통하여 발해[渤海]에 이르고,
발해[渤海]을 지나 난하[灤河]와 합류[合流]하고, 북[北]으로 흘러 열하[熱河]에 이른다.
열하[熱河]와 합류[合流]한 압록강[鴨綠江]은, 여러 물을 받아 들이며, 오늘날의 북극[北極]인 북해[北海]로 들어간다.
압록강[鴨綠江]을 천하[天下]의 삼대수[三大水]라고 한 말은, 이 때문이다.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의주[義州]를 출발하여 요동성[遼東城]으로 들어가기 전에, 험난[險難]한 이 청석령[靑石嶺]]을 넘어간다.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대로, 이 청석령[靑石嶺]에는 돌들이 띠처럼 이어져 있으며, 자라와 같이 생긴 거북바위도 있다.
이 청석령[靑石嶺]에는 괴괴한 둥근 돌, 물이 고인 돌, 목을 빼고 있는 자라 같은 돌 등 아름다운 돌들이 수 없이 많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청석령[靑石嶺]을 넘으며, 돌길의 험난[險難]함에 대하여 여러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청석령[靑石嶺]의 이곳을 지나면, 요동성[遼東城]으로 길을 재촉한다.
간이집[簡易集]
계사행록[癸巳行錄]
청석령[靑石嶺]
청석[靑石]의 고개 봉착하니 당나귀도 겁을 먹고 嶺逢靑石怯驢兒
온통 둥근 돌무더기 발 딛는 순간 기우뚱 看是坏渾踏覺離
터진 하늘 꿰매는 돌 따로 종자 있으리요. 補缺天餘寧有種
서로 본받기 부끄러워 특별한 산 모습 이루었구나. 學成山別恥相師
옥처럼 보이지 않을까 봐 눈으로 덮어 가렸나니 雪遮故忌瑤難似
고인 저 물 아름답고 벼루 만들면 참 좋겠구나. 泉浸堪憐硯可爲 [중략]
요동성[遼東城]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산[千山], 이 산의 주봉[主峯]은, 해발 3800m 에 이른다.
동서[東西]로 길게 이어지며, 서[西]쪽으로는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연산[燕山]까지 수[數] 천리[千里]를 뻗어 나간다.
분수령[分水嶺]에서는 물이 남[南]과 북[北]쪽으로 흐른다는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은, 동서[東西]로 뻗어 있는 이 산[山]의 태산준령[泰山峻嶺]을 말하는 것이다.
고주몽[高朱蒙]의 사묘[祠廟]가 있었던 오늘날 요동성[遼東城]의 모습이다
그 옛날, 고구려[高句麗]가 동서[東西]를 치달리며 천하[天下]를 호령할 때, 고주몽[高朱蒙]의 사묘[祠廟]가 요동성[遼東城]에 있었다.
역사서[歷史書]는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을 전[傳]하고 있다.
이 요동성[遼東城]에서, 모래 바람이 흩날리는 광활[廣闊]한 대막[大漠]의 북[北]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심양[瀋陽]에 이르게 된다.
고구려[高句麗]가 반도[半島]의 북[北]쪽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누구나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를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수[ 隋]나라의 백만대군[百萬大軍]을 초개[草芥]처럼 무찔렀다고,
그러나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제 서서히 그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 본[本]모습이 조금씩 들어나고 있을 뿐이다.
심양[瀋陽]을 가로 지르는 소요수[小遼水]와 심양[瀋陽]의 녹지[綠地] 풍경이다. 요동[遼東]의 대야[大野]에 자리 잡고 있는 심양[瀋陽],
황막[荒漠]한 천리[千里]의 광활한 대막[大漠]에도 이러한 맑은 물이 줄기차게 흐르고, 푸른 녹지[綠地]가 펼쳐져 있다.
이제 조선[朝鮮]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심양[瀋陽]에서, 산해관[山海關]으로 발길을 옮긴다.
각산[角山]을 오르는 계곡[溪谷]의 모습이다.
지금은 작은 댐이 세워져 있다. 연행록[燕行錄]에서, 각산[角山]을 오르는 도중에는 천[千]길의 암벽[巖壁]이 서리어 있다고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잔설[殘雪]이 쌓인 푸른 산[山]의 서[西]쪽, 산해관[山海關]에서는 서남[西南]쪽이 되는 곳에, 문필봉[文筆峯]이 솟아 있다.
산해관[山海關]의 각산[角山] 정상[頂上]의 모습이다.
월사[月沙] 선대[先代]는,
산해문[山海門] 만리성[萬里城]의 머리 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각산사[角山寺]가, 殊不知有角山寺在山海門萬里城頭最高頂,
남[南]쪽으로는 중토[中土]을 굽어보고,南臨中土, 북[北]쪽으로는 오랑캐 땅을 바라보는 곳이라, 北瞰胡地,
참으로 천하[天下]의 장관[壯觀]임을 유독 알지 못한다.誠天下壯觀也, 고 하였다.
산해관[山海關]의 각산[角山]은 발해[渤海]의 남[南]쪽에 있었다. 산해관[山海關]의 남[南]쪽에 발해[渤海]가 있다는 기록[記錄]들은, 모두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거짓의 기록 이다.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지금 북경[北京]의 산해관[山海關], 그 산해관[山海關]의 서남[西南]쪽은 바다만이 있을 뿐이다.
연행일기[燕行日記]
至深河驛。登一岡。望羣峯橫亘西北。最遠四五峯。雄拔秀異。方顧望稱奇。郵卒指西南間曰。昌黎縣後。文筆峯出矣。望之奇特
심하역[深河驛]에 이르러 한 언덕에 올라 바라보니, 산봉우리들이 서북[西北]으로 가로 뻗어 있는데 가장 멀리 보이는 4, 5개의 봉우리가 웅장[雄壯]하고 수려[秀麗]하여 바라보면 찬탄이 나왔다.
이때 우졸[郵卒]이 서남[西南] 사이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창려현[昌黎縣] 뒤에 있는 문필봉[文筆峯]입니다. 하기에, 바라보니 과연 기특[奇特]하였다.
산해관[山海關]의 서[西]쪽이 심하역[深河驛]이다. 심하역[深河驛]에서 서남[西南]쪽이면, 산해관[山海關]의 서남[西南]쪽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는 산해관[山海關]의 서남[西南]쪽에 문필봉[文筆峯]이 솟아 있다고 하였다.
지금 북경[北京]의 산해관[山海關] 서남[西南]쪽 어디에, 구름이 감도는 문필봉[文筆峯]이 솟아 있을까 ?
산자[生者]와 죽은 자[死者]의 도시
옛 산해관[山海關] 지역[地域]의 인근[隣近] 모습이다.
명[明]나라와 청[淸]나라가, 천하[天下]의 명운[命運]을 걸고, 천하[天下]의 대전[大戰]을 벌였던 대막[大漠] 지역의 산해관[山海關].
저 뒤로 보이는 산[山]이 각산[角山]의 자락이다.
옛 산해관[山海關]의 주변에는, 당시[當時]에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묘[[墓]가 즐비하다.
묘지[墓地]의 모양도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과 일치하고 있다.
지금은 인구[人口]가 많지 않으나, 당시[當時]에는 이 지역이 대도회지[大都會地]였다는 것을, 묘지[墓地]가 증명[證明] 해주고 있는 것이다.
연행록[燕行錄]에서 말하고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 기슭에 있는 무량옥[無樑屋], 지금도 무량옥[無樑屋]에서 살고 있는 토인[土人]들이 있다.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대로 대들보가 없고, 지붕위에는 흙을 바르고 그 위에는 풀이 자라고 있다.
역사[歷史]는 숨기고 속일 수 없으며, 거짓으로 왜곡[歪曲] 할 수 없는 것이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自鳳城至周流河。草家居多。自周流河至山海關。土屋居多。自有土屋以後。間有瓦家。而絶不見草家 [중략]
봉황성[鳳凰城]에서부터 주류하[周流河]에 이르기까지는 초가[草家]가 많고, 주류하[周流河]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는 토옥[土屋]이 많다.
토옥[土屋]이 있으면서부터는 이따금 기와집은 있어도 초가[草家]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중략]
此無草而然也。草屋上平塗以土而不漏。草生其上。或以石灰塗之。草家所覆茅。皆不編。但束積如魚鱗。而蓋覆之其厚尺餘。屋脊則泥塗其縫 [중략]
이것은 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초가[草家] 위에는 흙으로 평평[平平]하게 발라서 비가 새지 않게 했는데 풀이 그 위에 자랐다. 혹 석회로 바른 곳도 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自周流河至山海關。或於屋上。平塗以土。而或蓋以木板。或葺以薄石。不起屋脊者有之。此謂無樑屋也 [중략]
주류하[周流河]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혹 지붕에 흙으로 평평[平平]하게 바르기도 하고, 혹은 널빤지로 덮기도 하고, 얇은 돌로 덮기도 하면서 용[龍]마루를 세우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이것이 무량옥[無樑屋] 이다. [중략]
지금은 이르티시 댐의 물과 연결되어 천리[千里]에 푸른 물이 출렁이는 발해[渤海]인 자이산호,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아성[亞聖]으로 추존[推尊]되는 맹자[孟子]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죽국[孤竹國]이 있는 이 발해[渤海]를, 북해[北海]라고 하였다.
연행기[燕行紀]
진강성에서 열하까지[起鎭江城至熱河]
신점[新店]의 뒤 언덕에서 정서[正西]쪽 소흑산[小黑山]으로 뚫린 것이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길이고, 自新店後岡。正西走小黑山。爲山海關路,
서북[西北]쪽 백대자[白臺子]로 뚫린 것이 열하[熱河]로 가는 길이다. 西北走白臺子。爲熱河路.
이 발해[渤海][지금의 자이산호][명[明]과 청[淸]의 당시에, 그들은 이 발해[渤海]를 동해[東海]라고도 불렀다.]의 연안[沿岸]을 따라 서북[西北]으로 올라가면, 고북구[古北口]에 이른다.
발해[渤海]의 서[西]쪽에서는, 난하[灤河]가 발해[渤海]로 흘러든다. 난하[灤河]가에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이제묘[夷齊廟]가 있다.
난하[灤河의 북[北]쪽에는, 원[元]나라의 상도[上都]였던 개평부[開平府]가 있었다. 상도[上都]는, 난경[灤京], 또는 난도[灤都]라고도 불렀다.
간이집[簡易集]
夷齊廟次韻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사묘[祠廟]에서 차운하다.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어도 슬퍼하지 않았노라. 餓死西山不自悲
천추[千秋]를 기리는 드높은 대의[大義] 사묘에 부쳤구나. 千秋慕義寄高祠
난하[灤河]를 건너 고죽군[孤竹君]의 영령[英靈]을 모셨나니 隔河孤竹君靈在
청풍[淸風]은 끊임없이 불어오고 불어 가리라. 長有淸風來往吹
廟在灤河南岸。而北岸有孤竹君廟。
사묘[祠廟]는 난하[灤河]의 남[南]쪽 언덕에 있고, 북[北]쪽 언덕에는 고죽군[孤竹君]의 사묘[祠廟]가 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
용궁취목기[龍宮取木記]
위예개[魏裔介]의 용궁취목기[龍宮取木記]에서 말하기를, 魏裔介龍宮取木記曰,
天津之古北口北海之濱。與永平遵化諸邊口接壤。中有灤河。元人運粮。以達上都應昌者。是謂龍宮運木之通渠。
천진[天津]의 고북구[古北口]는 북해[北海]가에 있는데, 영평[永平], 준화[遵化] 등 여러 변구[邊口]와 접경[接境]하고 있으며, 그 중간에 난하[灤河]가 있다.
원[元] 나라 사람들이 양곡[糧穀]을 운반해서 상도[上都] 응창[應昌]으로 통하던 곳이다. 이곳은 용궁[龍宮]으로 목재를 운반하는 통거[通渠]라 한다.
서계집[西溪集]
이제묘[夷齊廟]
어느 해에 북해[北海]에서 이별 했나. 北海何年別
서산[西山]에서 굶어 죽도록 돌아가지 않았구나. 西山餓不歸 [중략]
난하[灤河]의 맑음이 바닥까지 이르니 灤河淸到底
그대 좇아 더러운 옷 씻으리라. 從子濯塗衣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백이[伯夷]가 주[紂]를 피하여 북해변[北海邊]에 살았다. 而孟子曰。伯夷避紂。居北海之濱.
청[淸]나라의 열하[熱河]는 고북구[古北口]의 북[北]쪽에 있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구외이문[口外異聞] 육청[六廳]에서, 당시[當時], 열하[熱河]를 다녀왔던 연암[燕巖] 선대[先代]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열하[熱河]의 서[西]쪽 전경[全景]
열하[熱河]의 모습이다. 열하[熱河]가 천하[天下]의 험지[險地]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만든 산세[山勢]의 험요[險要]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열하[熱河]는,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요해지[要害地]가 될 수 있는 요건[要件]을 두루 갖추고 있는 험요[險要]의 지역이다.
열하[熱河]를 둘러싸고 있는 태산준령[泰山峻嶺]은, 불함산[不咸山]인 백두산[白頭山]에서, 서[西]쪽으로 뻗어온 주맥[主脈]이다.
熱河太學大成門外東壁坎。置乾隆四十三年上諭曰。
열하[熱河] 태학[太學]의 대성문[大成門] 밖 동[東]쪽 바람벽 속에, 건륭[乾隆] 43년[四十三年]에 내린 글을 모셔 놓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京畿東北四百里熱河地方。在古北口以北。卽禹貢冀州邊末。而虞及殷周。幽州之境也。
경기[京畿] 동북[東北] 4백리[四百里]는 열하[熱河]의 지역이다. 그 지역은 고북구[古北口]의 북[北]쪽에 있는데, 곧 우공[禹貢] 기주[冀州]의 변두리였으며, 하[夏], 은[殷], 주[周] 때의 유주[幽州] 지경이다.
秦,漢以來。未入版圖。元魏時。建安營二州。
진[秦], 한[漢] 이후엔 판도[版圖]에 들지 않았고, 원위[元魏] 때에는 안주[安州], 영주[營洲] 두 고을을 세웠고,
唐有營州都督府。然不過僑置治所於內地。
당[唐]에서는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를 두었으나, 불과 잠깐 교치[僑置]을 내지[內地]에 두었을 뿐이요,
遼金及元。始鄕其名。而古地旋荒。
요[遼], 금[金]과 원[元]에 이르러서는 시향[始薌]이라 하였으나, 옛 땅은 곧 황폐[荒弊]하게 되었고,
明棄大寧。視爲別域。
명[明]에선 대령[大寧]을 버려서 이역[異域]으로 보았었다.
向者曾設承德州。今宜陞爲府。卽以同知改設。而其餘六廳。如喀喇河屯廳。改爲灤平縣。
이제 승덕주[承德州]를 세웠으니, 이제 의당 이를 부[府]로 승격[昇格]시켜 다시금 시설을 더하고, 그 나머지 육청[六廳]도 객랄하둔청[喀喇河屯廳]은 난평현[灤平縣]으로,
四旗。改爲豐寧縣。八溝廳。其地較廣。改爲平泉州。
사기[四旗]는 풍녕현[豐寧縣]으로 고치고, 팔구청[八溝廳]은 그 땅이 비교적 넓으므로 평천주[平泉州]를 만들고,
烏蘭哈達廳。改爲赤峯縣。塔子溝廳。改爲建昌縣。三座塔廳。改爲朝陽縣。並屬承德府統轄云云
오란합달청[烏蘭哈達廳]은 적봉현[赤峰縣]으로, 탑자구청[塔子溝廳]은 건창현(建昌縣)으로, 삼좌탑청[三座塔廳]은 조양현[朝陽縣]으로 각기 고쳐서 아울러 승덕부[承德府]에 통할하게 한다.
이렇게 연암[燕巖] 선대[先代]는, 청[淸]나라가 기록[記錄]한 고북구[古北口]와 열하[熱河]에 대한 역사[歷史]의 연혁[沿革]을,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소개하고 그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청[淸]나라의 건륭[乾隆] 황제[皇帝]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열하[熱河]는 고북구[古北口]의 북[北]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열하[熱河]의 남[南]쪽에 있는 고북구[古北口]는, 어떠한 지역 이었을까 ?
고북구[古北口] 북[北]쪽 지역의 전경[全景]이다. 이곳은 열하[熱河]와 고북구[古北口]의 중간 지역이 된다. 이 지역도 댐의 물이 들어 차 있다.
여기서 남[南]쪽으로 내려가면 북해[北海]라고 불린 발해[渤海]에 이르고, 북[北]쪽으로는 열하[熱河]가 지척에 있다.
고북구[古北口]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이제묘[夷齊廟]가 있는 난하[灤河]가 흘러드는 지역에 있었다.
상[商]나라의 고죽국[孤竹國]이, 고구려[高句麗]라고 한 말은, 역사[歷史]의 사실[史實] 이다.
연암집[燕巖集]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고북구[古北口]에서 장성[長城]을 따라 동[東]쪽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7백리[七百里]가 되고, 自古北口循長城。東至山海關七百里,
서[西]쪽으로 거용관[居庸關]에 이르기까지는 2백[二百] 80리[八十里]가 된다. 西至居庸關二百八十里,
거용관[居庸關]과 산해관[山海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장성[長城] 험요[險要]의 요해처[要害處]가 되는 곳으로는 고북구[古北口] 만한 곳이 없다. 中居庸山海而爲長城險要之地。莫如古北口.
몽고[蒙古]가 넘나드는 인후[咽喉]가 되어 왔기에 중관[重關]을 설치하여 그 요새[要塞]를 제어해 왔다. 蒙古之出入常爲其咽喉。則設重關以制其阨塞焉.
연행기[燕行紀]의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파극습영[巴克什營]에서 서남[西南]으로 8리를 가면 고북구[古北口]의 조하천 영성[潮河川營城]이 있다. 由巴克什營。西南行八里。爲古北口之潮河川營域.
기세[氣勢]가 웅장[雄壯]하고 경치도 장관이어서 실로 남북[南北]의 큰 방위선[防衛線]이요, 화이[華夷]의 큰 경계[境界]이다. 氣勢雄豪。形勝奇壯。實南北之大防。而華夷之大界也.
관내[關內]에는 여정[閭井]이 즐비하여 번화함이 평천[平泉], 의주[義州][이 의주[義州]는 청[淸]나라의 의주[義州]를 말한다.]에 버금간다. 關內閭井市廛櫛比。繁華亞於平泉,義州.
고북구[古北口] 지역의 모습이다.
변함없는 옛 산천[山川]은, 출렁이는 고북구[古北口]의 물결만 내려다 보고 있다. 고북구[古北口] 지역은, 화[華]와 이[夷]의 경계[境界] 지역 이었다.
고북구[古北口]는, 몽고[蒙古]가 넘나드는 인후[咽喉]가 되는 요충지 였다. 난하[灤河]는 이곳으로 흘러들어 북[北]쪽으로 흘러간다.
산해관[山海關]도 화[華]와 이[夷]의 경계[境界]요. 의무려산[醫巫閭山]도 화[華]와 이[夷]의 경계[境界]이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북구[古北口]는, 난하[灤河]와 상[商] 나라의 고죽국[孤竹國], 난하[灤河]가에 있던 이제묘[夷齊廟] 등이 있는 지역과, 서로 연접[連接]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한해[澣海]라고도 불렀다. 이 곳에서 북[北]쪽으로 한해[澣海]가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지[現地] 사람들은, 지금의 발하슈호가 있는 이 지역[地域]도 한해[澣海]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는 차이가 있다. 한해[澣海]는 이곳에서 북[北]쪽으로 더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역[地域]의 토인[土人]들이, 한해[澣海]라고 부르는 이유는, 역사[歷史]의 연원[淵源]과 깊은 관계[關係]가 있기 때문이다.
양촌집[陽村集]의 봉사록[奉使錄]
指揮管童。前元承相也速之子。本國奇平章之壻也。請留。對以王事之急。乘月渡小大二灤河。宿七家嶺驛。
지휘 관동[指揮管童]은 전 원[元] 나라 승상[丞相] 야속[也速]의 아들이요. 본국[本國] 기 평장[奇平章]의 사위다.
그가 나에게 묵어 갈 것을 청했으나 왕사[王事]가 급하다고 대답하고 달빛을 타서 작고 큰 두 난하[灤河]를 건너 칠가령역[七家嶺驛]에서 잤다.
路上許鎭撫唱月明行路好一句。因足之
노상[路上]에서 허 진무[許鎭撫]가, 달이 밝아 길 걷기가 좋다. 는 한 글귀를 외므로 나도 따라 뒷 구절을 달아 붙였다.
한해[澣海]라 가을에도 물결 안 일어 澣海秋無浪
배를 타고 난하[灤河]를 밤에 건너 가노라. 灤河夜渡船
달이 밝아 길 걷기 매우 좋으니 月明行路好
지금 가는 이 길 조천[朝天]의 여정이라네. 此去是朝天
엣 고북구[古北口]의 현재 모습이다. 산천[山川]은 말이 없고, 북해[北海와 댐의 물이 천리[千里]에 이어져 물결만이 오르 내린다.
전에는 난하[灤河]가 흐르는 강[江] 이었으나, 지금은 댐으로 인한 호수[湖水]의 물이 발해[渤海]까지 이어지는 물길이다.
연행기[燕行紀]의 진강성에서 열하까지[起鎭江城至熱河]
난하[灤河]는 부[府]의 남[南]쪽에 있는데 근원[根源]이 독석구[獨石口] 밖에서 나온다. 灤河。在府南。源出獨石口外.
서북[西北]으로 흐르다가 동북[東北]으로 꺾어서 옛날의 개평[開平] 남[南]쪽을 거쳐 동남[東南]으로 흘러 열하[熱河]와 합한다. 西北流。折而東北。經舊開平南。又東南會熱河.
그리고 상판[上板], 하판[下板]의 성[城]을 지나서 청하[淸河], 유하[柳河], 폭하[瀑河]와 만나서 반가구[潘家口]에 들어간다. 過上板下板城。會淸河柳河瀑河。入潘家口.
근원[根源]에서부터 입구[入口]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1천[一千] 4, 5백리[四五百里]를 흘러간다. 自發源至入口。約行千四五百里.
이 연행기[燕行紀]에서, 서북[西北]으로 흐르다가 동북[東北]으로 꺾어서 동남[東南]으로 흘러 열하[熱河]와 합한다는, 이것은,
발해[渤海]의 어귀에서, 발해[渤海]의 물과 합류[合流]한 난하[灤河]의 하류[下流]가, 북[北]쪽으로 흘러 열하[熱河]와 합류[合流]하는 방향[方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해가 뜰 무렵에 길을 나서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러 점심 식사를 하고,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길가에 말을 세우고 말하기를,
난주서편지경[灤州西境]이라 하였으니, 열하[熱河]를 또한 난하[灤河]라 일컫는지라.
대개 난하[灤河]물이 북[北]쪽으로 흘러 열하[熱河]에 이르러 합하여 흐르기 때문에, 열하[熱河]를 또한 난하[灤河]라 함이더라.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 말하는 난하[灤河]는, 난하[灤河]가 서북[西北], 동북[東北], 동남[東南]으로 방향[方向]을 바꾸어 흐르고 있으나,
북[北]쪽으로 흘러가는 물이기 때문에, 대개 난하[灤河]의 물이 북[北]으로 흘러 열하[熱河]에 이르러 합하여 흐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난하[灤河]가 동남[東南]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고 하는 것은, 난하[灤河]가 발해[渤海]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난하[灤河]가 대개 북[北]쪽으로 흘러 열하[熱河]와 합하여 흐른다는 말은, 발해[渤海]로 흘러든 난하[灤河]는,
발해[渤海]의 물이 북[北]쪽으로 흘러가는 물과 합류[合流]하여, 서북[西北], 동북[東北]으로 구부러지며 북[北]쪽으로 흘러,
동북[東北]에서, 서[西]쪽, 남[南]쪽으로 흘러오는 무열수[武列水]인 열하[熱河]와 만나 합류[合流]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하[熱河]를 난하[灤河]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큰 대수[大水]로 본다면, 압록강[鴨綠江]의 본류[本流]와 지류[支流]일 뿐이다.
산해관[山海關]을 지나는 요서[遼西]의 대막[大漠] 지대, 하늘이 나직이 들판 속에 잠겨 있는 이 광활[廣闊]한 대막[大漠]은, 난하[灤河]를 따라 고북구[古北口]까지 이어져 있다.
고북구[古北口]의 관[關]위에서, 대막[大漠]이 오히려 바라 보인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북구[古北口]의 남[南]쪽으로는, 요동[遼東] 요서[遼西]의 천리[千里] 대막[大漠]이 동서[東西]로 펼쳐진다.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동서[東西]를 치달리며 천하[天下]를 호령 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關在山上。雖千嶂周遭。而大漠猶可望也。
이 관[關]은 대개 뫼 위에 자리 잡아, 비록 수많은 묏 봉우리가 삥 둘렀으나, 큰 대막[大漠]이 오히려 눈앞에 보인다.
按金史。貞祐二年。潮河溢。漂古北口鐵裹門關。蓋胡虜之憑陵中州者。以其地據上流。勢如建瓴故也
금사[金史]를 상고[相考]하면, 정우[貞祐] 2년에 물이 넘쳐흘러, 고북구[古北口]의 쇠로 만든 관문[關門]을 허물어 버렸다. 하였으니,
대개 호로[胡虜]들이 중주[中州]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의 나라가 상류[上流]에 웅거하여 형세[形勢]가 병 목을 거꾸로 달아 놓은 것처럼 된 까닭이다.
고북구[古北口]의 지역에는, 서계집[西溪集]의 이제묘[夷齊廟]와, 용궁취목기[龍宮取木記], 그리고 사서오경[四書五經]속에서, 맹자[孟子]가 말하고 있는 발해[渤海]인 북해[北海]가 인접[隣接]하고 있었다.
어느 해에 북해[北海]에서 이별 했나. 北海何年別,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이[伯夷]가 주[紂]를 피하여 북해변[北海邊]에 살았다. 而孟子曰。伯夷避紂。居北海之濱.
천진[天津]의 고북구[古北口]는 북해[北海]변에 있다. 天津之古北口北海之濱。
옛 고북구[古北口] 지역의 마을에 세워놓은 노호[老虎] 동상, 고북구[古北口]는 그 옛날, 호북구[虎北口]라고 불린 지명[地名]을 잊지 않으려고 세워 놓은 것일까 ?
열하일기[熱河日記]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唐之先諱虎。故唐改虎爲古北口。
당[唐]의 선조에 호[虎]라는 휘[諱]가 있으므로, 당[唐]에서 호[虎]를 고쳐 고북구[古北口]라 하였다.
宋人使遼行程錄云。自檀州北行八十里。又行八十里。至虎北口館。則檀州之古北口。亦名虎北口也
송인[宋人]이 지은 사료행정록[使遼行程錄]에 이르기를,
단주[檀州]로부터 북[北]으로 80리[八十里]를 지나고, 거기에서 또 80리[八十里]를 가서 호북구관[虎北口關]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단주[檀州]의 고북구[古北口] 역시 호북구[虎北口]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중략]
열하일기[熱河日記]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大約此關。千古戰伐之塲。天下一搖。則白骨如山。眞所謂虎北口也。[중략]
대개 이 관[關]은 천고[千古]의 전쟁을 치른 마당이므로, 천하[天下]가 한 번 어지러우면 곧 백골[白骨]이 뫼처럼 포개어지게 되니, 이야말로 진실[眞實]로 이른바 호북구[虎北口]였다.
위성지도 출처 구글어스
연경[燕京]의 통주[通州]와 산해관[山海關]은, 위아래[上下]에 위치[位置]하고 있다는 연행록[燕行錄]의 기록[記錄]은 맞는 말이다.
열하[熱河]의 남[南]쪽 700리[七百里]의 지역에는 연경[燕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도[地圖]에서 보는 이 지역[地域]은, 그 옛날 고조선[古朝鮮]의 땅이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이를 증명[證明]하며 고증[考證] 해주고 있다.
북해[北海]의 안쪽, 중국[中國]의 동북[東北] 모퉁이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이 지역이 고조선[古朝鮮]의 고토[古土]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가리켜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은 다 같은 우리의 역사[歷史]이나, 본래 그 지역[地域]들은 큰 차이가 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르면,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은, 불함산[不咸山]의 일대와 요동[遼東] 요서[遼西]의 전역[全域]을 말하는 것이고,
삼한[三韓]의 78국[七十八國]은, 지금의 중국[中國] 황하[黃河]의 이남[以南] 지역 전체를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도,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을 혼동[混同]하면 착란[錯亂]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북구[古北口]는 산해관[山海關]의 서북[西北] 지역에 있었다. 난하[灤河]는 북[北]쪽으로 흘러 고북구[古北口]를 지나 열하[熱河]와 합류[合流]하여 북극[北極]으로 흘러간다.
난하[灤河]의 북[北]쪽에는, 원[元]나라의 상도[上都]인 개평부[開平府]가 있었다.
원[元]나라의 상도[上都]인 개평부[開平府] 지역[地域]의 전경[全景]이다.
청[淸]나라의 열하[熱河]는, 원[元]나라의 상도로[上都路]에 속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동[東]쪽으로 난하[灤河]를 건너면, 청[淸]나라의 열하[熱河] 지역[地域]이며,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던 곳이다.
목은집[牧隱集]
사하[沙河]
난하[灤河]가 하늘에서 동남[東南]으로 쏟아지는데 灤河天上注東南
나무 꽂아 만든 다리에 물은 쪽빛 같구나. 插木成橋水似藍
목은집[牧隱集]
記燕京途中
연경[燕京] 도중[途中]의 일을 기록[記錄]하다.
난하[灤河]는 산 옆 모퉁이로 청쾌히 흐르니 灤河淸駃傍山隅
곧장 근원 찾아 상도[上都]를 알현하고 싶구나. 直欲尋源謁上都
원[元]나라의 상도[上都]인 개평부[開平府]의 산세[山勢] 경관
원[元]나라 상도[上都]인 개평부[開平府]는, 열하[熱河]의 서[西]쪽에 있었으며, 난하[灤河]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치평요람[治平要覽]
유병충전[劉秉忠傳]
이때에 이르러 헌종[憲宗]이 성시[城市]를 건설하고 궁실[宮室]을 수축하여 도성지[都城地]를 조성하려고 하자,
황제[皇帝] 홀필렬[忽必烈]이 말하기를, 유병충[劉秉忠]은 천문[天文], 지리[地理]의 법칙[法則]에 정밀 합니다. 라고 하니,
헌종[憲宗]이 유병충[劉秉忠]으로 하여금 터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유병충[劉秉忠]이 환주[桓州]의 동[東]쪽이자 난수[灤水]의 북[北]쪽에 위치한 용강[龍岡]이 길지[吉地]이다. 라고 하니,
헌종[憲宗]이 유병충[劉秉忠]으로 하여금 경영하도록 하고, 개평부[開平府]로 이름을 지었는데, 3년이 되어 공역[公役]을 다 마쳤다. 고 하였다.
원[元]나라 상도[上都]의 산세[山勢]와 경관[景觀]은, 천하[天下]의 형승[形勝]을 지니고 있다.
난수[灤水]의 북[北]쪽, 한해[瀚海]와 가까운 용강[龍岡]의 지역에, 이렇게 수려한 천하[天下]의 승경[勝景]을 자랑하는 산천[山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정집[稼亭集]
난경기행[灤京紀行]
신모[神謀]에 거북점도 맞아서 정한 두 개의 도읍[都邑] 龜協神謀定兩都
높고 시원한 난경[灤京] 이러한 곳 세상[世上]에 없으리라. 灤京爽塏世間無
사해[四海]의 수레와 문자[文字]가 같게 된 것 누가 모르랴. 已知四海車書混
한 하늘 아래 추위와 더위가 다른 것 누가 믿을 것인가 ?. 誰信一天寒暑殊
난경[灤京] 백리에 펼쳐진 멋들어진 풍경 灤京百里好風煙
어느 집이나 준마에다 능란한 활 솜씨요. 家家駿馬便弧矢
세조[世祖]가 천명을 받아 즉위하신 곳 世祖膺圖處
유공[劉公]이 계획하여 도읍[都邑]을 건설했네 劉公定鼎謀
땅이 높은 하늘의 북[北]쪽 북극[北極]의 고원 지대에서 地高天北極
저 멀리 소나무 숲으로 뒤덮인 산[山]이 보인다.
댐의 수몰[水沒]로 인하여, 원[元]나라 개평부[開平府] 지역 난하[灤河] 주변의 소나무 숲들은 태반[太半]이 물속에 잠겨 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이 지역[地域]에는, 하늘을 가리는 소나무 군락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특히 동[東]쪽으로 수[數] 백리[百里]를 사이에 두고 곧게 하늘을 향해 자라는 소나무 군락은, 가히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렇게 소나무 군락지[群落地]가 곳곳에 많다는 것은, 이 지역[地域]이 예로부터 소나무의 자생산지[自生産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송사전 몽고열전[蒙古列傳], 상도[上都]는 환주[桓州]의 동[東]쪽에 있는데, 온 지역이 모두 소나무여서 천리송림[千里松林]으로도 불린다. 上都。在桓州東。遍地皆松。號千里松林.
오늘날의 자이산호가 있는 남[南]쪽에는, 장대[長大]한 하나의 산맥[山脈]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서북[西北]으로 길게 치달리고 있다.
송[宋]나라, 소철[蘇轍]의 시[詩]에,
연산[燕山]이 길다란 뱀 같아서 燕山如長蛇
천리[千里]에 이[夷]와 한[漢]을 경계[境界] 지었구나. 千里限夷漢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 산[山]이 바로 역사[歷史]에서 말하고 있는 연산[燕山]의 태산준령[泰山峻嶺]이다.
이 산맥[山脈]의 남[南]쪽에는, 천리[千里]에 이르는 광활[廣闊]한 평원[平原]과, 발하슈호가 자리 잡고 있다.
징기스칸, 기악온철목진[奇渥溫鐵木眞]의 셋째 아들이며, 원[元]나라 5대 황제[皇帝]이며, 원[元]의 태종[太宗]인 와활태[窩闊台]의 도성[都城]이, 이 지역[地域]에 있었다.
지금도 그 도성[都城]의 유지[遺址] 일부[一部]가 남아 있다.
현지[現地]의 토민[土民]들은, 와활태[窩闊台]의 도성[都城] 이라고 부른다.
현지인[現地人]들이 역사[歷史]를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해 주는, 원[元]나라 태종[太宗]의 도성[都城] 유지[遺址]이다.
원[元]의 대도[大都], 명[明]의 북경[北京]인 연경[燕京], 청[淸]나라의 연경[燕京]은, 이곳에 있었다.
다음 3편에서 계속 됩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연행록에 나오는 여정상의 지명과 그 주변환경의 기록내용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발해와 북해와 한해는 조선사를 연구하는 많은 분들께서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 곳이며, 다양한 의견 개진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해경에서 말하는 조선과 천독의 문제, 압록강이 이리 저리로 흘러가다가 여러 물을 받고 북해로 들어간다는 것은 조금 충격입니다.
금산=아이태산=백두산에서 발원해 자이산호로 흘러들고, 이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흐르는 액이제사하 곧 이르티슈강, 그리고 이 하천이 오브강에 또 들어가고 오브강은 북해로 흘러듭니다. 이게 바로 '압록강'이란 이야기군요.
이게 충격입니다.
천리송림! 이곳이 또한 송막이 아닐까 합니다.
수백리에 펼쳐진 송림지대, 이게 바로 천리송림지대의 비밀입니다. 서기지명고에서는 근대의 학자들에 의해 주석을 달았는데, 현재의 감숙성에 있는 송림지대라고 했지만, 역사서를 아는 분들이라면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열하(熱河)와 그 주변의 상세한 설명 역시 연행록과 대동소이한 환경이라고 한다면 확실시 된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오대사에서 말하는 유관 남쪽 700리에 유주가 있다고 한 역사서 기록과도 완전히 일치하는 곳입니다. 현재의 역사해설은 유관에서 700리에 유주라면 산동성 앞 바다속에 유주가 있어야 합니다. 조선사의 대표적 의문들이 하나 하나 풀리는 것 같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셨지만, 우리 카페의 회원님들과 손님으로 오시는 많은 분들께서, 조선사의 비밀을 풀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라고 봅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기원하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근래 평안 하신지요.
나라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역사의 유적들이 소멸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현지 사람들의 설명들은 조금 다른면이 있기는 하나, 그 지역의 토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전하는 내용은 사서의 기록들과 일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당시의 유지가 완연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많은 분들이 그러 하시겠지만 역사가 본업이 아니니, 역사에 매진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역사의 후손들과 산천과 흐르는 물은 고금을 통하여 여전 하건만, 오직 역사를 왜곡 하는 자들만이 세상을 흐리고 있습니다.
말씀 하시는 송막지대는, 열하와 인접되어 있습니다.
백이숙제의 북해, 연행록의 발해는, 이지역이 맞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의 증언과 전언으로, 그리고 유적으로 이미 확인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반도의 안타까운 현실,....... 공교육을 통하여 배운 역사가 거짓의 역사라는 것을 모르는 분들의 역사에 대한 자랑은 민망 하기만 합니다.
천하의 순리와 역사의 진리로 본다면, 지금의 이러한 혼란은 찰나에 지나가는 티끌 일 뿐이겠지요.
반도안에 갖혀 있는 우리의 역사. 국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역사 교육의 끝은 어디이겠습니까 ?
역사가 역사서를 따라가는 것이지, 추정과 가설이 어찌 이에 해당이 될것인가 ? 거짓과 진실, 옳고 그름, 정도와 인도, 극히 상식적인 이러한 일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날뛰는 자들이 많은 것은, 조선사를 무너트린 자들이 바라는 바 그 목적의 책략이 효과를 발휘 하는 것입니다.
늘 노고가 많으신 문무 선생님께, 항상 감사를 드립니다.
문무 선생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건강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고생많이 하시는 환국고려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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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 컴퓨터에서는 화면이 오른쪽 끝부분이 잘리는 현상이 보여서 ...
아쉬움이 남습니다.혹 다 볼수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김영주님 안녕 하십니까 ?
감사 합니다.
말씀 하시는 컴퓨터 화면의 현상은, 화면 비율 때문에 그럴수도 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디스플레이 해상도 1920 - 1080 이고 방향은 가로 입니다.
한번 맞추어 보시고 그래도 개선이 되지 않으시면, 컴푸터 기술자의 조언을 들어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김영주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고생하셨는데요 그런데 위 사진들이 지금 어느지역인지 좀 알려주실수 없나요? 문외한 들은 그게 지금의 만주 심양 요수 근처라고 오해할 수 잇습니다(아니면 지금의 심양과 만주가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