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치 (2009), 최동훈 감독
세상이 어지러우니 ‘황당무계’를 바라는구나!
한때는 어지간한 한국영화 개봉작은 다 챙겨보던 마니아급 관객이었으나 학생놀이에 돌입한 2009년은 극장에서 본 개봉작 편 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극장에 가지 않는 것도 이력이 붙으니 개봉작에 대한 관심 역시 희미해지더라.
그렇게 헤어진 애인 잊듯 영화에 대한 관심도 잊은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치 <전우치>는 땡겼다. 기말레포트를 다 쓰자마자 어떻게든 극장으로 달려갈 짬을 낼 궁리만 했다. 만세! 불꽃언니와의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다. 푸하하핫, 결국 짬을 냈다. 불꽃언니, 쌩유! 그리고 미안~ (몸살 걸려서 약속 못 지킨다는 언니를 두고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건가? ㅠㅜ;;;;)
‘동원’ 때문에 동원된 관객 한 명 추가요~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끊은 지 1년이 다 되가건만, 굳이 이 영화에 끌렸던 것은 <범죄의 재구성>, <타짜>로 한국형 느와르, 액션, 스릴러를 만듦새 있게 주무를 줄 아는 유일무이한 감독이라고 믿게 된 최동훈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이번엔 또 어떻게 주물러 놓았을지 퍽 기대가 됐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주연배우 강동원 때문이다.
사실 내가 본 강동원의 연기는 그의 데뷔작이었던 일요 아침드라마 <1%의 어떤 것>과 영화 데뷔작인 <그녀를 믿지 마세요> 이렇게 딱 두 편뿐이다. 데뷔작 드라마와 영화 이후 강동원의 연기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만큼 강동원을 배우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일 수도 있다. 그저 광고나 화보촬영, 인터뷰를 통해 간간이 보이는 모습이 (바람직한 기럭지와 스타일리쉬한 패션센스까지) 보기에 참 좋았더라, 이 정도로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1%의 어떤 것>과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강동원은 데뷔작인 만큼 약간의 어설픔은 있었지만,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인 연기자의 풋풋한 매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두 작품 이후 강동원이 출연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은(못한) 것은 그저 운이 닿지 않아서였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너무 잘 생겨서 한 발 뒤로 물러선 것일지도 모른다. 못생긴 사람에 대한 편견만큼이나 잘생긴 사람에 대한 편견도 크지 않던가. 실력만으로 정상까지 오른 배우들에 대한 무한애정과 무한신뢰에 대비되는, 의도된 거리두기라고나 할까? 강동원은 모델 출신이라는 게 너무 티나는 외모를 가진 배우였다. 그저 기럭지가 길기만 한 게 아니라 뭘 걸쳐도 폼나는 신체비율,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어줘야 할 것 같은 천진한 눈망울, 겉모습만으로도 꺅~ 소리가 절로 나는 배우라……, 괜히 멀리하고 싶어졌던 것이지. 그게 연기파 배우들에 대한 의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의리는 개뿔~ ㅋ;;)
그런데도 <전우치>만큼은 무척 기다려졌다. 개봉 전부터, 난세의 영웅 전우치이긴 하나 강동원의 전우치는 기존 영웅영화의 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캐릭터라는 홍보용 기사가 눈에 띄었다. 잘생긴 배우가 엉뚱하게 망가진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본 강동원의 데뷔작들 역시 멋드러진 남자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어리버리 캐릭터였고, 그래서 그 당시에는 강동원이 잘생겼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더랬다. 그래, 강동원의 타고난 외모마저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캐릭터의 향연, 바로 이거야, 싶었던 거지.
더구나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가 아니던가. 최동훈 감독은 영화 <약속>의 전형적인 순정파 건달 역할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박신양을 <범죄의 재구성>으로 불러와, 이전의 겉멋을 다 걷어내고 최창호/최창혁 1인2역의 캐릭터만을 뽑아냈던 바로 그 감독이잖은가, 최동훈 감독이 빚어내는 전우치 강동원을 꼭 만나고 싶었다.
강동원만의 전우치, 새로운 영웅의 탄생
헌데, 정작 영화를 통해 전우치 강동원을 만나고 보니, 이런, 된장맞을!
이거이거, 너무 멋진 거 아냐? 도사와 요괴의 싸움이 주요 얼개인 영화답게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현란한 와이어액션이 이어지는데, 허걱! 스크린을 날아다니는 강동원의 자태에 그저 뻑이 가더란 거지. 잘난 외모를 인식하지 못하긴 뭘 인식하지 못해? 보는 내내 침 질질이구먼! 영화 줄거리가 안드로메다로 가든 CG가 어지럽든 그게 뭔 상관이냐고! 이토록 눈이 즐겁기만 하구먼! 헤롱헤롱~~@_@;;
흐미, 강동원이 두르면 질질 끌고 다니며 바닥 청소를 하는 목도리마저 최고의 패션센스가 되듯, 조선시대에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전우치도, 현시대 강남 고층빌딩 숲에서 코트자락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전우치도, 방금 패션쇼 런웨이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멋지기만 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어이, 마법사! 정신차리라규~~)
그런데 문제는,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아무튼 그 잘난 자태와 더불어 강동원이 연기한 전우치라는 캐릭터도 매력덩어리더란 거지. ㅠㅠ 여느 영웅들처럼 세상의 정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 날리려 술법을 동원해 장난질이나 하는 철딱서니 없는 도사 수련생. 그저 청동거울과 청동검만 있으면 최고의 도사가 된다 하니 여염집 과부 보쌈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해대는 개망나니. 스승이 그렇게도 마음을 비우라 했거늘 무념무상무욕 도인의 경지에는 절대 오를 수 없는 속물인지라 부적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모지리. 이름 날리려고 옥황상제 아들 흉내로 사기치다 보니 임금을 혼쭐내는 의적 짓을 하게 됐을 뿐이고, 보쌈해 의뢰인에게 갖다바치려던 과부에게 뻑이 가서 의뢰인과 싸우다 보니 의뢰인이 사람이 아니라 요괴였을 뿐이고……. 그저 충실히 욕망을 쫓다 보니 우연히 영웅 비슷한 궤적을 밟게 된 얼치기. 지금껏 어떤 영웅도 이토록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이기적이고 무뇌아적인 캐릭터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영웅스럽지 않은 영웅, 개망나니 영웅은 강동원의 엉뚱하고 천진한 연기로 완성됐다.
타고난 외모의 매력도 살리고 캐릭터도 살린 영화라니, 영화 <전우치>는 강동원의, 강동원에 의한, 강동원을 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거,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 맞나요?
아, 강동원 ‘빠’의 자세로 너무 오래 떠들었다. 자자~ 정신차리시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솔까말, 영화 <전우치>는 최동훈 감독의 전작에 비하면 ‘정말 최동훈 감독이 만든 게 맞나?’ 의아함이 생길 정도로 산만하고 짜임새 없는 영화다. 그렇다고 아예 꽝인 영화란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136분이라는, 다소 긴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짜임새는 된다. 그러나 탄탄한 시나리오 아래 마치 퍼즐 맞추는 듯한 촘촘한 이야기 얼개가 가장 큰 장점이었던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이 주는 기대에 비하면, 매우 실망스러운 짜임새란 이야기다.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대략 흥미진진한데 이리저리 따로 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워낙 CG 많이 쓰는 황당 시추에이션에 그닥 땡기지 않는 취향까지 합쳐지니 영화를 보면서 자주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나오면서도 계속 갸웃갸웃. 감독에게 뭔 일이라도 있었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는.
소재 자체가 영웅 이야기이므로 시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부패한 임금과 관료들의 지배이든 현시대 왕 대신 자본의 지배든, 이 지배체제를 논하지 않고는 영웅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얼핏 시대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금세 흐지부지 꼬리를 내려 버린다. 이건 영화 다 찍고 편집 과정에서 잘려나갔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그래, 용비어천가만이 용인되는 지금 시대에 뭔가 불가능한 조건이 있었을지도 몰라. 근거 없는 음모론이 꿈틀, 한다. 쥐 요괴를 물리치는 CG로 만족하겠다던 어느 관객의 푸념에 묻어가기로 한다.
그렇게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배경이 흐지부지되면서 선과 악의 대결구도 또한 애매해졌다. 전우치의 스승 천관대사(백윤식)를 죽인 원수이자 알고 보니 요괴였던 화담(김윤석)은 ‘주인공보다 품위 있는 악당’이라는 멋지구리한 악역이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 김윤석의 연기는 여전히 출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멋진 캐릭터는 전혀 살지 않았다.
자신이 요괴(악당)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능력 출중하고 성품마저 빼어났던 화담이 왜, 어떻게 악의 화신으로 변해가는지, 이것을 제대로 그려내는 것이 전우치라는 캐릭터를 살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는 걸 최동훈 감독이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아니, 각본을 쓴 최동훈 감독에게는, 영웅 전우치의 맞장 상대로 전형적 악당을 세우지 않고 화담 같은 멋진 악당을 세운 이유가 분명 있었을 텐데. <범죄의 재구성>에서도 주인공 박신양보다 김선생 백윤식을, <타짜>에서도 주인공 조승우보다 악귀 김윤석을 더 멋지게 그려냈던 최동훈 감독인데. 왜? 왜? 왜?
감독을 직접 만나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시나리오의 귀재인 최동훈 감독을 이렇게 산만하게 만든 이 시대를 탓해야지 어쩌겠어. -_-;;
범인(凡人)의 욕망이 영웅이 되는 시대
그러나,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푸념만 늘어놓기엔,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 너무 많다. (그래, 안다. 최동훈 감독과 강동원,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김윤석까지. 관객이자 팬으로서 의리가 있지 도저히 이대로 글을 끝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_-;;)
앞서 강동원 칭찬모드의 단락에서 이미 이야기했듯, 영화 <전우치>의 주인공 전우치는 여느 영웅이야기의 주인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의협심, 민중에 대한 사랑, 그런 거? 전~혀 없다. 어떤 일이든 어느 경지에 오른 자나 가질 수 있다는 내공? 그딴 건 개한테나 던져주는 게 낫다. (그러고 보니 ‘개’ 초랭이가 전우치보다는 차라리 더 의리 있고 인간적인 캐릭터다. ㅋㅋ) 부적이 있으면 술수는 부릴 줄 알되 득도의 경지에는 절대 오르지 못할 범인 중의 범인 전우치. 이런 개망나니 얼치기 모지리 도사 수련생이 영웅이랍시고 깝죽대다니! 이거이거, 같은 조선시대의 영웅이신 홍길동님이나 장길산님 보시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버럭하실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만나면 큰 울림이 된다. 전우치는 뭔가 거창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도술을 연마한 것도, 요괴와 싸운 것도, 화담과 대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럴싸한 도술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임금과 양반들을 혼내다 보니 의적 아닌 의적이 돼 버렸다. 첫눈에 반한 과부를 지키려다 보니 요괴와 싸우고 과부를 억압하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제를 혼쭐내는 해방자가 되었다. 스승을 죽인 원수를 갚으려다 보니 현시대에 와서도 부패한 정치인을 혼쭐내게 되었다. 그뿐이다. 워낙 고매하게 타고난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욕망에 솔직한 보통사람이 시대와 부딪혀 영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 시대와 부딪힌다? 참 익숙한 문장 아닌가? 조선시대에서 날아온 전우치가 보기에 돈이나 셀 줄 아는 장사치인 자본이 군림하는 시대, 그런 자본을 위한 정권과 국가기구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시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이 시대야말로 범인의 욕망이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영웅은 자기 욕망에 솔직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까?
황당무계한 도술이 아니라, 현란한 CG가 아니라……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기에 현실은 너무 버겁다. 당장에 먹고살기도 급급한데 세상과 맞서 싸우기까지 하라니,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현대과학으로 봤을 때 절대 불가능한 전우치의 부적이라도 가져온다면 모를까. 시절이 하 수상하니, 민심이 워낙 흉흉하니, 현실에선 불가능한 도술이라도 가져다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대사, 근대사를 통틀어 영웅 이야기가 ‘전우치전’ 하나가 아니건만, 굳이 의적도 아닌 도사 전우치가 2009년 영화화 된 것은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황당하기까지 한 바람과 그만큼 깊은 절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ㅜㅠ;;
다만 한 가지, 이 영화에서 억지로라도, 굳이, 희망으로 삼고 싶은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말미 전우치와 화담은 영화세트장에서 전투를 벌인다. 화담은 전우치를 향해 전차를 날리는데 분명 한 대였던 전차가 두 대가 되어 양 갈래로 나뉘어 날아온다. 이때 전우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 중 하나는 가짜렷다!” 그리고 두 대의 전차 중 한 대를 물리쳤고, 역시나 그것은 가짜였다.
그래, 도술은 어짜피 허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상을 만들어내는 전우치의 부적따위가 아니라 허상과 진짜배기를 구분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첫댓글 근데 제가 젤 좋아하는 배우가 강동원이에요^0^ ㅋㅋㅋㅋ